지금까지 웨인은 "내가 따라야 하는 규칙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왔다. 그리고 성경에서 규칙과 원칙을 찾아왔다.
하지만 웨인이 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접근법은 어떠한 선택이 가장 최선의 결과를 낳는지를 평가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웨인이 각 방법의 잠재적 결과를 살펴보고, 그럴듯한 결과들을 비교해본다면, 그는 이상적인 결과에 근거해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을 택한다면, 웨인은 모든 단계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규칙을 더 이상 구하지 않고 그저 적당한 결과를 낼 수 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행하면 된다.
이렇게 결과를 산출해내고 비교해보는 접근법은 종종 "결과주의" 혹은 "목적론적 윤리(teleological ethics)"라고 불린다. 명령 접근법(최선의 선택은 행위가 해당되는 규칙을 따르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접근법)과는 달리 결과 접근법은 성과에 따라 결정된다. 가장 도덕적인 행위의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최종 결과인 것이다.
성경과 결과
목차로 돌아가기 성경을 규칙서로 여기고, 십계명의 관점에서 윤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실제로 성경이 독자들에게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고 이를 참고해 의사결정을 내리라고 얼마나 자주 권고하고 있는지 알게 되면 놀랄 것이다.
잠언은 이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잠언은 특정 행위가 초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결과를 자세히 설명하는 함축적인 격언들, 즉 경고와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예로, 잠언 14:14은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가득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고 말한다.[47]
예수님께서도 청중을 향하여 그들이 내리는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신중히 따져보라고 경고하신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의 일생과 사역은 “공공의 선”을 위한 결정의 살아있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팔복의 가르침 또한 결과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배부르고" 싶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산상설교의 다른 부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과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5:25)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5)
별도로 표기하지 않는 한 모든 구절들은 NRSV 버전이다.
선한 것 판단하기
목차로 돌아가기결과를 고려하는 것은 우리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웨인이 곧 깨닫게 되는 사실은 결과주의가 네 개의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선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선함을 정의할 수 있을까? 예컨대, 그것은 아마도 고객이나 웨인을 그저 금전적으로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어주는 것보다는 더 높은 차원일 것이다.)
- 누구에게 선한 것인가? (실제로 누가 이러한 선택에 따른 혜택을 받는가?)
- 선한 정도가 측정될 수 있을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것이 선한 것이며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예견할 수 있을까?)
- 어떠한 상황에서 선한 것인가? (이 상황에서 선한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악할 수 있을까?)
선한 것은 무엇인가?
목차로 돌아가기 선한 것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가장 잘 알려진 형태의 결과론적 사고는 행복이나 즐거움을 최고의 선으로 여긴다. 이러한 형태의 결과주의적 윤리는 "공리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선하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행복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본다. (이는 곧 고통을 불러오는 모든 상황은 최소화하거나 피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행복을 가장 궁극적인 선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 속에서 행복이 관심의 주제가 될 때에도, 우리의 문화가 이해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가르침에서 우리의 사고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괴롭거나 슬프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들이 바로 우리가 축복을 받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는 무엇이 선이라고 여겨지고 있을까?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하기 이전 세상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좋았더라," 그리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다(창1:4, 9, 12, 18, 21, 25, 32, 2:18-24). 그러한 세상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돌아오셔서 요한계시록 21-22장 말씀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실 때 회복될 것이며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모두 그러한 세상의 모습을 재건하고자 하는 목적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성경 구절에서 많이 묘사되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기쁨이 넘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창2:19-25).
사람들이 즐겁게 일을 하며 이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제공받는다(창2:7-9).
사람들이 인종이나 경제적 격차 혹은 성별로 인한 차별 없이 사회 안에서 모두 동등하게 대우받는다(갈3:23).
아픔이나 질병이 없다(계21:4; 22:2).
사회가 평화와 번영 속에서 살아간다(미4:3-4).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타락한 세상보다 위에서 묘사한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주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창조되었던 본래의 목적처럼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자 하신다. 신약성경은 고통과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자신이든 혹은 우리의 아픔으로 인해 도움을 받는 이들이든 간에, 이들을 온전함으로 이끄는 길임을 명백히 보여준다.[1]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예수님의 선택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자유와 삶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2]
예를 들면, 고난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보라. —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 (골1:24)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와 같은 구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누구를 위한 선인가?
목차로 돌아가기결과론적 윤리의 문제는 누구의 결과가 최적화되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이다.
개인적 이익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측정의 기준으로 본다. 이들은 만약 어떠한 결정이 자신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이러한 접근법을 취한다. 이러한 관점은 윤리적 이기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다지 탐탁지 않은가? 이 접근법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단정 짓기 전에, 웨인의 딜레마에 좀 더 적용시켜보자. 개인적 이익은 완벽하게 이기주의적인 관점에서 행동하는 것을 항상 의미하진 않는다. 웨인은 개인적 이익에 따라 고객의 차를 수리해주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장기적 평판이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고객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일에 달려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밖에서 보기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가 실제로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경우는 종종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부정적이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흔히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에게 좋은 것은 대부분 모든 이들에게도 좋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근대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비즈니스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개인의 이익추구 행위는 의도한 것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공공의 선을 달성해내곤 한다. 나는 공공의 선을 표방한 교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이를 제대로 이룬 경우를 본 적이 없다.[1]
오늘날 이러한 말들은 순수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단 비판을 받을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고객과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법들을 추가했음에도 말이다.)
공공의 선
두 번째로,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방법은 공공의 선을 측정 기준으로 한 결과에 따라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최선의 선택이란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결정이라는 접근법을 취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선(공리주의의 경우에는 행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이로 인해 소수의 사람들만 행복을 느끼고, 설상가상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행동은 선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반대로, 소수의 사람들을 희생한 채 다수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행위는 선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이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혹은 암담한 결과를 줄 수 있는 상황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특히 소수의 사람들이 소외된 사회적 약자 집단인 경우엔 말이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러한 조건 하에서 온갖 종류의 악이 용납되어 왔다.[2]
성경은 빈곤층 및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나서고 이들을 보호하라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예언서에서는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촉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 살펴보는 척도가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대표적인 세 개의 사회적 약자 집단)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떠한 대안도 완벽하게 선하거나 옳지 않은, 결정하기 어려운 선택들이다. 그러한 경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대안들의 상대적인 악의 정도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정전론"(just war theory)이라고 불리는 전쟁이론은 그러한 상황에서 윤리학자들이 어떠한 지침을 제시하고자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3] 때로는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선택이 존재한다. 그러한 고통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에 대한 선택을 내릴 때는 진정한 연민과 겸손함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것이 웨인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웨인이 처한 특정 상황에서는 그가 내리는 결정의 결과를 고려해보는 것이 다른 상황들보다 훨씬 더 간단하다. 그 이유는 웨인이 보기에 그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당사자는 웨인 자신과 고객, 이렇게 두 명이기 때문이다. 웨인이 자동차 딜러로서 환경이나 사회적, 공동체적 문제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복잡한 결과들을 고려해야 하는 다른 여러 결정들과는 달리, 이 선택은 훨씬 간단하다. 수리비를 부담하겠다고, 아니면 일부만이라도 부담하겠다고 결정하게 되면 어떠한 선한 결과가 수반될까?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웨인은 만족한 고객을 얻게 될 것이며, 그 고객은 막대한 금전적 어려움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 이는 수리비를 지불하지 않고서 웨인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것보다 공공의 선을 더욱 잘 실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Adam Smith,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7).
고전적인 성경적 예시는 예수님의 처형으로 이끈 Caiaphas의 결정이다. 유대교 의회에서 그가 선포하기를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11:50) 이 구절의 아이러니는 저자 요한이나 그의 독자들에게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사악한 나치 정권에 대해 어찌 해야할지 고뇌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딜레마이다.
선한 정도가 측정될 수 있을까?
목차로 돌아가기결과는 측정하거나 수량화하기가 어려우며, 때로는 불가능하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결과에 대해 인식하고는 있지만 그 결과를 측정할 방법이 부족할 때도 있다. 일이 즐거울 때와 연봉이 높을 때 중에서 어떤 경우가 더 행복할까? 이 밖에도, 우리의 결정에 따른 모든 결과들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들과 환경이 영향을 받는 데도 우리가 이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들도 종종 있다. 때로는 이들을 미리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성경은 많은 면에서 우리의 한계와 극도로 제한적인 관점을 깨닫게 도와준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결과를 신중히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겸손함이 요구되며, 겸손함 속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만 의존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혹은 실제로 선을 측정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 없을 때도 있다. 이러한 상황만 보더라도, 결과를 고려하는 것이 종종 의사결정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단 하나의 윤리적 접근법으로는 불충분함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명령과 결과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명령은 대개 선한 결과로 이어질 확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자체로도 선한 행동들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특히 거짓말의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려운 복잡한 상황들, 심지어는 의도적인 "하얀" 거짓말과 같은 경우에도 그 반대보다 더 긍정적인 결과로 우리를 이끌어줄 확률이 높다. 이와 동시에,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상황에 따라 어떠한 규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도와준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모든 상황에서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인간의 힘으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식일을 지켜라"는 명령은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도와주지 못하는 식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아픔과 고통의 결과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상태인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과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눅13:10-16, 요5:1-9).
어떠한 상황에서 선한 것인가?
목차로 돌아가기 상황은 윤리적으로 중요하다. 때로는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행위가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혹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이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는 바울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의 윤리적 결정을 다루는 부분인 고린도전서 8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이 지적하는 핵심 문제는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믿음이 약한 신도들"에게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바울은 스스로에게 만족함을 주는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보다 남을 위한 배려와 사랑을 더 앞세우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이게 옳은가?"가 아니라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인 것이다. 바울은 다른 상황에서는 해도 된다고 느꼈던 행동을 범죄나 다른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상황에서는 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 특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결과에 따라 행위의 옳고 그름이나 지혜를 결정한다.
이는 도덕적 상대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상황에서는 선했던 행동이 다른 상황에서는 선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적 가치가 상황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 문화의 특징인 완전한 상대주의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진리나 도덕에 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절대적인 기준이다. 하지만 여러 맥락에서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이거 벌써 계산한 거야?"와 "이 셔츠 나한테 잘 어울려?"와 같은 질문들은 서로 이 원칙을 다르게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점점 다문화로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맥락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바꾸어야 하는 많은 상황들에 맞닥뜨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직원 중 친척이나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1년에 몇 번씩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하는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이 있다면, 고용주로서 이들에게 어떻게 경조사 휴가를 분배해 줄 것인가?
아니면 여러분이 텐트를 제조하는 회사를 운영하는데,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는 이유로 다른 가난한 국가에서 텐트를 제조하기로 결정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직원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적정한 임금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
상황에 관한 문제는 다문화의 문제 그 이상이기도 하다. 이웃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들을 다르게 대우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들의 연봉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 진료비를 청구할 수도 있다. 아니면 자동차 딜러가 가격을 협상할 때 구매자의 경제적 조건을 고려할 수도 있는 것이다. 플로우 오토모티브(Flow Automotive)사가 가난한 사람들이 협상을 덜 하는 경향이 있어서 결국 차를 구매할 때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상황적인 관심사들이 웨인의 의사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웨인은 이러한 특정 상황들이 행동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들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요소를 이해하고 예상해보고자 했다.
앞서 우리는 고객의 금전적 상황과 관련한 문제를 언급했었다. 만약 웨인이 수리비를 부담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일부분만 부담하겠다고 한다면, 그 고객과 가족들에게 어떠한 금전적 영향을 미칠까? 상황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은가? 웨인은 이 문제를 고려사항에 넣을만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더 광범위한 사랑과 정의의 문제에 포함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그 고객이 이웃을 돕고 이 세상에 진정한 변화를 만드는 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웨인이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한 상황이라면, 아마도 웨인은 그에게 좀 더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웨인은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지불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가 만약 그 거래에서 수익을 거의 혹은 전혀 내지 못한다면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웨인은 자신이 남기게 될 선례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까? 만약 웨인이 온화한 행동을 취한다면, 다른 고객들도 도움을 받으러 몰려들지 않을까? 웨인은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며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웨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꼼꼼히 살펴보았던 다른 요소들은 그에게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이었다. 그가 내린 타당한 결정에 스스로 만족하기만 한다면, 웨인은 "어수룩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에 따라, 웨인은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