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것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가장 잘 알려진 형태의 결과론적 사고는 행복이나 즐거움을 최고의 선으로 여긴다. 이러한 형태의 결과주의적 윤리는 "공리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선하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행복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본다. (이는 곧 고통을 불러오는 모든 상황은 최소화하거나 피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행복을 가장 궁극적인 선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 속에서 행복이 관심의 주제가 될 때에도, 우리의 문화가 이해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가르침에서 우리의 사고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괴롭거나 슬프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들이 바로 우리가 축복을 받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는 무엇이 선이라고 여겨지고 있을까?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하기 이전 세상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좋았더라," 그리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다(창1:4, 9, 12, 18, 21, 25, 32, 2:18-24). 그러한 세상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돌아오셔서 요한계시록 21-22장 말씀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실 때 회복될 것이며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모두 그러한 세상의 모습을 재건하고자 하는 목적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성경 구절에서 많이 묘사되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기쁨이 넘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창2:19-25).
사람들이 즐겁게 일을 하며 이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제공받는다(창2:7-9).
사람들이 인종이나 경제적 격차 혹은 성별로 인한 차별 없이 사회 안에서 모두 동등하게 대우받는다(갈3:23).
아픔이나 질병이 없다(계21:4; 22:2).
사회가 평화와 번영 속에서 살아간다(미4:3-4).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타락한 세상보다 위에서 묘사한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주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창조되었던 본래의 목적처럼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자 하신다. 신약성경은 고통과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자신이든 혹은 우리의 아픔으로 인해 도움을 받는 이들이든 간에, 이들을 온전함으로 이끄는 길임을 명백히 보여준다.[1]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예수님의 선택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자유와 삶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2]
예를 들면, 고난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보라. —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 (골1:24)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와 같은 구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