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상황마다 매번 "규칙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최선의 결과를 낳을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대신,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자꾸 묻는 것이 바로 미덕 접근법이다. 이 접근법은 만약 어떤 사람이 선한 성품을 발달시키면, 일생동안 여러 상황들 속에서 옳거나 선한 일을 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접근법은 행위보다는 변화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누군가 결과적 또는 명령적 윤리를 적용하여 무엇이 옳은 일인지 깨닫는다고 해서 반드시 그 옳은 일을 행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주장한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인격에 달려 있다. 인격 윤리는 옳은 일을 식별하는 능력과 함께 옳은 일을 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우리의 인격이 어떻게 빚어지는 지에 대한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세 가지 인격의 특징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가 더욱 신성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가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의사결정에 있어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그저 단순한 원칙들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기본설정으로 점점 자리매김하고 있는 인격적 특징들이다. 이 문제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 다음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로,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 우리는 판단을 통해 복잡한 문제들을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을 지닌 존재들로 스스로를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해결할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어떤가? 우리가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 황급히 내려지지 않는가? 우리는 이 사람과 어떻게 공감하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며, 고객에게 어떠한 상담을 해주고, 어떻게 실적이 좋지 않은 개인 또는 팀에게 동기부여를 해주는가?
둘째로, 우리가 내리는 윤리적 결정들은 대부분 우리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 거의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무엇을 하기로 결정내리는 것의 대부분은 우리의 인격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내리는 윤리적 결정은 우리가 어떠한 의사결정 과정을 택하는지에 따라 결정되기 보다는, 우리가 누구인지(인격의 유형이나 몸에 밴 가치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세 번째로, 우리는 개인적인 결정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내리는 개인인가? 아니면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일까? 인격과 공동체가 우리의 가치관과 함께 얽히고설켜서 윤리를 언급할 때 개별적으로 분리하지 못할 정도인 것은 아닌가?
데이비드 쿡(David Cook)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1]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반응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우리의 반응이 거의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기르는 일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자동적으로 굉장히 많은 윤리적 결정들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은 선한 결정을 내릴 확률이 더 높다.
David Cook, The Moral Maze: A Way of Exploring Christian Ethics (London: SPCK, 1983) 78쪽.
미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목차로 돌아가기명령 접근법과 결과 접근법이 어떤 명령이나 결과가 참으로 선한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인격 접근법 또한 어떠한 미덕이 선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고대 그리스의 덕목인 정의, 용기, 절제, 그리고 자제를 강조했다.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e, 339-397년)는 이러한 덕목들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특히 "신학적인” 또 다른 세 가지 덕목들을 성경에서 인용해 추가한다. 바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이러한 덕목들에 상응하는 반대 죄악들을 언급했는데 바로 우리가 7대 죄악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다.
가톨릭 사상은 계속해서 미덕 윤리를 중시해왔으나 개신교 신학자들은 최근에야 인격 접근법을 열성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성경을 미덕의 근원으로 보아왔다.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알렉산더 힐은 성경적 덕목인 신성함, 정의로움, 그리고 사랑을 하나님의 주요 덕목으로 보았다. 하지만, 힐마저도 미덕 접근법을 규칙 접근법의 하위개념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자기 내면에 있는 덕목을 개발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은 하나님의 덕목에 따라 규칙을 확립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인간이 개발해나가야 하는 기독교적 덕목을 발견하고자 애써왔으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특히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스타센(Stassen)과 거쉬(Gushe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평평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절정이자 중심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도덕적 문제도 그 문제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고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1]
스타센과 거쉬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마땅히 갈망해야 하는 구체적인 덕목들을 살펴보는 일의 확실한 출발점이 바로 산상설교, 특히 팔복의 가르침이라고 본다. 마음이 가난한 것, 자비,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것, 온유함,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 슬퍼하는 것 등은 우리가 길러야 하는 주요 성품들 중의 일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과 행위가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핵심적 태도, 동기, 그리고 인격 특성을 보여주는 거라고 말씀하신다(막7:21-22). 사도 바울 또한 인격 발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예수님께 속한 자들에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말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절제인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권고하고 있다(갈5:16-25).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3-5)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본보기이시다. 또한 우리는 그분을 그대로 본받고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말들은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야 한다는 점을 매우 크게 강조한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Glen H. Stassen and David P. Gushee, Kingdom Ethics: Following Jesus in Contemporary Contex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 97쪽.
진짜 예수님, 좀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목차로 돌아가기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한다(요일3:2).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과 소망하는 결과, 그리고 인격을 우리의 생활방식과 세계관과 너무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스스로 "재구성"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예수님을 우리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유혹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부유한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어마어마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인 의미를 무의식적으로 걸러내기 쉽다. 그래서 결국은 범위가 좁은 "개인적"인 도덕 문제들만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에게 남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이 보잘것없게 여겨지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규칙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비기독교인들과 구별되는 윤리적 이해를 실제로 실천하는 경우는 단지 성적 행위, 개인적인 정직함, 그리고 부의 축적과 관련된 소수의 문제들인 경우라고 한다.[1] 다른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예수님의 윤리보다는 우리의 문화가 중시하는 가치에 따라 우리의 모습이 정해진다.
이 연구 결과의 긍정적인 점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윤리적 이해에 있어서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굉장히 제한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꾸준히 다루는 윤리적 문제들이 대부분의 직장 혹은 사업과 관련된 윤리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엔론(Enron)이나 월드컴(WorldCom)과 같은 기업의 CEO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신들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 칭할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맹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를 알리고, 기념하며, 탐색하는 방식으로 더 많은 일터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도록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그저 개인의 변화의 결과를 통해 발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러한 성품이 처음부터 양육되어지는 공동체의 맥락에서만 가능하다. 벤저민 팔리(Benjamin Farley)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 성경은 히브리서 성경과 함께 믿는 공동체의 불가분한 상황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이 양육되는 상황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의 과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생경하고 적대적인 문화에 맞서는 것은 결코 개인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결코 개인이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행동의 진원지가 될 수 없다.[2]
우리가 복음의 이야기를 다시 전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실천하고자 하는 공동체에 속해있을 때, 비로소 미덕을 갖춘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 공동체 자체가 예수님의 성품을 좀 더 명확히 알아내고자 노력하고, 도덕적인 삶에 대한 우리의 제한적인 시각에 도전하는 어렵고 불편한 질문들을 던진다면, 그러한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비기독교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하는 안타까운 여러 사례들을 반복하게 될 확률이 줄어든다.
이것은 Robin Gill의 저서 Churchgoing and Christian Eth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의 결론이며, Alistair Mackenzie, “Evangelicals and Business Ethics: The Church” in Stimulus, Vol. 14, No.1 (February 2006) 2-9쪽에 의하면 New Zealand Values Surveys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지지되고 있다.
Benjamin Farley, In Praise of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5) 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