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은 정의와 사랑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아티클 / TOW 프로젝트가 제공하는 주제별 콘텐츠

   금융은 정의와 사랑과 관련된 특정의 활동을 가능케 해준다. 우리는 월터스토프(Wolterstorff)의 개념, 즉 정의란 인간이 지닌 권리대로 사람들을 마땅히 존중하는 것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사용한다.[1] 월터스토프의 유신론적 해석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사랑받을 영예로운 자격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 하나에 이러한 인권이 기초한다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인간을 해치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2] 이러한 하나님—인간의 관계로 인해 인권이 생겨났으며, 이에 따라 정의라는 개념도 형성되었다. 우리는 또한 월터스토프가 케어아가피즘(care-agapism)이라고 부르는 사랑의 "배려"의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의 번영 그 자체를 추구하고, 사람들을 인간으로서 마땅하게 존중해 주는 것이다.[3] 배려는 정의를 사랑 속으로 끌어오기 때문에, 배려로서의 사랑을 통해 성경적 사랑(아가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월터스토프는 이야기한다. "배려는 사랑하는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려는 자신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해주신 사랑,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종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배려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사랑의 네 가지 모습에 대해서 통일된 이해를 할 수 있다."[4] 배려는 행동을 수반하며, 어떤 경우에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위험이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동반하기도 한다.

 

   배려를 통해 나타나는 사랑은 정의와 사랑과 같은 다른 기독교적 개념과 일관된다. 예를 들어, 크리스 라이트(Christ Wright)는 의로움과 정의에 관한 주요 성경적 주제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개념들이며, 이는 어떤 상황을 올바르게 회복하기 위해 "특정 상황이나 관계 속에서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것들”이라고 말한다.[5]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민족을 정의와 의로움으로 축복하고자 하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을 특별히 선택하셨다고 이야기한다.[6]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정의와 의로움으로 축복하시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라이트의 주장은 이러한 사랑을 실제로 행해야 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로 존중하기 위해 그들의 번영을 이끌어내어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그렇게 그들을 축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과 정의로움은 누구를 위해 나타내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22장, 막12장, 눅10장) 이는 앞선 모세의 가르침과도 일치했다.[7]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우리가 이전에 관계가 없었던 이웃을 포함해, 모든 이웃에게 사랑과 정의로움을 나타내야 함을 보여준다. 혹은 월터스토프가 말했듯이,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이들의 필요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항상 기억하고 있으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으로 본다."[8]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사랑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께서 금융을 통해 의도하신 목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금융은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서 존중해주면서 이들의 번영을 추구하는 데 유용하다. 금융은 자원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금융을 통해 다시 배분된 자원은 사람들이 번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상호간 이익이 되는 자발적 방법으로 자원을 공유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하나의 탁월한 방법이 된다. 비록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정의의 핵심이다. 만약 지금 당장 여러분에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자원이 없지만, 이후에 증가분을 내게 조금 나누어 줄 의향이 있다면,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서로 자원을 빌리고 빌려주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금융은 다른 이들의 번영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개인적 친분이 없거나 가까이 살지 않는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체계적인 법률 제도와 구조가 잘 잡힌 금융제도는 낯선 사람들끼리도 대출해주고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해당 자원을 문제없이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개인적 범위를 훨씬 넘어선 상호적 이익을 위해 자원을 공유할 수 있다. 모든 금융 체계가 이러한 방식으로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고 있진 않지만, 이는 가능한 일이며 또 권장되는 일이기도 하다. 채플린(Chaplin)은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서라도 "사랑이라는 핵심 규범을 구현"하고 이러한 제도들이 사랑과 정의의 "전달 매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9]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