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을 통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어떤 모습을 띨까?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그분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창조물이 모두 죄로부터 깨끗해질 수 있도록 하셨다. 금융기관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선한 청지기 의식을 고취시키며, 사람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오는 금융의 능력을 회복시킬 수 있다. 이러한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되짚어보자. 청지기 사명은 마치 정원을 도시로 일구어내는 것처럼, 모든 자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창조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정의란 인간의 타고난 권리대로 사람들을 마땅히 존중하는 것이며, 이러한 권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번영하기를 바라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남을 배려하고 그들을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따라 존중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틀을 적용해서, 회복된 모습의 금융의 간단한 예들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은행에서 일하는 것
목차로 돌아가기은행 직원들은 금융 서비스의 최전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회복의 수단으로써 행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금융 중개기관에서 그들이 맡은 특정한 업무가 예금자 및 채무자를 향한 정의 및 사랑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며, 그 다음 그러한 정의와 사랑을 어떻게 하면 특별히 잘 실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은행 대출 부서에 속한 직원이라면 채무자들의 특정 상황에 주목하자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모기지 사태에서 주목 받은 "로보 사이너(Robo-signers)" 소동은 굉장히 많은 채무자들이 금융계에서 인간관계의 측면을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요구가 전혀 관철되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은행 직원이라고 해서 모든 담보권 행사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에 처한 채무자들에게 개별적인 관심을 좀 더 많이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은행의 인사 담당자는 새로운 직원을 고용할 때 정의와 사랑에 대한 지원자의 열정을 특별히 눈여겨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금융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하면 자신의 업무를 통해 채무자와 채권자를 향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 알아내지 못하거나, 그런 방향으로 조직을 변화시켜나가지 못한다면, 어쩌면 그들은 해당 조직에 적합한 직원들이 아닐 수도 있다.
금융 전문가들은 금융의 두 가지 성경적 토대를 자신들이 실천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첫째, 금융 전문가들은 주로 고객의 대리인이나 청지기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개인적 이득보다 고객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둘째, 금융 전문가들은 종종 계약이나 약속을 협상하기도 하고 체결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가 속한 조직이 합의된 약속을 수행할 능력과 의향을 지니고 있는지를 신중히 평가할 의무를 진다. 청지기 사명과 약속 이행은 말 그대로 금융의 신성한 토대이기 때문에, 금융 전문가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에 대한 본을 마땅히 보여야 한다.
대출 결정 내리기
목차로 돌아가기특정 고객에게 대출을 해줄 것인지의 여부, 그리고 만약 해준다면 어느 정도의 이자율을 책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의 금융 신학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여기서 몇 가지 성경적 금융의 토대가 부각된다. 우선 은행원들은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잠재적 채무자의 상황과 필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고 해야 한다. 은행원들은 채무자로 하여금 대출이 그들에게 실제로 이익이 될 것인지의 여부를 평가하고, 대출금을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둘째로, 채무자나 채권자 모두 미래를 알지 못하므로, 둘 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신중하고 보수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두 당사자는 대출기간 동안 잘못될 수 있는 일, 그리고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 속에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신중하게 의논해야 한다.
셋째로, 은행원은 채무자를 향한 정의와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대출 상품을 채무자에게 안내해줄 수 있다. 채무자가 어려움 없이 상환할 수 있는 대출이 바로 정의롭고 사랑을 베푸는 대출이다. 초반에는 금리가 낮았다가 시간이 갈수록 높아져서 채무자를 어렵게 하는 대출이 아니라면, 정의롭고 사랑을 베푸는 대출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신용카드와 같이 미래에 더 많은 빚을 지게 할 수 있는 대출은 정의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금리는 대출의 리스크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는 채무자가 리스크에 따라 조정된 대출 수익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리가 너무 높아 채무자가 번영하지 못한다면, 이는 금융의 성경적 목적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성경 원칙은 채무자의 신용 상태에 비해 시중금리가 터무니없이 높아 채무자가 감당하기 어려울 경우에 대한 방침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다. 첫째, 정부 보조를 받는 금리로 대출을 전환한다. 둘째, 금리가 높다고 하더라도 채무자가 대출금을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셋째, 채무자가 대출을 받기보다는 정부나 자선 단체를 통해 자원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넷째, 채무자가 대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가난한 이들에게 대출을 제공하는 일이 가장 성경적으로 이행되는 경우는, 비영리 단체가 금융 및 생계 상담과 함께 제로 금리로 대출을 제공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1] 이러한 해결책들의 일부는 우리가 앞서 정의한 금융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어쩌면 가난한 사람이 처한 복잡한 재정 상황을 헤쳐 나가도록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이 금융기관의 직원들일 수도 있다. 이는 금융 관련 직업이 요구하는 일과 근무 시간을 넘어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경도 해당 주제를 매우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2]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헤지 펀드에서 일하기
목차로 돌아가기헤지 펀드는 보통 개인 예금자는 이용할 수 없는 특화된 금융 상품에 투자하는 상호 기금이다. 헤지 펀드는 보통 규제가 덜하고, 차입금이 많으며, 보다 다양한 종류의 금융 상품에 투자될 수 있고, 다른 일반적인 상호 기금보다 높은 운용 수수료를 청구한다. 최근 헤지 펀드가 뉴스의 관심을 받은 것은 여러 명의 펀드 매니저들이 막대한 금액의 운용수수료를 벌고, 또 몇몇 펀드 매니저들이 내부자거래 혐의로 기소되고, 주가의 급격한 하락이 헤지 펀드의 탓으로 돌려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지 펀드는 우리가 세운 금융의 틀을 적용해서 이해해볼 수 있다. 헤지 펀드는 리스크에 따른 고수익, 경기 순환과의 연관성이 적은 예금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예금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 많은 헤지 펀드는 파생상품에 투자를 하고, 파생상품 계약에서 채무자 쪽의 당사자들에게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이는 투자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헤지 펀드는 리스크를 줄이고자 하는 기업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헤지 펀드는 증권 시장에서 과다 공급된 제품을 사들이고 공급이 부족한 제품은 판매하는 사업을 하는 일종의 도매상들로 간주되며, 따라서 이들은 수익을 올릴 시도를 할 뿐만 아니라 시장이 더욱 원활해질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이들은 증권 가격이 좀 더 정확하게 내재적 가치를 반영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사회에 이바지한다고 할 수 있다.
헤지 펀드 투자라는 것은, 어떤 종류이건, 그 고도의 복잡성 때문에 이들이 정확히 어떻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오는지를 우리는 쉽게 밝힐 수가 없다. 만약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교환이 자발적이고 시장 시세를 따른다면, 각 당사자는 저마다 이득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고 간주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복잡성 뒤에는 보조금, 힘의 불균형, 정보 비대칭, 탈세 등 금융의 성경적 토대를 침해하는 요소들이 교묘하게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일부 헤지 펀드의 경우, 특정 투자 전략으로 인해 예금자와 채무자를 향한 사랑이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지 어느 정도 확실히 아는 것이 가능하지만, 다른 헤지 펀드들은 이러한 일이 쉽지 않다. 금융 전문가와 투자자들은 특정 헤지 펀드 혹은 투자가 선한 청지기 사명, 정의, 사랑으로 이어지는지, 혹은 헤지 펀드 매니저들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수익을 최대한으로 올리고자 하는지를 끊임없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
채무자
목차로 돌아가기우리는 대출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이루어지는 청지기 사명, 정의, 그리고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대출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자원을 얻게 되며, 이 자원은 또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된다.
적정한 금액의 채무
목차로 돌아가기 성경적 원칙을 통해 얼마만큼의 금액을 빌려야 하는지, 혹은 언제 빌려야 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을까? 몇 가지 금융의 성경적 토대가 이런 경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의 지배를 받는 세상, 사회적 순환 주기 및 다양한 개별적 삶의 생활 주기가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고객이나 시민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성장 혹은 인프라 기회에 투자를 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할 때가 있을 것이며, 채무를 상환해야 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기는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경기 침체기에 여유 자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자원을 현금으로 비축해두기보다는 그것을 투자함으로써 정의와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 개인적 삶의 주기와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 나이가 든 사람들이 제공하는 예금 및 자본을 젊은 사람들이 빌려 씀으로써 젊은 세대가 혜택을 받는다.
둘째, 대출의 목적은 자원을 확보함으로써 미래에 또 다른 자원을 창출해내기 위함,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나중에 대출을 상환하는 것이다. 교육, 성장 기회, 혹은 주거비용의 삭감을 위해 받는 대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다. 앞서 "대출금의 비생산적인 사용" 부분에서 다루었듯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영위하고자 무리하게 대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종류의 탐욕을 지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여기에는 옳지 않은 이유로 돈을 빌리는 행위도 포함된다(눅12:14).
셋째, 채무자들은 그들이 —사랑의 행위로서— 빚을 상환하겠다고 한 약속을 이행할 수 있다고 어느 정도 확신해야 한다. 최소한 채무자가 상환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리스크를 채권자가 인식해서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이는 거짓 혹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출 신청이나 신원보증을 방지한다. 예컨대, 내일 직장을 잃을 것 같은데도 오늘 대출을 받는 것은 채권자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는 행위가 아니다. 갚을 수 있는 확실한 계획 없이 신용카드의 빚만 늘려가는 것 또한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넷째, 대출 받는 돈은 직면할 수 있는 리스크에 비해, 적당하고 현명한 정도의 금액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할 수 없는데도 거듭 신용 한도액까지 돈을 빌린다면, 이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돈을 빌려준 이들에게도 사랑이 되는 행위가 되지 못한다.
위에서 다룬 예들은 주로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금융의 성경적 원칙들은 기관, 그리고 정부의 다양한 금융 관련 결정에도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원칙들은 대부분의 경우 적절한 수준의 부채를 제시하며, 개인, 기업, 그리고 정부의 재정에서 자기자본을 더 많이 사용할 것을 유도한다. 특히, 채무자는 대출 행위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장기적 상호 관계의 형성임을 기억하면서, 너무 지나친 금액을 대출받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빚을 지는 것은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대출을 해주고 받는 행위를 통해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다.
파산, 채무 면제, 그리고 융자 재조정
목차로 돌아가기 미래를 알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인간의 특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토대에 포함된다. 이는 결국 불가피하게 상환을 하지 못하는 상황의 사례로 이어질 것이다. 갚지 못하는 상황이 반드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채무불이행은 경솔한 대출, 무능한 일 처리, 은폐, 채무자의 소득 불투명, 계약 체결 당시 채무자 채권자가 모두에게 투명하지 못했던 정보, 혹은 채무자의 번영을 목적으로 계획되지 않은 대출 조건 등의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밖에도, 문제가 없었던 대출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채무자가 실직을 했거나, 예상치 못한 병원비를 지불해야 했거나, 혹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채권자에게는 대출의 채무를 삭감 혹은 면제해주거나 상환을 재조정해주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성경에서는 이것이 채무자의 복지나 생계를 위해 필요한 경우 채무자가 자신의 담보를 계속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형태로 나타난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출22:26-27)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신24:6)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신24:10-13)
이웃이 밤 동안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담보로 잡아두었던 옷은 해가 지기 전에 주인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맷돌을 전당잡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빼앗을 경우 방앗간 주인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타당한 전당물이라고 하더라도 채무자의 집 같은 것을 취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힘든 상황에 처한 채무자를 더 큰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장치들이 된다. 비록 채권자가 대출을 통해 기대했던 수익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의 손실을 겪더라도 말이다. 채무자의 상황이 채권자와 공유되는 것이다. 이것이 금융에 내재된 시간적 관계의 속성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보호 장치는 지불불능이라고도 불리는 파산법, 채권 조사, 리시버 제도, 파산 관리, 가압류 등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법은 채권자로 하여금 파산한 채무자의 생활과 업무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상환 대신 취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현대의 법은 또한 담당 공무원이 아닌 채권자가 직접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 물품을 압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채무불이행 때문에 채무자가 감옥에 수감되는 등, 근대 사회 이전에 수 세기 동안 빈번하게 일어났던 비생산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들 또한 금지되고 있다. 이는 성경적 원칙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현대의 파산법을 통해 이행됨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무자는 빚을 갚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노력해야 한다. 추닝(Chewning)은 하나님의 한결같으심과 잠언 6:1-5 말씀을 배경으로, 만약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다면 법원에 파산신청을 해서 채권자로부터 보호받고자 하지 말고, 스스로를 낮추어 채권자 앞에서 채권자의 자비를 간곡히 부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 위의 성경 구절들이 어려움에 처한 채무자들을 채권자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따라 보호하고 있음을 생각해볼 때, 이는 너무 확대된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채무자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하는 행동은 채권자의 도움과 조언을 구하는 것이라는 추닝의 주장은 옳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출은 채무자와 채권자 간의 장기적 관계 형성을 유도한다. 따라서 채권자와의 상호적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우선적으로 시도해보지도 않고 파산을 신청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관계를 존중하는 방법이 아니다. 티엠스트라(Tiemstra)는 리스크를 신중하게 다뤄야 하며 대출은 "노동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쉬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책임을 나타내 보이는 신중한 문제"라고 말한다.[2] 금융은 정의와 사랑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며, 신중한 채권자와 채무자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부딪히는 경우에도, 이러한 정의와 사랑은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양 당사자 모두에게 있어서 더욱 커져야 한다.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대출을 위한 담보 제공
목차로 돌아가기우리는 "파산, 채무 면제, 그리고 융자 재조정" 부분에서 담보에 대한 내용을 담은 성경 구절들을 살펴볼 것이다. 대출을 받기 위해 주택을 담보로 제공하는 것은 대체로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적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금융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우리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신중하게 위험을 감수하라는 성경적 가르침과 잠언 22:26-27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최소한 채무자들이 대출을 상환할 수 있음이 아주 확실하지 않은 이상, 채권자들이 주택을 담보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성경적 가르침에 따르면, 주택 소유주들은 대출을 상환할 수 있음이 아주 확실하지 않은 이상 그들의 주택을 담보로 제공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많은 선진국들에서 채무자의 소득 수준과 안정성, 그리고 과거 부채 상환의 이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큰 규모의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현재의 대출 관행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담보는 채권자로 하여금 '필요한 경우 난 담보권을 행사하면 되니까 이 대출이 채무자에게 좋은 것인지 혹은 채무자가 상환할 수 있을지에 대해 너무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채무자도 '빚을 갚지 못하면 은행이 내 집을 갖게 될 테니까, 난 아무런 해를 끼친 게 아니야'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러한 생각은 성경적 가르침과 맞지 않으며 정의와 사랑의 형태로서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금융의 역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예금자와 채권자
목차로 돌아가기 채권자와 예금자처럼 자원을 공급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자원을 오로지 자신만의 이득을 위하는 것이 아닌 공공의 선을 위해 투자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관점은 때때로 "사회책임투자"라고 불린다. 우리는 이를 은행에 예금하는 것이나 대출을 해주는 것이 아닌 주식 투자 형식을 통해 알아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책임원칙은 모든 종류의 다른 투자에도 해당이 될 것이다.
기업은 보유 자원의 양보다 생산적인 기회를 회사가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서 주식을 발행한다. 기업은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판매함으로써 추가적인 자원을 습득한다.[1] 투자자는 자신의 자원을 기업이 일정 기간 이용할 수 있게 허락해줌으로써 기업,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고객, 협력업체, 직원,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기업은 투자자에게 배당금이나 주가상승 보상권과 같은 형식으로 일정한 수익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한다.
투자자들은 가능한 한 금융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천하는 기업의 주식만을 구매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선한 청지기의 역할을 하는 기업, 자신들이 판매하는 재화나 용역을 통해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기업, 그리고 고용 관행이나 공동체 관계에 있어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기업들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수천 개에 달하는 기업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에는 많은 시간이 소모되기 때문에 실제로 투자자들이 이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청지기 사명이나 정의, 사랑 등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기업들을 걸러내도록 도와주는 상호 기금 투자 옵션들이 여러 가지 있다. 사회적인 책임투자와 성경적인 책임투자에 대한 문헌과 자료는 많지만, 이를 더욱 세부적으로 알아보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2] 하지만 이러한 투자 접근법은 이 글에서 다루어진 틀과 완벽히 일치하며, 마땅히 행해져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앙과 주식 투자 결정을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