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출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이루어지는 청지기 사명, 정의, 그리고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대출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자원을 얻게 되며, 이 자원은 또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된다.
적정한 금액의 채무
목차로 돌아가기 성경적 원칙을 통해 얼마만큼의 금액을 빌려야 하는지, 혹은 언제 빌려야 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을까? 몇 가지 금융의 성경적 토대가 이런 경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의 지배를 받는 세상, 사회적 순환 주기 및 다양한 개별적 삶의 생활 주기가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고객이나 시민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성장 혹은 인프라 기회에 투자를 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할 때가 있을 것이며, 채무를 상환해야 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기는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경기 침체기에 여유 자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자원을 현금으로 비축해두기보다는 그것을 투자함으로써 정의와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 개인적 삶의 주기와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 나이가 든 사람들이 제공하는 예금 및 자본을 젊은 사람들이 빌려 씀으로써 젊은 세대가 혜택을 받는다.
둘째, 대출의 목적은 자원을 확보함으로써 미래에 또 다른 자원을 창출해내기 위함,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나중에 대출을 상환하는 것이다. 교육, 성장 기회, 혹은 주거비용의 삭감을 위해 받는 대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다. 앞서 "대출금의 비생산적인 사용" 부분에서 다루었듯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영위하고자 무리하게 대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종류의 탐욕을 지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여기에는 옳지 않은 이유로 돈을 빌리는 행위도 포함된다(눅12:14).
셋째, 채무자들은 그들이 —사랑의 행위로서— 빚을 상환하겠다고 한 약속을 이행할 수 있다고 어느 정도 확신해야 한다. 최소한 채무자가 상환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리스크를 채권자가 인식해서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이는 거짓 혹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출 신청이나 신원보증을 방지한다. 예컨대, 내일 직장을 잃을 것 같은데도 오늘 대출을 받는 것은 채권자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는 행위가 아니다. 갚을 수 있는 확실한 계획 없이 신용카드의 빚만 늘려가는 것 또한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넷째, 대출 받는 돈은 직면할 수 있는 리스크에 비해, 적당하고 현명한 정도의 금액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할 수 없는데도 거듭 신용 한도액까지 돈을 빌린다면, 이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돈을 빌려준 이들에게도 사랑이 되는 행위가 되지 못한다.
위에서 다룬 예들은 주로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금융의 성경적 원칙들은 기관, 그리고 정부의 다양한 금융 관련 결정에도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원칙들은 대부분의 경우 적절한 수준의 부채를 제시하며, 개인, 기업, 그리고 정부의 재정에서 자기자본을 더 많이 사용할 것을 유도한다. 특히, 채무자는 대출 행위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장기적 상호 관계의 형성임을 기억하면서, 너무 지나친 금액을 대출받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빚을 지는 것은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대출을 해주고 받는 행위를 통해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다.
파산, 채무 면제, 그리고 융자 재조정
목차로 돌아가기 미래를 알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인간의 특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토대에 포함된다. 이는 결국 불가피하게 상환을 하지 못하는 상황의 사례로 이어질 것이다. 갚지 못하는 상황이 반드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채무불이행은 경솔한 대출, 무능한 일 처리, 은폐, 채무자의 소득 불투명, 계약 체결 당시 채무자 채권자가 모두에게 투명하지 못했던 정보, 혹은 채무자의 번영을 목적으로 계획되지 않은 대출 조건 등의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밖에도, 문제가 없었던 대출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채무자가 실직을 했거나, 예상치 못한 병원비를 지불해야 했거나, 혹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채권자에게는 대출의 채무를 삭감 혹은 면제해주거나 상환을 재조정해주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성경에서는 이것이 채무자의 복지나 생계를 위해 필요한 경우 채무자가 자신의 담보를 계속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형태로 나타난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출22:26-27)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신24:6)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신24:10-13)
이웃이 밤 동안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담보로 잡아두었던 옷은 해가 지기 전에 주인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맷돌을 전당잡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빼앗을 경우 방앗간 주인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타당한 전당물이라고 하더라도 채무자의 집 같은 것을 취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힘든 상황에 처한 채무자를 더 큰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장치들이 된다. 비록 채권자가 대출을 통해 기대했던 수익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의 손실을 겪더라도 말이다. 채무자의 상황이 채권자와 공유되는 것이다. 이것이 금융에 내재된 시간적 관계의 속성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보호 장치는 지불불능이라고도 불리는 파산법, 채권 조사, 리시버 제도, 파산 관리, 가압류 등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법은 채권자로 하여금 파산한 채무자의 생활과 업무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상환 대신 취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현대의 법은 또한 담당 공무원이 아닌 채권자가 직접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 물품을 압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채무불이행 때문에 채무자가 감옥에 수감되는 등, 근대 사회 이전에 수 세기 동안 빈번하게 일어났던 비생산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들 또한 금지되고 있다. 이는 성경적 원칙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현대의 파산법을 통해 이행됨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무자는 빚을 갚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노력해야 한다. 추닝(Chewning)은 하나님의 한결같으심과 잠언 6:1-5 말씀을 배경으로, 만약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다면 법원에 파산신청을 해서 채권자로부터 보호받고자 하지 말고, 스스로를 낮추어 채권자 앞에서 채권자의 자비를 간곡히 부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 위의 성경 구절들이 어려움에 처한 채무자들을 채권자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따라 보호하고 있음을 생각해볼 때, 이는 너무 확대된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채무자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하는 행동은 채권자의 도움과 조언을 구하는 것이라는 추닝의 주장은 옳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출은 채무자와 채권자 간의 장기적 관계 형성을 유도한다. 따라서 채권자와의 상호적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우선적으로 시도해보지도 않고 파산을 신청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관계를 존중하는 방법이 아니다. 티엠스트라(Tiemstra)는 리스크를 신중하게 다뤄야 하며 대출은 "노동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쉬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책임을 나타내 보이는 신중한 문제"라고 말한다.[2] 금융은 정의와 사랑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며, 신중한 채권자와 채무자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부딪히는 경우에도, 이러한 정의와 사랑은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양 당사자 모두에게 있어서 더욱 커져야 한다.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대출을 위한 담보 제공
목차로 돌아가기우리는 "파산, 채무 면제, 그리고 융자 재조정" 부분에서 담보에 대한 내용을 담은 성경 구절들을 살펴볼 것이다. 대출을 받기 위해 주택을 담보로 제공하는 것은 대체로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적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금융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우리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신중하게 위험을 감수하라는 성경적 가르침과 잠언 22:26-27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최소한 채무자들이 대출을 상환할 수 있음이 아주 확실하지 않은 이상, 채권자들이 주택을 담보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성경적 가르침에 따르면, 주택 소유주들은 대출을 상환할 수 있음이 아주 확실하지 않은 이상 그들의 주택을 담보로 제공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많은 선진국들에서 채무자의 소득 수준과 안정성, 그리고 과거 부채 상환의 이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큰 규모의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현재의 대출 관행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담보는 채권자로 하여금 '필요한 경우 난 담보권을 행사하면 되니까 이 대출이 채무자에게 좋은 것인지 혹은 채무자가 상환할 수 있을지에 대해 너무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채무자도 '빚을 갚지 못하면 은행이 내 집을 갖게 될 테니까, 난 아무런 해를 끼친 게 아니야'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러한 생각은 성경적 가르침과 맞지 않으며 정의와 사랑의 형태로서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금융의 역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