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족한 재산을 가진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떨어져 살고 싶어 한다.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는 주택, 에어컨이 작동되는 자가용, 자신의 사회경제적인 집단으로 국한된 교제 범위,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제한된 교회. 이 모든 것들로 부유한 자들은 자신만을 위한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로써 그들만의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효과적으로 추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부자들이 국내 또는 해외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지리적인 거리와 사회적인 거리로 인해 최소한의 공급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히 과부, 아버지가 없는 고아, 그리고 이방인을 돌보라는 명을 받았다.[1] 이런 약자들은 농경사회에서 특히 취약계층으로 꼽혔는데, 그 이유는 땅을 경작할 수 있는 권한이나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인들로 인해 약자들은 쉽게 소외되었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바로 이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시편에서 묘사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68:5)
이와 같이 “이방인”을 환대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기본적 요소다. 두 개의 핵심적인 복음 구절인 눅14:12-14(자신의 축제에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는 것)과 마25:31-46(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의 말씀은 일반적인 환대(conventional hospitality)와 그리스도적인 환대(Christian hospitality)를 구분하고 있다. 우선 일반적인 환대는 친구들과 가족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적 환대는 가난한 자들과 “지극히 작은 자”(마25:40), “값을 것이 없는”(눅14:14) 자들, 그리고 “도로 청하는”(눅14:12) 자들까지 그 범위를 넓혀간다. 예수님께서는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라고 하시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 관계의 차원을 강조하신다. 맥락상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내 가족들”)을 일컫고 계심을 알 수 있는데, 제자들 또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즉, 우리가 그분과 한 가족이 되기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알게 되면 그의 관점은 바뀔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어려움을 직접 눈으로 보며, 이들에게 배울 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도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새로워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빌2:6-8)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게 되었다(히4:15).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과 비교해 가난하고 연약한 우리를 가까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다면, 우리 또한 그분을 따라 우리와 비교해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얼굴을 모르는 무리들이 아니다. 이들은 진짜욕구를 지니고 진짜 삶을 사는 진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환대를 어떻게 베풀 수 있는지에 대하여 관대하게 생각해야 한다. 환대를 베푸는 일에는 기부를 하거나 투자를 하는 것이 필수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좀 더 개인적이고 친근한 표현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모든 공동체 안에는 온갖 부류의 이방인들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보수를 많이 받는 직업을 갖고, 부자동네에 살며, 부유층 친구들하고만 교류하고, 부유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들에겐, 가난한 자들과의 교류가 그들의 일상에 들어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것은 익숙한 집단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 불편한 상황에 처해지는 것이다. 심지어는 먼 거리를 여행하거나 이동해야 할 수도 있다. 만약 진정한 그리스도적인 환대를 베풀고자 한다면,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대신 해줌으로써 그들의 힘을 빼앗는 온정주의를 피하고 힘의 불균형을 최소화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재정적인 성공을 경험하거나 지위와 성공을 기준으로 자긍심을 얻는 이들에게는 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이들과 직접 만나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상황에서, 권력으로 비롯된 위신과 특권을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욥은 가난한 자들과 이러한 개인적 친분을 쌓은 성경 속 인물 중 한 명이다. 욥은 자신이 사는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교류하였다. 또한, 자신의 종, 과부, 아버지가 없는 고아, 이방인 같은 사람들을 멀리하지 않았으며 이들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살았다.
“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 (욥31:32)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욥29:12-13, 15-16)
욥은 그의 가난한 이웃들과 친했고 이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해주었으며 이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끼고 자신의 정치적 또는 재정적 자원을 이용해 이들을 돌보았다.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