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만족으로 이어진다. 만족은 그 자체로 아주 기분이 좋으며 탐욕과 질투심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하다. 성경은 우리가 낙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증가하는 소비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제적 삶의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 비전을 따르면, 충분히 소유한 후에는 더 이상 바라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매일 그들이 필요한 정확한 양의 만나를 내려주셨던 광야에서 이를 경험하였다.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출16:18) 히브리서에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고 조언하고 있다. 바울 또한 같은 맥락에서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자신의 여정을 통해 경험한 것을 나누고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1-13)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 즉, 부유와는 거리가 먼 빌립보 교회는 겨우 끼니를 이어갈 정도로 어려웠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경제적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부유한 삶을 사는 사람들 또한 자신들이 가진 것에서 만족을 찾으라는 도전의식을 준다.
만족이란 어느 정도가 충분한지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 정도의 수익이 충분한 것일까? 급여는? 근무 시간은? 저축 금액은? 집 평수는? 재산은? 우리 중 누구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가 충분하고 과한지 그 기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신도들끼리 소그룹을 이뤄 각자의 구매 계획을 공유하고 이러한 구매가 감사와 만족에 이르는 진정으로 필요한 욕구를 위한 것인지, 혹은 질투와 열망으로 인해 특권의식과 불만족으로 이어질 구매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 시도해본 기독교인은 거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가 충분한지에 대해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눠보는 것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