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는 진실 말하기가 규범이다
목차로 돌아가기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주요 성경 구절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겠지만, 정직과 진실 말하기는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하시는 가치들이며, 그분에 대한 진실성과 충실함을 보여주는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모세의 법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레19:11) 서로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출20:16). 시편 기자 역시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시15:2). 신약은 정직과 진실함을 그리스도 안에 사는 새로운 신자들의 삶과 연관 지을 때 이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골3:9). 신자들의 첫 번째 표시 중 하나로 낡은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진리에 대한 헌신을 의미한다(엡4:24).
정직이라는 덕목은 하나님의 성품을 궁극적인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그 말은 하나님께서 진실하시기 때문에 우리 또한 진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은 하나님께는 거짓이 없다고 말하며(딛1:2), 예수님과 성령님을 모두 진리로 일컫고 있다(요14:6, 16:13, 요일5:6).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말씀 또한 진리라고 불린다(시119:142, 요17:17). 신학적으로 정직함은 덕목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다른 덕목들과 마찬가지로 정직함이 하나님의 성품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진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진실 말하기는 우리가 따라야 하는 도덕적 원칙이며,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특히 십계명을 통해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며, 출애굽기에서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출20:16)고 말씀하시며, 레위기 19:11에서는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라고 다시 한 번 말씀하신다. 잠언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잠12:19) 즉, 진실 말하기는 윤리, 미덕, 명령과 결과로 나아가는 세 가지 접근법에 속한 성경적인 규범이다. (직장에서의 윤리에 대한 성경적인 접근법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려면 www.theologyofwork.org에 실린 “직업 윤리”라는 논문을 살펴보라.)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이 어떻든 상관없이, 성경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정직함 또한 덕목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다른 덕목들과 마찬가지로 정직함이 하나님의 성품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이시고,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 속에 있길 원하기 때문에, 진실 말하기는 우리가 따라야 하는 도덕적 원칙이다. 진리와 가까워지는 유일한 방법은 진실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법은 지시적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은 서술적이다. 즉, 하나님 스스로를 진리라고 칭하신다. 만약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법이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지내도록 창조되었는지를 서술하는 것이라면, 속임수는 우리의 인간 본성을 거부하며, 우리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세우신 기준에 한참 못 미치게 만들고, 우리 스스로와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믿음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함으로써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는” 것이다. 그분은 “머리니 곧 그리스도”이시다(엡4:15).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고후13:8)이기 때문이다.
진실 말하기에 대한 성경의 예외사항
목차로 돌아가기하나님께서는 진리와 사랑을 마치 완벽한 결혼생활을 하는 부부처럼 여기셨다. 이들이 결혼을 하면, 갈등은 생겨나지 않는다. 만약 이들이 헤어지면, 우리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예를 들어, 사랑이 거짓을 필요로 한다든지 (예컨대, 코리 텐 붐이 유대인들을 그녀의 집에 숨겨두었다는 것을 나치 당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거짓말을 한 경우) 진리가 해를 가하는 상황도 (예컨대, 어린 아이로서는 아직 이해할 준비가 안 된 진실을 아이에게 이야기 하는 경우)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잘못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국이 실현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려 노력할 때마다 주기적으로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 말하기가 성경적 원칙이라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이를 따라야 한다는 절대적 원칙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거짓이 칭찬을 받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허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들이 적어도 두어 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신생아였던 모세를 돌보는 일을 맡았던 산파는 모세의 생명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 그가 히브리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바로가 모세를 자신의 친자 중 하나로 믿게끔 만든다(출2:1-1). 또한 라합은 약속의 땅을 살펴보기 위해 미리 찾아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여리고의 병사들을 속인다(여2:1-24). 라합은 정탐꾼들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이 일에 있어 라합의 거짓말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함) 히브리서 11장에서 하나님의 믿음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렇듯 일반적인 진리 말하기 원칙에 대한 예외를 보여주는 또 다른 전형적인 사례로는 2차 세계대전 때 코리 텐 붐이 겪었던 유명한 이야기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주는 나의 피난처(The Hiding Place)>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은 유대인들이 나치 당원에게 붙잡혀 포로수용소로 끌려가지 않도록 얼마 동안 이들을 숨겨주었다. 게슈타포는 반복적으로 그녀에게 총구를 겨눈 채 유대인들을 숨겨주고 있는지 물었고, 그녀는 유대인들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해 당국에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였다.
이것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도덕적 가치들과 덕목들이 대립하는 진정한 도덕적 갈등이었으며, 텐 붐 자매는 대립하는 가치들을 평가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의무를, 진실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이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의무보다 더 중대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는 옳은 선택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흔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명령이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것임을 암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대립은 도덕과 관련된 이러한 요구들이 때때로 상충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우리의 타락한 세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개념과 언어로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는 방식은 인간적인 개념의 한계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언어는 상호적 모순 없이 모든 상황을 다루지 못하며,[1]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것들조차 예외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모순되는 가치들을 비교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음을 알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임을 기대해야 한다. 따라서 진실 말하기가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중요한 도덕적 가치와 상반되는 상황에서는 때때로 예외가 허용되는 일반적인 규칙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도 타락한 세상의 거짓에 매우 근접한 방식으로 일하기도 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특히 구약에 하나님께서 거짓을 통해 일하시는 예시가 많이 나와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으시다는 개념과 상반되어 혼란스럽게 비쳐질 수 있다(왕상22:23, 렘4:10, 20:7 참고). 하지만 그 모든 상황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에 깊이 빠져 있었고, 곧 있을 망명 생활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들에게 진실을 명백히 말씀하셨지만 이들은 진실을 거부했으며, 그에 따라 심판이 다가오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교훈의 수단이 아닌 심판의 수단으로 사람들을 속이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를 거부할 때, 하나님의 성품마저 그들에게는 속임수로 보였다. 하지만 자기기만에 빠진 이들을 속이시는 하나님의 조치는 그분의 진리의 성품과 모순되지 않는다.
신약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은 데살로니가후서 2:11-12의 바울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바울은 종말의 시기에 "불법한 자"가 어떻게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기만에 맞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속임수를 사용하시는데, 이는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버린 이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를 사용하신다. 따라서 바울이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딛1:2)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지만, 타락한 세상에서는 가장 깊은 진리마저 때때로 사랑을 위한 속임수에 싸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다. 코리 텐 붐의 경우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에 따른 정당화될 수 있는 예외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더 깊은 진리를 실천한 것이다.
진실 말하기를 명백한 도덕 원칙으로 보는 것은 속임수를 규칙적으로 사용하는 특정 직업들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인 직관에 항의하기도 한다. 기밀정보 수집을 예로 들어보자. 대부분 국가의 정보기관들이 적국의 중요한 기밀정보를 빼내기 위해 속임수를 사용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경찰의 잠복근무 또한 조직에 효과적으로 잠입하기 위해 그들의 신분을 숨기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위장한다. 이러한 직업과 관련해서 속임수의 사용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2] 그리고 물론 포커 게임에서 허풍을 친다든지 스포츠 경기에서 정교한 속임수를 쓴다든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이는 게임의 일부로 여겨지며 규칙 내에서 허용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그 어떤 경우도 비즈니스 혹은 대부분의 업무가 발생하는 상황들과 완벽히 유사하진 않다. 이후 이 글에서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예외 항목들이 국가 안보와 공공의 안전의 차원 외에도 존재하는지에 대해 논의해볼 것이다. 그리고 포커 게임처럼 진실이 기대되지 않는 상황들은 극히 드물며, 직장에서의 행동 규범으로 작용하기 어렵다.[5] 이것은 직장에서 진실 말하기와 관련해 우리가 어떠한 기준들을 따라야 하는지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유명한 Kurt Godel의 불완전의 원리(“Über formal unentscheidbare Sätze der Principia Mathematica und verwandter Systeme I,” Monatshefte für Mathematik und Physik 38: 173-98, 1931)는 엄밀히 말하자면 몇몇 오류 명제들을 증명하지 않고도 모든 수학적인 참 명제들을 증명할 수 있는 수학적 언어를 만들기 불가능할 때에만 적용이 가능하다. 수학적 언어는 특별히 일반적인 언어보다 더 일관되도록 고안되었다. 만일 모든 수학적 시스템들이 모순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면, 인간 언어들에 묘사되어 있는 모든 규칙과 논리의 시스템들도 필연적으로 모순을 포함한다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현실을 상징적인 용어들, 다른 말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노력에 의해 부과된 근본적인 한계이다.
이러한 예외사항들과 그 정당성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Sissela Bok, Lying: Moral Choice in Public and Private Life (New York: Vintage, 1989), 90-106쪽을 보라. 또한 Norman L. Geisler, Christian Ethics: Options and Alternative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2001), 113-132쪽과 Scott B. Rae, Moral Choices: An Introduction to Ethics, 3r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9), 49-51쪽에 요약되어 있는 것도 살펴보라.
이것에 대한 한 가지 예외사항은 Carr의 " Is Business Bluffing Ethical?”이다. 그의 관점들은 이 논문의 후반에 논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