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은 명백하지만, 이는 심지어 성경에서조차 완벽하게 절대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적인 원칙들에는 몇 가지 예외가 존재한다. 물론, 법적으로 허락되는 것이 진실 말하기의 기준을 결정하진 않는다. 다시 말해, 법은 최소한의 도덕적 요소다. 쉽게 말해 도덕적 천장이 아닌 바닥이라고 할 수 있다. 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교묘히 빠져나갈 수 있는 것들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다음은 진실 말하기의 규범에 있어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몇 가지 예외적인 범주들이다.
과대광고/과장
목차로 돌아가기오늘날의 많은 광고들이 "악의 없는 과대광고"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이는 광고 문구뿐만 아니라 회사의 제품과 관련되어 만들어진 이미지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TCBY 요거트 체인은 스스로를 "국내 최고의 요거트"라고 칭했다. 하지만 그 제품이 정말로 국내 최고의 요거트인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알려져 있는 바에 따르면, 이 회사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모으기 위한 설문조사도 하지 않았으며, 그저 자신들의 의견일 뿐이고, 측정할 수도 없는 그 주장에 대해 그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 광고는 의심할 여지없이 과장된 것이며, 광고하는 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과대광고의 한 예시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회사의 이름을 거짓말로 여기진 않는다. 현명한 소비자라면 그러한 주장을 그저 홍보성 과대광고라고 받아들일 것이다.
만약 엄격한 진실 말하기의 기준에 따라 광고의 부풀리기가 사라진다면, 광고는 그저 입증 가능한 사실들만 진술해야 할 것이며, 대부분의 광고들은 소비자에게 호소할 능력을 잃을 것이다.
"이 지역 최고의 피자"도 하나의 슬로건으로 여겨질 뿐,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더 넓은 범위에서 보면, 입증할 수 없는 의견에 대한 진술의 경우 분명하게 "내 의견은...이다"라는 식으로 진술하지 않는다면 그런 진술 또한 진실 말하기를 위반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누군가가 의견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으며, 광고가 일반적으로 수익을 내기 위한 차원의 의견이지, 객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다. 우리는 "주인이 생각하기에 이 지역 최고의 피자"라고 부가적인 설명을 들을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의견이 옳지 않을 지라도 사회에 가치 있는 것이며, 광고 또한 악의 없는 과대포장을 하고 있다고 해도 가치 있는 것이다. 스포츠팬들이 "우리 팀은 우리나라에서 14번째, 아니면 기껏해야 13번째"라고 응원하거나 사랑하는 연인들이 "난 너를 93%의 마음을 다해 사랑해"라고 말하는 세상에서 정말로 살고 싶은가?
하지만 다음과 같은 광고를 하고 있는 자동차 대리점의 예시를 살펴보자. "신용 문제가 있으신가요? 그 어떠한 신청서라도 환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광고를 상업적인 과대광고로 인식할 것이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를 보고서 신용이 굉장히 안 좋거나, 방금 파산한 사람들도 신용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광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신청서라도 환영"이라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모호한 의견을 서술한 광고보다는 오해의 여지가 크다. 일반 사람들이 광고를 보고 정확한 실제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광고는 그 문구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경우, 그 회사는 모든 신용거래 신청서가 심사를 거친다는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혹은 오해의 소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광고의 "그 어떠한 신청서라도 환영"이라는 부분을 삭제해야 한다. 여기서의 차이점은 그 주장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며 "그 어떠한 신청서라도 환영"한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진실 말하기 위반이다.
광고주들은 또한 광고의 직접적인 문구가 아닌, 제품과 관련지어 내보내는 이미지를 통해 함축적으로 주장할 수도 있다. 남성용 면도 제품들은 보통 아름다운 여성들이 그 회사의 면도기, 면도 크림 혹은 아프터셰이브 로션을 방금 바른 남성들에게 끌리는 이미지를 동반한다. 이는 만약 이 제품을 사용한다면 여러분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운 여성들에게 둘러싸일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또는 적어도 여러분이 좀 더 매력적인 남성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그 제품을 사용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의 시선을 아름다운 여성을 통해 사로잡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광고의 심리학적 작용과는 상관없이, 대부분의 현명한 소비자들은 이러한 과대광고를 간파해내며, 제품을 통해 광고에서 그려지는 그러한 효과를 기대하진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이성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위생 제품들이 성적 매력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제품들과 연관 지어지는 이미지들은 여전히 광고주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들이며, 이러한 형태의 과대광고가 계속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누군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과대광고에 과도하게 격분하진 않는다. (이러한 종류의 광고가 부정적인 성적 고정관념을 강조하거나, 여자 혹은 남자를 비하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신체 이미지를 장려하는지의 여부는 이 논의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물론, 광고주들이 입증 가능한 주장을 할 때는, 진실을 말하는 광고, 그리고 진실 말하기의 도덕적 필요뿐만 아니라 광고에 있어서 진실을 말하도록 규정하는 법을 지키는 광고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예를 들어, 치약 제조사가 "5명 중 4명의 치과의사들은 크레스트(Crest)를 추천한다고 응답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실제로 설문조사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또한 광고의 맥락이 아닌 경우에도, 입증할 수 있는 주장들은 진실이어야 한다. 광고가 아닌 주장을 과장하는 경우는 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상황 혹은 개인이 실제보다 더 낫다고 포장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된다. 만약 있는 그대로 진실이 전해진다면, 과장했을 때만큼의 긍정적인 인상을 남기지 못할 것이 당연해 보이는 경우다. 예를 들어, 이력서에서 자신의 업무 경력이나 학력을 위조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인데 이는 이력서를 받는 사람이 사실을 기대하며 그러한 서류에 나타난 사실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제가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지원자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님을 모든 이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허용된다. 하지만, 사실과는 다르게 "저는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혹 증명할 수 없는 의견을 낼 때라도, 여러분의 의견을 요청하는 사람은 이를 정확한 평가로서 신뢰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에 가르치던 학생이나 동료에 대한 의견을 누군가 물었을 때, 여러분이 대답하는 구체적인 주장들은 사실일 것으로 예상된다. 심지어는 "내 최고의 학생 중 한 명"이라는 것처럼 애매한 진술 또한 그 학생이 실제로 대다수의 다른 학생들보다 더 뛰어났을 경우에만 해야 한다.
물론 과장법(요점을 제대로 말하기 위해 과장된 강조를 사용하는 것)은 오늘날 언어에서 흔히 사용되는 비유법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도 특히 시로 쓰인 부분에서 이러한 방법이 사용된다. 시편 6:6은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내가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라는 것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보고 정말로 시편 기자의 요가 축축하게 젖거나 침상이 띄워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막9:43, 45, 47)는 말씀도 과장법을 사용한 것으로 간주된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다시는 은행을 털지 못하도록 스스로 발을 잘라버린다면 이는 섬뜩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여러분의 의견을 묻는다든지,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에는 과장법이 기대되지 않는다. 보통의 경우는 실제 의견을 좀 더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설명이 뒤따른다.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 중의 하나는 바로 추천서와 관련된 상황이다. 특히 여러분이 해고를 시킨 직원이 여러분의 추천서 없이는 다른 직업을 찾기 힘든 경우에는 더욱 어렵다. 이에 대하여 대체로 회사 변호사들이 권고하는 일반적인 해결책은, 문제의 그 직원이 명시된 기간 동안 여러분의 회사에서 일했다는 사실 말고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한 전 직원의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럴 경우 다른 고용주들이 무능력하고 성품이 나쁘거나 혹은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직원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은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을 피하고자 한다. 법정에서 진리가 절대적인 방어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은 애초에 그러한 소송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추천서를 쓸 때, 추천하는 사람의 실제 모습보다 더 뛰어나고, 자격이 있는 것처럼 과장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직원들에게 주는 추천서에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추천서를 과장하는 관행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추천서의 수령인은 그 사람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통해 그 사람이 특정한 지위나 기관에 적합한지 결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적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직원과 기관 모두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장이 흔하게 일어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추천서와 관련한 냉소주의가 생겨났으며, 일부는 이를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고 추천서의 전반적인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소송을 피하기 위해 신중해지면, 후보자가 그 지위에 적당한 사람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사실들을 공개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는 꽤 까다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를 위반하진 않겠지만, 추천서를 요청한 이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을 채택하게 되면, 공정함을 위해 모든 추천서에 적용되어야 한다. 추가 내용을 덧붙이지 않는 추천서가 해당 후보자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 "비공개"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스스로를 잘 보이게 만들기 위해 과장을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어쩌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거나 암시할 수도 있다. "지금 말씀하시는 상황을 저도 많이 겪어봤는데, 제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겁니다." 실제로는 그러한 상황을 단 한번 겪어보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겪은 이야기를 그저 들어봤을 뿐이라도 말이다. 사실, 우리가 만약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잘 알고 있다면, 이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해보지 않은 것을 해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정직함이 기대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특정한 상황에 직면한 적이 많다고 과장하는 대신, 나라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자. 당신이 그러한 상황을 (만약 정말로 보았다면) 보았다고 말하고, 당신이라면 이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차근차근 설명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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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의 거짓말"은 대화를 부드럽게 하거나 사소한 언쟁을 모면하고자 하는 거짓말로 그 누구에게도 거의 해를 끼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회의에 지각을 한 경우, 우리는 "차가 너무 막혔어요..." 혹은 "꼭 받아야 하는 전화가 갑자기 걸려왔어요."와 같이 자신의 체면을 살리는 변명을 만들어내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낀다. 또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동료에게 당신이 지금 사무실에 없다거나 회의 중이라고 말해달라고 하는 상황도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또 다른 종류의 선의의 거짓말은 다음과 같다. "내 친한 친구를 소개할게." (그 동료를 실제로는 별로 안 좋아하면서도), "굉장히 현명하십니다." (어리석음이 명백히 보이는 고객에게), "내가 전화할게" (실제로는 전화할 생각이 전혀 없을 때) 등등.
선의의 거짓말은 악의가 없어 보이는 거짓말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취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에 잘 대처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만약 회의에 늦는다면, 그냥 간단히 “죄송합니다. 일이 좀 생겨서요."라고 말하고 넘기면 된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었는지 꼭 알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애매하게 넘어가는 것이 선의의 거짓말보다 낫다. 둘 다 악의는 없더라도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은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하면 된다.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사람이 어떤 상황 때문에 당신이 이야기를 할 수 없는지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 또한 당신에게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야 할 의무도 없다. 혹은 그 사람과 직접 대면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냥 이렇게 이야기하면 된다. "지금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보면 좋겠네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세한 설명을 덧붙일 의무는 없다. 불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반드시 속임수라고 할 수는 없으며, 이유를 솔직하게 다 털어놓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싶은 상황들 중에는 우리가 정직함을 보여야 하는 상황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뒤, 여러분의 평가를 물어보았다고 생각해보자. 이에 대해 "아주 좋았어요. 마음에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쉽고도 효율적인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실제로 프레젠테이션이 별로였을 경우 그 사람에게 유용하고 건설적인 피드백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따라서 칭찬할 부분은 칭찬해주면서 부족했던 부분도 지적해주어서 그 사람이 다음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떠한 유형의 속임수들은 비교적 가벼운 것이기 때문에 용인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도 있다. 여러분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고용주에게 거짓된 정보를 준다든지, 혹은 비용계정을 부풀리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가 이러한 거짓말은 흔하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면, 특히 이러한 속임수의 유혹에 취약해질 수 있다. 혹은 우리가 겪는 부당함에 대한 보상으로서 이러한 속임수를 정당화하고자 할 수도 있다. "나는 더 많은 몫의 팁을 받을 자격이 있어. 하지만 동료 팻처럼 상사와 부적절한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제 몫을 못 받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현금입출금기에서 돈을 조금 꺼내서 그걸로 보충해야지." 이러한 것은 선의의 거짓말이나 과대광고와 같은 수준을 명백히 넘어선 것이다. 이는 의심하지 않는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며, 그 상대가 속지 않는 이상 얻을 방도가 없는 개인적 이득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속임수는 기독교적 윤리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허풍
목차로 돌아가기직장에서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진실 말하기의 위반 행위는 허풍, 혹은 "상호적인 속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 허풍은 모든 당사자들이 진실을 기대하고 있지 않을 때, 그리고 협상의 일부로 여겨질 때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마치 춤을 추는 두 사람이 모두 음악과 동작을 잘 알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일반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허풍의 흔한 예는 스포츠 경기나 포커 게임에서 속임수를 쓸 때, 혹은 비서양 국가에서 쇼핑을 하면서 가격을 흥정할 때, 그리고 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할 때다. 필립 칸이 바이트 매거진 판매원에게 사용한 허풍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허풍이 용인될 수 있는 상황은 허풍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황, 즉 모든 이들이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는 상황이다. 위와 같은 예시들은 명백히 이러한 상황들이며 (칸의 경우는 확실치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부정하게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허풍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변론은 1968년 앨버트 카(Albert Carr)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발표한 논문일 것이다. 카는 비즈니스가 포커 게임과 유사하며, 모든 이들이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기 때문에 허풍은 속임수가 아닌 용인되는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흔히 캐비앳 엠프토르(Caveat Emptor, 매수자 위험 부담 원칙) 도덕이라고 불리는 것의 일환으로 이는 진실 말하기에 대한 카의 견해와 상당히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카는 허풍이 빠른 상황 판단을 요하는 효과적인 비즈니스 관행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사무실의 삶 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일개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다소 다른 윤리적 기준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게임 플레이어들이 된다. 포커에서 사용되는 윤리는 문명화된 인간관계의 윤리적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포커 게임에서는 상대 플레이어를 향한 불신이 필요하다. 이는 우정에 의한 호소도 무시한다. 포커에서는 친절함과 솔직함이 아닌 자신의 능력과 의도를 숨기는 교묘한 속임수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점 때문에 포커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비즈니스 게임에서 사용되는 옳고 그름의 잣대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도덕 전통과 다르다고 해서 그 누구도 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2]
카는 혁신적 개념인 이중도덕을 주장하는데 이는 개인적인 삶의 도덕적 잣대가 비즈니스에 적용되면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카는 직장에서는 진실 말하기라는 윤리적 가치를 버리고 포커의 특징에서 볼 수 있는 허풍과 속임수로 대체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여기서 카는 비즈니스 활동이 반드시 "법규로 정해진 규칙들뿐만 아니라 윤리적 관습까지 포함한 사회의 기본 규칙"[3]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같은 경제학자들과 대립하게 된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적 삶에서의 도덕과 비즈니스의 도덕을 엄격히 양분한 카의 견해는 정당한 비즈니스 윤리로 여겨질 수 없다. 성경은 삶을 여러 개의 도덕적 차원으로 나눠 어떠한 경우에는 예상 밖의 속임수를 이용해 이웃을 부정하게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앞서 지적했듯이, 포커 비유는 비즈니스에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당사자들이 선택에 따라 참여한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떠날 수도 없다) 모든 이들이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비즈니스는 게임이 아니다. 여기서 마지막 이유가 특히 중요한데, 그것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허풍을 치는 것과 잘 모르는 사람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것을 구분 짓는 경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허풍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또한 허풍과 협상이 반드시 같은 것도 아니다. 협상의 목표는 선하고 정직한 방법으로 상호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공정한 가격에 합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협상의 일부로 허풍이 이용되기도 한다. 상업부동산 판매나 소송에서 합의를 하는 경우처럼 모든 사람들이 규칙을 알고 있음이 확실한 상황들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쌍방이 모두 최종 합의를 향해 계속해서 진행되는 협상 과정을 기대한다. 하지만 진행되는 협상 과정 중에는 상대방에게 명백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의도를 처음부터 전부 드러내지 않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예를 들어, 고객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어떤 합의 조정회의에 참석했는데 사건 해결을 위해 100,000달러까지 지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치자.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으므로, 변호사는 정당하게 75,000달러 정도를 먼저 제안할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 변호사에게 그 금액이 그가 제안할 수 있는 최고 금액이냐고 자세하게 물어본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다. 여기에 "그렇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이 금액이 현재 제안된 금액이라고 간단히 단언하면 된다. 당사자들이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협상이 반드시 속임수를 수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말하기 위해 처음부터 솔직하게 모든 것을 공개해 결국 협상력을 잃어버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허풍이 제한되는 중요한 경우는 바로 실질적인 정보 공개가 필요할 때다. 즉, 사실에 기반을 둔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거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경우 말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판매하려고 하는데 변속장치가 고장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라면, 구매자가 변속장치의 상태가 좋다고 믿도록 유인하는 것은 정당한 방법이 아니다. 만약 내가 그 자동차의 실제 상태를 알려주고 싶지 않거나 알려주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그 자동차는 "현 상태 그대로" 판매되는 것임을 명시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사법재판소에서는 판매자가 실질적인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 (특히 미국 내에서) 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
협상이라는 상황에서 당사자들은 확인이 불가능한 허위 사실들을 만들어내어 허풍을 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 조건으로 제 상사가 승인을 내려줄지 모르겠네요",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 제안입니다" 혹은 "지금 이 거래를 하고 싶어 하는 다른 기업들이 몇몇 곳이나 돼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짓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게임의 규칙에 속하는 것일까? 어떠한 경우에서는 그럴 수 있다. 협상 초반에 "이 조건이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종 제안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상대측이 능숙한 협상가라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혹은 어느 한 쪽이 "지금 이 거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이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상대방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에 입각한 것처럼 보이는 진술을 하는 것은 상대방이 이를 허풍의 규칙을 넘어선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종류의 허풍을 치면 안 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이 방법이 하나님을 높이고 상대측을 존중하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모든 협상은 일반적인 현실의 규칙에 입각해야 하며, 이 경우 사실적 진술들은 참이라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토지를 판매하고자 할 때, 그 누구도 허풍을 타당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접근법은 허풍을 광고와 유사하게 간주하는 것이다. 가격, 조건 등과 같은 항목에 대한 상대방의 태도를 하나의 협상 전술로 보아 과장(혹은 축소)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부정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실에 대해 거짓 진술을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정말 잘 속아 넘어가는, 즉 허풍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측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진술은 실제 사실로 여겨지지 않는다. 거짓된 사실을 만들어내는 대신, 상대방이 잘 모르고 있는 부분에 대해 진술하는 것은 어떤가? "지금 우리에게 값을 제의할 준비가 된 다른 바이어들이 세 명이나 있는데, 이 가격에 제의 받으신 걸 행운으로 아세요”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값을 제의할 준비가 된 다른 바이어들이 세 명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이 가격에 운을 걸어보시겠습니까?"
허풍에 대해 의심을 한다고 해서 그 회사 혹은 개인이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들은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인터뷰나 프레젠테이션이 있으면 옷을 잘 차려입고, 회사의 사무실은 사람들이 일하거나 방문하기에 보기 좋게 만들어놓는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보기 좋게 나타내는 것은 우리의 실제 제품이나 우리의 본모습이지, 가상의 인물이나 제품이 아니란 사실은 중요하다. 필립 칸과 바이트 매거진의 이야기에서 칸은 자신이 속고 있는지도 모르는 판매원에게 자신의 회사를 고의적으로 실제 모습과 다르게 보여준다. 이는 허풍의 위험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상황이 명백하고 모든 사람들이 규칙을 알고 있을 때는 허풍이 용인된다고 하더라도, 규칙을 정확히 모르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을 속여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유혹은 굉장히 저항하기 힘든 것이며, 이는 애초에 허풍이 시작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렉산더 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호간의 속임수는... 신중하게 미리 규정된 상황 속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모든 당사자들이 규칙을 이해하고, 애꿎은 다른 이들이 불리하게 영향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러한 투명한 절차를 시장에서 시행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4]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필립 칸과 볼랜드의 경우는 정당하지 않은 속임수로 보인다. 교차로에서 정지 신호를 그냥 지나쳤을 때 다른 차를 치지 않았다고 해서 옳은 일은 아닌 것처럼, 술책이 성공적으로 통했다고 해서 정당한 것은 아니다. 볼랜드가 만약 사업에 실패해 바이트 매거진에게 20,000달러를 지불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걸 고려하면, 그러한 속임수가 정당하지 않음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실제로, 칸의 속임수는 모기지 담보부 증권시장의 붕괴로 초래된 세계 경제위기에서 자행된 속임수와 유사하다. 대출기관들은 주택 구매자들이 대출을 상환할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이들에게 위험도가 높은 대출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이들 대출기관들은 해당 대출의 위험 수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투자자들에게 그 대출을 팔았다. 볼랜드가 운 좋게도 많은 소프트웨어를 판매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만약 주택 가격이 계속해서 증가했다면, 대출기관은 담보권을 실행해 대출을 상환할 수 있는 충분히 높은 가격에 주택을 판매할 수 있었을 것이며, 투자자들 또한 그들이 어떠한 위험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났다. 주택 가격이 하락해 대출을 상환하지 못하게 되었고, 경제는 세계적 불황에 빠져들었다. 이는 속임수를 통해 때로 운이 좋으면 이득을 얻을 수도 있지만, 항상 모든 사람들이 이득을 얻고 아무도 피해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개인이나 조직을 속이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
사실, 허풍과 부정 속임수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여러분이 회사 동료의 승진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그 동료가 믿게 만든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여러분이 대신 승진을 하고자 상사 앞에서 그 동료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했다고 치자. 이는 진실 말하기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며 동료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건 단지 허풍일 뿐이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도 있다. 허풍에 관한 또 다른 문제는 허풍이 합법성이라는 허울 아래 모욕으로 이어지는 문을 연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당사자들이 허풍에 대해 인식하고 있고, 규칙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상황에서만 허풍을 용인해야 한다. 알렉산더 힐의 경고를 다시 반복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터에서 그러한 상황을 드물게 접하거나, 아예 접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