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진실 말하기의 위반 행위는 허풍, 혹은 "상호적인 속임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 허풍은 모든 당사자들이 진실을 기대하고 있지 않을 때, 그리고 협상의 일부로 여겨질 때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마치 춤을 추는 두 사람이 모두 음악과 동작을 잘 알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일반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허풍의 흔한 예는 스포츠 경기나 포커 게임에서 속임수를 쓸 때, 혹은 비서양 국가에서 쇼핑을 하면서 가격을 흥정할 때, 그리고 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할 때다. 필립 칸이 바이트 매거진 판매원에게 사용한 허풍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허풍이 용인될 수 있는 상황은 허풍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황, 즉 모든 이들이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는 상황이다. 위와 같은 예시들은 명백히 이러한 상황들이며 (칸의 경우는 확실치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부정하게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허풍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변론은 1968년 앨버트 카(Albert Carr)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발표한 논문일 것이다. 카는 비즈니스가 포커 게임과 유사하며, 모든 이들이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기 때문에 허풍은 속임수가 아닌 용인되는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흔히 캐비앳 엠프토르(Caveat Emptor, 매수자 위험 부담 원칙) 도덕이라고 불리는 것의 일환으로 이는 진실 말하기에 대한 카의 견해와 상당히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카는 허풍이 빠른 상황 판단을 요하는 효과적인 비즈니스 관행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사무실의 삶 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일개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다소 다른 윤리적 기준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게임 플레이어들이 된다. 포커에서 사용되는 윤리는 문명화된 인간관계의 윤리적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포커 게임에서는 상대 플레이어를 향한 불신이 필요하다. 이는 우정에 의한 호소도 무시한다. 포커에서는 친절함과 솔직함이 아닌 자신의 능력과 의도를 숨기는 교묘한 속임수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점 때문에 포커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비즈니스 게임에서 사용되는 옳고 그름의 잣대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도덕 전통과 다르다고 해서 그 누구도 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2]
카는 혁신적 개념인 이중도덕을 주장하는데 이는 개인적인 삶의 도덕적 잣대가 비즈니스에 적용되면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카는 직장에서는 진실 말하기라는 윤리적 가치를 버리고 포커의 특징에서 볼 수 있는 허풍과 속임수로 대체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여기서 카는 비즈니스 활동이 반드시 "법규로 정해진 규칙들뿐만 아니라 윤리적 관습까지 포함한 사회의 기본 규칙"[3]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같은 경제학자들과 대립하게 된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적 삶에서의 도덕과 비즈니스의 도덕을 엄격히 양분한 카의 견해는 정당한 비즈니스 윤리로 여겨질 수 없다. 성경은 삶을 여러 개의 도덕적 차원으로 나눠 어떠한 경우에는 예상 밖의 속임수를 이용해 이웃을 부정하게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글에서 앞서 지적했듯이, 포커 비유는 비즈니스에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당사자들이 선택에 따라 참여한 것도 아니고 (또한 그들의 선택에 따라 자유롭게 떠날 수도 없다) 모든 이들이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비즈니스는 게임이 아니다. 여기서 마지막 이유가 특히 중요한데, 그것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허풍을 치는 것과 잘 모르는 사람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것을 구분 짓는 경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허풍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또한 허풍과 협상이 반드시 같은 것도 아니다. 협상의 목표는 선하고 정직한 방법으로 상호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공정한 가격에 합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협상의 일부로 허풍이 이용되기도 한다. 상업부동산 판매나 소송에서 합의를 하는 경우처럼 모든 사람들이 규칙을 알고 있음이 확실한 상황들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쌍방이 모두 최종 합의를 향해 계속해서 진행되는 협상 과정을 기대한다. 하지만 진행되는 협상 과정 중에는 상대방에게 명백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의도를 처음부터 전부 드러내지 않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예를 들어, 고객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어떤 합의 조정회의에 참석했는데 사건 해결을 위해 100,000달러까지 지불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치자.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처음부터 모든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으므로, 변호사는 정당하게 75,000달러 정도를 먼저 제안할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 변호사에게 그 금액이 그가 제안할 수 있는 최고 금액이냐고 자세하게 물어본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다. 여기에 "그렇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이 금액이 현재 제안된 금액이라고 간단히 단언하면 된다. 당사자들이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협상이 반드시 속임수를 수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말하기 위해 처음부터 솔직하게 모든 것을 공개해 결국 협상력을 잃어버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허풍이 제한되는 중요한 경우는 바로 실질적인 정보 공개가 필요할 때다. 즉, 사실에 기반을 둔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거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경우 말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판매하려고 하는데 변속장치가 고장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라면, 구매자가 변속장치의 상태가 좋다고 믿도록 유인하는 것은 정당한 방법이 아니다. 만약 내가 그 자동차의 실제 상태를 알려주고 싶지 않거나 알려주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그 자동차는 "현 상태 그대로" 판매되는 것임을 명시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사법재판소에서는 판매자가 실질적인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 (특히 미국 내에서) 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
협상이라는 상황에서 당사자들은 확인이 불가능한 허위 사실들을 만들어내어 허풍을 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 조건으로 제 상사가 승인을 내려줄지 모르겠네요",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 제안입니다" 혹은 "지금 이 거래를 하고 싶어 하는 다른 기업들이 몇몇 곳이나 돼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짓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게임의 규칙에 속하는 것일까? 어떠한 경우에서는 그럴 수 있다. 협상 초반에 "이 조건이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종 제안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상대측이 능숙한 협상가라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혹은 어느 한 쪽이 "지금 이 거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다섯 명이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상대방은 곧이곧대로 듣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에 입각한 것처럼 보이는 진술을 하는 것은 상대방이 이를 허풍의 규칙을 넘어선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종류의 허풍을 치면 안 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봐야 할 것이다. "이 방법이 하나님을 높이고 상대측을 존중하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모든 협상은 일반적인 현실의 규칙에 입각해야 하며, 이 경우 사실적 진술들은 참이라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토지를 판매하고자 할 때, 그 누구도 허풍을 타당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가장 좋은 접근법은 허풍을 광고와 유사하게 간주하는 것이다. 가격, 조건 등과 같은 항목에 대한 상대방의 태도를 하나의 협상 전술로 보아 과장(혹은 축소)해서 받아들이는 것은 부정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실에 대해 거짓 진술을 하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정말 잘 속아 넘어가는, 즉 허풍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게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측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진술은 실제 사실로 여겨지지 않는다. 거짓된 사실을 만들어내는 대신, 상대방이 잘 모르고 있는 부분에 대해 진술하는 것은 어떤가? "지금 우리에게 값을 제의할 준비가 된 다른 바이어들이 세 명이나 있는데, 이 가격에 제의 받으신 걸 행운으로 아세요”라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값을 제의할 준비가 된 다른 바이어들이 세 명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이 가격에 운을 걸어보시겠습니까?"
허풍에 대해 의심을 한다고 해서 그 회사 혹은 개인이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들은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인터뷰나 프레젠테이션이 있으면 옷을 잘 차려입고, 회사의 사무실은 사람들이 일하거나 방문하기에 보기 좋게 만들어놓는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보기 좋게 나타내는 것은 우리의 실제 제품이나 우리의 본모습이지, 가상의 인물이나 제품이 아니란 사실은 중요하다. 필립 칸과 바이트 매거진의 이야기에서 칸은 자신이 속고 있는지도 모르는 판매원에게 자신의 회사를 고의적으로 실제 모습과 다르게 보여준다. 이는 허풍의 위험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상황이 명백하고 모든 사람들이 규칙을 알고 있을 때는 허풍이 용인된다고 하더라도, 규칙을 정확히 모르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을 속여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유혹은 굉장히 저항하기 힘든 것이며, 이는 애초에 허풍이 시작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렉산더 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호간의 속임수는... 신중하게 미리 규정된 상황 속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모든 당사자들이 규칙을 이해하고, 애꿎은 다른 이들이 불리하게 영향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러한 투명한 절차를 시장에서 시행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4]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필립 칸과 볼랜드의 경우는 정당하지 않은 속임수로 보인다. 교차로에서 정지 신호를 그냥 지나쳤을 때 다른 차를 치지 않았다고 해서 옳은 일은 아닌 것처럼, 술책이 성공적으로 통했다고 해서 정당한 것은 아니다. 볼랜드가 만약 사업에 실패해 바이트 매거진에게 20,000달러를 지불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걸 고려하면, 그러한 속임수가 정당하지 않음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
실제로, 칸의 속임수는 모기지 담보부 증권시장의 붕괴로 초래된 세계 경제위기에서 자행된 속임수와 유사하다. 대출기관들은 주택 구매자들이 대출을 상환할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이들에게 위험도가 높은 대출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이들 대출기관들은 해당 대출의 위험 수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투자자들에게 그 대출을 팔았다. 볼랜드가 운 좋게도 많은 소프트웨어를 판매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만약 주택 가격이 계속해서 증가했다면, 대출기관은 담보권을 실행해 대출을 상환할 수 있는 충분히 높은 가격에 주택을 판매할 수 있었을 것이며, 투자자들 또한 그들이 어떠한 위험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상황이 일어났다. 주택 가격이 하락해 대출을 상환하지 못하게 되었고, 경제는 세계적 불황에 빠져들었다. 이는 속임수를 통해 때로 운이 좋으면 이득을 얻을 수도 있지만, 항상 모든 사람들이 이득을 얻고 아무도 피해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개인이나 조직을 속이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
사실, 허풍과 부정 속임수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여러분이 회사 동료의 승진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그 동료가 믿게 만든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여러분이 대신 승진을 하고자 상사 앞에서 그 동료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했다고 치자. 이는 진실 말하기를 명백히 위반한 것이며 동료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건 단지 허풍일 뿐이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도 있다. 허풍에 관한 또 다른 문제는 허풍이 합법성이라는 허울 아래 모욕으로 이어지는 문을 연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당사자들이 허풍에 대해 인식하고 있고, 규칙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는 상황에서만 허풍을 용인해야 한다. 알렉산더 힐의 경고를 다시 반복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터에서 그러한 상황을 드물게 접하거나, 아예 접하지 않는다.
이 표현은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it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39-143쪽에 있다.
Albert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cited in Scott B. Rae and Kenman L.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2nd edition, (Grand Rapids: Zondervan, 2004), 26쪽.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The New York Times Magazine, September 13, 1970.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