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에서 있었던 두 번의 갈등 가운데 첫 번째는 바울과 실라가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면서 일어난다.[18]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이런 유형의 귀신은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행 16:16) 점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것은 가장 추악한 형태의 경제적 약탈 사례로 보인다. 바울과 실라가 좀 더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행 16:18). 아마도 바울이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전에 아이나 아이의 주인과 연줄을 만들기를 원했기 때문일 수 있다. 바울이 행동을 취하자 아이는 영적으로 해방됐고, 아이의 주인들은 금전적 손해를 봤다. 주인들은 평안을 해친다는 죄목으로 바울과 실라를 당국자들 앞으로 끌고 간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해방 사역이 당시 흔히 있던 노예 착취라는 사업상의 관행을 배척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명했다. 인간을 착취해 가면서 경제적 이윤을 산출하는 사업은 기독교 복음과 마찰을 일으킨다. (인간을 착취하는 정부도 그에 못지않게 나쁘다. 우리는 앞에서 헤롯이 자기 백성을 향한 폭력, 심지어는 자기 군사들이 가한 그 폭력이 결국은 주의 사자의 손에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논했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제국의 부패한 정치 · 경제적 관행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었지만, 죄와 사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능력은 그런 착취의 굴레를 깨뜨릴 수밖에 없다. 경제적 결과 없이 영적 해방은 있을 수 없다. 바울과 실라는 성(性) 때문에, 경제적 지위 때문에, 또 나이 때문에, 학대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경제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해 기꺼이 조롱을 받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려 했다.
만약 우리가 2천 년 앞의 일을 내다보고 그 시간을 준비한다면,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윤리와 사회적 원칙들을 어기는 제품들, 회사들, 사업들, 정부들의 편의를 봐주거나 심지어 거기서 이윤을 취할 수 있을까? 마약과 성매매 같은 불법 사업들을 가로막는 것은 쉽지만 근로자들이나 소비자들, 또는 크게는 대중에게 해를 가하는 사업들은 어떤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 대가로 누군가 이득을 챙기는 합법적인 구멍들과 보조금, 불공정한 정부 규제는 어떤가? 혹시 우리조차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이익을 얻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가?
세계 경제에서 경제 활동의 조건들과 결과들을 추적하기란 어렵다. 정보를 잘 알고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크리스천 공동체는 지금까지 엄격하게 비판을 해온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경제 활동의 표준을 위한 원리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경제 문제는 복음의 문제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위대한 선교사요, 믿음의 영웅들인 바울과 실라를 통해 우리는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경제적 남용에 정면 돌파를 하도록 부름받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도행전 17-18장은 일과 관련된 관심사를 훨씬 더 많이 담고 있지만, 세상 체계에 맞서는 복음의 도전에서 야기되는 충돌을 더 논의하기 위해 이 기사는 19장 21-41절에 나오는 두 번째 충돌 뒤에 나오며, 그다음에 17-18장으로 돌아갔다가 19장의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겠다.
그리스-로마의 인식 개념 안에서의 이런 유형의 영에 대한 설명은 John R. Levison, Filled with the Spirit (Grand Rapids: Eerdmans, 2009), 318-320쪽을 보라.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