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받은 공동체 (행1:6)
목차로 돌아가기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모습 그대로 세상을 회복시키려는 예수님의 사명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사명으로 전환된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주변 세상과는 다르게 일하고 일과 관련된 힘과 부를 다르게 사용하는 그룹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구성하는 동안 그들의 공동체 생활을 추적한다. 이 작업은 교회라 불리는 독특한 공동체의 탄생으로 시작된다. 누가는 “그들이 모였을 때” 그 공동체로 시작하며,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려는’(행 1:6) 임무를 계속해 나간다. 이 일의 성취를 위해 그 공동체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명을 지향하고,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증인을 자기 정체성으로 붙들어야 한다.
증인의 사명, 성령으로만 감당할 수 있다 (행1:8)
목차로 돌아가기사도행전은 부활 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다(행 1:3). 그들은 사회적 · 정치적 나라를 세우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반응한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6).[1] 예수님의 반응은 일꾼으로서의 우리 삶과 아주 긴밀하게 연관된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제자들의 호기심을 막아 버리신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정확한 시간에 집착해 계속해서 의문을 품으며 살아서는 안 된다. 둘째, 예수님은 사회적 · 정치적인 나라, 곧 제자들이 물었던 ‘이스라엘에 회복시키실 나라’를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이스라엘의 성경을 잘 알았다. 그들은 선지자들에 의해 그려진 나라가 또 다른 하나의 현실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새로워진 이 세상에서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참다운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은 다가올 이 나라의 실체를 부인하지 않으셨으나, 기대하는 그 나라 속에 모든 피조 세계를 포함시키심으로 제자들의 기대의 범위를 확장시키신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영토를 위한 새로운 나라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행1:8) 이르는 나라다. 이 나라의 완성은 (“이때까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미 여기 이 세상에 와 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계 21:2-3).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한다. 하나님이 여기, 구속된 이 세상에 거하신다. 그런데 왜 아직 여기에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의 제자들이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그 답의 일부임을 암시한다. 에덴 동산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는 데는 인간의 일이 필요했지만(창 2:5), 우리의 일은 타락으로 무능력해지고 말았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일에 힘을 불어넣으시기 위해 그분의 영을 보내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도래에 필수적인 사명을 주셨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활동영역에 성령의 능력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선물은 하나님이 인간의 일에 위임하신 필수적인 역할과 그 역할을 완수할 수 있는 우리 능력 사이의 간극을 메워 준다. 타락 이후 처음으로 우리의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기여할 능력을 갖췄다. 대체로 학자들은 이 사도행전 1장 8절을 누가의 두 번째 책(사도행전)의 표제적인 진술로 본다.
실제로 사도행전 전체는 (때로는 비틀거리기도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라는 크리스천의 사명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증언한다는 것은 전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각 개인이 자기 말을 통해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나누는 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해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원칙과 관습에 맞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효과적인 증인의 형태는 종종(더 정확히 말하면 주로)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공동체의 삶을 나누는 것임을 우리는 볼 것이다.
증인이 되는 사명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성령님은 개인과 공동체를 변혁시켜서 인간 노동의 결실, 특히 능력, 자원, 영향력을 지역 공동체 및 주변의 문화와 나누게 하신다.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도와줄 때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된다. 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문화에 더 폭넓은 유익을 끼치기 위해 자신들의 자원을 사용할 때 증인이 된다. 정의, 선, 아름다움의 방식으로 일해 더 충만한 삶에 이르는것을 주변 사람들이 볼 때 공동체는 예수의 증인이 된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지역들을 보면 제자들의 증언이 그들을 사회적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곳들이다.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제자 그룹은 로마제국의 원수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서 최근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한 사람을 위해 대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그들의 스승이 죽임을 당한 도시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의 인종적 원수들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들, 넓게는 로마제국까지 이 부르심을 가져가라는 사명을 받았다.[2]
한마디로, 사도행전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증인’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위해 부르신, 즉 목적이 분명한 부르심으로 시작된다. 무엇보다 증인이 된다는 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에 합당하게 사는 삶을 뜻한다. 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다. 이 사명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며, 사회적 장벽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이행되어야 한다. 목적이 분명한 이 부르심은 인간의 노동이나, 오직 말씀으로 예수님을 전파하는 제자들의 노동자로서의 삶을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행전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나라의 근본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이다.
누가가 사용했던 회복 동사인 ‘Apokathistēmi[아포카티스테미]’를 국가적 회복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망을 설명하기 위해 70인역과 요세푸스가 사용했다. (출 4:7; 호 11:11,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11.2, 14를 보라.) 또한 David L. Tiede, “The Exaltation of Jesus and the Restoration of Israel in Acts 1,” Harvard Theological Review 79, no. 1 (1986): 278-286쪽과 James D. G. Dunn, Acts of the Apostles, Epworth Commentaries (Peterborough, UK: Epworth Press, 1996), 4쪽을 보라.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적대감에 대한 참고 자료는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18:30; Jewish War 2:32 이하를 보라. “땅끝”에 대한 언급은 로마제국의 사람들과 장소의 최대 범위를 암시한다. David W. Pao, Acts and the Isaianic New Exodu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2), 91-96쪽을 보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행2:1-41)
목차로 돌아가기오순절 이야기가 초대 교회 공동체 삶의 중심이 되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묘사된 ‘증인의 사명’이 시작된 사건이다. 사도행전의 이 부분은 모든 일꾼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첫째, 성령 강림은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크리스천들의 정체성을 인정해 준 사건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세상을 재창조하여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생명력을 더한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나타난 그 현상을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언급함으로써 설명한다.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5-21).
베드로는 포로된 하나님 백성의 회복을 묘사하는 요엘서 부분을 언급한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단번에 영원히 그분의 백성을 건지는 일을 시작하셨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 부분을 사용한다.[3]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동시에 세상의 재창조의 시작이다. 요엘은 이 재창조를 너무 놀라워 숨이 멎을 듯한 이미지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땅에 돌아오면서 사막은 일종의 새 에덴으로 생명이 살아난다. 흙과 짐승과 사람 모두 하나님의 승리와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기뻐한다(욜 2장). 요엘서의 이 부분에 나오는 풍부한 이미지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회복이 즉각적으로 경제적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욜 2:19). 이런 구원 행위의 절정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초대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세상에 실질적이고 대단히 신비로운 방식으로 참여하는 참여자가 되게 하시려 성령이 오셨다고 이해했다.
다음으로 중요하면서도 밀접하게 연관된 요소는, 베드로가 구원을 “패역한 세대”(행 2:40)에서의 구출로 본다는 점이다.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설명해 둘 필요가 있다. 하나는 누가가 이 세상에서 도망쳐 하늘의 존재로 옮겨 가는 것을 구원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리어 구원은 바로 지금 이 세상 한복판에서 시작된다. 또한 누가는 구원이 현재 시제 구성요소를 가지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이 “패역한 세대”의 패턴에 반하는 다른 방식의 삶으로서 지금 시작되는 것이다. 일과 일의 경제 · 사회적 결과는 인간의 정체성에 너무도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처음 재편돼야할 부분 가운데 하나는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소유를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도행전의 초반부 흐름은 이렇게 흘러간다. (1)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신다. (2) 성령의 오심은 오래전 약속된 “주의 날”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새 세상으로 사람들을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3) “주의 날”에 대한 기대에는 심오한 경제적 변혁이 포함되어 있다. 누가의 다음 행동은 성령으로 능력을 받아 하나님 나라 경제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종말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기대를 크리스천들에게 맞게 바꾼 것을 “시작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이라 부르며, 흔히 이미(already) 여기에 와 있지만 아직(not yet) 완성되지는 않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하에 조직화한다. 이스라엘은 주의 날이 절정의 단계에서 올 것으로 기대했다. 초대 교인들도 주의 날이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부으심으로 시작되었으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걸 발견했다.
권력과 소유를 쓰는 법이 달라지다 (행 2:42-47; 4:32-38)
목차로 돌아가기 베드로가 성령이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하셨다는 선언을 한 후에, 사도행전은 그런 공동체가 여러 곳에서 아주 빠르게 성장해 나가는 것을 추적해 나간다. 사도행전 2장 42-47절과 4장 32-37절에 요약되어 있는 공동체가 가장 집중적으로 묘사된 공동체다. 실제로, 초대 신자들의 헌신의 범위와 그들이 함께 나눈 삶에 대한 본문의 묘사는 놀랍기 그지없다.[4] 그 둘은 상당한 유사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함께 논의해 나갈 것이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2-37).
이 본문은 직접 일을 묘사하지는 않지만, 흔히 인간이 하는 수고의 결실인 권력과 소유라는 두 실체의 배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살던 주변 사회와 비교해 볼 때, 크리스천 공동체들은 권력과 소유의 사용에서 아주 다른 풍습들을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초대 크리스천들은 각 개인이 가진 권력과 소유는 그 개인의 편안함을 위해서 비축해 둬야 하는 게 아니라, 크리스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거나 지혜롭게 투자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게 분명하다. 재화(財貨)는 타인의 선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 어떤 것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타인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첫째, 이 본문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정체성을 크리스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공동체의 유익이 각 개인 구성원들의 유익이라는 말이다. 둘째, 이것은 당시 로마제국을 특징짓고 있던 보호 경제와 근본적으로 결별하는 것이다. 보호 체계하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부자들의 선심은 체계적인 의무 구조를 만들어 낸다. 베푸는 자에게서 나오는 모든 선심은 그것을 받은 자의 사회적 부채를 내포한다. 이런 체계는 너그러운 후원자(후견인)가 그 후원에 따라오는 영예를 얻기 위한 가짜 선행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5] 한마디로, 로마 경제는 ‘너그러움’(후한 베풂)을 사회적 권력과 지위를 얻는 수단으로 봤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묘사에는 구조적으로 은혜에 대한 답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개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크리스천 공동체에서의 기부는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번영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동기가 되어 하는 것이지, 기부자의 영예를 위한 게 아니다. 베풂은 주는 사람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고, 그 혜택을 받는 사람하고 관계가 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사회 경제 체계다. 누가복음에서처럼, 사도행전도 기독교 개종은 소유와 권력에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하는 결과에 이른다고 주기적으로 입증해 나간다. 나아가 재화는 이웃을 위해 써야 한다는 이 고집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명, 무엇보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보이신 자기희생에서부터 명확하게 나타난다.
역사적 맥락 안에서 누가가 쓴 공동체에 대한 요약과 그 두 본문의 병행은 많은 글의 주제가 되어 왔다. Essene/Qumran parallels: Brian J. Capper, “The Interpretation of Acts 5.4,”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6, no. 19 (1983): 117-131쪽; Brian J. Capper, “The Palestinian Cultural Context of Earliest Christian Community of Goods,” The book of Acts in its Palestinian setting, ed. Richard J. Bauckham (Grand Rapids: Eerdmans, 1995), 323-356쪽에 수록; Greco-Roman friendship parallels: Alan C. Mitchell, “The Social Function of Friendship in Acts 2.44-47과 4.32-37,”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11, no. 2 (1992): 255-272쪽; Greco-Roman utopian parallels: Gregory E. Sterling, “ ‘Athletes of Virtue’: An Analysis of the Summaries in Acts (2.41-47; 4.32-35; 5.12-16),”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13, no. 4 (1994): 679-696쪽; parallels with Greco-Roman associations: Philip A. Harland, Associations, Synagogues, and Congregations: Creating a Place in Ancient Mediterranean Society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2003); John S. Kloppenborg, “Collegia and Thiasoi: Issues in Function, Taxonomy and Membership,” Voluntary associations in the Graeco-Roman world, ed. John S. Kloppenborg, S. G. Wilson (London: Routledge, 1996), 16-30쪽.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구제가 이런 식으로 기능하는 것은 지금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급진적 베풂 (행 2:45; 4:34-35)
목차로 돌아가기어떤 주석가들은 이 공동체의 모습을 “원시 공산주의”라고 묘사하고 또 다른 주석가들은 재화를 강제로 박탈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 등, 이 공동체들을 묘사한 성경 본문이 어느 특정 경제 체제를 옹호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크리스천 공동체를 넘어선 사회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소외된 자들로 이루어지고 사회적으로 아무 힘도 없는 하찮고 작은 집단이 거대 제국의 경제 체계를 변혁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공동체가 제국 내 경제 체계에서 완전히 분리돼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부들은 수산업 협동조합에 남아 있었고, 장인들은 여전히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6] 누구보다 바울도 자신의 선교 여행 경비 조달을 위해 장막 짓는 일을 계속해 나갔다(행18:3).
도리어 본문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암시한다. 초대 교회 안에서는 재물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from time to time”(때때로 - 행 4:34, NIV) 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행 2:45; 4:35) 자신의 재화들을 소모했다. 이것은 급진적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눠 주는 것이 각 개인의 자산 관리의 정상적인 형태라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특정한 자원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면서도, 크리스천 공동체의 용도를 위해 자신이 소유한 물질적 · 정치적 · 사회적 · 실질적 자원들을 계속해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체계적으로 부를 분배해서 평면적인 공평성을 확보하는 대신, 초대교회는 경제적 불평등의 실상을 수용했고 재화가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 유익을 위해 적절하게 존재하게 하는 급진적 베풂을 실천했다. 이런 형태의 나눔은 여러 면에서 엄격한 규칙에 얽매인 체계보다 훨씬 더 부담이 크다.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의 삶에 계속해서 관여할 것과 책임을 져줄 것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소유를 계속해서 느슨하게 잡고, 공동체 내의 관계를 소유물에서 오는 가짜 안정감보다 더 높은 가치로 볼 것을 요구한다.[7]
체계 안의 이 체계는 50년마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토지와 그 토지에서 얻은 부를 재환원해 주는(레 25:1-55) 희년의 시행이 절정을 이루는 이스라엘의 율법에 표현된 경제적 이상에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희년은 사람이면 누구나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도록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광범위하게 시행하지 않았던 하나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많은 희년의 주제를 소개하는 이사야서 61장과 58장에서 인용한 본문으로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희년의 윤리는 누가가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라”라고 말하는 사도행전 4장 34절에도 암시된다. 이 구절은 신명기 15장 4절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장으로,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는 말씀을 확고히 하기 위해 고안된 안식년(매 7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의 축소판)의 시행을 담고 있다.
크리스천 공동체가 이것을 자신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모델로 보려는 것은 적합하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안식년과 희년을 단지 각각 7년, 50년마다 한 번씩 시행해야 한 데 반해, 급진적 베풂은 초대 크리스천 공동체의 특징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산상수훈과 유사한 용어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예전에 너희는 매 50년마다 너희 토지를 토지가 없는 자들에게 돌려주라는 말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 권력과 자원들을 너희가 도울 필요가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언제든지 그들에게 내다 줄 수 있게 하여라.’ ” 다른 사람의 필요에 토대를 둔 급진적 베풂은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경제 활동의 토대가 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건들을 통해 이 점을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초대 교회의 풍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오늘날의 급진적 베풂의 모델에 대해 상상력을 펼쳐 보라고 도전한다. 급진적 베풂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며, 개인적 부와 안정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인간의 삶을 조직화하는 가능성 있는 대안을 형성할 수 있을까?
Harland, Associations, Synagogues, and Congregations: Creating a Place in Ancient Mediterranean Society; Kloppenborg, “Collegia and Thiasoi: Issues in Function, Taxonomy and Membership,” Voluntary associations in the Graeco-Roman world, 16-30쪽.
Christopher M. Hays, Luke’s Wealth Ethics: A study in Their Coherence and character, Wissenschaftliche Untersuchungen zum Neuen Testament 2.275 (Tubingen: Mohr-Siebeck, 2010)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부의 윤리를 깊게 탐구했다.
후히 베풀 능력을 부어 주시는 성령 (행 2:42-47; 4:32-38)
목차로 돌아가기 마지막 두 가지 요점은 초대 크리스천 공동체의 자원 사용과 관련해 주목해 봐야 할 중요한 것들이다. 첫째, 급진적 베풂의 실천을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하다. 사도행전 2장 42-47절과 4장 32-37절에 묘사된 공동체의 모습은 성령이 나타나신 두 번의 주요 현현 직후에 나온다.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 그리스도를 닮아 너그럽게 살고자 하는 공동체의 능력사이의 연결 고리를 누가만큼 또렷하게 보여 주는 이도 없다. 우리는 초대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서 행하신 성령의 근본적인 역사하심 중 하나가 자원의 배분과 관련해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한 공동체를 구축한 것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환상, 방언, 기타 등등) 좀 더 장엄한 성령의 나타나심을 추구하면서도, 단지 무언가를 누군가와 나누는 행동이나 또는 일관되게 환대하는 행동도 성령이 주시는 가장 장엄한 은사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둘째, 우리가 이 말씀이 오로지 재정 자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할까 봐, 베드로와 요한이 모든 자원은 다 타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증명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사도행전 3장 1-10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 앞에 있는 한 거지를 만난다. 그 거지는 돈이 하나도 없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증언이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대답한다(행 3:6). 여기서 금전적 부와 연결되지 않는 자원의 나눔에 대한 좋은 예가 나온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힘과 지위를 사용하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몇 번 나타난다.
가장 큰 감동은 재정 자원을 급진적인 너그러움으로 내놓은 모범 사례(행 4:32-37)였던 바나바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도 바울과의 교제를 꺼려할 때 그를 환영해 들임으로써 바울을 처분하는 일에 자신의 사회적 자원까지 내놓았을 때(행 9:26-27) 일어난다. 또 다른 사례는 두아디라 성안으로 바울이 들어오게 하기 위해 두아디라의 섬유 산업계에서 자신이 가진 높은 사회적 지위를 사용한 루디아다(행 16:11-15). 사회적 자본도 다른 자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 효율적으로 활용돼야 한다.
정의로운 공동체로 모여드는 사람들 (행 2:47; 6:7)
목차로 돌아가기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들을 선택한 이후에서처럼 자원들이 크리스천 공동체의 삶에서 적절히 배치될 때 그 공동체는 하나의 자석이 된다. 그 공동체의 정의로운 삶, 권력과 소유를 기본적으로 타인 중심으로 사용하는 삶은 사람들을 그 공동체 안으로, 그 공동체의 머리이신 예수님께로 끌어당긴다.
그 공동체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공동체의 소유와 특권들을 사용할 때, 개인의 자원들이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온전히 드려졌을 때, 사람들은 그 안으로 떼로 몰려든다. 우리는 이미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것’(행 2:47)을 봤었다. 그것은 사도행전 6장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한 섬김의 여파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공동체를 세우고 정의를 강화하는 일곱 집사들의 수고는 수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