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요한복음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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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은 ‘일’에 대한 고찰보다는 ‘일하는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고찰할 기회를 준다.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대신에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떠한 불만의 표시도 나타내지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물에 고기를 가득 채워 주심으로 제자들의 노동에 축복하신다.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전도자의 임무로 돌아가지만, 각자의 특정한 부르심일 뿐 고기 잡는 일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요한복음 21장의 배경과 흐름은 베드로의 회복, 베드로의 미래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 21:20)의 미래를 대비하는 구도로 진행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 무너졌던 관계를 주님은 세 번 사랑을 반복해 고백하게 하심으로 회복하신다. 본문의 시점에서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면 베드로가 겪어야 할 순교가 있고,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긴 수명을 누릴 것임을 암시하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나중 인물에 초점을 맞춰 보려 한다. 그가 자칭한 내용이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네 번째 복음서에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의 정체가 끝내 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호기심을 유발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사도 요한이라고 추정하지만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7]) 여기서 핵심은 어째서 그 제자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베일에 숨겼을까 하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제자로 표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서 전반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희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기다.

   그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은 그가 모든 제자에게 적용되는 표현인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칭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그는 단순히 이름이나 가족 관계, 직업으로 답하지 않는다. 그의 대답은 이것이다, “저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요한의 말을 빌자면 주의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요 13:23) 있는 제자였고, 마찬가지로 메시아는 “아버지 품속”(bosom)에서 정체성을 찾는다(요 1:18).[8] 우리 또한 무슨 일을 한다거나, 누구를 알고,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서 정체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릴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찌 보면 예수님을 통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 정체성의 근원이고 삶의 이유라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활동함으로 우리는 그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활동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일상의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일은 사랑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과, 또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무대가 된다. 일상의 일이 타인의 눈에 사소해 보이든, 반대로 고귀해 보이든 그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일을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는 살아 있는 비유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다.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1), 68-81쪽.

이것들은 요한복음에서 “가슴, 품, 품속”(헬라어로 kolpos)이라는 단어가 딱 두 번 쓰인 경우다. (TOW 웹사이트 원문에는 “leaning on Jesus’ bosom”[요 13:23]과 “in the bosom of the Father”[요 1:18]의 병행법을 살려 번역한 KJV 역본이 실려 있다 - 편집자 주). 대부분의 현대영어 성경 역본에서(NASB만은 예외)는 이 병행법을 빠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