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이 가까이 왔을 때, 그분은 가장 위대한 표적을 행하신다.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요11:1-44). 이미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요 8:59; 10:31) 반대파는 예수님과 나사로 모두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오자, 역설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예찬하는 말로 보이는 표현을 사용하시며 자신이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 것이라 말씀하신다(요 12:32). 그러나 요한은 그다음 구절에서, 이것이 십자가가 땅에서 들리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설명한다(요 12:33). 단순한 말장난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이 지적하듯이,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완전한 자기희생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고귀한 아들임을 완전히 드러내신다. “자비로운 자기희생의 하나님으로 정의되는 하나님의 정체성은, 그냥 드러난 게 아니라 그분 아들의 섬김과 스스로 낮추심을 통해 이루신 구원 사건에서 상연됐다.” [3]
다가오는 예수님의 자기희생 행위는 다양한 방식의 대가 지불을 뜻한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기도 하셨지만, 그에 수반된 극심한 고통과 갈증도 감내하셨다(요 19:28). (요한은 예외였지만) 사랑하는 제자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비통함을 겪어야 했고 어머니에게 자식을 잃는 큰 슬픔을 안기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요 19:26-27). 오해를 받고 누명을 쓰는 수모도 겪으셨다(요 18:19-24).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을 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지불해야 하는 대가였다. 태초에 그리스도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며,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의도대로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일 역시 공정하지 않게 느껴지는 비용을 요구할 때가 있고, 그 비용을 지불해야만 일을 마칠 수 있는 상황에 놓일 때도 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일하셨다. 일을 자기 예찬,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보여 주신 본에서 그만큼 멀어진다.
다른 사람을 위해 수행한 일에는 필연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며 (현대 서구의 기준에서) 적지 않은 연봉을 받지만 최대한 동시에 환자의 고통을 현장에서 목격하며 함께 힘들어한다. 높은 시급을 받는 탁월한 배관공일지라도 오물과 배설물을 뒤집어쓰는 일을 감수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공직에 앉은 자는 물론 모든 시민의 정의와 번영을 위해 일하지만,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가난한 자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고 그들의 어려움을 헤아려야 한다(요 12:8).
반대로 각 직업마다 타인의 고통을 같이하지 않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진통제를 투여하지 않은 환자와 대면하는 것을 최소화한다거나, 깨끗한 신축 건물에서만 배관 작업을 한다거나, 사회의 가장 취약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향한 마음을 닫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하는 것이 예수님의 행동양식을 따르는 것일까? 비록 우리가 때때로 일을 생계 수단으로 언급하지만, 긍휼한 마음이 있는 일꾼이라면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고 에이게 하느냐로 일을 정의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일한다.
Richard J.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68쪽.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