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못에서 치유받아 자리를 들고 걸어간 사람의 이야기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과 그에 뒤따른 논란을 다시 상기시킨다. 비록 논란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할지라도, 그 논란에 대한 이곳에서의 예수님의 변증은 다른 때와는 약간 다른 각도를 취한다. 길게 이어지는 예수님의 논증은 요한복음 5장 17절로 말끔하게 요약할 수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원칙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창조 세계가 지속되도록 일하시므로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도 안식일에 일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주장이 예수님만의 주장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일하심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추론 과정으로 이것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은 특별하다.
결과적으로 이 본문을 토대로 우리도 안식일에 일하는 행위의 타당성을 추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와 같은 신성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 예를 들어 도랑에 빠진 가축을 끌어내는 일은 이미 안식일에도 합법적인 행동으로 인정했다. 본문에서 그다지 큰 고통이 없는 것 같은 그 병자가 예수님을 붙잡아 뒀다가 안식일이 돼서야 치유하시게 했다고 해도, 이 이야기 속에서 치유 자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치유받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나가도록 명령한 것(유대인 율법 기준으로 자리를 드는 행위도 일에 해당하기에)을 두고 예수님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 일요일에 차를 몰고 휴양지로 이동해도 되는 것일까? 월요일 아침에 시작하는 비즈니스 회의를 위해 일요일에 비행기를 타도 되는 것일까? 제품 생산을 위해 공장을 365일 쉬지 않고 돌려도 되는 것일까?
예수님은 단순히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 목록의 범위를 넓히시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가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주제, 즉 창조 세계(물질적 · 영적 모두)를 유지하고 구속하시는 일이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일일 경우, 안식일에도 행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일이 그러한 조건을 만족하는지는 해당자가 분별해야 할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www.theologyofwork.org의 '마태복음과 일'에 나오는 "마12:1-8"과 '마가복음과 일'에서 "막1:21-45" 및 "막2:23-3:6", 그리고 '누가복음과 일'에 나오는 "눅6:1-11; 13:10-17" 을 보라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보다 중요하고 명확한 교훈은 하나님이 오늘도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시며, 예수님은 치유 사역을 통해 아버지의 일을 진척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표적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세상의 실현이다. 표적들은 “내세의 능력”(히 6:5)을 증거함과 동시에 현세를 유지하고 관리한다. 수많은 직업과 직책에 대한 패러다임이라고 봐도 매우 적절하다. 믿음으로 행해 의사, 간호사, 자동차 정비사 등의 직업인들이 하는 것처럼 부서진 것을 회복할 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 프로그래머, 교사, 예술가 등이 하는 것처럼 창조의 역량을 배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고 사람에게 주신 권세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 행하신 구속 사역과 창조, 생산의 일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선포하는 고백이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의 본래 의도를 회복하고 계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의 계획하신 목표를 이루실 것이다.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