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도 계신 하나님 (눅1, 2 및 4장)
목차로 돌아가기일터에 찾아온 가브리엘 천사 눅 1:8-25
누가복음은 일터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여호와가 일터에 나타나신 오랜 이야기의(창 2:19-20; 출 3:1-5) 연장이다. 제사장이었던 사가랴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근무날, 즉 예루살렘 성전 성소에서 성전 업무를 수행하도록 선발된 바로 그날에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는다(눅 1:8-11). 우리 중에는 성전을 일터로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곳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짐승도 잡고, 요리도 하고, 청소하고, 회계를 보고, 그 외에도 많은 일에 종사했다. 당시 성전은 단순한 종교 중심지가 아니라, 유대인의 경제생활 및 사회생활의 중심지였다. 사가랴는 여호와 하나님과 만난 뒤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증거하기 전까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상 한복판을 뚫고 들어오시다 눅 2:8-20
일터에서 하나님을 만난 또 다른 만남이 성전에서 몇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다. 들판에서 양 떼를 돌보던 한 무리의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이 방문한다(눅 2:9). 당시 목자들은 대개 평판이 좋지 않았고, 그들을 깔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그들을 돌아보셨다. 제사장 사가랴를 방문하셨던 때처럼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목자들의 일을 중단시키셨다. 누가는 여호와와 만나는 일을 주일, 수련회, 또는 선교 여행 때로 미루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휘젓는다.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든 친히 나타나실 수 있다. 마치 롯이 살던 시대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지은 것이” 그들의 성읍에 닥쳐오던 심판에 눈멀게 했듯이(눅 17:28-30), 하루하루 똑같이 돌아가는 일상은 우리의 영적 감각을 무디게 할 수 있다.[1]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심과 영광을 지니시고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의 한복판으로 뚫고 들어오실 수 있다.
왕이신 예수님 눅 1:26-56; 4:14-22
만약 두 일터의 한복판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그분의 계획을 선언하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예수님의 직무설명서와 함께 소개하는 건 더더욱 이상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녀가 아기를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할 때, 분명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하신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우리가 예수님의 직업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누가복음에 의하면 왕 되심은 틀림없이 그분의 일이었다. 왕으로서의 그분의 일은 더 자세하게 기술된다.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교만한 자를 흩으시며, 통치자들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며,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 주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며,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눅 1:51-55) 등이다. 흔히 마리아의 찬가로 불리는 이 유명한 구절들은 예수님을 정치, 경제, 어쩌면 군사 권력까지 행사하는 왕으로 그린다. 타락한 세상의 부패한 왕들과는 달리, 그분은 자신의 권력을 가장 희생되기 쉬운 자기 신하들을 위해 행사하신다. 그분은 자기 왕조를 세울 때 권력자들과 뒤가 든든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신다. 자기 백성을 압제하거나 자신의 사치스런 삶을 영위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지 않으신다. 땅이 모든 백성을 위해 좋은 것들을 내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며, 악함을 회개하는 자에겐 긍휼을 베풀어 주는 올바른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세워 나가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에 한 번도 없었던 진정 위대한 왕이시다.
나중에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이 직무설명서를 확증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이것은 정치권과 정부가 해야 할 과업이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는 적어도 예수님의 직업이 오늘날의 목회적인 직업이나 종교적인 직업보다는 정치인의 일에 훨씬 더 가깝다.[2] 예수님은 제사장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그들이 하는 역할을 대단히 존중하셨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을 제사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으셨다(눅 5:14; 17:14).
예수님이 스스로 주장하신 과업들은 궁핍한 자들에게 유익을 준다. 타락한 세상의 통치자들과 달리 그분은 가난한 자들, 갇힌 자들, 눈먼 자들, 압제당하는 자들, 빚에 허덕이는 자들(주의 은혜의 해에는 그들의 땅이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 레 25:8-13) 편에서 다스리신다. 물론 예수님의 관심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만을 위한 건 아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그분은 모든 상황, 모든 처지의 사람을 돌보신다. 그러나 그분이 특히 가난한 자들과 고난받는 자들, 힘없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은 다른 통치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비유에 나오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초청을 거절한 까닭은, 최근에 산 자기 밭(눅 14:18)과 소(눅 14:19)를 돌봐야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들은 일과 일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발견되도록 자신들을 열어 놓는 대신, 하나님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일을 활용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부르는 책들, 즉 에베소서(4:15; 5:23)와 골로새서(1:18)조차도 그분을 “만물 위의 머리”(엡 1:22, NIV),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골 2:10)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국가의 수장이시며, 만물의 머리시다. 또한 세상의 구속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즉 교회가 그 특별한 일부가 될 때도 그렇게 되실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눅5:1-11; 27-32)
목차로 돌아가기예수님은 자신을 따를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해 두 번 그들의 일터를 찾아가신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들을 찾아가 그들의 일을 중단시키고, 배를 강단으로 사용하셨을 때다. 거기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몇 가지 탁월한 고기잡이 팁을 주신 후, 갑자기 어부들을 자신의 첫 제자로 부르셨다(눅 5:1-11). 두 번째는 세금 거두는 일에 몰두하던 레위를 부르실 때였다(눅 5:27-32). 이들은 자기 직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전임 교역자들로 생각하지만, 전임 “사신”(고후 5:20)이라 부르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이들이 비록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일을 위해 부름받긴 했으나, 누가는 어떤 한 부르심(예를 들면, 설교하는 일)이 다른 부르심(고기잡이)보다 더 높은 부르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베드로, 요한, 레위같이 예수님의 몇몇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눅 5:11). 우리는 조만간 다른 사람들, 마리아와 마르다(눅 10:38-42), 또 다른 세리 삭개오(눅 19:1-10) 및 로마 군대의 백부장(눅 7:1-10)같이, 자신들의 직업 안에서 변화된 삶을 영위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또 누가복음 8장 26-39절처럼 예수님께서 그 사람더러 자기 집을 버리지 말고 그분을 따라다니지도 말라고 명령하신 경우도 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은 분명히 돈 버는 일은 그만뒀고, 필요한 것은 후원에 의존해 공급받았다(눅 9:1-6; 10:1-24). 그러나 이는 우리 직업을 버리는 것이 제자가 되는 가장 고상한 형태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이들 각 개인을 향한 특정한 소명이었으며, 우리의 모든 공급하심은 (비록 일반적으로는 직업의 형태로 우리에게 공급하시긴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다양한 직업을 유지한 채 예수님을 따른 모델도 상당히 많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www.theologyofwork.org의 '마태복음과 일' 에 나오는 “마3-4장”과 '마가복음 & 일의 신학'에 나오는 “막1:16-20” 부분을 보라. 일반적인 부르심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www.theologyofwork.org에서 "소명에 대한 개요"라는 부분을 보라.
예수님은 일터에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 가죽부대(눅 5:36-39), 어리석은 건축가와 지혜로운 건축가(눅 6:46-49), 씨 뿌리는 자(눅 8:4-15), 깨어 있는 종들(눅 12:35-40), 악한 종(눅 12:45-48), 겨자씨 (눅 13:18-19), 누룩(눅 13:20-21), 잃어버린 양(눅 15:1-7), 잃어버린 동전(눅 15:8-10), 탕자(눅 15:11-32), 악한 농부들(눅 20:9-19)을 비롯해 일터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일터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는 마치……”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되돌아오시는 장소다. 이런 단락들은 때로 일터에 대한 약간의 지침을 제공하긴 하지만, 일터 자체에 대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 것은 아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비유에 나오는 특정 배경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요점을 짚어 주시기 위해서, 일터의 여러 익숙한 측면들을 사용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일상적인 일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걸 시사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터에서 쓰는 용어로 하나님 나라를 예시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했을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 (눅3:8-14)
목차로 돌아가기누가복음의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어난 순서대로 살펴보면, 누가복음에서의 첫 번째 가르침은 비록 예수님이 아닌 세례 요한에게서 나온 것이긴 해도 바로 일에 대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라고 청중들에게 권면한다(눅 3:8). 그들이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눅 3:10, 12, 14), 요한은 종교적 해법이 아닌 경제적 해법을 준다. 먼저 세례 요한은 (두 벌 옷과 많은 식량을 가진) 소유가 넉넉한 사람들에게 가지지 못한 자들과 그것을 나누라고 말한다(눅 3:11). 그다음 그들의 직업과 연관해서 세리들과 군인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즉, 세리에게는 세금 고지서에다 금액을 부풀려서 그 차액을 챙기지 말고 부과된 금액만큼만 거두라 하고, 군인에게는 돈을 착취하거나 사람들을 무고하게 고발하는 데 힘을 쓰지 말라고 한다. 또 자기의 봉급을 족한 줄로 여기라고 한다(눅3:13-14).
세례 요한이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눅 3:13)라고 말했을 때, 그는 조직적인 불의가 깊이 뿌리내린 직업인에게 대단히 극단적인 말을 한 셈이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세금은, 공무원들과 다른 고위 관리들이 자신의 관할구역 내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해 외주를 주는 ‘세금 징수 청부’(tax farming)로 모아졌다.[3] 그 외주 계약을 따기 위해 세리들은 로마가 거두는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둬 그중 일정액을 그 담당 관리에게 상납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관리들을 위한 상납금 위에 세리 스스로를 위한 이윤이 더해진 것이 최종 액수였다. 로마의 세금이 실제로 얼마인지 백성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세리가 그들에게 부과한 금액이 얼마든지 납부해야 했다. 따라서 당시 세리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돈을 착복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정부 관리들에게 두둑한 이익을 보장하지 않고 그 계약을 따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세리들에게 세리라는 직업을 그만두라는 선택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런 상황은 누가가 “군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훈련을 받은 로마 군인이 아니라, 로마에 예속된 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에게 고용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헤롯의 군인들은 사람들을 겁주고, 착취하며,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권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꾼들에게 세례 요한이 내린 지시는 불의에 깊이 뿌리내린 시스템에 정의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타락한 세상의 통치자 밑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다는 것은 위험하고도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John Nolland, Luke 1-9:20,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1989), 150쪽. “세리들은 뇌물수수와 부패로 특정지어지는 바로 그 구조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일해야만 했다. 정직한 세리는 오늘날 일부 국가에서 관료들과 결탁하지 않고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 부딪치는 것과 똑같은 문제들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Robert H. Stein, Luke (Nashville: Broadman, 1992), 134쪽, “군인들은 아마도 로마인들이 아니고, 임무 중에 세리들을 돕는 의무가 있었던 헤롯 안디바가 고용한 유대인들일 것이다. (Josephus, Antiquities 18.5.1 [18.113] 참조) 군인들은 …… [예수님에 의해] 사직을 요구받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직무상 저지르는 죄, 곧 폭력으로 위협하는 것(직권 남용), 거짓 참소로 강도짓 하는 것, 자기 월급에 (또는 어쩌면 할당받은 그날의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등은 피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불시에 찾아오는 유혹들 (눅4:1-13)
목차로 돌아가기 예수님이 왕으로서 일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 사탄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포기하라고 예수님을 유혹했다. 예수님은 광야로 나가셨고, 거기서 40일 금식을 하셨다(눅 4:1-2). 그런 다음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부딪쳤던 것과 똑같은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하신 대답들은 전부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이야기인 신명기 6-8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공급하심보다 자기 능력을 신뢰하라는 유혹을 받으신다(눅 4:1-3; 신 8:3, 17-20).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눅 4:3). 둘째로, 예수님은 감언이설로 권력과 영광의 지름길을 제시하는 사탄에게 충성의 대상을 바꾸라는 유혹을 받으신다(눅 4:5-8; 신 6:13; 7:1-26). ‘네가 만일 나를 경배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말로 자신과 함께하는지를 의심하고, 그래서 절망해 하나님의 도움을 억지로 이끌어 내라고 유혹을 받으셨다(눅 4:9-12; 신 6:16-25).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으로써 이 유혹들을 이겨 내셨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이전의 아담과 하와도 그랬듯이) 되었어야 했지만 결코 되지 못했던,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명기 6-8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받은 유혹과 병행해서 여기 나오는 유혹들은 예수님만 받으신 것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 그분 역시 그런 것들을 경험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이스라엘처럼, 예수님처럼 우리도 똑같이 삶의 전 영역에서 그렇듯 일에서도 그런 유혹을 받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직장에서 오로지 우리 자신의 필요만 채우기 위해 일하라는 유혹은 상당히 크다. 물론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도 일하지만(살후 3:10), 자신의 필요‘만’ 채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함이기도 하다. 예수님과 달리 기적을 통해 자급하는 선택지가 우리에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월급만을 위해 일하고, 일이 어려우면 도중에 그만두고, 다른 사람과 같이 짐을 나눠지는 걸 회피하고, 일을 잘 못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바람에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지는 것을 모른 척하라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또 직장에서 지름길을 택하라는 유혹도 상당히 크다.
그중에서 가장 큰 유혹은 우리가 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의문을 품는 것일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도움을 강요하도록 시험을 받으셨다. 우리가 게을러지거나, 어리석어지거나, 하나님께서 돌봐주시길 기대할 때, 우리도 똑같은 시험에 넘어진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어떤 지위나 직업으로 부름받았으나 하나님이 직접 그 일이 일어나게 해주시길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또는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포기하라는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우리 일은 하나님께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은 우리의 교회생활에만 신경 쓰신다고 생각하거나, 하루하루 일상 활동을 도와 달라는 기도는 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매일의 일에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길 기대하셨지만, 자신을 위해 그 일을 대신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지는 않으셨다.
이 전체 이야기는 40일 금식을 위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이 시작하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엔 금식과 따로 한적한 곳에 가 기도하는 시간은 인생의 중대한 변화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 중 하나였다. 예수님은 이제 막 왕으로서의 일을 시작하실 참이었기 때문에, 그 전에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능력과 지혜를 받고 싶으셨다. 이것은 성공적이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을 때,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40일을 보내셨다. 대적하기에 충분한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금식은 그 유혹을 더욱 적나라하게 느끼게 하기도 했다. ‘그는 굶주려 있었다’(눅 4:2).
유혹은 종종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재빨라서, 우리가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찾아올 수 있다. 우리는 생산적인 직업의 사다리 맨 아래부터 출발하는 대신, ‘성공 급행열차’에 올라타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생전 처음으로 우리 자신의 약점에 정면으로 부딪쳐, 남을 속이거나 위협을 가하거나 사기를 쳐서 그 약점을 보완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내가 가진 기술로는 원하는 직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 내 본모습을 감추거나 자격을 위조해서 보여 주고 싶은 유혹에 빠질수도 있다. 시간이 좀 흐른 다음 소명에 맞는 일을 더 많이 하겠다는 허상을 핑계 삼아, ‘자리 잡을 때까지 임시로 몇 년만’ 성취감이 없지만 월급은 많은 직책을 맡을 수도 있다.
‘준비’는 유혹을 이기는 열쇠다. 유혹은 대개 경고 없이 온다. 거짓 보고서를 통과시키라는 명령을 받을 수도 있다. 내일이면 온 세상이 알게될 비밀 정보를 오늘 제공받을 수도 있다. 살짝 열려 있는 문은 당신 것이 아닌 무언가를 차지할 기회를 갑자기 제공하기도 한다. 점심시간에 동료를 험담하는 일에 끼어들라는 압박이 느닷없이 올 수도 있다. 최고의 준비는 있을 수 있는 시나리오를 ‘사전에’ 상상해, 거기 어떻게 대처할지를 놓고 미리 기도하고, 계획을 세우며, 대처 방안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글로 적어 놓는 것이다. 또 다른 보호책은 짧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서 당신이 직면한 유혹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절친한 사람들의 그룹을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행동하기 전에 그들에게 알려 준다면, 그들은 당신이 그 유혹을 견뎌 나가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부 하나님과 거룩하게 교통하셨던 예수님은 (우리가 삼위일체라고 표현하는) 그분의 공동체와 함께 유혹에 대처하셨다.
우리의 유혹은 예수님이 받으셨던 유혹과 폭넓은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존재냐는 것과 우리의 환경과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 크든 작든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유혹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삶을 뒤바꿔 놓는 결과를 초래한다. 만약 예수님이 왕으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외면하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데 평생을 낭비하거나, 악의 주인이 요구하는 걸 수행하거나, 성부 하나님이 자기 일을 대신해 주길 기다리며 주저앉아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상상해 보라.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