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자신을 따를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해 두 번 그들의 일터를 찾아가신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들을 찾아가 그들의 일을 중단시키고, 배를 강단으로 사용하셨을 때다. 거기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몇 가지 탁월한 고기잡이 팁을 주신 후, 갑자기 어부들을 자신의 첫 제자로 부르셨다(눅 5:1-11). 두 번째는 세금 거두는 일에 몰두하던 레위를 부르실 때였다(눅 5:27-32). 이들은 자기 직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전임 교역자들로 생각하지만, 전임 “사신”(고후 5:20)이라 부르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이들이 비록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일을 위해 부름받긴 했으나, 누가는 어떤 한 부르심(예를 들면, 설교하는 일)이 다른 부르심(고기잡이)보다 더 높은 부르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베드로, 요한, 레위같이 예수님의 몇몇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눅 5:11). 우리는 조만간 다른 사람들, 마리아와 마르다(눅 10:38-42), 또 다른 세리 삭개오(눅 19:1-10) 및 로마 군대의 백부장(눅 7:1-10)같이, 자신들의 직업 안에서 변화된 삶을 영위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또 누가복음 8장 26-39절처럼 예수님께서 그 사람더러 자기 집을 버리지 말고 그분을 따라다니지도 말라고 명령하신 경우도 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은 분명히 돈 버는 일은 그만뒀고, 필요한 것은 후원에 의존해 공급받았다(눅 9:1-6; 10:1-24). 그러나 이는 우리 직업을 버리는 것이 제자가 되는 가장 고상한 형태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이들 각 개인을 향한 특정한 소명이었으며, 우리의 모든 공급하심은 (비록 일반적으로는 직업의 형태로 우리에게 공급하시긴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다양한 직업을 유지한 채 예수님을 따른 모델도 상당히 많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www.theologyofwork.org의 '마태복음과 일' 에 나오는 “마3-4장”과 '마가복음 & 일의 신학'에 나오는 “막1:16-20” 부분을 보라. 일반적인 부르심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www.theologyofwork.org에서 "소명에 대한 개요"라는 부분을 보라.
예수님은 일터에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 가죽부대(눅 5:36-39), 어리석은 건축가와 지혜로운 건축가(눅 6:46-49), 씨 뿌리는 자(눅 8:4-15), 깨어 있는 종들(눅 12:35-40), 악한 종(눅 12:45-48), 겨자씨 (눅 13:18-19), 누룩(눅 13:20-21), 잃어버린 양(눅 15:1-7), 잃어버린 동전(눅 15:8-10), 탕자(눅 15:11-32), 악한 농부들(눅 20:9-19)을 비롯해 일터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일터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는 마치……”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되돌아오시는 장소다. 이런 단락들은 때로 일터에 대한 약간의 지침을 제공하긴 하지만, 일터 자체에 대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 것은 아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비유에 나오는 특정 배경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요점을 짚어 주시기 위해서, 일터의 여러 익숙한 측면들을 사용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일상적인 일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걸 시사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터에서 쓰는 용어로 하나님 나라를 예시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했을 것이다.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