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종으로 사는가 (막 10:17-22)
목차로 돌아가기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을 던진 한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만남은 마가복음에서 경제활동을 직접 다룬 몇 안 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다. 그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은 십계명에서 가장 사회적 경향이 짙은 여섯 가지 계명을 열거하신다. 흥미롭게도 “탐내지 말라”(출20:17; 신 5:21)라는 계명이 “속여 빼앗지 말라”라는 명확한 상업적 부정행위의 형태로 제시된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이것[모든 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20)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청년의 재물을 희생하고 갈릴리에서 온 방랑자를 따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하늘의 재물이 그에게 아직 부족하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 부자 청년이 넘을 수 없는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부자 청년은 엄청나게 많은 그의 소유가 제공하는 안락함과 안정감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가복음 10장 22절은 그 상황의 감정적 차원을 강조한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주는 진리에 열려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살아갈 능력은 없었기에 정서적인 불편을 느꼈던 것이다. 부와 지위에 대한 그의 정서적 애착이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려는 의지를 눌러 버린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의 일에 적용하는 건, 우리 자신의 본능과 가치관과 관련해 진정한 민감함과 정직함이 요구된다. 부는 때로 우리가 한 일이든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든 일의 결과지만, 일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정서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그 부자 청년이 그랬던 것처럼 상당한 지위가 있다면, 우리의 경력 관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거나, 선을 행하거나, 가족을 위해서나 시민으로서 또 영성생활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예상치 않은 때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 마음을 열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도 있다.
우리의 부와 특권이 우리를 거만하게 만들거나, 우리 주변 사람들을 향해 무감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런 어려움은 물론 부와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만남은, 만일 당신이 이미 조직이나 사회의 상층부에 있다면, 당신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을 먹기가 어렵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서구에 살면서 소박한 생계 수단과 지위를 가진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전에, 혹시 우리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상대적인 부와 지위 때문에 그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냉철하게 물어보자.
이 에피소드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결정적인 측면이 남아 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막 10:21). 예수님의 목적은 그 청년에게 수치를 주거나 말로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그를 사랑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그 청년의 유익을 위해서, 제일 먼저 그의 소유를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부와 일이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끊어지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게 할 때, 정작 고난을 겪는 사람은 바로 우리다. 해결책은 더 선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삶에 정말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며, 안전을 위해 우리의 지위나 부를 안간힘을 다해 꼭 붙들 필요가 없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비유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이 책 3장의 “눅 18:18-30” 부분을 보라.
‘지위’의 종으로 사는가 (막10:13-16, 22)
목차로 돌아가기 마가가 이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는 독특한 점이 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어린아이들 이야기와 나란히 놓여 있으며, 그런 어린아이와 같이 천국을 받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그다음 진술이다(막 10:13-16). 이 두 단락을 연결해 주는 것은 아마도 안전이나 하나님보다 재정적인 자원에 더 의존하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도리어 그 연결점은 지위의 문제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지위가 없었거나, 기껏해야 최하층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18]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지위를 말해 주는 그 어떤 재산도 소유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아이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 부자 청년은 그 지위의 상징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재산도 엄청났다(막10:22). 누가복음 18장 18절은 그가 “관리”였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 부자 청년이 천국을 놓친 것은, 그가 ‘부’의 종이었던 만큼 ‘지위’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직장에서 지위와 부는 같이 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기 일을 통해 부와 지위가 동시에 늘어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이중 경고다. 설령 부는 경건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위의 종에서 탈출하기는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최근에 한 그룹의 억만장자들이 자신들의 재산 중 최소한 절반은 기부하겠다고 맹세해 대중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19] 물론 그들의 자선은 놀라운 것이며, 그렇게 맹세한 사람들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비난하고 싶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 정도로 기부의 가치를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절반 이상을 기부하진 않는 걸까? 그들이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고 남은 돈도 여전히 아주 안락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보다는 훨씬 더 많다. 기부자들이 너무도 명백하게 중요한 목적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치는 데, ‘억만장자라는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장애물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소박한 삶을 사는 직장인들은 그 면에서 다를까? 지위를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더욱더 많이 바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지위가 부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학자, 정치가, 목회자, 예술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반드시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닐 수 있지만, 나름 훌륭한 지위는 얻을 수 있다. 지위는 어떤 특정 대학에서 일하거나 평판이 자자한 어떤 인맥 안에 있다는 것에서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지위는, 우리가 인기 없는 입장을 취하거나 결실이 더 많은 일자리로 이직함으로써 우리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걸 막아 주는 또 하나의 종살이가 아닐까?
자신과 여러모로 다른 누군가를 섬기고, 불의를 줄여 나가며, 도덕적 청렴함을 지키고,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보기 위해, (아주 약간일지라도) 일과 관련된 자기 지위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게 사실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예수님은 이런 모든 지위를 가지고 계셨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셨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지위를 제쳐 놓기 위해, ‘아버지’께 날마다 기도하시고, 아무런 평판도 없는 사람들 속으로 자신을 계속 밀어 넣으시며, 그렇게 열심히 일하신 이유일지 모른다.
Malina, Rohrbaugh, A Social-Scientific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238쪽. “어린아이들은 지역 사회나 가족 안에서 지위가 거의 없었다. 아주 어린아이는 노예나 다를 바 없었고 자란 이후에야 가족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어린아이/어린아이들’이라는 용어는 아주 심한 욕으로도 쓰였다”(마 11:16-17 참조).
Stephanie Strom, “Pledge to Give Away Half Gains Billionaire Adherents,” New York Times, August 4, 2010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복 (막10:23-31)
목차로 돌아가기 그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막 10:23-25)에는 뜻밖의 만남(encounter)이 중요함을 상세히 다룬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부(富)가 얼마나 까다로운 걸림돌인지 강조하신다. 부자 청년의 반응은 부자들이 자신의 부와 그 부에 따라오는 지위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데, 의미심장한 것은 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제자들이 도리어 어리둥절해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24절에서 예수님이 그 진술을 되풀이하실 때제자들을 “얘들아”(children)라고 부르시면서, 제자들이 지위의 부담을 지고 있지 않음을 말씀하신다. 이미 그분을 따라나섰기에 제자들은 부요함에서 오는 부담에서 벗어나 있었다.
예수님이 하신 낙타와 바늘귀 비유(막 10:25)는 아마도 예루살렘의 작은 문들[20]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다만 낙타를 뜻하는 헬라어 ‘Kamelos[카멜로스]’와 굵은 밧줄을 나타내는 헬라어 ‘Kamilos[카밀로스]’ 사이의 유사성을 이용한 언어유희적인 표현일 수 있다. 의도성이 담긴 우스꽝스런 이미지는 부자가 하늘의 도움 없이 구원받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왜 그럴까?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막 10:26). 그런 하늘의 도움에 대한 약속이 마가복음 10장 27절에 밝혀져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것은 그 단락이 (바라건대 독자인 우리도) 부자들을 향해 단순히 냉소해 버리지 않도록 방지한다.
이에 베드로는 제자들의 태도와 자기 부인에 대한 과거를 변호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걸 버렸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희생을 한 모든 사람을 기다리는 하늘의 상급을 확증해 주신다. 되풀이 하거니와, 그들이 버린 것(“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 지위에 대한 의미도 내포할 것이다. 실제로 마가복음 10장 31절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모아 지위에 대해 힘주어 강조한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시점 전까지의 설명은 물건들 그 자체에 대한, 또는 그런 것이 제공해 주는 지위에 대한 사랑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말씀은 확고하게 지위 문제를 강조한다.
얼마 안 있어서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한 직장 용어로써 선언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4). 결국 종은 지위 없이 그냥 일하는 사람이며, 심지어는 일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의 능력을 가질 지위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갖는 바른 지위는 어린이나 종처럼 전혀 지위가 없는 처지다. 혹 우리가 고위 직책이나 권세의 지위를 가졌다 해도, 우리는 그런 직책과 권세를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변할 뿐, 그분께만 속한 지위를 취하지 않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
이것은 널리 알려져 있던 크리스천 분파들 사이에서 회자된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그가 쓴 Daily Study Bible Commentary에서 이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William Barclay, The Gospel of Matthew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253쪽을 보라. 이 신화의 기원이 어떤 것들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런 문이 예루살렘이나 다른 어느 곳에서 발견된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다.
교회를 내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위험 (막11:15-18)
목차로 돌아가기 예수님이 성전에서 좌판을 뒤집어엎고, 환전상들을 쫓아내신 사건은 상업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이 행동에 담긴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개별 복음서의 설명으로 보건, 역사적 예수라는 전통으로 보건, 논란이 있다.[21] 분명히 예수님은 제사에 쓰일 정결한 짐승과 새들을 팔고 있었든지, 아니면 성전세를 내기 위해 적정한 비율로 동전을 바꾸고 있었든지 간에,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과격하게 쫓아내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거의 강도나 다름없는 환율로 사람들을 착취하던, 성전세를 내러 온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던 사람들에게 항거한 것이었다고 풀이한다.[22] 한편에서는 그것이 매년 내는 반 세겔 성전세를 거부한 것이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23] 또 다가오는 성전의 파괴에 대한 그림자로서, 성전에서의 절차를 종료시키는 예언적인 표적의 행위라는 견해도 있다.[24]
우리가 그 성전을 오늘날의 환경하에 놓인 교회라고 가정해 본다면, 교회와 아무 연관 없는 일에 대해서도 다루는 이 책의 범주를 대부분 벗어난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 사건이 교회를 자기의 이익을 얻는 안전한 일터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미한 빛을 던져 준다는 걸 주목해 볼 수 있다.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사업상의 직책을 얻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거나 교회에 나오는 것은, 공동체에 상업적으로 손해를 끼치고 개개인에게도 영적으로 해롭다.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교회 안에서 더 나은 직장인(일하는 사람)이 되도록 서로 돕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만약 교회가 상업적 도구가 된다면, 교회의 정직함은 손상되고 교회가 하는 증언이 흐려질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N. T.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London: SPCK, 1996), 413-428쪽. 그리고 좀 더 최근에는 J. Klawans, Purity, Sacrifice and the Temple: Symbolism and Supersessionism in the Study of Ancient Juda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213-245쪽.
Craig A. Evans, “Jesus’ Action in the Temple,” C. A. Evans, B. Chilton, eds., Jesus in
Context: Temple, Purity and Restoration (Leiden: Brill, 1997), 395-440쪽, 특히 419-428쪽에서 에반스는 당시 제사장들이 광범위하게 탐욕스럽고 부패한 상태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종류의 증거를 조사해 제시한다. 에반스의 주장은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1985), 61-76쪽 내용을 반박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에반스의 주장이 Klawans, Purity, Sacrifice and the Temple, 225-229쪽에서 도전을 받는다.
R. J. Bauckham, “Jesus’ Demonstration the Temple,” B. Lindars, ed., Law and Religion: Essays on the Place of the Law in Israel and Early Christianity (Cambridge: James Clarke, 1988), 72-89쪽, 특히 73-74쪽.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413-428쪽; Sander, Jesus and Judaism, 61-76쪽.
돈도 세상 통치자도 하나님께 속했다 (막12:13-17)
목차로 돌아가기 납세 문제는 앞서 세리였던 레위를 부르셨던 장면에서 이미 간접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막 2:13-17). 논리를 따져 봤을 때 그 본문의 의미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번 장에서는 그 문제를 좀 더 직접 다룬다. 여기서 묘사된 사건 전체가 하나의 함정으로 제시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의 과세를 정당한 것으로 확증한다면, 그분은 자기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과세를 거부한다면, 그분은 반역죄로 몰릴 것이다. 세금 사건이 바로 그 같이 특정한 상황에 기초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단락을 이런 상황과 닮지 않은 오늘날 상황에 적용하려면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 함정을 형상과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빠져나가신다. 흔한 데나리온(기본적으로 하루치 일당) 동전을 자세히 관찰하신 예수님은 그 동전에 누구의 “형상”(또는 “모습”)이 새겨져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 질문의 요지는 어쩌면 대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창세기 1장 26-27절(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을 넌지시 암시할 수도 있다. 동전엔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황제의 것(돈)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우리 자신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지녔다는 핵심적인 요소는 진술되어 있지 않지만, 그 주장하는 논리 안에 어우러진 대구법에 의해 분명히 암시되어있다.
그런 논리를 펴심으로써 예수님은 납세 문제를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더 큰 요구 아래에 종속시키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납세의 타당성을 부인하신 게 아니며, 심지어 잠재적으로 남용될 가능성이 있는 로마제국의 시스템도 무너뜨리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돈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으신다. 만약 돈이 가이사에게 속해 있다 치더라도 가이사 역시 하나님의 권세 아래 속해 있기 때문에(롬13:1-7; 벧전 2:13-14) 돈은 더욱 하나님께 속한다. 이 단락은 흔히 말하듯 사업은 사업이고, 종교는 종교일 뿐이라는 잘못된 주장의 근거가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성과 속을 구분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는 일엔 전혀 신경 쓰시지 않는 것처럼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예수님을 따를 순 없다. 예수님은 당신이 직장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면허를 선언하시는 게 아니라,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안을 선언하신다. 당신이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속일지 말지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으므로(막 10:19), 속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세금을 낼지 말지는 국민의 한 사람인 당신이 조정할 수 없는 사안이기에(막 12:17),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만약 당신이 당신의 세금을 통제(혹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경우, 예를 들어 당신이 로마 원로원의 위원이라든가, 또는 21세기의 민주주의 유권자라 할 때 당신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게 아니다.
이 사건은 www.theologyofwork.org의 '누가복음과 일'에 나오는 “눅20:20-26”부분을 보라.
우리 일, 지상대계명에 순종할 기회 (막 12:28-34)
목차로 돌아가기예수님이 성경을 탁월하게 해석하시는 것을 지켜본 한 서기관이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던 문제를 여쭈었다.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당시 청중이 이미 잘 알고 있을 두 계명으로 대답하신다. 첫째는 유대 민족에게 주신 선언으로 신명기 6장 5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어서 예수님은 “둘째는 이것이니” 라고 바로 덧붙이신다.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다.(이 두 계명의 관계를 더 살피고 싶다면 이 책 1장 “마 22:34-40”과 3장 “눅 10:25-37” 부분을 보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하게 될 것이다. ( 이 시리즈 1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모세오경 · 역사서》 4장의 “레 19:17-18” 부분을 보라.)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은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알려 준다. 하나님이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집중하기 원하시는 과업을 둘만 꼽으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네 자신과 같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기를 바라심도 드러내셨다.
감사하게도, 일은 우리가 지상대계명에 응답하는 주요한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가 많다. 그리스도인의 많은 직업은 다른 사람의 기본 필요를 채워 줄 기회가 된다. 의료서비스를 예로 들어 보자. 처방전을 써 주는 의사, 처방전대로 약을 조제하는 약사, 약국과 편의점에 약품을 비치하는 사람 모두가 이웃에게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전달하는 일에 각기 역할을 담당한다. 의약품 공급망의 위아래를 훑어보면 약이나 치료법의 효과를 시험하는 과학자, 의료품이 운송되는 도로를 유지하는 건설노동자, 건강보험 청구 내용을 처리하는 사무직원, 이 모두가 이웃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이웃 사랑에 참여한다.
물론 인간이 필요한 것은 의료서비스외에도 많다. 음식, 거처, 웃음도 있어야 한다. 자신보다 큰 의미와 이어지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농부와 식당 종업원, 주택건설업자, 보험설계사, 희극 배우와 아이들, 철학자와 목회자 모두가 자기 일을 매일 잘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교차로를 쌩쌩 달리는 차량의 브레이크를 최근에 손본 정비공의 사랑의 수고는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의 목숨을 좌우한다.
일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가족의 재정적 필요를 채운다. 이것도 일로써 지상대계명을 성취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의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사랑하는 것인데, 이것은 로렌스 수사 같은 지혜로운 이들의 삶으로 널리 알려진 방식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함으로써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큰 구원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시장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길 원하시는지 보여 준다. 많은 산업과 일터에는 구원받고 회복되어야 할 문제들이 있다. 크리스천 일꾼은 용서와 긍휼과 정직의 본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건, 우리는 지상대계명을 이루는 두 부분의 순서를 꼭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고, 이웃 사랑은 두 번째다. 도로시 세이어즈가 말한 대로, “두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에 의존한다. 첫 번째 계명이 없는 두 번째 계명은 망상이고 덫이다. …… 이웃을 첫째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보다 인간을 우선시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우리가 인류를 숭배하고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기 시작한 이래 죽 해오던 일이다. ……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하는 일에는 역설이 있다. 공동체를 섬기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으면 일이 그릇되고 만다. 공동체를 섬길 유일한 길은 공동체는 잊고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25]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이것은 우리는 진정한 일,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을 감당함으로써 이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 일은 우리의 이웃인 고객, 손님, 동료, 공급자가 우리에게 원하는 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직장 동료는 우리가 그들의 일을 대신해 줌으로써 그들을 섬기길 바라는 반면, 하나님은 그들이 그 일을 스스로 감당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그들을 섬기기를 원하실 수도 있다. 고객은 최저가에 제품을 공급받기 원하는 반면, 하나님은 좀 더 높은 가격의 물건이 고객은 물론이고 환경과 사회에도 더 나은 이유를 고객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실 수도 있다. 지상대계명의 전반부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굳건한 토대에 우리 발을 딛게 한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써 다른 이를 위해 일해야 한다.
서기관은 자신의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신 것을 듣고 예수님의 우선순위가 옳다고 동의한다. 서기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유대교 율법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계명들보다 참으로 더 중요하다고 공감한다. 예수님은 그 서기관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응답하신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지상대계명의 기준에 맞추어 행동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자기 몸을 돌보듯 다른 이를 돌볼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 일터에 임한다.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