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을 던진 한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만남은 마가복음에서 경제활동을 직접 다룬 몇 안 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다. 그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은 십계명에서 가장 사회적 경향이 짙은 여섯 가지 계명을 열거하신다. 흥미롭게도 “탐내지 말라”(출20:17; 신 5:21)라는 계명이 “속여 빼앗지 말라”라는 명확한 상업적 부정행위의 형태로 제시된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이것[모든 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20)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청년의 재물을 희생하고 갈릴리에서 온 방랑자를 따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하늘의 재물이 그에게 아직 부족하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 부자 청년이 넘을 수 없는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부자 청년은 엄청나게 많은 그의 소유가 제공하는 안락함과 안정감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가복음 10장 22절은 그 상황의 감정적 차원을 강조한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주는 진리에 열려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살아갈 능력은 없었기에 정서적인 불편을 느꼈던 것이다. 부와 지위에 대한 그의 정서적 애착이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려는 의지를 눌러 버린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의 일에 적용하는 건, 우리 자신의 본능과 가치관과 관련해 진정한 민감함과 정직함이 요구된다. 부는 때로 우리가 한 일이든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든 일의 결과지만, 일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정서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그 부자 청년이 그랬던 것처럼 상당한 지위가 있다면, 우리의 경력 관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거나, 선을 행하거나, 가족을 위해서나 시민으로서 또 영성생활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예상치 않은 때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 마음을 열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도 있다.
우리의 부와 특권이 우리를 거만하게 만들거나, 우리 주변 사람들을 향해 무감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런 어려움은 물론 부와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만남은, 만일 당신이 이미 조직이나 사회의 상층부에 있다면, 당신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을 먹기가 어렵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서구에 살면서 소박한 생계 수단과 지위를 가진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전에, 혹시 우리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상대적인 부와 지위 때문에 그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냉철하게 물어보자.
이 에피소드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결정적인 측면이 남아 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막 10:21). 예수님의 목적은 그 청년에게 수치를 주거나 말로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그를 사랑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그 청년의 유익을 위해서, 제일 먼저 그의 소유를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부와 일이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끊어지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게 할 때, 정작 고난을 겪는 사람은 바로 우리다. 해결책은 더 선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삶에 정말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며, 안전을 위해 우리의 지위나 부를 안간힘을 다해 꼭 붙들 필요가 없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비유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이 책 3장의 “눅 18:18-30” 부분을 보라.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