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설교와 예수님의 세례 및 시험에 대한 이야기에는 일을 언급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향해 가는 관문으로서의 그 이야기들은 뒤에 나오는 모든 주제 문맥의 기초를 제공하며, 우리가 일이라는 관심사에 보다 더 분명하게 적용 가능한 본문을 향해 움직여 나갈 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가가 마가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제목을 붙인 사실이다(막 1:1). 내러티브 관점에서 볼 때, 시작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인상적이다. 마가복음은 끝이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초기 사본에서는 그 복음이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라는 구절에서 갑자기 끝난다. 본문이 너무도 갑자기 끝나는 바람에 필사가들이 신약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마가복음 16장 9-20절의 내용을 구성해 넣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쩌면 마가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복음서에 끝이 없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마가복음을 읽는 우리가 계속되는 그 복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 삶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사건들의 직접적인 연속이요, 우리에겐 그것을 우리 일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길 기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2]
우리는 앞으로, 마가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묘사할 때 항상 완전과는 아주 거리가 먼 초보자로 묘사한다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이는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다.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마가복음은 이 사도들을 둔하고, 무지하며, 계속해서 예수님을 실망시키는 사람들로 그린다. 이것이 우리에게 상당히 위로가 된다. 직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애쓰는 상당히 많은 크리스천이,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도 부적합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마가는 우릴 격려한다. 이 점에선 열두 제자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으니, 용기를 내라고 말이다.
세례 요한(막 1:2-11)은 말라기 3장 1절과 이사야 40장 3절에 나오는 ‘주의 사자’로 묘사된다. 세례 요한은 “주”의 오심을 선포한다. 이 표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막 1:1)로 지칭한 것과 함께,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를 독자들에게 또렷하게 나타내 준다. 다만 예수님은 마가복음 1장 15절까지 기다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복음”(good news)과 연결시켜 사용하신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성령님의 변화시키는 역사를 통해, 사람과 여러 민족들이 하나님의 법 아래서 따르게 될 주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세례와 시험(막 1:9-13)에 대한 마가의 간략한 묘사에 강조되어 있다. 그 짤막한 묘사는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시며, 예수님이 사탄에 의한 시험을 받도록(아마도 그 시험을 극복하시도록) 몰아가시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단락은 두 가지 상반되면서도 널리 알려진 하나님 나라 개념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한 가지 개념은, 하나님 나라는 아직 실존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친히 다스릴 때에야 비로소 실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견해로 보면 직장은, 세상의 다른 어떤 곳과 마찬가지로 원수의 영토다. 크리스천이 할 일은, 이 세상이라는 적의 영토에서 전도 할 정도로 생존하고, 개인의 필요를 채우며, 교회에 헌금할 만큼만 이득을 내면 된다. 다른 하나의 개념은, 하나님 나라가 내면적이고 영적인 영역이어서, 우리 주변의 세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서 보면, 크리스천이 교회에서의 시간과 개별 기도 시간을 제외하고 직장이나 다른 어떤 곳에서 하는 일은 전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두 견해 모두를 반대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땅에 현재적 실체로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나님 나라는 물론 현재 실현된 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이 땅을 다스리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까지는 그러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지금 여기에 와 있으며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분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우리 주변의 세상에 대단히 실질적인 결과들을 가져온다. 그것은 우리로 사회적 불명예나 갈등에 휘말리게 할 수도 있고, 또 고난을 당하게 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 4장 12절처럼, 마가복음 1장 14절도 요한이 투옥된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이 투옥 사건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5)라고 직접 선포하신 시작과 연결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권력에 맞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복음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반드시 이생에서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또렷이 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에 나타나 있듯이(막 1:23-34, 40-45), 성령의 능력으로 주변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성령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는 나중에 바알세불 논쟁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막 3:20-30). 이것은 어려운 부분이므로 아주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에 대한 우리 신학을 뒷받침하는 하나님 나라 신학에 분명히 중요하다. 이 단락은 귀신을 쫓아 냄으로써, 예수님이 ‘강하지만 이제는 결박당한’ 사탄에게서 이 세상을 실제로 해방시키셨음을 보여 준다. 크리스천은 우리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세상에서 도망치거나 세상에 순응하는 대신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J. David Hester, “Dramatic Inconclusion: Irony and the Narrative Rhetoric of the Ending of Mark,”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17 (1995), 61-86쪽.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