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과연 일의 신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기 전에는 스스로 일해 먹고살 능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주변 사람의 은혜와 긍휼에 의지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친구들의 믿음에 깊은 인상을 받으신다. 일에서 오는 재정적 보상과 관계적 보상을 모두 배제한 채, 누군가에게 돌봄과 긍휼과 우정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 그들의 믿음엔 행함(doing)과 존재됨(being)의 구분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노력을 집단의 믿음의 행위로 보신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안타깝게도 믿음의 공동체는 현대 서구 크리스천의 직장생활에서는 사라지다시피 하여 작은 역할만 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직장생활을 위한 도움과 격려를 교회에서 받긴 하지만, 그것은 거의 개인적인 도움과 격려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함께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과 같이 일했다. 그래서 교회는 일자리를 나눠 가진 근로자들, 농부들, 집안 식구들에게 쉽게 성경을 적용시킬 수가 있었다. 반면 오늘날 서구 크리스천들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과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물론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경우는 많다. 따라서 그들이 일에서 부딪치는 도전과 기회들을, 비슷한 직업을 가진 다른 신자들과 나눌 기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크리스천 근로자들을 위해 서로를 지원하고 함께 성장하며 얼마간의 업무연관성도 있는 크리스천 공동체를 개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마가복음 2장 3-12절에서 핵심으로 다루는 믿음의 공동체적 본질을 놓치게 된다.
이 짧은 일화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관찰한다. 첫째, 일은 일을 통해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신을 부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주려는 의도가 있다. 둘째, 믿음과 일은 존재됨과 행함처럼 분리될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힘으로 행하는 활동에 통합되어 있다. 셋째, 믿음으로 행해진 일은 그것을 지지해 줄 믿음의 공동체가 절실히 필요하다.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