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 글에서 안식일이 예수님의 일상생활에 녹아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바 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간에 일어난 충돌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바리새인에게 안식일은 애당초 부정적인 용어로 정의되어 있었다. 그들은 “율법에 일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는 것들이(출20:8-11; 신 5:12-15) 어떤 것들이냐?”라고 질문한다.[13] 바리새인에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사소한 행위까지도 일종의 일이었으며, 금지 명령을 무시한 것으로 보았다. 제4계명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토라(율법)에는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행위를 율법에 안 맞는 “하지 못할 일”(막 2:24)로 묘사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 해석만이 권위 있고 구속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지, 자신들이 틀렸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이 더욱 반발한 것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인데(막 3:1-6),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게 만드는 핵심 사건으로 그려져 있다.
바리새인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셨다. 일에서 해방되는 안식일은 인류의 선을 위한 선물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더 나아가 안식일은 긍휼과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제공한다. 안식일에 대한 그런 관점은 예언적인 멋진 선례가 있다. 이사야 58장은 안식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의 긍휼 및 사회적 정의와 연결시켜 주며,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사 58:13-14) 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긍휼, 공의, 안식일을나란히 놓는 것은 안식일이 긍휼과 공의를 보여 줌으로써 가장 온전하게 예배하는 날로 사용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안식일 그 자체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기억하는 것이다(신 5:15).
첫 안식일 논쟁 기록은 제자들이 곡식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 때문에 촉발되었다(막 2:23-28).[14] 마태는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는 내용을 덧붙이고, 누가는 제자들이 그 이삭을 먹기 전에 손바닥으로 비비는 행위를 묘사하는 반면에, 마가는 그냥 그들이 이삭을 잘랐다고만 서술하는데, 그것은 그 행동의 우발적 성격을 전달해 준다. 제자들은 아마도 별생각 없이 그 곡식을 잘라서 조금씩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변호는 얼핏 보면 이상해 보이는데, 그것은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막 2:25-26).
학자들은 예수님의 주장이 어떻게 유대인의 성경 해석과 논쟁 원칙을 따르는지에 대해, 심지어는 과연 그것이 그 원칙을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15] 그 핵심은 ‘거룩’의 개념을 인식하는 차이에 있다. 안식일과 성전(그 안의 내용물들과 함께)은 모두 성경에서 “거룩한것”으로 묘사된다.[16] 안식일은 거룩한 시간이요, 성전은 거룩한 공간이지만, 한쪽의 거룩함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교훈들은 다른 쪽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요점은, 성전의 거룩함이 긍휼과 공의의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땅의 거룩한 공간들은 ‘세상에 맞선 거룩함’의 피난처가 아니라, 세상을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 장소들이다.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해 둔 장소는 근본적으로 공의와 긍휼의 장소이다. “안식일[그리고 그것이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성전]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이 사건에 대한 마태의 기록에는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 12:7)라는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좀 더 유보적으로 다루는 요점을 마태복음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똑같은 요점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사람을 고치셨을때 일어난 두 번째 안식일 논쟁에서 그대로 재연된다(막 3:1-6). 예수님이하신 핵심 질문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아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안식일이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에 의해 귀하게 여겨진다는 점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일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안식일 원칙은 우리가 일정한 시간을 따로 성별해 그 시간을 업무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서, 그 시간이 예배라는 독특한 성격을 갖게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안식일이 예배드리는 유일한 시간이라거나, 일 그 자체는 예배의 한 형태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안식일의 본질은, 일주일 내내 일할 경우와는 확실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주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면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는 그 자체로 사회적인 긍휼, 돌봄, 사랑으로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여유를 준다는 사실이다. 안식일에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주중에 우리가 하는 일에 향기와 맛을 더해 준다.
안식일에 대한 크리스천의 단일한 관점은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 책의 3장 “눅 6:1-11; 13:10-17” 부분에서 다소 다른 관점도 살펴보고 있다.
이 점에서는 랍비 전통이 널리 퍼져 있다. m. Sabb 7:2 and m. Besah 5:2를 보라.
Lutz Doering, “Sabbath Laws in the New Testament Gospels,” ed. F. García Martínez and P. J. Tomson, The New Testament and Rabbinic Literature (Leiden/New York: Brill, 2009), 208-220쪽.
Guelich, Mark 1-8:26, 121-130쪽.
출애굽기 31장 14-15절에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라는 말씀을 그대로 따오고, 하나님이 친히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출 20:11)는 것을 인정하면서 안식일은 거룩한 것으로 언급된다. 이 ‘거룩함’이라는 개념은 ‘거룩한 것’으로 해 오던 성전(예를 들면, 시 5:7; 11:4)과 안식일을 연결시키고 있고, 그 핵심엔 당연히 ‘지성소’가 있다.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