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하나님의 은혜가 화목과 공의를 가져오기 위해 세상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세상에는 생명을 주는 하나님 은혜의 능력에 대적하는 악한 영적 세력들이 여전히 있다(롬 6:4). 바울은 이런 악한 영적 세력들을 “죄”(롬 6:2) “육신”(롬 7:5) “사망”(롬 6:9) 또는 “이 세대”(롬 12:2)라고 부르며 종종 의인화한다. 인간은 일상의 삶에서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거쳐 하나님과 협력을 하든지, 아니면 이들 악한 영적 세력들과 협력을 하든지 선택해야만 한다.
바울은 “새 생명 안에서 행함으로”(롬 6:4) 하나님과 협력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그는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을 죽음에서 살아나신 후의 그리스도의 새 생명과 비교한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듯이, 우리는 화목과 의로움 안에서 살아가기(또는 ‘행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는 건 우리의 판단주의를 포기하고, 우리 자신을 섬기려는 습관들을 헤아리지 말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라고 요구한다 (롬 6:12-13). 하나님의 의의 도구인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진 생명을 주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과 공동체를 세워 간다. 이는 단순히 나쁜 행위를 삼가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방법이다. 우리 부르심을 받아 일꾼이 되어 고통당하는 세상에서 죄의 영향력들을 뿌리 뽑기 위해 일함으로써 의와 화목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원들은 경영을 악하거나 불공평한 것으로 판단하는 나쁜 습관에 빠질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전자의 경우, 사원들이 월급을 받고 일하는 시간을 개인 용도로 소모하거나 업무를 탁월하게 해내지 못함으로써 회사를 속이는 데 편리한 핑계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경영진에게는 개인적으로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원들을 차별하거나, 작업장의 안전이나 평등 규정을 위반하거나, 아니면 사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규정을 따르거나 아니면 속이지 않는 것만으로는 새 생명으로 행하는 게 아닐 수 있다. 도리어 새 생명으로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다른 편 판단하는 일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일단 우리가 ‘더 이상 그들은 우리가 존중할 대상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버리면, 그때 우리는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를 공평하고 정당하게 대하는 관계를 재확립해 더불어서 조직을 세워 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분별해 낼 수 있다.
우리의 삶과 일에서 이런 변화를 일으키기란 매우 어렵다. 바울은 죄가 계속해서 ‘너희의 죽을 몸에 역사하여 너희가 그것에 종노릇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우리는 금세 우리의 깨어진 방식으로 되돌아간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실재하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판단하는 습관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능력이 있다(롬 6:6).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옛 고질병으로 되돌아가 “마음대로” 헤매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에다 묶어 놓을 수 있는 줄을 제공해 주신다. 그 결박은 우리가 코스를 벗어나 헤맬 때마다 쓸려서 고통을 줄 것이다. 또 바울은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이 처음에는 노예처럼 느낄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새 생명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옛 죄의 노예가 될 것인가, 그 사이에서 어떤 종류의 노예가 될 것인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새 생명 안에서 행함으로 얻는 이점은, 그 최후가 수치와 사망이 아닌 생명과 의라는 것이다.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