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례와 법도 (신4:44-28:68)

아티클 / 성경 주석

   제2연설의 두 번째 부분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순종하라고 주신 ‘규례와 법도’를 상세히 묘사했다(신 6:1). 이 규정은 전쟁, 노예제도, 십일조, 종교적 축제, 희생제물, 정결한 음식, 예언, 군주제, 중앙 성소 등 아주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내용 속에는 일의 신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다수의 단락이 들어 있다.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순종하는 축복 (신7:12-15; 2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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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이스라엘에게 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우려가 있기에, 모세는 그것의 주된 목적은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신 7:12-13).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2-7 11-12).

 

   언약에 따르는 것은 하나님 백성에게 축복, 번영, 기쁨, 건강의 근원이 됐을 것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다.

 

   이것을 소위 “번영 복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총애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재물과 건강을 가져다주신다’라는 번영 복음의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본문은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언약에 따라 살면 세계는 모든 사람에게 더욱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크리스천의 증언은 우리 힘으로는 율법을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이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순종 여부에 따라 제한되기보다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고 결국 모세가 묘사한 모든 복을 받을 수 있다. 현세에서는 그 복을 부분적으로 받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성취될 때에는 온전하게 받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은 신명기 전체를 꿰뚫는 중요한 주제다. 이런 세 개의 주요 단락 외에도 이 주제는 신명기 전체에 걸쳐 두루 언급되며, 모세는 그의 인생을 마치기 전 최후의 연설에서 이 주제를 반복하는데, 그 내용이 신명기 29-30장에 기록되어 있다.

번영의 위험성 (신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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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즐겁게 순종하는 것에 반대는 거만인데, 이는 종종 번영에 뒤따라온다. 이것은 모세가 신명기 4장 25-40절에서 경고한 안일이 몰고 오는 위험과 유사한데, 그 초점은 수동적인 권리 주장이 아니라 능동적인 거만에 맞춰져 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 8:12-18).

 

   오랜 세월 동안 땀을 흘린 후에 사업, 경력, 연구 과제, 자녀 양육, 기타 일들이 성공으로 열매 맺을 경우 우리는 종종 정당한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기쁨에 찬 자부심은 자칫 교만으로 변질될 수 있다. 신명기 8장 17-18절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일부로써 하나님은 경제적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성공이 전적으로 우리 능력과 노력 덕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뿐 아니라 능력도 주셨다는 점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창조된 자가 아니다. 자급자족에 대한 환상은 우리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다. 언제나 그렇듯 올바른 예배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 그 대안일 것이다(신 8:18).

 

 

관대함(너그러움) (신1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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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대함’이란 주제는 신명기 15장 7-8절에서 나타난다.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관대함과 긍휼은 언약의 본질이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10). 우리 일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될 경우에만 완벽한 축복이 된다. 바울이 말한 바처럼,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이 마찬가지겠지만, 일해서 번 돈은 우리를 너그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돈을 너그럽게 쓰는가? 더욱이 일 자체를 통해서 우리가 너그러워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단락은 일(“네가 하는 모든 일” , 10절)의 한 국면으로서의 관대함을 특별히 언급한다. 만일 한 직장 동료가 기술이나 능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 정직한 충고의 말을 원할 때, 또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참아 줄 인내심을 요청할 때, 이런 순간들이 관대함을 베풀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이런 류의 관대함을 베풀려면 시간과 돈이 들 수도 있고, 우리의 자아상을 재검토하거나 우리가 누구 편인지 스스로 살피고 자신의 동기를 물어봐야 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자진해서 이런 희생을 감내할 수 있다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문이 우리에게 열리는 것 아니겠는가?

 

 

노예제도 (신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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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기에서 논란을 일으키는 주제 중 하나는 노예제도다. 구약에서 허용된 노예제도는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 모든 의문점을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제도를 미국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를 포함한 현대 노예제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후자는 그들의 고국인 서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납치해 매매한 경우와 그들의 후손을 영구적인 종으로 삼은 경우를 포함한다. 구약은 이런 종류의 노예제도를 정죄했으며(암 1:6) 적발 시 사형까지 가능했다(신 24:7 출 21:16).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된 것은 납치나 불운한 태생 때문이 아니라 빚이나 가난 때문이었다(신 15:12, NRSV 각주 a). 노예 신세가 되는 게 굶어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 빚을 갚거나 최소한 잠잘 곳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이 노예제도는 종신(終身)적인 게 아니었다.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신 15:12). 놓이면, 종이었던 사람은 그들이 일해서 마련한 부의 일정 몫을 차지했다.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3-14).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는 사람이 아직도 빚 때문에 대개 부모에 의해 강제 노역 노동자로 팔린다. 이것은 사실상 노예제도인 셈이다. 성 밀매(密賣)로부터 벗어나기란 더더욱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몇몇 지역의 기독교인이 그런 관습을 뿌리 뽑는 데 앞장서고는 있지만, 훨씬 더 많은 노력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한층 많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이런 일을 선교 및 사회활동의 높은 우선순위에 올려놓는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한번 상상해 보라.

 

   보다 더 발전한 나라에서는, 아주 궁색한 노동자라고 해도 팔려가서 비자발적인 노동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그들이 기꺼이 원하고 또 감당할 수 있는 직업을 얻는다. 신명기에 노예에 대한 보호 규정까지 담겨 있다고 한다면, 이런 보호 장치가 일반 노동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명기는 정해진 해방일, 음식과 주거 제공, 작업 조건에 대한 책임 등 계약 조건과 노동 규정을 지킬 것을 주인에게 요구했다. 근무 시간은 합리적으로 제한되어야 하며 일주일에 하루는 쉬게 해야 했다(신 5:14).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주인이 종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 동일한 인간으로 취급하며 하나님 백성을 모두 구원받은 종으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신 15:15).

 

   현대의 고용주가 고대의 주인이 그랬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힘없는 노동자를 학대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노동자가 실제로 노예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보호를 받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고용주에게는 노동자를 적어도 노예보다는 더 잘 대우해 줘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취약한 노동자는 초과 수당도 없이 연장 근무를 하거나, 팁을 매니저에게 넘겨주고, 근무 시간을 조절하기 위해 뇌물을 바치고, 성희롱이나 비열한 처우를 당하고, 불리한 혜택을 받아들이고, 불법적 차별과 다른 형태의 혹사를 견디도록 요구받을 수도 있다. 부유한 노동자조차도 자신이 제공한 노동의 열매에 합당하지 못한 불공정한 처우를 당할 수도 있다.

 

   고대 노예제도가 16-19세기 노예제도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현대의 독자들은 성경에서 일시적인 노예제도를 수용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적어도 오늘날 모든 곳에서 노예제도가 최소한 법적으로 불법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한다. 노예제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폐지된 것으로 간주하기보다, 현대적 형태의 비자발적 강제 노동을 없애는 한편 경제적으로 불우한 사회 구성원을 보호해 주는 성경 지침을 따르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뇌물과 부패 (신16: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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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산권 및 노동자 보호의 실효성은 종종 법률의 집행과 사법 제도에 달려 있다. 모세가 재판장과 지도자들에게 명한 내용은 일에 관해 특히 중요하다.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 16:19). 공정한 사법 제도가 없다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20)라는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대의 직장과 사회는 뇌물, 부패, 부정과 관련해서 고대 이스라엘 못지않게 취약하다. 유엔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큰 경제성장의 장애물은 공정한 법 집행의 실패다.[1] 부패가 만연한 곳에서는, 뇌물을 주지 않고는 생계를 유지하거나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평안히 거주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본문의 규정은 일반적으로 뇌물을 요구하는 자가 순순히 뇌물을 바치는 자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처럼 보인다. 금지의 초점이 뇌물을 주는 쪽보다 뇌물을 받는 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뇌물을 주는 쪽이든 받는 쪽이든) 부패를 줄이기 위해 크리스천들이 하는 모든 노력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신 16:18)하는 데 도움이 되며, 주님께 영광이 된다. 법 규범의 경제적 적용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내용은 이 책 6장의 “민 26-27장; 36:1-12” 부분을 보라.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Issue Brief: Rule of Law and Development (New York: United Nations, 2013), 3쪽

법원 판결을 따르는 것 (신17: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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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는 현대 법원의 구조와 놀랍도록 유사한 사실심 법정과 상소 법원 제도를 설립했다. 그는 백성에게 법원 결정에 순종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말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신 17:11).

 

   오늘날 일터는 법, 규정, 관습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것의 적절한 해석 및 적용을 위한 절차, 법원, 상소 과정을 통해서 통제된다. 사도 바울도 언급했듯이(롬 13:1), 우리는 이런 법적 구조에 따라야 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권세를 가진 자가 법과 규정을 흔히 무시하거나 뇌물, 부패, 폭력을 일삼는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기업과 직장 조직이 의도적으로 법을 어기는 일은 거의 없어도 방해 소송, 정치적 이해 활동, 또는 공공선에 반하는 로비 활동으로 법을 위반하려는 노력이 자행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법 규범을 존중하고, 거기에 따르고, 지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부름받았다. 시민의 불복종이 무조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부 부당한 법은 변경이 불가능하다면 폐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드물며, 대개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개인적 희생이 뒤따른다. 하지만 개인 이익을 목적으로 법을 전복(顚覆)하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권세를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 (신17: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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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기관이 합당한 권위에 도전하지 말아야 하듯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그들의 권세를 불법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모세는 특별히 왕의 경우를 다뤘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6-19).

  

   이 본문에서 우리는 권세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두 가지 제약을 발견한다. 권세 있는 자가 법 위에 있는 게 아니므로 그들도 법을 준수하고 법을 지지해야 한다. 권세자는 자신의 권세를 악용하거나 남용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경찰과 법원 직원이 자기나 친구가 받은 교통 위반 딱지를 ‘해결’하거나 고위 공무원이 특별대우를 받으려는 예에서 보듯, 권력을 쥔 자가 자신을 법 위에 두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관리가 자기 권세를 이용해 뇌물을 받는다거나 차별 및 예외를 불법적으로 적용하거나 비밀 정보에 접속하거나 공적 자산이나 사적 자산을 개인 용도로 유용함으로써 이익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 권력자에게 정책상으로나 법적으로 특혜가 주어지기도 하나, 그렇다고 해서 범죄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모세가 왕들에게 준 명령은 무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의 법적인 권세를 사용하라는 게 아니고 무절제를 전적으로 피하라는 것이었다. 권세 있는 자가 권력을 사용해 특권을 얻을 뿐 아니라 친구에게 독점권을 주고 거대한 땅과 자산을 전용하고 반대자를 투옥하거나 고문하거나 죽인다면, 그 결과는 치명적인 것이 된다. 권력을 조금 남용하든 전체주의적으로 압박을 가하든 간에, 그 본질에는 차이가 없고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공공의 선을 위한 자산 사용 (신23:1-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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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기는 생산물의 주인들에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산을 사용할 것을 명료한 방식으로 요구한다. 예를 들어, 지주는 그들의 땅을 이웃의 급박한 필요를 위해 내놓을 수 있어야 했다.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 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신 23:24-25).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길옆의 밭에서 곡식을 잘라 먹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그 율법이었다(마 12:1). 이삭 줍는 자는 자신을 위해 곡식을 수확해 음식을 조달할 책임이 있었고 지주는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용할 책임이 있었다. 이 관습에 대해서는 이 책 4장의 “레 19:9-10” 부분을 보라.

 

   마찬가지로 자본을 빌려주는 사람도 채무자의 건강이나 생계를 위험에 빠뜨릴 만한 조건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신 23:19-20 24:6, 10-13). 어떤 경우에는 이웃의 필요가 너무 커서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어도 그들에게 돈을 빌려줄 의사가 있어야 한다(신 15:7-9).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책 3장의 “출 22:25-27” 부분을 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원을 궁핍한 사람에게 개방하기를 요구하시는 한편, 그분이 맡겨 주신 자원을 선하고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청지기 역할도 감당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것을 가지고 공동체의 선을 위해 쓰라고 명령하신다(신 15:7). 다른 한편으로, 신명기는 어떤 사람의 밭을 공동 재산으로 여기지 않았다. 외부인은 남의 밭을 마음대로 취급할 수 없었다. 공공선에 대한 기여 요건은 생산의 주요 수단인 사적 소유권 제도 내에서 성립됐다. 오늘날 사회에서 사적 소유권과 공적 소유권 사이의 균형 및 다양한 경제 제도의 적절성은 논쟁거리가 되는데, 그에 대해 성경은 원칙과 가치를 제공하지만 규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경제 정의 (신24:14-25; 25:19; 27: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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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층과 부의 격차가 불공정의 여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공의(公義)는 노동자를 공평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한다. 신명기 24장 14절에는 다음 내용이 나온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가난한 자나 이방인은 공동체 내에서 부유한 지주에게 맞서 법정에 설 수 없었으므로 학대에 노출되어 있었다. 야고보서 5장 4절에도 유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고용주는 가장 말단 직원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신성하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했다.

 

   또한 공의는 고객을 공정하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신 25:13). 이 저울추는 매매할 때 곡식이나 다른 상품을 계량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었다. 판매자에게는, 공시했던 것보다 가벼운 저울추를 사용해서 곡식 무게를 재는 것이 이득이었을 것이다. 구매자는 거짓된 무거운 추를 사용할 경우 이득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는 팔 때나 살 때나 언제나 동일한 저울추를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사기 방지책은 비단 고객과 거래할 때만 국한된 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과 이뤄지는 모든 형태의 거래에 해당됐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7).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8).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9).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25).

 

   원칙적으로 이런 규칙은 모든 종류의 사기를 금지한다. 현대적 비유를 들어 본다면, 도덕적 관련성은 무시한 채 하자 있는 제품을 고의로 판매하는 회사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고객은 사용하던 제품을 반환해 주는 상점의 정책을 악용할 수 있다. 회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회계 원칙을 어겨 가면서 재무제표를 발행할 수 있다. 노동자는 근무 시간 중에 개인 업무를 보거나 맡은 일을 게을리할 수 있다. 이런 관습은 부당할 뿐 아니라, ‘우리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려는’(신 26:19) 하나님만을 예배하겠다는 다짐에 어긋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