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신5:6-21)

아티클 / 성경 주석

   십계명은 일의 신학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필수 요건을 기술하며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일을 지배하는 핵심 원칙을 묘사한다. 모세의 설명은 이 책에 나오는 진술 중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수 세기 후에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이다. 그때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셨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 22:37-40). 이 ‘두 번째로’ 가장 큰 계명은 신명기에 명시적으로 기술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십계명이 진실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볼 것이다.

 

   넷째(안식일 지키기), 다섯째(부모 공경하기), 열째(탐내지 말기) 계명들 내의 근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이 단락은 문법적 차이만 약간 보일 뿐 사실상 출애굽기 20장 1-17절과 동일하다. 이 계명들 중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특히 일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는 점은 흥미롭다. 우리는 이제 이 책 3장의 내용을 반복해 살펴보면서 추가적으로 출애굽기와 신명기 서술 간의 차이도 탐구해 볼 것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신5:7; 출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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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계명은 토라 속에 담긴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 사랑은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에 반응한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하셨을 때 드러났다(신 5:6). 인생에서 그 어떤 욕망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커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더 강력한 다른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규칙을 어기고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른 관심사가 돈, 권력, 안정, 명예, 성적 쾌락, 여타 어느 것이든 간에 우리의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가짜 신’들은 그 나름의 계명을 갖고 있어서 참된 하나님의 계명과 불화를 일으킬 것이며, 우리가 그 ‘가짜 신’의 요구 조건에 응하는 순간마다 반드시 토라를 위반하게 된다. 십계명을 지키는 첫 발걸음을 떼는 것은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일과 관련해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일이나 그 조건과 열매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이 하나님을 대체하게끔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데이비드 길이 말한 대로, “아무도, 아무것도 당신 삶 속에서 하나님이 차지한 중심적 위치를 절대 위협하지 못하게 하라.”[1]

 

   많은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므로, 돈에 대한 과욕은 일과 관련해서 첫째 계명을 어기게 만드는 가장 흔한 위험이 된다. 예수님도 바로 이 위험을 경고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어쨌든 일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우리 욕망을 왜곡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에 지장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어야 할 것, 즉 정치 권력, 재정 안정, 직업에 대한 헌신도, 동료 사이에서의 지위, 탁월한 성과 등이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변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극적인 파국을 맞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인격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한 게 되었다면, 궁극적 관심사가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사람의 평가로 바뀌었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David W. Gill, Doing Right: Practicing Ethical Principles (Downer’s Grove, IL: IVP Books, 2004), 83쪽. 길의 책은 현대 세계에서의 십계명에 대한 확장된 주석과 그 적용을 담고 있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신5:8; 출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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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계명은 우상숭배 문제를 거론한다. 우상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신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줄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신이다. 고대 세계에서 우상숭배는 주로 물리적 대상을 숭배하는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이 주제의 초점은 신뢰와 헌신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안녕과 성공에 대한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우리 소망을 성취할 능력이 없는 하나님 외의 존재는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조종할 의도로 우상을 만들었다가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비참한 결과를 얻은 한 집안의 이야기가 사사기 17-21장에 잘 나와 있다.

 

   일의 세계에서는 돈, 명예, 권력을 잠재적 우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흔한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우상인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일 가운데의 우리 역할 속에서 사실상 필요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성취함으로써 우리 안전과 번영이 확보될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의 신뢰와 소망을 하나님보다 그런 것들에 둘 때 우상숭배가 시작된다. 준비, 각고의 노력, 창의력, 모험, 부(富), 기타 자원 심지어 행운까지 사실상 성공의 모든 요소 가운데에서 우상숭배가 발생할 수 있다. 우상숭배가 시작되는 시점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은혜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대신 가짜들을 숭배하려는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신5:11; 출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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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계명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지’ 말 것을 하나님 백성에게 명한다. 이것은 “여호와”(신 5:11)라는 이름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등에도 적용된다. 그릇되게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여기에는 저주, 비아냥거림 및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잘못은, 사람이 사람의 책임을 하나님께로 거짓되게 돌릴 때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배재한 채 자신의 행위나 결정을 정당화하게 만든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크리스천은 직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건 다른 사람을 존중하거나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자기 이해에 기초해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야”라든가 “그런 일을 당신이 당하는 건 하나님이 당신에게 벌을 준 거야”와 같은 말은 매우 위험하며 신앙 공동체의 지지나 분별 없이 개인의 입에서 나올 경우, 대개 거기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살전 5:20-21). 

 

   이에 비춰 보건대, 전통 유대인이 (“하나님”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영어식 표현인 “God”도 입에 담기조차 어려워하는 지혜는 크리스천도 일면 본받을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 조금이라도 더 신중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주장을 펼 때 더 조심하고 특히,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셋째 계명은 사람의 이름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께도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시는”(요 10:3) 선한 목자는 만일 다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거나 그들을 불경스런 호칭으로 불러서도 안 된다. 다른 이에게 저주를 퍼붓거나 창피를 주거나 그들을 억압하거나 배척하거나 편취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거나 감사를 표하거나 그들과 유대감을 다지거나 그를 환영할 때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좋게 사용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외워서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축복이 된다. 그 사람이 무명이거나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당신은 쓰레기통을 비워 주는 사람, 고객 상담 전화를 받는 사람, 버스 운전기사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신5:12; 출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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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은 신명기, 출애굽기와 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과 실생활에서도 복잡한 문제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넷째 계명을 이방인 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한 것은 신약 시대 이후로 줄곧 이어져 왔다(롬 14:5-6). 하지만 일이라는 문제만큼은 안식일의 일반 원칙이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안식일과 ‘우리가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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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넷째 계명의 앞부분은 일주일에 하루는 노동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교할 데 없는 선물이었다. 다른 고대 국가 사람들은 일주일에 하루씩 쉴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안식일을 지키려면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을 온전히 신뢰해야 했다. 이는 곡식을 심고 거두고 물을 긷고 길쌈을 하고 각종 양식으로부터 식량을 얻어 내는 모든 작업을 6일 만에 끝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이 일주일에 하루씩 안식하는 동안 주변 나라는 계속 칼을 만들고 화살을 제작하고 병사들을 훈련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경제 및 군사적 재난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문제와 씨름한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를 따라 일과 안식의 순환을 지키면서도, 현대 경제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둘 혹은 셋 이상의 직업을 유지하고 집 안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세차를 하고 공과금을 제때에 내고 학교 공부를 하고 시장을 보는 일에 7일이 다 필요한가? 아니면 매주 하루씩 쉬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양해 주시리라고 신뢰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과 어울려 성경공부를 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데 시간을 쓴다면, 우리 생산성은 전반적으로 더 떨어질까 아니면 더 높아질까? 넷째 계명은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해 주실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안식을 취하라고 말할 뿐이다.

 

   크리스천은 안식일을 “주일”(일요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로 바꿔 부르지만, 안식일의 본질은 일주일 중 특정한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게 아니다(롬 14:5-6). 안식일이 정말로 강조하는 두 가지 사항은 일과 안식이다. 일과 안식이 둘 다 제 4계명에 포함된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신 5:13). 일하는 6일도 안식하는 하루만큼이나 이 계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많은 크리스천이 일하는 시간을 짜내어 안식에 할애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와 반대로 한가로운 여가와 낭비를 위해 일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것은 안식일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악하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부양하지, NIV]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과 안식의 적절한 조화다. 그것이 우리 자신과 가족, 동료 근로자, 고객 모두에게 다 좋기 때문이다. 그 조화에는 일요일(또는 토요일) 24시간 동안 푹 쉬는 게 포함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안식 시간 비율은 일시적인 필요나 때에 따른 삶의 필요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과로가 주된 위험이라면, 우리는 신령한 것(일요일에 진행되는 예배)과 세속적인 것(월요일부터 진행되는 노동)을 대립시키는 새로운 거짓 율법주의를 창안해 내지 않으면서도 제4계명을 지킬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 만일 일을 회피하는 게 우리의 위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일하는 것의 기쁨과 의미를 배우고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엡 4:28).

 

 

안식일과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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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계명에 대한 두 가지 역본(譯本)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중 대다수는 특히 신명기에 나오는 넷째 계명에 대한 첨가 문구에서 발생한다. 첫째, 안식일에 일을 시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목록이 확대되어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신 5:14a)까지 포함됐다. 둘째, 안식일에 왜 종에게 일을 시킬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가 주어져 있다.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신 5:14b-15a).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군사 및 경제적으로 경쟁하는 가운데서도 편안히 안식을 취할 수 있음은 “강한 손과 편 팔”(신 5:15b)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신명기는 상기시켰다.

 

   이 계명을 두고 출애굽기와 신명기가 차이를 보이는 주요 부분은 각각 창조 및 구속에 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안식일은 6일간의 창조와 뒤이어지는 하루 동안의 안식으로부터 기인한다(창 1:3-2:3).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요소가 첨가된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이 두 가지를 합쳐 보면, 안식일을 지키는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것과 우리를 구속하신 사실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가된 이런 요소는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는 이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을 대변한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을 위해 일하는 노예, 다른 이스라엘 백성, 동물에게도 안식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애굽에서 종 됐던 것을 기억한다면’ 자기 안식을 특권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주님이 당신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다른 이에게도 안식을 베풀어야 한다.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는지 혹은 그들이 안식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일꾼이며, 일하는 이에게 안식을 제공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우리는 자신의 휴식을 위해 안식일을 지키려는 생각은 하겠지만,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쉬게 할 의무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이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이 다른 이들의 편의를 위해 자신의 대인관계나 수면 리듬, 교제 기회를 깨뜨리는 시간대에 근무한다.

 

   과거에 사람들을 보호했던 (혹은 보는 관점에 따라 ‘일하지 못하게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소위 “엄격한 법률”(blue laws 일요일에 일과 오락을 금하는 18세기 청교도적 법률 - 편집자 주)이라는 것은 이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사라져 버렸다. 분명히 이것은 노동자와 그들이 섬기는 사람에게 새로운 많은 기회를 열어 줬다. 그러나 거기에 언제나 우리가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밤늦게 쇼핑을 하거나 일요일 아침에 골프를 즐기거나 자정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경우, 그것이 그 시간에 일하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하는가? 어쩌면 우리 행동이 고용 기회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시간에 해도 될 일을 누군가에게 괴로운 시간에 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패스트푸드 식당 체인인 칙필레(Chick-fil-A)는 일요일에 문을 닫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창립자인 트루엣 캐시(Truett Cathy)가 십계명의 제4계명을 독특하게 해석한 탓에서 기인한다고 사람들은 종종 주장한다. 그러나 그 회사의 웹사이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결정은 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모든 칙필레 운영자와 식당 종업원은 그들의 선택에 따라 휴식할 시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할 시간, 예배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물론 제4계명을 부하 직원을 배려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는 것은 종파적이거나 율법주의적인 해석은 아니다. 특이한 해석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문제는 복잡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해답을 찾기란 어렵다. 어쨌든 소비자 또는 (경우에 따라) 고용주인 우리 선택은 다른 사람의 안식과 근무 시간 및 조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신5:16; 출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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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계명은 우리가 사람의 가장 기본 권위, 즉 부모가 자녀에게 가지는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명령이다. 달리 말하면, 자녀 양육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여서 깊은 공경과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거나 공경하지 않을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의 의미를 부모에 대해 좋게 말하고 칭찬하는 것에 국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계명을 지키려면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막 7:9-13). 우리는 누군가의 선을 위해 일함으로써 그 대상을 향한 공경을 표현한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인생의 커다란 기쁨 중 하나다. 부모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즐거움이다. 따라서 이 계명을 따르는 것은 이들에게 쉽게 다가온다. 그러나 부모를 위해 일하는 것이 짐처럼 느껴질 경우 우리는 이 계명으로 시험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홀대나 냉대를 받았을 수도 있다. 또 부모에게 통제나 간섭을 심하게 받으며 자랐을 수도 있다. 부모와 엮이는 것이 자아를 무너뜨리거나 배우자에 대한 헌신(셋째 계명에 따른 우리 책임 포함),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망치는 것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비록 현재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부모를 돌보는 일에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든다는 것 자체가 나중에 큰 짐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만일 부모가 늙거나 치매에 걸려서 기억력, 능력, 좋은 성품을 상실할 경우, 부모를 돌보는 일이 깊은 슬픔으로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5계명은 약속이 딸린 계명이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부모를 올바르게 공경하는 것을 통해, 자녀는 장래 직장과 다른 모든 종류의 대인관계에서 남을 올바르게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장수와 번영을 돕는다. 공경과 권위를 기반으로 한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개인이 성공하고 사회 질서를 세우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유익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 이 계명의 바탕이기에, 이것은 본질상 일의 현장에서의 명령이 되기도 한다. 일터는 우리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곳일 수도 있고, 일상적인 수발을 통해 그분들을 돕는 곳이 될 수도 있다. 두 가지가 다 일이다. 부모와 더 가까이 살기 위해, 혹은 부모에게 돈을 보내거나 부모가 물려준 가치관이나 재능을 가지고 일하거나 부모가 중요하다고 여긴 일을 해 나가기 위해 우리가 일할 때,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모를 위해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부모를 목욕시켜 드리거나 안아 드리고, 좋아하는 곳에 모시고 간다거나 그분들의 두려움을 덜어 드리기 위해 직장활동을 역으로 제한한다면, 그것 역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부모는 신뢰와 공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녀 양육도 일종의 일이며 그 어느 직장도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신뢰, 긍휼, 정의 및 공정(公正)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하나님 은혜로만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신명기 전체의 근간임을 알리는 또 다른 지표가 되기도 한다.

 

   직장에서 우리는 스스로 다섯째 계명을 지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 우리는 종업원, 고객, 동료, 상사, 거래처 및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기대를 조절함으로써 그들이 자기 가족을 돌볼 수 있도록 지원해 줄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과 부모 사이의 갈등을 말하거나 불평할 때에, 우리는 연민을 갖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다. 가령 근무 시간대를 교대해 부모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말이다. 그들에게 성경적인 시각에 근거한 어떤 견해를 피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생활에만 몰두하는 동료가 자신의 가족 위기에 대해 털어놓을 때, 우리는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에게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재조정하도록 권고할 수 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신5:17; 출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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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깝게도 여섯째 계명은 현대 직장에 너무나도 실질적으로 잘 적용될 수 있는 계명이다. 직업과 연관된 사망 사고의 10퍼센트(미국 기준)가 살인이기 때문이다.[1] ‘직장에서 절대로 살인하지 말라’라고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권고한다고 해도 이런 통계치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살인은 직장 폭력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며, 단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더욱 실질적인 폭력은 분노인데, 예수님은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여섯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21-22). 바울이 말한 대로, 분노의 감정을 금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을 배울 수는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따라서 여섯째 계명이 일의 현장에서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일터에서 분노 문제를 겪는다면, 분노 조절을 위한 도움을 받도록 하라.’ 많은 고용주, 교회, 국가 및 자치단체, 비영리 조직이 분노 관리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제공하는데, 이런 것을 이용하면 여섯째 계명을 지키는 데 크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은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이지만, 여섯째 계명으로부터 파생된 판례법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의도적이지 않은 죽음을 막을 의무도 있다. 아주 명료한 한 예는 소(일하는 동물)가 사람을 받아서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다(출 21:28-29). 만일 그 사건이 예측 가능한 사고였다면, 그 소의 주인이 살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주인이나 관리자는 직장 내의 안전을 적절하게 유지할 책임을 지니는 것이다. 이 원칙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으로 잘 확립되어 있는데, 직업 현장의 안전은 정부 정책, 산업체 내규, 조직체 정책과 관습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직장들이 근로자가 안전하지 못한 조건에서 계속 일하도록 요구하거나 묵인한다. 작업 여건을 조성하거나 근로자를 감독하거나 직장 관습을 형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크리스천이라면 여섯째 계명을 상기해 안전한 근무 환경이 그들의 가장 큰 책임 중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Fact Sheet: Workplace Shootings 2010,” United States Department of Labor, Bureau of Labor Statistics, http://www.bls.gov/iif/oshwc/cfoi/osar0014.htm.

“간음하지 말지니라.” (신5:18; 출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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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은 간음이 아주 흔하게 발생하는 환경 중 하나다. 간음이 직장 내에서 많이 발생해서라기보다 근무 환경과 직장 동료의 인간관계 등이 간음이 발생할 분위기를 쉽게 조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장에서 이 계명은 우선 문자 그대로 적용된다. 결혼한 사람은 직장과 연관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어떤 이유에서라도 성(性)적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 성매매나 포르노그래피 산업 종사자는 언제나 이 계명을 어기는데, 이런 직업은 거의 항상 기혼자 간의 성적 접촉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혼 서약에 흠집을 내는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일곱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런 일은 여러 가지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다. 병원, 회사, 연구소와 교회 등 직장 동료 간의 강한 감정적 유대관계가 요구되면서 배우자와 서약한 것은 충분히 지지해 주지 못할 수 있는 환경. 장시간 신체적으로 가까이 하는 직업이라든지 합리적인 한계 내에서 퇴근 후의 만남을 제한하지 못하는 장기 출장 같은 작업 조건. 성희롱을 당하게 하거나 압력에 굴복해 권력자와 성행위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무 환경도 있을 수 있다. 허영심이나 선망에 둘러싸이는 연예인, 스타 운동선수, 대기업 사업가, 정부 고위 관료나 극히 부유한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간음이 흔히 발생할 수 있다. 직장 일에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다가 배우자와의 관계가 망가지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은 7계명을 손상할 수 있으므로, 크리스천은 그런 환경을 피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신5:19; 출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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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째 계명 역시 일터를 주요 배경으로 삼는 또 다른 계명이다. 도둑질은 피해자로부터 노동의 대가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게 일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도둑질은 정직한 노동을 피하려는 편법의 일환으로 저질러진다. 때문에 그것은 6일 동안은 힘써 일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도 된다. 여기서 또 우리는 십계명끼리의 연관성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터에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도둑질’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재산과 재산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건을 취득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자발적으로 재화와 용역을 교환하거나(거래나 선물로), 탈취하는 길이다. 도둑질은 가장 노골적인 형태의 탈취로서, 타인에게 속한 것을 빼앗아 달아날 때 발생한다. 그러나 기업이 고객을 속이거나 정부가 국민에게 부당한 세금을 매길 때처럼, 탈취는 보다 더 크고 더 복잡한 규모로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 집단이나 기관은 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공정한 상업 거래와 독점적 상업 거래를 비교하거나 합당한 세금과 과도한 세금을 견주어 보는 것이 여기서 우리 목표는 아니지만, 여덟째 계명은 개인, 범죄 집단, 기업, 정부가 재산권을 무시하면서도 무사하다면 그 어떤 사회도 번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실질적으로 도둑질은 다른 사람 것을 훔치는 것 외에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타인의 귀한 어떤 것을 소유주 동의 없이 취득하는 순간 그것은 도둑질이 된다. 자원이나 자금을 개인 용도로 착복하는 것도 도둑질이다. 판매 실적을 올리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사기를 치거나 가격을 올리는 것 역시 도둑질이다. 구매자가 실제와 다른 상황 속에서 구매를 하기 때문이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과대광고/과장” 부분을 보라. 마찬가지로 사람의 두려움, 취약점, 무력감, 절박함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것도 도둑질의 한 형태다. 왜냐하면 그들의 동의는 진정 자발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저작권이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도 창안한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민법상의 이윤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둑질이다.

 

   타인의 재산과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것을 취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돌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신명기 22장 1절은 이렇게 말한다.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그건 나랑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라는 변명은 우리 무관심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직업이 사람의 무지나 궁지에 몰린 선택권 없는 상황을 이용해 그들에게 원치 않는 거래를 하게 만드는 특성을 지닌다. 회사, 정부, 개인, 조합 및 기타 조직은 그들의 힘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불공정한 임금, 가격, 재정 조건, 근무 여건이나 근로 시간 등을 흔히 내세운다. 은행을 털거나 고용주의 것을 훔치거나 상점에서 들치기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불공정하거나 비윤리적인 관행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서 그들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는 일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동참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이런 관행을 거부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심지어 경력에 큰 제한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할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신5:20; 출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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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홉째 계명은 자신의 평판에 대한 권리의 중요성을 다룬다.[1] 이것은 사람의 증언에 따라 인생행로가 갈리는 법정에서 뚜렷하게 적용될 수 있는 계명이다. 사법적 판정과 소송 과정 속에 담겨진 힘은 실로 대단하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사회의 윤리 체계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며 결과적으로 매우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 계명이 “사회적 실상이 신빙성 있게 묘사되며 알려진다고 대중이 확신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적 삶은 실현 불가능하다”[2]라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법정 용어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이 아홉째 계명은 사실상 삶의 모든 국면에 해당하는 다양한 상황에 적용된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오해를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과대광고/과장” 부분을 보라. 불러일으키거나 잘못 대변하는 말이나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은 통찰도 제시했다.

 

정치인은 네거티브(부정적) 선거 운동으로 경쟁자를 음해하려고 애쓴다. 가십 기고가는 중상모략으로 돈을 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거실에서 멋진 커피잔에 곁들인 다과를 먹으면서 남을 비방하고 평판을 파괴한다. 사실상 법정 행위가 정당한 사법 절차 없이 이렇게 도처에서 자행된다. 비난이 가해지고 소문이 전파되며 비방, 위증 및 명예훼손 발언이 여과 없이 유포된다. 여기에는 증거도 없고 변론도 없다. 크리스천은 이런 대화에 가담하거나 그런 대화를 용인하는 것을 거부해야 하며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당사자 본인이 없는 상황에서 절대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기도 요청이나 목회적 관심에 의한 것이라 해도, 동기가 무엇이든 어떤 형태로든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단순히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크리스천에게는 소문을 멈추게 하고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을 막아야 할 의무도 있다.[3]

 

   이 계명은 직장에서 하는 잡담도 심각한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직장 밖의 개인 영역에서 파괴력을 발휘하는 잡담도 그 자체로 악하지만, 한 직원이 다른 직원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경우에는 어떤가? 당사자가 현장에 없는 상황에서 진실이 규명될 수 있을까? 근무 태도를 평가하는 말은 또 어떤가? 공정하고 정확한 평가가 이뤄지려면 어떤 안전장치가 필요한가? 마케팅이나 광고 산업은 대체로 단체와 개인이 섞인 공공영역에서 전개된다. 이때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를 가장 돋보이게 하려고 할 경우, 편견이 배제된 객관적인 시각으로 경쟁자 제품의 하자나 약점을 어느 정도까지 지적하는 게 가능하겠는가? 당신이나 ‘이웃’의 권리만큼 다른 회사의 권리도 똑같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세계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이 계명의 적용 범위는 엄청나게 넓다고 할 수 있다.

 

   이 계명은 다른 사람에 대해 거짓 증언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금하나,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지를 문제로 대두시킨다. 거짓된 혹은 오도(誤導)하는 재무제표를 발행하는 것은 아홉째 계명을 어기는 것인가? 경쟁자를 거짓되게 폄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과장된 광고는 잘못된 것인가? 해고가 임박해 있는 상태인데도 경영자가 직원들에게 거짓된 확신을 심어 줄 때는 또 어떠한가? 인식이 실재를 종종 대신하는 세상에서, 그럴듯한 언변은 참된 진실을 가린다. 그러나 아홉째 계명은 하나님만큼은 우리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편 속임수는 가끔 성경에서도 저질러지고, 받아들여지고, 심지어는 승인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다. 진실과 거짓에 대한 신학의 출처는 아홉째 계명을 포함한 성경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다. 보다 심층적인 논의는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 부분을 보라.

 

 Walter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The New Interpreter’s Bible: Genesis to Leviticu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431쪽.

같은 책, 848쪽.

같은 책, 432쪽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신5:21; 출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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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째 계명은 ‘이웃에게 속한 무엇이든지’ 탐내지 말 것을 우리에게 명한다(신 5:21). 이웃에게 속한 물건을 눈여겨보는 것이나 그런 것을 우리가 합당하게 얻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것조차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탐심은 타인의 번영, 성취나 재능을 보고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그것을 빼앗기 원할 때, 또는 성공한 사람을 응징하고 싶어질 때 발생한다. 금지되는 것은 다른 사람, 즉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마음이지 뭔가를 갖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이가 성공한 것을 보고 영감을 얻을 수 있지만 탐심을 가질 수도 있다. 전자의 태도는 각고의 노력과 신중함을 불러일으킨다. 후자의 태도는 게으름을 유발하고 자기 실패에 핑계를 대도록 만들고 탈취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삶을 점유율 쟁탈전으로 여겨 다른 사람이 잘 나가는 만큼 내가 해를 입는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성취를 우리 자신의 성취로 여기는 공상에 빠진다면 우리는 결코 위대한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되지만, 이 계명의 궁극적인 기초는 하나님만을 예배하라는 명령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예배의 핵심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이웃의 소유물 등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불경건하고 탐심 섞인 욕망을 대신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가 되는 것이다.

 

   신명기는 우리가 탐내서는 안 되는 이웃의 소유물에 대한 출애굽기 목록에다가 “밭”을 덧붙이고 있다. 신명기의 십계명에 추가된 다른 내용과 마찬가지로, 이 계명도 직장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밭은 직장이며, 밭을 탐내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생산 자원을 탐내는 것이다.

 

   삶의 여러 현장에서 시기와 탐심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위나 급여나 권력’이 인간관계의 주요 요소가 되는 직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직장에서 성과, 진급 또는 보상을 원하는 데는 정당한 이유가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시기는 그런 이유가 될 수 없으며 사회적 지위를 탐해 집착적으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유가 될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면서까지 우리 업적을 과대 포장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이를 예방하는 방법은 단순하지만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일관된 자세로 다른 사람이 성취한 결과를 알아주고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타인의 성공을 기뻐해 주거나 최소한 알아주기라도 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면 우리는 직장에서 발생하는 시기와 탐심의 명맥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공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성공도 이뤄질 수 있게끔 노력한다면, 탐심은 협력으로 대체되고 시기는 화합으로 대체될 것이다.

 

   미네소타주 에덴 프레리의 우드데일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목회할 당시 레이스 앤더슨은 이렇게 말했다. “담임목사로서 저는 주머니 속에 동전을 무한히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교회 임원이 내놓은 좋은 방안이나 자원봉사자의 수고를 칭찬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할 때마다, 제 주머니 속 동전이 그들 주머니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리더인 제가 할 일은 그거죠. 동전을 제 주머니로부터 그들의 주머니로 넣어 주는 것.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건넬 칭찬을 저도 한쪽에서 거들어 주는 것입니다.”[1]

 

2004년 10월 20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롯에서 레이스 앤더슨과 나눈 대화를 윌리엄 메신저가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