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최근에 겪은 주요사건을 되새기는 모세의 연설로 시작된다. 모세는 그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도출했으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의에 응답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권고했다(신 4:40). 반역이나 안일 때문에 하나님과의 신뢰가 깨지는 것은 일의 신학을 살펴볼 때 특히 중요하다.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길 거부한 이스라엘 (신1:19-45)
목차로 돌아가기광야에서, 사람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실패로 이어졌다. 그 결과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해 주신 땅으로 인도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반기를 들었다(신 1:7-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건지셨으며, 호렙(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들을 약속하신 땅의 변경으로 신속히 인도하셨다(신 1:19-20). 그러 자 모세는 그 땅으로 들어갈 때가 됐다고 선언하지만 백성은 그 지역을 점령한 아모리 사람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계획을 신중히 세우자는 일환으로 먼저 정탐 분대를 보내자고 모세를 설득했다. 정탐 분대는 그 땅에 대한 좋은 보고를 들고 돌아왔다. 이때 백성의 진짜 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두려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다’라고 모세에게 말하며 ‘낙심이 된다’(신 1:28)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시리라고 신뢰하지 못했고, 결국 그분의 명령 따르기를 거부했다.
하나님의 반응은 엄중했다.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신 1:35).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은 자녀 세대로 미뤄졌으며 그 부모들은 영구히 기회를 잃고 말았다. 모세조차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아마도 정탐꾼을 보내기로 동의했을 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뢰도 적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좋은 땅”을 차지하는 대신 평생 광야에서 살다 가야만 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신 1:25). 그들은 뒤늦게 아모리 사람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신 1:42).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함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축복을 놓치고 말았다.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어기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을 향한 신뢰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길을 이탈하는 데서 지켜 줄 수 있다. 이것은 도덕적인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데 실패했는데, 우리가 성공하리라고 진실로 자신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실 하나님 은혜에 달린 문제다. 옳은 것을 위해 분연히 일어설 때, 우리는 우리를 강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실패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 인생에서 커다란 대가를 치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실패도 하나님의 은혜로 만회될 수 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책 5장의 “민 13-14장” 부분을 보라.
성공이 안일로 이어질 때 (신4:25-40)
목차로 돌아가기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린 일은 두려울 때뿐 아니라 성공했을 때도 발생했다. 첫 번째 연설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를 기다리는 번영에 대해 묘사했다. 모세는 성공이 실패보다 훨씬 더 위험한 영적 안일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신 4:25-26). 신명기 5장 8절에서 우상숭배에 대해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초점은 안일에 의해 초래되는 영적인 위험에 있다. 사람은 성공하면 하나님을 더 이상 경외하지 않고 성공이 타고난 권리라고 믿기 시작한다. 감사하는 대신에 마땅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도덕적으로는 위험할 수가 있다. 우리가 달성한 성공은 실은 약간의 기술과 수고에 행운과 하나님이 통상적으로 내려 주시는 은혜가 가미된 것이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필요, 욕망, 안정에 대해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 성공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성공이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역대하에 나오는 웃시야 왕의 삶이다.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대하 26:15-16).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안정과 만족을 발견할 수 있다(시 17:15).
안일해진 결과가 무신론이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사람들이 주님을 저버리면 영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모세는 예견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신 4:28). 모세 시대에는 아마도 ‘종교 없는 삶’이라는 개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종교와 분리된 삶’이라는 개념이 있다. 점점 더 커지는 세속주의의 물결이 ‘부패한 종교 제도, 신념, 관습에 지배되는 족쇄처럼 보이는 것’(틀린 지적은 아니다)을 던져 버리려 한다. 그러나 종교를 거부한다고 해서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인간이 날조한 신’을 위한 예배로 대체될 것인가?
이 질문이 추상적인 것처럼 보이긴 해도, 이것은 일, 직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후반 전후만 해도 기업 윤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성경에 근거를 두고 이루어졌다. 이런 관행이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일과 관련된 권력 투쟁에서 밀리는 측 사람에게 상당한 힘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가장 극적인 경우는 종교에 근거해서 영국과 미국에서 벌어졌던 노예제도 반대 투쟁일 것이다. 결국 그것으로 노예 거래와 노예제도 자체가 모두 성공적으로 폐지될 수 있었다. 세속화된 조직 내에서는 그 누구도 어떤 뚜렷한 도덕적 권위에 호소할 수 없다. 그 대신 밀턴 프리드먼이 말한 대로, 윤리적인 결정이 법과 “윤리적 관습”에 기초해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1] 법과 윤리적 관습은 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기업 윤리는 점차 힘 있고 인기 있는 자의 지배하에 놓인다. 누구도 종교 지도자에게 지배받는 직장을 원하지는 않겠지만, 완전히 세속화된 직장은 그저 다른 종류의 착취에 문을 열어 주는 것일 뿐이지 않을까? 신자라면 하나님의 신실함이라는 축복을 직장에 가져다주면서도 그들 자신의 특권은 주장하지 않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이 반드시 안일로 이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인도가 우리가 얻는 모든 성공의 뿌리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자기만족이 아닌 감사를 드릴 수 있다. 그럴 때 우리가 경험하는 성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다. 여기서 경고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역경보다 도리어 성공이 영적으로 더 위험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모세는 더 나아가 신명기 8장 11-20절에서 이스라엘에게 번영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 장의 “신 8:11-20” 부분을 보라.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New York Times, September 13, 1970.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