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이 출애굽기나 특히 레위기의 어느 구절에서 논점을 이끌어 낸 다음, 그 교훈을 현대에 적용하는 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반론에 부딪힌다. “좋아요. 하지만 성경은 노예제도를 허용하고 우리에게 베이컨이나 새우를 먹지 말라고 하잖아요! 게다가 내 옷에 면과 폴리에스테르가 섞여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크게 상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해요”(출 21:2-11; 레 11:7, 12; 19:19 참조). 이런 일은 크리스천 가운데서도 일어나기 때문에, 성경을 공적인 분야에서 ‘일’이라는 주제에 적용할 때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무엇이 오늘날 적용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경을 모순되게 대한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진실로 변화될 수 있을까? 출애굽기와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의 다양성은 이런 유형의 도전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도전은 크리스천들이 토라와 구약을 그리스도와 신약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다양한 방식에서 나온다. 기독교에서 토라 문제는 극히 중요하며,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일에 관해서 성경이 다루는 부분으로부터 뭔가를 얻을 수 있다. 다음에 나오는 간단한 정리는 과도하게 편협하지 않은 차원에서 이에 도움을 줄 것이다.
신약과 율법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것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제는 ……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라는 바울의 두 진술을 모두 포함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구절이 아니고, 토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얻은 사람에게 공의, 지혜, 내적 변화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계속해서 계시해 준다는 하나의 공통된 사실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건한 본질에 대한 표현이자, 구원이라는 위업에 따르는 결과로서 토라를 주셨다. 토라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된 죄성을 보고 하나님 및 타인과 평화롭게 살기 위한 어떤 기준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훈을 우리가 삶의 크고 작은 실제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그 교훈에 순종할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몇몇 특정 율법을 보고서 우리가 하나님을 비현실적인 완벽주의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작거나 시시한 것이 아님을 율법은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토라는 외적 행위에 대한 것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탐심 같은 마음의 문제도 거론한다(출 20:17). 후에 예수님은 살인과 간음을 정죄하셨을 뿐 아니라 분노와 정욕의 뿌리도 꾸짖으셨다(마 5:22, 28).
하지만 오늘날 삶의 실제 문제에 토라를 적용하며 토라에 순종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수천 년 전에 행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과는 다르다. 율법의 일부는 영구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이미 구약은 우리에게 암시한다. 성막은 영구적인 구조물이 아니고 성전도 이스라엘 원수의 손에 무너져 버렸다(왕하 25:9). 예수님이 파괴된 “성전”을 삼일 만에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희생을 통한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 것이었다(요 2:19).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성전, 제사장 제도 및 제사장 활동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구현했다. 음식에 대해 예수님이 선언하신 내용, 즉 ‘사람이 불결하게 되는 것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 때문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모세 언약의 특정 음식법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막 7:19).[1] 더욱이 신약의 하나님 백성은 그들에게 토라의 제재 규정을 적용할 합법적 권한이 없는 세계 여러 국가와 문화 속에서 살았다. 이에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여러 문제를 논의했고, 유대 율법의 세부사항이 이방 크리스천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의했다(행 15:28-29).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당시 신학에 비춰 볼 때도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0-31).[2]
신약에 나오는 내용 대부분도 토라를 확증해 주는데, 거기에는 간음, 살인, 도적질, 탐심을 경계하라는 계명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계명도 있다(롬 13:8-10; 갈 5:14). 팀 켈러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우리가 예배하는 방식은 바뀌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3]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은, 새 언약 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속에 율법을 넣어 두고 그들의 마음에 율법을 새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렘 31:33; 눅 22:20). 모세 언약의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실함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에 달려 있었는데, 결국 예수님만이 이를 성취하실 수 있었다. 새 언약 아래의 신자는 그런 식으로 행하지 않는다. 바울은 ‘우리는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섬긴다’고 말했다(롬 7:6, NIV).
일의 신학과 관련해서는 앞서 설명한 것이 몇 가지 내용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데, 그것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을 직업과 관련된 현장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도움을 줄 것이다. 노동자, 동물, 재산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 율법은 하나님 본성의 영원한 가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노예처럼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십계명은 일반 용어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다양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적용될 수 있다. 반대로 시종(servants), 가축 및 개인 상해에 대한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의 특정 역사, 사회적 맥락, 특히 당시 논쟁 거리였던 분야에서의 적용을 예시(例示)하는 것이었다.
율법은 올바른 행위의 예를 든 것이지만 적용의 실례를 모두 총망라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천은 행위를 스스로 통제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태도, 동기, 욕구를 변화시키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율법을 존중한다(롬 12:1-2).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주님과 구주의 일과 의도에 대한 회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 자기 방침과 행위를 주관하도록 구해야 한다.
Tim Keller, “Keller on Rules of the Bible: Do Christians Apply them Inconsistently?” The Gospel Coalition, http://thegospelcoalition.org/blogs/tgc/2012/07/09/making-sense-of-scriptures-inconsistency/.
James Tabor and Randall Buth, Living Biblical Hebrew for Everyone (Pasadena, CA: Internet Language Corp., 2003).
Keller, “Keller on Rules of the Bible: Do Christians Apply them Inconsistently?”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