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일하고 있는가 (창 1:27)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분이라는 것을 이미 살펴봤으므로(창 1:26), 관계적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도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다. 창세기 1장 27절의 둘째 부분은 이 점을 재확인해 주는데, 우리에 대해 개별적으로 말하지 않고 두 단위로 언급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는 우리 창조주와 우리 동료 피조물과의 관계 아래에 있다. 이런 관계는 창세기에서 철학적인 추상 관념으로 남아 있지 않다. 동물 이름을 짓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은 아담과 이야기하시며 그와 협력하셨다(창 2:19). 또한 하나님은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창 3:8)으로 아담과 하와를 방문하셨다.
이런 실질적인 일은 직장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주변 사람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관계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요일 4:7). 혹자는 단순히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내면으로 즉 성부, 성자(요 17:24), 성령 가운데서 흘러넘치는 사랑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간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우리에게로 흘러나와서, 우리에게 제일 유익한 일만을 행한다. 우리 감정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적 사랑과 비교되는 ‘아가페 사랑’이다.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우리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은 인격적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더 깊이 탐구했다. 쉐퍼는 이것이 참된 사랑을 가능케 한다고 말하며, 이에 반해 기계는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관리 하에 두신 모든 것을 우리는 의식적으로 돌봐야 할 책임이 있다. 관계적인 피조물이 되는 것에는 도덕적인 책임이 수반된다.[1]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한다는 건 무엇인가 (창 2:18, 21-25)
우리는 관계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내재적으로 관계적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모든 창조 행위는 “좋다”라거나 “매우 좋다”라고 불렸으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이 “좋지 않다”라고 선언하신 첫 번째 경우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살과 뼈를 취해 여자를 만드셨다.
최초의 여자 하와가 태어나 보니 아담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이후로, 모든 새로운 사람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살로부터 나오게 되겠지만,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잉태하게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한 몸”을 이뤘다(창 2:24). 이것이 순전히 애정 문제나 가정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일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하와는 아담의 ‘돕는 배필’이요 ‘동역자’로 지음받아 에덴 동산을 일구는 일에 동참하게 됐다. 돕는 자라는 말은 아담처럼 그녀도 그 동산을 가꾸게 될 것을 나타낸다. 돕는 자가 된다는 건 일한다는 의미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돕는 사람이 아니다. 동역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이와 더불어 관계 속에서 일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하와를 “돕는 배필”이라고 부르셨을 때 그분은 하와가 아담보다 열등한 자가 되리라거나 하와의 일이 아담의 일보다 덜 중요하거나 덜 창조적일 거라고 의도하신 건 아니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ezer)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시 30:10). 에제르는 분명히 종속적인 자가 아니다. 더욱이 창세기 2장 18절은 하와를 돕는 자로 묘사할 뿐 아니라 동역자로도 묘사한다. 돕는 자와 동역자에 대해 오늘날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영어 단어는 “협력자”(co-worker)다. 이것이 참으로 창세기 1장 27절에서 가리키는 의미다. ‘그분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라는 말은 우선순위나 지배권의 차이를 말하는 게 전혀 아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부합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타락의 비극적인 결과였다(창 3:16).
관계는 일하는 데 부수적인 게 아니라 필수 요소다. 적절한 환경 아래 일터는 깊고 의미 있는 관계의 장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일종의 일로 묘사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멍에란 소 두 마리를 함께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와와 아담을 협력자로 만드셨을 때 의도하셨던 대로 참으로 동역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과 몸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하는 동안, 우리 영혼은 안식을 찾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공동의 선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쉼을 얻지 못한다. 멍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시리즈 4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서신서 · 요한계시록》 3장의 “고후 6:14-18” 부분을 보라.
하나님이 친히 형성하신 관계에서는 권위의 위임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동물 이름 짓는 일을 아담에게 위임하셨는데, 권위의 이전은 진지한 것이었다.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다”(창 2:19). 다른 모든 형태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위임할 때 우리는 권한과 독립성의 일부를 내주고 다른 사람이 한 일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리더십과 경영 분야에서 지난 50년 동안 이뤄진 발전의 대부분은 권한의 위임, 작업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팀워크를 기르는 형태로 성취됐다. 비록 기독교인이 늘 인지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종류의 발전은 창세기부터 일터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많은 사람은 공동의 목적과 목표가 주어질 때 (유급으로 일하든 무급으로 일하든) 서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방대하고 복합적인 재화와 용역을 개인의 역량 이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만든다. 일터에서 관계가 없다면, 자동차도, 컴퓨터도, 우편배달 업무, 법률, 상점, 학교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한 사람 크기보다 더 큰 사냥감은 사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남녀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할 다음 세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몸담은 공동체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철저하게 상호 연계되어 있다. 서로 잘 결합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열매 맺고 번성하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
Francis A. Schaeffer, Genesis in Space and Tim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72), 47-48쪽. 프랜시스 쉐퍼, 《창세기의 시공간성》(생명의말씀사 역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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