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죄로 물든 삶을 회개치 않은 채 드리는 종교의식을 혐오하신다고 이사야는 주장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1-17).
후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책망을 반복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그 나라에 재앙이 임하는 까닭은, 근로자들을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양식을 공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 58:1-8).
평일의 삶과 주일의 삶을 구별하여 사는 오늘날의 세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안 된다. 너희가 나의 법을 알고 나를 사랑한다면, 직장에서 근로자들을 부당하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경험했기에 잘 알았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크리스천이라면, 직장에서도 개인의 삶 전반에서도 삶이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 이사야는 모든 신들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반복적으로 보여 준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사 8:13-14a).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7-29).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13).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사 44:6-7).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사 48:12-13).
이런 크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권세에 압도당해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으나, 이내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잠기면, 우리 영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고, 공의와 의를 일상에 적용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24시간을 살게 된다. 일과 예배는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으로 긴밀하게 묶여 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일하는 방식, 여가를 즐기는 방식을 바꾸며, 우리의 일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도 바꾼다.
일과 예배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는, 일터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기 위해 이사야가 언급한 두 왕의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아하스와 히스기야는 군주로서 유다를 지휘할 책임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나라와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키려는 무서운 적들을 만났다. 그리고 둘 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유다가 적에게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을 기회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빠진 왕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b) 하고 아하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하스는 구제를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대신 경솔하게 앗수르와 동맹을 맺는다.
한 세대가 지난 후 히스기야는 더욱 강력한 적과 맞닥뜨린다. 그때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함락하도록 그냥 두지 않으신다고 확증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했다. 그 결과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18만 5천 명을 쳐 전멸시켰다. 성경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보니 시체뿐이었다’고 밝힌다. 마침내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다시 니느웨로 돌아갔다(사 37:36-37).
두 이야기에서 이사야는, 예배의 초석인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우리를 위협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대조하여 보여 준다. 일터는 우리가 믿음과 두려움 사이에서 선택에 직면하는 장이다. 우리가 일할 때 주님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임마누엘 주님은 심지어 일터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신다(사 7:14).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지 안 믿는지에 따라 우리의 믿음은 믿음으로 굳게 설지, 아니면 우리를 해칠 능력을 가진 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에 압도당할지 결정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참된 예배를 드리고, 일 또한 참되게 할 수 있다.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