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정
하나님을 풍성한 수확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은 유다 백성들은, 자연히 수확량을 결산하면서 하나님을 제외시켰다. 이 때문에 그들은 약자들과 무방비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속이기에 이르렀다.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렘 5:28).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렘 8:6).
하나님의 땅에서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 단지 개인들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을 일하도록 부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에 하나님은 비를 거두셨고,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성공의 원천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와 유사한 모습을 2008-2010년의 경제적인 위기 및 그 위기에 따른 보상 문제,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금전 거래에서의 정직의 문제,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즉각적인 이익을 맹렬히 취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매사를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오늘날의 주요 경제적인 문제들은 너무 복잡해서 예레미야서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끌어내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사람들과 국가의 경제적 안녕과 그들의 영적인 삶과 가치관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경제적인 안녕은 도덕적인 문제다.
탐욕
하나님은 경제적인 사욕을 채우는 것보다 더 높은 목적으로 사람들을 부르신다. 우리의 가장 높은 목적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그 관계 안에서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공급과 물질적인 안녕은 중요한 문제다.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렘 2:2-3).
하나님의 사랑을 최고 관심사로 삼아야 하는데, 경제 이익을 무절제하게 추구하는 탐욕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렘 8:10). 예레미야가 내리는 정죄에서 피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1] 그는 부유한 자들에게나 가난한 자들에게나, 작은 자들에게나 큰 자들에게나 편파적이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려고’ 애를 쓴다(렘 5:1).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도 완악했다(렘 5:4). 다음에는 부자들을 향했는데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어’ 버렸다(렘 5:5).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 말한 대로, “모든 사람들, 더구나 종교 지도자들조차 부도덕한 경제 범죄로 기소되었다. …… 이 공동체는 만족할 줄 모르고 착취를 일삼고, 탐욕을 평가하고 산정하는 기준을 잃어버렸다.” [2]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부를 획득하는 일에 마음이 기울었다. 부자들(왕 - 렘 22:17)이든 가난한 자들이든 간에 탐욕한 자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공선
하나님은 우리가 공공선을 위해 살기를 원하신다.[3] 예레미야는 유다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들이 고아들이나 궁핍한 사람들(렘 5:28)이나 타국인들과 과부들과 없이 사는 사람들(렘 7:6)에게 경제적 이익을 나누지 않고, 그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행위는 도둑질과 살인, 간음과 거짓 맹세, 우상숭배 등 율법을 어기는 것보다 더 큰 죄다(렘 7:9).
예레미야는 특정한 개인들과(“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렘 5:26) 모든 개인들(“유다 사람들” - 렘 7:2), 사업을 주도하는 자들(부자들 - 렘 5:27), 정부(재판관 - 렘 5:28)와 여러 도시들(렘 4:16-18; 11:12; 26:2), 그리고 국가 전체(“이 악한 백성” - 렘 13:10)를 고소한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던 것이다.
일과 일의 소산물이 공공선에 도움이 된다는 예레미야의 주장은, 기업 윤리는 물론이요 개인의 동기 부여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 어떤 행위가 공공선에 공헌하는지는 그 행위의 합법 여부만큼이나 중요하다. 공공선을 훼손하면서 하는 사업이 세상 법으로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합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회사들은 가공 전 부품을 다루거나, 부품들을 조립하여 완성된 상품을 만들거나, 완성된 상품을 소비자에게 배달하는 역할들을 분담한다. 그 네트워크에서 한 회사가 다른 회사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의 수익을 쥐어짜 모든 이익을 손에 넣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런 행위가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해도 정녕 그것이 산업과 공동체를 위한 선이겠는가? 또 그것이 장기간 지속될 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한 노조가 신규 근로자들의 이익을 외면한 채 협상하여 현행 근로자들의 이익을 지켜 내는 것은 합법적일까? 이것이 과연 공공선에도 동일하게 유익할까? 이런 문제들은 복잡하며, 예레미야서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도 없다.
예레미야서는 유다 백성들과 관련이 있고, 그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여러 가지 경제 규정 및 일터 규정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율법을 지키며 산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4]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아직도 일터와 경제 활동에서 정직하지 않음을 간파하셨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따르기는 했지만, 정신을 따르지는 않았다. 예레미야는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땅에서 그들이 수고한 열매를 향유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는 모두 일에서 얻는 이익을 저장하거나 혹은 나누는 기회를 갖는다. 어떤 회사들은 상위 간부들의 손에 보너스와 스톡 옵션을 몰아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회사들은 그것을 모든 근로자들과 널리 나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관계한 모든 성과를 자기의 공으로 돌리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아낌없이 동료들에게 공을 돌린다. 여기에도 물론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단순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내가 이 일에서 얻은 돈과 권한과 인정과 다른 보상들은 주로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그것이 내 동료들과 내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의 이익에 공헌하는가?’
마찬가지로 조직은 탐욕에 치우칠 수도 있고 공공선으로 기울 수도 있다. 만일 기업이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독점권을 부당하게 활용한다거나, 생산품을 팔기 위해 속임수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돈을 탐해서다. 만일 정부가 이웃 나라들을 누르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거나, 시민들을 누르고 지도자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공공선은 물론 그 반대인 탐욕까지도 폭넓게 파악한다. 탐욕은 어떤 특별한 법을 위반하여 얻은 이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필요나 상황을 묵살하고 획득한 그런 류의 이익도 거기에 포함된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그러한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결함
‘고결함’(integrity)이라는 단어는 단순하고 일관된 태도로 윤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사회에서 동일한 윤리 의식을 따른다면, 우리는 고결함을 갖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다른 영역에서 다른 윤리적인 의식을 따른다면 우리는 고결함을 잃어버린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에게 고결함이 결핍돼 있다고 꾸짖는다. 그들은 일터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윤리적인 기준을 위반하고도, 성전에 올 수 있고 거룩하게 행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가 어떠하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듯 보인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7:9-11).
예레미야는 그들을 고결한 삶으로 초대한다. 고결함이 빠진 그들의 경건은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 7:15). 그저 성전에 가기만 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평소 우리가 직장에서 행하는 모습을 포함해 우리가 매일 행하는 행동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렘 2:30-32, 3:25; 7:21-24; 11:7-8; 22:21 등을 보라.
Walter Brueggemann, A Commentary on Jeremiah: Exile & Homecoming (Grand Rapids: Eerdmans, 1998), 72-73쪽.
“TOW 프로젝트 지도위원회”(The Steering Committee of the Theology of Work Project)는 일과 수고의 산물이 근로자나 권력을 쥔 사람들만이 아닌 일반적으로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또는 최소한 사회 다수의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어야 한다는 예레미야의 주장을 기술하기 위해 “common good”(공공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D의견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다. 대다수의 위원이 명백한 영어 의미가 그 상황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기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주안점을 묘사하기 위하여 공공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더욱이 NIV, NASB, RSV와 NRSV와 같은 주요 영어 성경 번역본에서 그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느헤미야 2장 18절과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등장한다. 하지만 소수의 위원들은, 어떤 예레미야 영역본에도 그 용어가 없고, 예레미야서에는 대충이라도 그에 상응하는 어떤 히브리 용어도 없기 때문에,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일 그 용어가 예레미야의 주안점을 기술한다는 대다수의 의견이 옳다면, 예레미야 자신이 그와 같은 방
식으로 기술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더욱이 그 용어는 예레미야와 관계됨직한 명백한 영어 의미를 훨씬 넘어가는 어떤 철학파나 신학파나 정치학파의 전문화된 의미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그 용어를 사용하는 일은, 자칫 예레미야서가 그런 학파들의 사상을 본질적으로 가르친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우려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대다수의 의견에 따라 이 논문에서 그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게 우리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취한다거나 후기 예레미야의 철학이나 신학을 예레미야 본문에서 찾아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수고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도 또한 채워 주는 데 공헌하도록 의도하셨다는 예레미야의 선포를 가리키기 위해 그 용어를 선택하고, 사용할 뿐이다.
몇몇 다른 선지자들과는 대조적으로(겔 45:9-12), 예레미야는 그가 만난 상인들이 불공정한 무게 단위와 계량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데, 그것들은 레위기 19장 36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