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삿1-21장)

아티클 / 성경 주석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 이스라엘에는 항구적인 국가 지도자 직책이 없었다. 대신 위협이 생길 때마다, 예를 들면 군사 공격을 당할 때 이런저런 사람들이 리더 자리에 올랐다. 영어로 “judges”(사사)라는 단어는 실제로는 이들이 나라 안에서 한 역할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사사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shopet)의 뜻은 분쟁의 중재자, 군사 사령관, 지역 총독 등이다.[1] 사사는 분쟁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주변 백성에 맞서 국가의 군사 및 국정도 책임진다. 우리는 사사에 대한 전통적인 호칭을 그대로 쓰긴 하겠지만, “구원자들”(delivers)이라는 통칭이 이 지도자들을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사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지켜보며 여호수아서보다 더욱더 우울한 모습을 발견한다. 사사들이 대를 이어 계승될수록 차츰 자질이 떨어지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완전한 혼란에 빠지고 만다. 이 책은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라는 준엄한 종결부를 가지고 간음, 살인, 내전으로 끝맺는다. 그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말은 자신의 고유한 규범에 따라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미덕을 갖췄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 표현대로 해 본다면, 일등을 차지하기 위해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던 모습을 가리킨다. 그것은 여호수아를 통해 주신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라는 하나님 계명을 순종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계명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편향되고 자기만족적인 시각에서 좋아 보이는 것을 행하는 게 아니다. 사사는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이끄는 데 실패했으며, 그 때문에 나라에 공의를 행하고 국가를 다스리는 데도 실패했다.[2]

 

 

 Temba L. J. Mafico, “Judge, Judging,” ed. David Noel Freedman, 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1992), 1105쪽.

Daniel I. Block, Judges, Ruth,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83-84쪽

우상숭배가 파고들다 (삿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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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1-2장은 여호수아서 13-22장이 끝난 곳, 곧 이스라엘이 그 땅의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했다는 데서 이어진다.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수 17:13). 이제 막 자유를 맛본 이스라엘 족속이 기회를 얻자마자 제일 먼저 노예 소유주로 변모하다니 다소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야 할 주된 이유는 이스라엘을 감염시킬 우상숭배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에덴 동산에서의 뱀처럼 가나안 족속의 우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심을 시험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담이나 하와가 했던 것보다 더 나은 게 없었다. 가나안 족속의 유혹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얼마 못 가서 가나안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기” 시작했다(삿 2:11-13 10:6 등 - NRSV는 이 히브리어를 “worshipping”으로 번역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영어 역본은 좀 더 정확하게 “serving”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가끔 어떤 형상에게 절하거나 이방 신에게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이 성공하는 게 그 지역 가나안 족속의 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삶과 그들의 수고는 우상을 헛되이 섬기는 데 소모되었다.[1]

 

   오늘날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어떤 사람 또는 그 무엇을 섬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비즈니스는 고객과 주주를 섬기고, 정부는 국민을 섬기며, 학교는 학생을 섬긴다. 가나안 족속의 신을 섬기는 것과는 달리 이런 대상을 섬기는 건 그 자체로는 악한 게 아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방식이다. 그러나 만약 고객과 주주, 국민과 학생을 섬기는 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해지거나, 그것이 단순히 우리를 크게 보이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면, 우리는 가짜 신들을 섬기게 된 고대 이스라엘 족속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 팀 켈러는 우상은 고대 종교에서 사라져 가는 유물이 아니라, 비록 거짓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매일 접하는 대단히 복잡한 영성(spirituality)이라고 말한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중요한 것, 당신 마음과 상상력을 하나님보다 더 많이 앗아가는 것,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길 바라면서 추구하는 것은 전부 우상이다. 당신 삶의 중심에 너무도 깊이 자리 잡고 있고 핵심이 되어 있어서, 만약 당신이 그것을 잃었을 때는 당신이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가짜 신이다. 우상은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하는지 당신의 거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 감정, 재정, 자원을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거기에 쏟아 붓게 한다. 가족이나 자녀, 경력, 돈 버는 것, 업적, 비평가의 갈채, ‘체면’을 세우는 것, 사회적 지위 같은 게 바로 그것이다. 또한 낭만적인 연애 관계, 동료의 인정, 능숙함과 기술, 안전하고 안락한 환경, 미모나 두뇌, 대단한 정치 사회적 명분, 도덕성과 미덕, 심지어는 기독교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2]

 

   예를 들면, 선출직 공무원은 대중을 섬기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 사람은 계속 섬겨야 할 대중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선거에서 계속 당선돼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대중을 섬기는 것이 그의 최후 목적이 되면,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남을 속이거나, 겁주거나, 거짓 소문을 내거나, 심지어는 투표 조작을 포함해 선거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뭐든지 정당화하게 된다. 대중을 섬기겠다는 무한 욕망은 대중을 효과적으로 이끌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결부된다.

 

   이는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리처드 닉슨이 가졌던 동기와 비슷할 것이다. 대중을 섬기겠다는 무한 욕망은 그로 하여금 워터게이트호텔의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까지 하게 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선거에서 이기겠다는 막다른 골목으로 그를 몰아갔다. 결국에는 이것이 탄핵을 몰고 왔고, 그는 대통령직을 잃고 수치를 당했다. 우상숭배는 항상 재앙으로 끝난다.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은 배우자, 부모, 자녀라는 역할까지도 그것을 수행하면서 얻는 중간 유익을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우선하려는 유혹에 직면한다. 어떤 이익을 위해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표현이 아니라 궁극적 목적이 되면, 우상숭배가 파고든다. 일을 우상화하는 것의 위험성에 관해서는 이 책 3장의 “출 20:3”과 “출 20:4”, 6장의 “신 5:7; 출 20:3”과 “신 5:8; 출 20:4” 부분을 보라.

 

 

 John Gray, Joshua, Judges and Ruth, The New Century Bible (London: Nelson, 1967), 256쪽.

Timothy Keller, Counterfeit Gods: The Empty Promises of Money, Sex, and Power, and the Only Hope That Matters (New York: Dutton Adult, 2009), 17-18쪽. 팀 켈러,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두란노 역간).

최고의 사사 드보라 (삿4-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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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 중 최고의 사사는 드보라다. 사람들은 그녀의 지혜를 알아보고 상담과 갈등 해결을 위해 그녀에게 나아왔다(삿 4:5). 군대 조직도 그녀를 최고 사령관으로 인정했고, 실제로도 그녀의 명령만 따라서 전쟁에 나갔다(삿 4:8). 드보라의 통치는 너무도 훌륭해서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했는데”(삿 5:31),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어떤 시기에 비춰 보아도 아주 드문 일이다.

 

   오늘날, 어떤 남성 통치자의 딸이나 미망인이 아닌 일반 여자가 근대화 이전 국가에서 그 국가의 중심인물로 부각됐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기는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과 동등하게 여긴다. 사사 가운데 홀로 드보라는 선지자 또는 여선지로 불리는데(삿 4:4),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께서 대면해서 말씀하셨던 모세와 여호수아와 대단히 밀접하게 닮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비밀 요원 야엘을(겐 사람 헤벨의 아내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주해 온 시스라를 자기 장막 안에서 쳐 죽임으로 이스라엘의 칭찬을 받은 여자 - 삿 4:17 5:24) 포함한 어떤 여자도, 군대 총사령관 바락을 포함한 어떤 남자도 여성 리더를 따르는 것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고 있다. 드보라가 선지자이자 사사로 섬긴 것은, 하나님은 여성이 정치, 사법, 군사 지도자가 되는 것을 문제로 보지 않으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드보라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녀에게 재판받으러 나올 때’(삿 4:5)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앉아’ 자기 책임을 감당할 시간을 낼 수 있도록 그녀의 남편 랍비돗과 직계 가족이 가정 일을 분담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늘날 어떤 사회에서, 상당수의 일터와, 특정 기관에서 여성의 리더십은 드보라가 그랬던 것처럼 논쟁이 되지 않게 됐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많은 문화, 권역, 기관에서 여성은 리더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남성이 당하지 않는 속박에 시달려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드보라의 리더십을 되새겨 보는 것이 오늘날 크리스천이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여성의 리더십에 장애가 되는 부적절한 것을 없애도록 도와줌으로써 우리 기관이나 사회를 섬길 수 있을까? 우리 일에서 여성을 우리 상사나 멘토, 롤 모델로 삼으려는 노력에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전쟁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삿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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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보라 이후 사사의 자질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사사기 6장 1-11절은 이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준다. 전쟁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전쟁이 일에 끼치는 영향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다. 경제적 목표물에 직접 타격한 결과 입은 손해뿐 아니라, 무장 충돌로 빚어진 불안정이 사람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지역의 농부는 추수기가 오기 전에 혼란스러울 것이 걱정돼 파종을 꺼릴 것이다. 투자자는 전쟁으로 찢어진 나라를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사회 기반 시설 확충을 위한 자원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 개발 희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국민은 그나마 남아 있는 자원이라도 약탈하기 위해 싸우는 무장 파벌을 따를 수 있다. 따라서 우울한 전쟁의 악순환과 피폐함은 계속되는 것이다. 평화가 풍요보다 중요하다.

 

   미디안 족속 하에서의 이스라엘 경제 상황은 너무도 피폐해서 우리는 미래의 사사인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에게 밀을 숨기기 위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삿 6:11)하는 것을 본다. 대니얼 블록(Daniel Block)은 기드온이 그렇게 행동한 이면에 있는 이유를 이렇게 본다.

 

현대적인 기술이 없던 당시에, 탈곡할 때는 먼저 도리깨로 곡식 낱알을 두들겨 턴 다음 짚을 골라내고, 그다음에는 알곡과 왕겨가 뒤섞인 것을 공중에 까불러서 무거운 알곡은 땅에 떨어지게 하고 왕겨는 멀리 날아가게 했다. 현재 같이 위중한 상황에서 보면 이렇게 탈곡하는 것은 분명 지혜롭지 못한 것이었다. 언덕 꼭대기에서 탈곡하는 것은 약탈을 일삼던 미디안 족속의 주의를 끄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기드온은 포도주 짜는 데 쓰던 가려진 큰 통에서 탈곡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도즙 틀은 바위에다 두 개의 구렁을 만든 것이었는데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높았다. 포도를 윗 구렁에 모아 밟으면 그 관을 타고 즙이 아래 구렁으로 흘러내려 갔다.[1]

 

   오늘날,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사업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데 신자와 비신자 모두 의견을 같이한다. “분쟁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를 국제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현대의 한 예다.[2] 크리스천이 이런 노력을 주도해 가는가? 우리가 일하는 기업, 정부, 대학이나 기관이 부지중에라도 폭력에 가담하는지 안 하는지를 우리는 추적하고 있는가? 우리 상사가 그런 상황을 무시하려고 할 때 우리는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위험을 무릅쓰는가? 아니면 기드온처럼 그냥 우리 할 일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숨는가? 

 

 

 Block, Judges, Ruth, The New American Commentary, 258-259쪽.

 http://www.amnestyusa.org/our-work/issues/business-and-human-rights/oil-gas-and-mining-industries/conflict-diamonds, accessed December 14, 2013.

기드온의 양면적인 리더십 (삿6:1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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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드온은 일터나 다른 곳에서 이스라엘 사사의 인품상의 역설적 특징과 양면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준다. ‘기드온’이라는 이름은 문자적으로 “난도질하는 자”(hacker)라는 뜻이며[1] 그것은 사사기 6장 25-27절에서 보여 주는 대로 자기 아버지가 세웠던 우상을 기드온이 난도질할 때 이름 뜻의 긍정적인 방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서 이 일을 밤에 했다는 것은 불편한 부분이다.)[2]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표적을 구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사사기 6장 36-40절에 나오는 양털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 사건에서 기드온에게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양보하시지만, 그것은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특히 직업의 인도하심을 구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따라야 할 하나의 본으로 보기는 어렵다. 도리어 그것은 그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 결국은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흔들리는 헌신에 대한 하나의 표적이었다.[3] 기드온의 분별 방법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위해서는 Decision Making by the Book(책으로 하는 의사결정)[4]과 《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Decision Making and the Will of God, 생명의말씀사 역간)[5]을 보라.

 

   물론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요점은 기드온이 미디안에게 놀라운 승리를 거둔 것이다(삿 7장). 그에 비해 기드온이 뒤이어 지도자로서 저지른 실패는 덜 알려졌다(삿 8장). 숙곳과 브누엘 거민은 그 전투 후에 그의 부하를 돕기 거부했는데, 기드온이 그 성읍들을 잔인하게 파괴한 것은 그들의 행위와 다소 어울리지 않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기드온은 다시 그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 침범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단칼에 죽여 버린다.[6] 왕이 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완강한 항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목만 빼고는 실제로 전제 군주가 됐다(삿 8:22-26).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드온이 나중엔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에봇이 그의 백성에게 “올무”가 됐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서 그것을 음란하게 예배(worshipping, NIV)했다(삿 8:27). 위대한 자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잘 보라!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위대한 사람의 은사를 우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감사하는 법을 찾아내는 것일 수 있다. 기드온처럼 오늘날 장군도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 수는 있겠지만 평화로운 시기에는 폭군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천재는 음악이나 영화에 있어 우리에게 숭고한 통찰력을 줄 수 있지만, 부모 역할이나 정치에 있어서는 우리를 잘못 인도할 수도 있다. 기업의 총수는 위기에서 회사를 건져 낼 수도 있지만, 평안한 때에는 회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 이와 똑같은 불연속성은 우리 스스로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에서는 직급이 올라가지만 가정에서는 불화하며 살 수 있으며, 그 반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개인 업무 처리 능력은 인정받지만 관리에는 실패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선한 것을 훨씬 많이 성취하지만, 성공 때문에 자신을 의지할 때는 거대한 파멸로 역풍을 맞을 수 있다.[7] 사사기의 사사들처럼 우리도 모순의 사람이요, 깨어지기 쉽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자 한편으로 절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용서와 변혁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점이다. 

 

 

Robert G. Boling, “Gideon (Person),” ed. David Noel Freedman, 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1992), 1013쪽

 Daniel I. Block and J. Clinton McCann, Judges, Interpretation (Louisville: John Knox, 1989), 61쪽

양털 사건에 대한 맥켄(McCann)의 주석을 참조하라(66쪽). “한마디로 기드온은 약간 우스꽝스럽게 시작하고 있다. 갈수록 믿음이 더 커지는 게 아니라, 그는 점점 더 믿음이 없어지고 더욱 겁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Haddon W. Robinson, Decision-Making by the Book (Wheaton, Ill.: Victor Books, 1991)

Garry Friesen and  J. Robin Maxson, Decision Making & the Will of God: A Biblical Alternative to the Traditional View (Portland, OR: Multnomah Press, 1980). 게리 프리슨, 《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생명의말씀사 역간).

Block, Judges, Ruth, The New American Commentary, 287쪽의 “Gideon, the fearful young man, has become a brutal aggressor”을 참조하라.

 Tomas Chamorro-Premuzic, “Less-Confident People are More Successful,” Harvard Business Review, July 6, 2012, accessed at http://blogs.hbr.org/2012/07/less-confident-people-are-more-su/ on May 23, 2014.

사사들의 리더십의 실패 (삿6-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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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드온이 저지른 실패는 그 뒤를 잇는 사사들에게서 더욱 심각해진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권력을 하나로 모으긴 했으나 자기 앞길에 장애가 되는 형제 70명을 죽여서 이뤄낸 통일이었다(삿 9장). 입다는 산적으로 출발해 백성을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구해 오지만, 자기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맹세를 함으로써 가족과 자녀를 무너뜨린다(삿 11장). 가장 유명한 사사인 삼손은 블레셋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이방 여인 들릴라의 유혹에 굴복하는 바람에 스스로 멸망을 초래했다(삿 13-16장).

 

   이 모든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 일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먼저 사사기는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명백하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등 상당수의 사사가 신약에서 라합과 더불어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다(히 11:31-34). 사사기는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운 고난에 직면했을 때 사사에게 구원의 행동을 하도록 하나님의 성령이 힘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을 주저 없이 기록한다(삿 3:10 6:34 11:29 13:25 14:6-9 15:14). 더 나아가 사사는 단순히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은 도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능동적으로 반응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거듭 구하셨다.

 

   그러나 사사기의 전반적인 이야기 흐름은 사사들을 우리의 롤모델로 삼으라고 권면하지 않고 있다. 이 책에 나타난 괴로움은 나라가 엉망진창이고, 타협으로 꽉 차 있으며, 나라의 지도자들은 하나님 언약에 불순종해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는 데 있다. 성공은,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성공까지도 반드시 하나님의 호의를 선언하는 공표가 아니다. 일터에서 우리가 수고한 것이 복이 될 때, 특히 어려운 환경에서 복이 될 때, ‘음, 하나님이 이 일에 분명히 함께하시네. 내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분이 내게 상을 주시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온다. 그러나 사사기 역사는 하나님은 그분이 하시고 싶을 때,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방법으로, 그분이 일하시고 싶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우리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신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성공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라도 있는 듯이 복을 받아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로마서 2장 1절에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번영 신학의 초기 형태가 얼굴을 드러내다 (삿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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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의 중심 부분이 압제와 구원의 사이클에 갇혀 절망하는, 결함 있는 영웅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면, 17장부터 21장까지의 마지막 부분들은 구속의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것 같은 타락한 백성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사사기 17장은 우상숭배 패러디로 시작한다. ‘미가’라는 사람이 돈이 많아서 그의 모친이 그 돈으로 우상을 만들고, 미가는 프리랜서 레위인을 자기 개인 제사장으로 고용한다. 미가가 집에서 키워 온 값싸고 번지르르한 신흥종교가 구제불능 신학(abysmal theology)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 놀랍지 않다.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삿 17:13). 다시 말하면, 자신의 우상숭배 사업에 종교적 권위를 갖게 됨으로써 미가는 자신이 갈망하는 좋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님을 제멋대로 써도 된다고 믿은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이 여기서는 최악의 방법으로 낭비되고 있다. 탐욕과 교만을 가리기 위해 신을 만드는 데 쓰이니 말이다.

 

   하나님을 ‘번영하게 해 주는 기계’로 둔갑시키고 싶어 하는 충동이 없었던 시절이 없다. 오늘날에는 소위 ‘번영(형통)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부와 건강과 행복을 반드시 보상받는다고 선동한다. 일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번영 신학은 하나님께서 소나기처럼 퍼부으시는 부요함의 단비를 내려 주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일을 방치하게 만들고, 방탕에 빠지게 한다. 이것은 가족과 공동체를 태만히 대하게 만들고, 동료들을 학대하게 하며, 사업을 비윤리적으로 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므로 자신은 일반인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에서는 예외라고 확신하게 만든다.

 

인간의 부패와 종교적 권위의 결탁이 드러나다 (삿18-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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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타락과 우상숭배,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는 가장 끔찍한 사건이다. 단 지파 자손이 미가의 우상과 레위인을 포함한 종교 사업 전부를 그대로 취해 가져갔다(삿 18:1-31).

 

   한편 한 레위 남자가 멀리 있던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했으나, 가정불화로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레위인은 그녀를 달래서 데려오려고 베들레헴으로 갔다. 닷새 동안 머물며 장인과 먹고 마신 레위인은 무모하게도 해가 지기 전에 집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어느 성읍 광장에 이르렀는데 아무도 맞이해 줄 사람이 없었다. 누구도 그를 맞아 주지 않다가 마침내 에브라임 지파의 한 노인이 그날 밤 묵고 갈 숙소를 제공해 줬다.

 

   그날 밤 그 성읍 불량배들이 집을 에워싸고 노인에게 그 방문객을 강간하겠다며 내놓으라고 요구했다(삿 19:22). 노인은 나그네를 보호하려고 애썼지만,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 그 노인이 내놓은 생각은 가슴을 에이게 한다. 레위인을 살리기 위해 노인은 자신의 어린 딸과 레위인의 첩을 폭도들에게 내 주기로 한 것이다. 그 레위인이 직접 자기 첩을 문 밖으로 내보냈는데, 어쩌면 이것은 종교 권력과 성적 학대가 결탁된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첩을 강간했고 날이 밝을 때까지 그녀를 능욕했다(삿 19:25). 레위인은 그녀의 시체를 토막 내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냈고, 그 시체를 받은 이스라엘 지파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베냐민 지파를 거의 멸절했다(삿 20-21장).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화된 것이다.[1]

 

   사사기의 결론 부분은 그 끔찍한 사건을 이렇게 간결하게 요약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이것은 백성이 여호와를 섬기도록 인도해 주는 지도자가 없이는 사람은 각자 자신의 악한 방법과 욕구를 따라 살지, 누구의 감독 없이도 옳은 일을 행하도록 인도해 주는 내재적 도덕적 나침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의 일터 반경 안에서 (여성과 외국인의 학대를 포함해) 힘없는 자를 위협하는 일은 충격적일 만큼 흔하게 일어난다. 우리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불의에 직면한 사람 편에 설지 아니면, 그 피해가 지나갈 때까지 바짝 엎드려 있을지 개별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조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리는 인간 행위의 악을 제어하는 시스템과 구조를 위해 일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심지어는 우리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우리 일터에서 가해지는 학대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으며, 우리가 권위의 자리에 있지 않을 때는 특히 더 심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당신이 힘이 있다고 여길 때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나이가 많아서든, 그곳에서 더 오래 일했기 때문이든, 회사 상사와 자주 얘기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든, 또는 어떤 특정 인종에 속했거나 언어권에 속했기 때문이든, 교육을 더 받아서 그렇든, 당신 의견을 더 잘 표현해서든 간에 말이다. 그때 당신이 학대받는 사람 편에 서 주지 않는다면, 학대를 가하고 당하는 시스템에 일정 부분 기여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오는 경우가 많다면, 당신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인지한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천박한 농담을 던지는 사람 편에 서거나, 또는 신입 사원이 왕따 당하는 것을 본체만체한다면, 당신은 희생자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며, 다음 단계 학대를 위해 길을 닦는 것이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들에 펼쳐지는 소름 끼치는 사건들을 읽노라면 우리가 그 시대에 살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깨어 있다면, 날마다 출근하는 우리의 일상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어떤 사람이나 지도자가 하는 일에 못지않게 도덕적 중요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블록(Block)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화(化)를 자신의 사사기 주석의 주제로 삼고 있음을 주목하라. Block, Judges, Ruth, The New American Commentary를 참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