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수2-12장)

아티클 / 성경 주석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모두에서 땅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주요한 특징이 될 만큼 중요하다. “그 땅이 …… 평온(rest, NIV)하였더라”(삿 3:11, 30 등). 여호수아서의 주된 활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수 2:24 1:6).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공연해 나가시는 드라마의 중심 무대이며, 하나님이 그 나라에 하신 약속의 핵심이다. 모세의 율법조차 그 땅과 뗄 수 없게 얽혀 있다. 율법의 주요 조항 중 많은 것이 그 땅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의미 있으며, 그 언약 아래서 가해지는 가장 무거운 벌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내가] 그 땅을 황무하게 하리니 거기 거주하는 너희의 원수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놀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레 26:32-33).

 

   그 땅, 우리가 밟고 서 있는 흙은 우리 실존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심지어 바다로 나가거나 하늘로 나가는 사람도 대부분의 시간은 땅에서 보낸다.) 자기 백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실체 없는 추상이 아니라, 그분의 의지가 실현되고, 그분의 임재가 보이는 아주 명확한 장소다. 매 순간 우리가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우리가 그분의 일을 해 나가야 하는 유일한 곳이다. 창조는 선 아니면 악이 거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실제 창조물들과 문화 안에서 선하게 일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함으로써 가나안 땅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라는 사명을 받았다. 우리도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게 일함으로써 우리 일터를 거룩하게 만들라는 똑같은 사명을 받았다. 

 

땅을 경작하다 (수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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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땅은 고대 근동의 기준에 의하면 당연히 윤택한 땅이었다. 그러나 그 땅의 축복은 창조주의 손길로 공급되던 온화한 기후, 풍부한 물, 그 외 천연 혜택을 넘어섰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이 잘 갖춰 놓은 사회 기반시설도 물려받을 것이다.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수 24:13 신 6:10-11 참조). 심지어는 그 땅을 묘사하는 표시도 일정 수준의 가축 관리와 양봉업을 짐작하게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수 5:6 출 3:8)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땅과 노동 간에는 뗄 수 없는 연결 고리가 있다. 우리 생산 능력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근면함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쓸 수 있는 자원에서도 나온다. 반대로 땅은 그 자체가 일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땀을 흘리면서 빵을 생산해 내야 한다(창 3:19). 이 점은 여호수아 5장 11-12절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다.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이스라엘은 광야 유랑 기간 동안 하늘로부터 온 선물인 만나로 살아남았으나, 하나님은 이것을 식량 공급을 위한 항구적 해결책으로 삼으실 의도가 전혀 없으셨다. 이제는 땅에서 일해야 했다. 풍부한 자원과 결실을 맺게 하는 노동은 약속의 땅의 빠질 수 없는 구성 요소였다.

 

   그 요점은 아주 당연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때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 물리적 필요를 공급해 주실 수도 있으시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노동한 결실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땅의 정복을 허락하시는가 (수6-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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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풍성한 경제가 가나안 족속을 그 땅에서 쫓아내는 것에 기반을 뒀다는 사실은 조금은 불편한 질문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땅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정복을 인정해 주시는 걸까? 하나님은 종족 전쟁을 용인하시는 걸까?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보다 그 땅을 차지할 자격이 더 있었다는 말인가? 정복에 대한 자세한 신학적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1] 그렇게 야기된 무수한 질문에 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몇 가지 명심할 것은 있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해 소집된 세력이 방대하고 대단히 강하던 고대 근동의 무법천지 같은 곳에서 자기 백성 만나기를 의도하셨다.

 

2. 군사 정복이라는 일이 여호수아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일이지만, 그것은 그 뒤에 나오는 다른 모든 일의 모델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서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한 일과 리더십의 면면을 찾아볼 수 있으나, 사람을 땅에서 쫓아내는 것은 그런 적용점의 하나가 아니다.

 

3.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라는 명령은(수 1:1-5) 대단히 특수한 명령이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족속이나 다른 인종에게 하시는 일반적인 성질의 명령은 아니다.

 

4. 가나안 족속의 멸절은 악명 높았던 그들의 사악한 생활방식 때문이었다. 가나안 족속은 어린아이 공양, 신접, 무당 및 강신술 등에 참여했는데, 그것은 온 세상을 축복하는 통로가 되길 원하셨던 하나님이 택한 백성(신 18:10-12) 가운데서는 용납하실 수 없던 것이었다. 그 땅은 우상숭배가 근절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온 세상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2]

 

5. 라합같이 회개한 가나안 사람은(수 2:1-21 6:22-26) 살아남았다. 실제로는 가나안 족속이 완전히 멸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6.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할 자격이 더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확실하게 답할 수 있을 만큼 이스라엘도 결국 가나안 족속 못지않게 사악한 행위를 그대로 했다. 가나안 족속처럼 이스라엘 족속도 다른 나라의 정복으로 그 땅에서 쫓겨나는 고난을 겪을 것이며, 성경은 이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이다(암 3:1-2).

 

7. 힘에 대한 완전한 크리스천 윤리는 여호수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 전부를 구체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부활에서 찾아야 한다. 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여러 나라를 정복하시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목숨을 내주신 데서(막 10:42-45 요 10:11-18) 찾아볼 수 있다. 힘에 대한 성경적 윤리는 궁극적으로는 희생과 겸손을 바탕으로 한다. 

 

정복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책을 보라. C. S. Cowles, Eugene Merrill, Daniel L. Gard, and Tremper Longman III, Stanley N. Gundry, ed., Show Them No Mercy: 4 Views on God and Canaanite Genocide (Grand Rapids: Zondervan, 2003).

 J. Gordon McConville and Stephen N. Williams, Joshua: The Two Horizons OT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2010), 113-114쪽을 보라.

그 땅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다 (수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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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땅의 백성에게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이다. 백성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을 구현한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강 가운데에서 기념하는 돌들을 가져다 세움으로써 이 복을 축하했다.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번성과 안정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게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일은 항상 그들을 위해 앞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에서 나왔다.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에서 끊어질 때마다 그들의 수고의 궤적은 하향곡선을 그렸다. 사사기 2장 10-11절에서 들리는 칙칙한 곡조가 증거한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이 그로 인해 직면한 문제는 그들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우리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스스로 물어볼 수 있다.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을 잘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릴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에서 우리 대부분은 우리 자신이 잘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사이의 긴장, 혹은 로라 네쉬(Laura Nash)가 이 역동성을 탁월하게 분석한 대로, “사리사욕이라는 나 중심 시스템”과 “다른 사람의 행복한 삶” 사이의 긴장을 느낀다.[1] 그것은 아무도 우릴 돌봐주지 않는 게 두려워서 우리가 기어이 일등이 되려고 지나치게 애쓰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을 기억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중 상당수는 일에서 우리가 거둔 성공의 기념물(상장, 기념패, 사진, 훈장, 자격증 같은 것)을 간직한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내가 마땅히 얻을 걸 가진 거야’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매일매일 여기서 나와 함께해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이것이 다른 사람을 더 돌보게 우리를 좀 더 자유롭게 해 주면서, 우리도 여전히 돌봄을 받고 있다는 기분을 받게 하지 않을까? 이것을 시작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하루를 지내는 동안, 당신에게 직접 일어나는 일이든 당신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든 간에,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좋은 일들을 마음속으로 기억해 두거나 적어 놓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셨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요단강변에 세웠던 돌처럼, 이런 것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일종의 기념석이 된다. 본문에 따르면 그 기념하는 돌들은 그들에게 아주 강력한 회상이었고, ‘그 돌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다’(수 4:1-9). 

 

 Laura Nash, Believers in Business (Nashville: Thomas Nelson, 1994), 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