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2장 1절이 말하는 것처럼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그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던 간에 보아스의 경우는 그가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리더 중 하나임을 의미한다. 보아스의 리더십 스타일은 존중에서 시작한다. 자기 일꾼이 일하는 밭으로 나왔을 때 보아스는 그들에게 축복하며 인사하고(“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일꾼들도 친절하게 응대한다(“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룻 2:4). 보아스의 일터는 여러 면에서 아주 놀라운 곳이다. 보아스는 고용된 일꾼의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는 기업을 소유해 경영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근로 환경을 관리하고 있었다. 감독관과 소유주가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를 경멸하고, 근로자 역시 자신의 상사를 존경하지 않는 많은 일터와는 대조적으로, 보아스는 신뢰와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었다.
보아스는 일꾼이 일할 때 물을 제공하고(룻 2:9), 그들과 함께 식사하며, 무엇보다 그들 가운데 가장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던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 줌으로써(룻 2:14) 자기 일꾼을 실질적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심지어 추수기 때는 지주인 보아스가 수확한 자기 곡식을 키질하고, 들판에서 일꾼과 같이 잠까지 잔다(룻 3:2-4, 14).
보아스는 자기 일터의 이방 여인을 아주 사려 깊게 대해 줌으로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창 1:27 잠 14:31; 17:5) 본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보아스가 일꾼 가운데서 그 여인을 봤을 때 그는, 그녀가 어떤 한 남자의 아내이거나 딸인 줄 알고 온유하게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고 묻는다. 그 여자가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돌아온 모압 여인이라는 말을 듣고, 또 자기 추수꾼 뒤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게도 그가 한 첫마디는 “내 딸아 들으라”였다(룻 2:5-8). 자신의 음식을 외국 여자와 나누는 것(룻 2:14)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행동이다. 룻이 감탄하며 말했듯이 존경받는 지주가 외국 여인과 대화하는 것은 관례상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룻 2:10).[1] 사회적 체면과 사업 기회에만 관심이 있던 남자라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별로 없던 사람이라면, 모압 여자를 자기 땅에서 당장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는 일꾼들 가운데서도 더 딱한 형편인 그 일꾼을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녀 편에 섰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서 어쩌면 우리는 세계 최초로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 반대 정책에 대한 기록을 접하게 된다. 어쩌면 그는 많은 농장주와 일꾼들이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2] 어쩌면 이것이 바로 보아스가 룻에게 자신이 자기 일꾼에게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일러두었다고 알려 주는 이유일 것이다(룻 2:9). 나오미가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룻 2:22)라고 한 말은 그녀가 자기 며느리의 안전을 걱정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보아스의 정책에 나타난 조건은 아주 분명하다.
1. 남자 일꾼은 이 여자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naga’라는 단어는 ‘건드리다’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그 단어는 대개 ‘때리다, 괴롭히다, 이용하다, 학대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3] 보아스는 ‘건드리다’라는 것의 의미는 피해자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2. 룻은 똑같이 물(룻 2:9)과 점심식사 자리(룻 2:14)를 이용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에 보아스는 룻에게 자신과 자기일꾼 쪽으로 와서 그녀가 가져온 빵 조각을 자기 소스에 찍어 먹으라고 권유했다. 그런 다음 보아스는 그녀가 배부르고 남을 정도로 그녀를 친히 챙겨 줬다. ‘가까이 오다, 다가가다’라는 뜻의 동사로 ‘nagash’를 고른 것은 이방인인 룻이 의도적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희롱을 방지하는 보아스의 정책은 단순히 제한적이지 않았고 적극적인 것으로, 학대를 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의 반응이 무엇이 학대고 아닌지를 정할 수 있는 기준임을 의미했다. 보아스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보호를 제공할 때 룻이 얼마나 안정감을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취약한 여성 근로자가 어떻게 존중되어야 하는지 실례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3. 보아스의 정규직 일꾼은 룻을 책망하거나(룻 2:15) 꾸짖지(룻 2:16) 말아야 했다. 2장 9절에 나오는 ‘괴롭게 말라’(NRSV에는 “bother”, 개역개정에는 “건드리지 말라”)라는 단어와 함께 이런 표현은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 언어적 학대 등 여러 형태로 학대가 온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감정을 실어 룻에게 한 그의 축복 선언으로(룻 2:12) 보아스는 극적으로 그 모델을 확정한다.
4. 정규직 일꾼은 룻의 근로환경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고 룻이 이삭을 충분히 주울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의무 이상을 해야 했다(룻 2:15-16). 일터에서 학대를 금지한다는 것은,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근로자에게 생산성이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생산성과 승진, 포상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 장벽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보아스는 남자 일꾼에게서 룻을 멀리 떼어놓아 룻의 안전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버리면 그녀가 물이나 음식도 먹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가 주워 단으로 묶기 전에 바람이나 짐승이 이삭을 가져가 버렸을 수도 있다. 보아스는 자신이 만든 안전장치가 룻이 생산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확실히 했다.
보아스의 일꾼들은 그의 너그러운 정신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들의 상사가 그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넸을 때 그들도 축복의 말로 화답했다(룻 2:4). 보아스가 자기 밭에 나타난 여인의 정체를 물었을 때 인력 감독관은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것을 밝히긴 했지만,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룻 2:6-7). 룻이 집에 있는 나오미에게 보리 한 에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룻을 잘 대해 주라는 보아스의 명령에 일꾼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일꾼들은 그녀를 위해 상당히 많은 곡식을 잘라두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이 모압 여인을 추수기간 동안 자신의 동료 일꾼으로 받아줬다(룻 2:21-23).
보아스가 보인 리더십의 긍정적인 측면은 일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오미가 룻이 수고한 결과를 봤을 때, 나오미는 룻에게 일자리를 준 사람을 축복하며 그의 인자와 너그러움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룻 2:20). 나중에 그 공동체 안에서 보아스가 가진 높은 명성이 사회적 조화와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온다는 게 명백해진다(룻 4:11-12). 모든 지도자, 아니, 사실상 모든 근로자는 그들이 속해서 일하는 문화를 형성한다. 비록 우리는 우리 문화에 의해 불공평하고, 무의미하거나, 생산적이지 못한 방식의 일에 동화하라는 강요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부패하고 신실치 못한 사회(룻기 1장 1절의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말은 부패한 사회를 간략히 서술한 것이다) 가운데서 재력가였던 보아스는 정직하고 성공적인 사업을 창출해 낸다. 추수 감독관은 여자를 싫어하고 인종 차별이 심하던 사회에서 평등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룻과 나오미는 끔직한 상실과 어려움 앞에서도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든다. 우리가 나쁜 근로 환경에 동화하라는 압박을 느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약속은 우리 주변의 문화적 사회적 역기능 때문에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의심을 이길 수 있게 해 준다.
Fredric W. Bush, Ruth, Esther,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Incorporated, 1998), 129쪽.
Daniel I. Block, “Unspeakable Crimes: The Abuse of Women in the Book of Judges,”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Journal 2 (1998): 46-55쪽.
Block, Judges, Ruth, 659-660쪽.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