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유다 선지자들의 배경과 연대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있다. 주요 쟁점과 그들의 저술 정황을 전반적으로 다룬 논의는 ‘예언서의 이해’(208쪽) 부분을 참조하라. 소선지서와 관련해서만 개요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첫 번째 묶음에서 호세아, 아모스 그리고 미가가 BC 8세기에 활동했다는 데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한다. 그 무렵은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통일 왕국이 이스라엘로 알려진 북 왕국과 유다로 알려진 남 왕국으로 분열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때다. 미가는 남유다를 향해 말한 남유다 출신이고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을 향해 말한 북이스라엘 출신이다.
8세기가 열리면서 남북 왕조는 모두 솔로몬 시대 이래로 사상 유례가 없는 번영과 주변국들과의 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처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 눈에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왕조 갈등들이 지배층들을 사로잡으면서 경제와 정치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변화무쌍해졌다. 대외적으로는 그 지역에서 서서히 초강대국으로 재부상하던 앗수르가 남북 왕국 모두에게 점차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갔다. 실제로 북 왕국은 BC 721년경에 앗수르 군대에게 전멸당했다. 비록 그들의 존재 흔적을 오늘날 사마리아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긴 하지만(왕하 17:1-18), 북 왕국은 하나의 정치적인 실체로는 다시는 등장하지 못했다. 선지자들은, 남유다에 한 것과는 달리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 율법의 윤리적 요구사항들을 어긴 것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을 대놓고 비난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도록 자신들은 여호와와 언약을 맺었다는 잘못된 안정감에 의지해 그들 스스로 미혹되었다.
남 왕국은 히스기야 왕 치하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서 앗수르의 위협에서 살아남았지만(왕하 19장), 바벨론 제국의 발흥이라는 더 큰 도전에 직면했다(왕하 21장). 불행하게도 유다는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후에도 자신들의 우상숭배를 회개하지 않았다. 결국 BC 587년, 바벨론에 멸망당한다. 이로써 유다 사회 인프라는 완전히 파괴되고 유다 지도자들은 바벨론 제국으로 포로로 잡혀간다(왕하 24-25장).
선지자들은 이 멸망을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내린 형벌의 증거로 여겼다. 이것은 소선지서 가운데 나훔, 하박국, 스바냐서에 신랄하게 기록했다. 아울러 같은 시대 인물들로 추정되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쓴 예언적 내용들도 함께 담았다. 성경의 각 권들은 그들의 선지자 경력을 기록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 내용을 다루지는 않을 생각이다.
바사의 고레스 왕은 바벨론을 멸망시켰고 그 권력을 쟁취했다. 이후 바사 제국은 유다 백성들의 고국 귀환을 허락했고, 아울러 그들의 성전과 핵심 기관 재건도 허락해 주었다(스 1장). 이 모든 일은 바사 제국이 기꺼이 그리한 것이었다.[1] 학개, 스가랴,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기간에 자신들의 사역을 감당했다.
요약하면, 소선지서는 하나님 백성들의 광범위한 삶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일에서 신앙 표현이 필요한 여러 상황에서 여러 다른 패러다임들을 반영한다.
Carol L. Meyers, Eric M. Meyers, Haggai, Zechariah 1-8: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he Ancher Bible (New York: Doubleday, 1987), xxxi-xxxii.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