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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윤리란 어떤 것이 선하고 옳은 것인지를 알고 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직업 윤리란 일터에서 어떤 것이 선하고 옳은 것인지를 알고 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윤리란,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관한 다른 자료들을 통해 어떤 것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지 결정하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윤리'와 '도덕'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윤리에 대한 세 가지 보편적 접근법은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사고뿐만 아니라 일반 세상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이 세 가지 접근법은 다음과 같다.
- 명령(Command) — 규칙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라 말하고 있는가?
- 결과(Consequences) — 어떠한 행동이 가장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는가?
- 성품(Character) — 나는 어떠한 도덕적 사람이 되고 싶은가?[1]
기독교 윤리를 구분 짓는 것은 다른 접근법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접근법마다 성경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명령(혹은 원칙), 성경적으로 바람직한 결과, 그리고 성경적 인격의 특징(혹은 덕목)을 자신들의 윤리적 결정, 행동, 그리고 형성 과정에 적용시켜야 한다.
기독교적 윤리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각 접근법에 대해 성경으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 세 가지 접근법을 어떻게 결합시켜 좀 더 균형 있고 통합된 접근법을 도출해낼 수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타락하거나 불완전한 세상의 현실 속에서, 그리고 완벽한 해결책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일터에 적용되는 윤리의 기독교적 접근법을 확립할 것이나, 직업 윤리와 관련된 주요 쟁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기독교적 윤리의 원칙과 방법을 설정해 독자들이 이러한 원칙들을 여러 문제와 상황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제 이러한 접근법들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설명이 제시될 것이다. 하나는 실생활 사례연구를 이야기 형식으로 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좀 더 체계적으로 다른 접근법들을 설명한 것인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읽으면 된다. 체계적인 접근법은 좀 더 간결하고 요약적이다. 이야기 형식의 접근법은 조금 더 길며, 자동차 딜러인 웨인커클랜드가 겪은 실제 상황에 위의 접근법들을 적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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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 요약은 Rev. Dr. Gordon Preece의 허락 하에 사용됨.
윤리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
목차로 돌아가기서론
인간이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직업은 다른 관점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세상 속에서 우리의 지위와 직업을 보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일을 통해 얻으려는 가치들, 이 모든 것을 형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에 관한 인식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할 핵심 사항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우리는 그분의 끊임없는 사역을 위해 함께 일하는 동반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인식이다. 우리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자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숙지해야 우리의 직업 윤리관 속에 다른 관점들과 구별되는 기독교적 관점을 적용할 수 있다. 우선 보편적인 시각으로 윤리를 살펴보도록 하자.
정의
목차로 돌아가기“윤리”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에토스(ethos)”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습관이나 관습이고 다른 하나는 법령 또는 법률이다. 신약에서의 “윤리”는 이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전부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5:16에서는 주로 "법"이라고 번역되며 ["내주는 것은 로마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였노라."] 고린도전서 15:33에서는 "행실"이라고 번역된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윤리와 도덕이라는 이 두 단어는 흔히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윤리는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거나 영향을 주는 도덕적 원칙들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데니스 홀링거(Dennis Hollinger)는 윤리란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기준에 대한 체계적인 학문으로, 이러한 기준들을 삶의 현실 속에서 적용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라고 말했다.[1]
기독교적 윤리에 따라 사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유하는 근본적인 믿음의 약속에 따라 삶의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의 걸음을 이끌어 나가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2] 혹은 다른 정의에 따르면, "기독교적 윤리는 성경에서 보이는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며, 성령님에게 응답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결과를 내는 의사결정의 틀과 방법을 제공하려는 시도이다."[3]
Dennis P. Hollinger, Choosing the Good: Christian Ethics in a Complex World (Grand Rapids: Baker, 2002) 14쪽.
Stanley J. Grenz, The Moral Quest (London: Apollos, 1997) 19쪽.
Alistair Mackenzie and Wayne Kirkland, Just Decisions (New Zealand: NavPress NZ, 2008).
윤리에 대한 다른 접근법들
목차로 돌아가기개요
우리는 기독교적 윤리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을 윤리와 도덕적 사고에 대한 다른 일반적 접근법들을 이해하는 데 적용시켜야 한다.[1] 일반적으로 세 가지 다른 접근법을 찾아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명령, 결과, 그리고 인격이다.[2]
명령 접근법
명령 접근법은 "이 행동 자체가 규칙을 준수하는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접근법이다. 이는 흔히 의무론적 접근법(deontological approach)이라고도 불린다. 의무 또는 규칙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deon'에서 유래한 이름이다.[3] 이는 일련의 규칙이나 의무사항에 따라 어떠한 행동이 본질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보는 명제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일련의 의무사항이나 규칙은 하나님의 명령, 자연법, 이성적인 논리 혹은 다른 것에서 비롯될 수 있다. 기독교적 윤리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 혹은 성경에서 논리적으로 유추해낼 수 있는 명령에 초점을 맞춘다.
결과 접근법
결과 접근법은 "이 행동이 좋은 (혹은 나쁜) 결과를 초래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접근법이다. 이는 종종 목적론적 접근법(teleological approach)라고도 불리는데(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telos'에서 유래[4]) 그 이유는 최종 결과를 통해 어떠한 행동 방법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가장 도덕적인 행동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통해 결정될 수 있다.
- 어떤 행동이 가장 최고의 선으로 이어질까? 공리주의[5]는 목적론적 접근법의 대표적인 예로서, 최대 다수에게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최고의 선이라고 정의한다.
- 어떠한 행동이 개인의 이익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윤리학적 이기주의[6]라고 불리는 체계는 각 개인이 일정 한도 내에서 자신의 최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최고 이익을 달성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가정한다.
- 창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에 가장 적합한 결과를 내는 것은 무엇인가? 이 접근법은 장애인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과 같은 부수적인 목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궁극적인 목표에도 초점을 맞춘다. 상황이 복잡한 경우를 만났을 때, 이 접근법은 어떠한 행동이 악을 이기고 선의 균형을 최대화할 수 있는지 추정하고자 한다.
행복이나 개인의 이익 모두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에게 바라는 최고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공리주의나 윤리학적 이기주의 모두 기독교적 형태의 윤리로 간주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성경적인 규칙 체계가 있다고 해서 윤리적 명령이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닌 것처럼, 그러한 결과들도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인격 접근법
이 접근법은 "선한 동기를 지닌 행위자는 선한 사람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도덕적 행위 과정은 대체로 인격과 동기에 대한 질문에 따라 결정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은 그들의 인격과 태도와 행위를 형성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질문으로 결정된다. 이는 흔히 미덕 윤리라고 불리기도 한다.[7] 기독교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미덕은 기독교적 윤리의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졌다. 하지만 20세기 말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 미덕 윤리는 결과적 윤리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개신교 윤리 사상에서 명령적 윤리에 가려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다룬 세 가지 접근법을 기독교적 윤리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This section borrows elements from Scott B. Rae, Moral Choices: An Introduction To Ethics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5) 13-96, and Dennis P. Hollinger, Choosing the Good (Grand Rapids: Baker, 2002) 27-60쪽.
대부분의 윤리학 글들은 의무론, 목적론, 그리고 장점 윤리를 뚜렷이 바른 접근법으로 분류하고 있다. 일부는 맥락적 고려를 별개의 범주로 포함시킨다.
Patrick Hanks, Collins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London: Collins, 1979) 397쪽. 또한 Wikipedia에서 http://en.wikipedia.org/wiki/Deontological_ethics를 보라.
Patrick Hanks, Collins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London: Collins, 1979) 1493쪽. 또한 Wikipedia에서 http://en.wikipedia.org/wiki/Teleological_ethics와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링크를 보라.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면, Wikipedia에서 공리주의(Utilitarianism)에 대한 글(http://en.wikipedia.org/wiki/Utilitarianism.)을 보라.
Wikipedia에서 http://en.wikipedia.org/wiki/Ethical_Egoism.를 보라.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면, Wikipedia에서 장점 윤리(Virtue Ethics)에 대한 글(http://en.wikipedia.org/wiki/Virtue_ethics.)을 보라.
하나님의 규칙은 무엇인가? 하나하나의 상황마다 거기에 맞는 명령이 존재하는가?
목차로 돌아가기교회 전통을 따르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명령과 원칙을 이해하는 데 성경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일에 관한 구절을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성경의 첫 장과 두 번째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자연 자원을 보살피고 경작하라는 일을 주신다(창1:26-29, 2:15, 2:18-20).
-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에 안식일을 가짐으로써 7일을 기준으로 하는 일의 전형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에 따라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창2:2, 출20:9-11, 마2:27). 또한 일상적인 일과 휴식에 관한 규칙도 정해져 있다(시104:19-23).
- 정직하게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라고 명령받았다(시128:2, 살전2:9, 살후3:7-10).
- 잠언에서는 열심히 일하라는 권고의 말씀과 나태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잠6:6 등).
- 육체노동 또한 괄시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왕도 자신의 손으로 일했다(삼상11:5). 예수님께서도 수공업에 종사하셨다(막6:3).
- 예언자들은 게으른 부자들을 비난한다(암6:3-6 등).
- 예수님께서도 이전의 선지자들처럼(사5:7-8, 미3:1-3; 암5:21-24),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이들을 꾸짖으신다(마23:23).
- 사도 바울은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장막을 만드는 일을 했으며, 성실하고 자립적인 모습을 통해 자신을 따르는 개종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라고 이들에게 권했다(엡4:28). 바울은 정직한 노동이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보았다(살전4:11). 그래서 일상적인 일을 제쳐둔 채 보다 더 시급하다고 여기는 복음사역에 무작정 뛰어들어 결국 남에게 의존해서 사는 열성주의자들을 바울은 질책했다(살후3:10 이하).
- 우리는 노동을 하나의 예배 행위로서 접근해야 한다(고전10:31, 골3:17, 23).
또 성경에서는 직장 문제에 대해 염려하는 구절도 찾을 수 있다.
- 우리는 그저 상사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골3:23, 엡6:5-8). 또한 우리는 전심을 다해 일을 대하고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전9:10, 골3:22-24).
-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 따른 정당한 보수를 받고, 그러한 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의식주를 누리길 원하신다(눅10:7, 살후3:10, 시128:1-2).
- 고용주들은 자신도 궁극적으로 섬겨야 하는 주인이 계심을 인정하고,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하도록 명령받았다(골4:1).
- 이들은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눅10:7, 딤전5:18).
- 고용인도 자신의 고용주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딤전6:1; 딛2:9).
이러한 명령들뿐만 아니라, 직장에서의 관계나 성실함을 다루는 성경 말씀은 아주 많다. <비즈니스맨을 위한 주제 성경(The Businessman’s Topical Bible)[1]과 그 자매편인 <비즈니스우먼을 위한 주제성경(The Businesswoman’s Topical Bible)[2]은 직장에서 흔히 겪는 100가지 문제를 열거한 뒤, 그에 따른 해답을 제시해주는 1,550개의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 그 책이 다루는 주제로는 고객이 불평할 때, 회사의 핵심적인 직원이 퇴사했을 때, 배신당한 기분이 들 때,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싶은 유혹이 생길 때, 그리고 직원들의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 등등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딜레마를 성경에 입각해 한 권의 규칙서로 만들어내는 것은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 어떠한 일련의 명령이라도 직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다루진 않는다. 그리고성경이 쓰여진 시대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직장 문제들이 오늘날에는 존재하기도 한다. 성과에 따라 스톡옵션을 나눠주는 것은 윤리적인 일인가?사람들이 더 많이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상품 광고는 윤리적인 것인가?직원 고용에 있어서 소수민족을 선호하는 것은윤리적인 일인가? 경쟁사를 인수하는 것은 윤리적인 일인가?위의 상황들은 그 어떠한 성경적인 명령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이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포괄적인 규정을 만들어내려고 했을 때 맞닥뜨렸던 문제로, 이들은 사소한 문제에 얽매여 결국 중요한 내용까지 놓치게 되었다. 그렇지만 성경이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한다는 사실까지 무시해버리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성경은 도둑질, 거짓말, 원수를 포함한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 옳은 일을 행하는 것,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보살피는 것 등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크리스 마셜(Chris Marshall)은, "성경적 명령, 법 또는 원칙의 규범적 권한을 배제하는 것은 기독교적 윤리에 따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위태롭게 할 수 있으며, 너무 많은 주관적 판단의 여지를 주는 격이다."[3]라고 말했다. 성경은 오늘날의 직장에서 윤리를 위한 종합 규정집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하고 중요한 규칙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Mike Murdock, The Businessman’s Topical Bible (Tulsa: Honor Books 1992).
Mike Murdock, The Businesswoman’s Topical Bible (Tulsa: Honor Books, 1994).
Christopher Marshall, "The Use of the Bible in Ethics" in Voices for Justice, edited by Jonathon Boston and Alan Cameron (Palmerston North, N.Z.: Dunmore Press, 1994) 125쪽.
지도 방침 구하기
목차로 돌아가기지금까지 성경 속의 수많은 명령들을 몇 가지 포괄적인 명령이나 원칙으로 압축시키고자 하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예시는 모세의 십계명[1]이나 예수님의 팔복에 대한 가르침[2], 혹은 잠언의 인용 문구들[3]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비즈니스맨과 비즈니스우먼을 위한 성경원리에 입각한 완벽 지침서>[4]라는 화려한 부제가 붙은 래리 버켓(Larry Burkett)의 <성경속의 경영학(Business by the Book)>은 다음과 같이 경영과 관련된 성경적인 최소 기본 원리 6가지를 이야기한다.
- 경영 실무를 할 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라.
-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라.
- 적당한 가격에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제공하라.
- 채권자들을 존중하라.
- 직원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라.
- 고객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라.
이밖에도 이와 비슷한 시도는 무수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은 다수의 유용한 통찰력을 내포하고 있지만, 때로는 우리가 사물의 핵심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성경적 통찰력의 범위에서 벗어나 결국 작위적인 규정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신앙의 눈으로 본 경영(Business Through the Eyes of Faith)>[5]은 좀 더 근본적인 성경적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책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최우선의 윤리적 문제로 삼는다. 그리고 미가 6:8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비즈니스 분야에 사랑을 어떻게 적용하길 원하실지 판단할 수 있는 원칙을 도출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 따라서, 정의와 선함, 그리고 신실함을 통해 적용되는 사랑은 윤리적 원칙의 기초가 된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3:23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는 기독교적 윤리의 핵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개인적 윤리와 사회적 윤리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초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문제마다 특정한 명령을 구하는 것보다 몇 가지 근본적인 명령을 따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된다면, 그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다른 모든 명령들이 토대로 삼고 있는 단 하나의 성경적인 명령이 있는가?"
일반적으로 출20:1-17 또는 신5:6-21의 축약된 버전. 예를 들면, 십계명의 몇가지 제적인 함축의 유용한 요약에 대해 Max L. Stackhouse, “The Ten Commandments: Economic Implications” in On Moral Business, edited by Max L. Stackhouse, Dennis P. McCann and Shirley Roels (Grand Rapids: Eerdmans, 1995) 59-62쪽과 David Gill, Doing Right (Downers Grove: IVP, 2004)를 보라.
David Gill, Becoming Good (Downers Grove: IVP, 2000).
Michael Zigarelli, Management by Proverbs (Chicago: Moody Press, 1999) and also Clinton W. McLemore, Street Smart Ethics (Louisville/London: WJKP, 2003).
Larry Burkett, Business by the Book (Nashville: Thomas Nelson, 1990).
Richard C. Chewning, John W. Eby and Shirley J. Roels, Business Through the Eyes of Faith (London: Apollos, 1992).
Ibid, 26.
지침이 되는 여러 원칙에서 단 하나의 명료한 명령으로
목차로 돌아가기성경의 도덕적 명령들을 모아서 이를 전부 포함하는 단 하나의 명령으로 요약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다음 구절을 황금률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접받고 싶은가?"[1] 맥스웰은 이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다른 원칙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 다른 이들이 여러분을 대해주는 것보다 더 잘 대해주어라.
- 또 누군가 여러분에게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라(마5:41 참고).
- 여러분을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라.
- 옳지 않은 일을 행하는 것이 자연스럽더라도 옳은 일을 행하라.
- 약속을 지키는 것이 손해라고 해도 약속을 지켜라.
안타깝게도, 이것은 본질적인 율법의 수를 줄인다기보다 오히려 늘리고 있다. 또한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인용되지 않은 원칙들도 소개하고 있다.
조셉 플레처(Joseph Fletcher)는 자신의 저서 <상황윤리(Situation Ethics)>[2]에서 모든 것을 예수님의 "사랑하라는 명령"에 적용시켰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9) 그 후 플레처 역시 비슷한 문제에 맞닥뜨렸고, 다른 여러 가지 원칙을 만들어내야만 했으며 (4개의 전제와 6개의 제안) 사랑해야 하는 상황을 대체로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 명료하게 밝혀야 했다. 맥스웰은 스스로 <상황윤리>의 "도덕적 상대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애쓰면서 플레처와 다르게 사랑하라는 율법을 절대적인 도덕적 원칙으로 보지 않았다. 다시 말해, 다른 모든 도덕적 규칙들을 그저 단순한 "조명 장치" 정도로 만들어버리는 절대적 원칙으로 이 율법을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맥스웰과 플레처의 경우에서 모두 볼 수 있듯이, 단 하나의 원칙을 격상시켜 선택하는 단순함이 어떤 점에서는 매력적이고 유용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너무 지나치게 단순하고 현혹적일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윤리학을 논하는 데 단 하나의 접근법만을 사용하는 미흡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들의 경우에 명령 접근법만을 사용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하나의 절대적인 성경 명령을 격상시키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절대적 명령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다른 적절한 명령들이 필요한지 알아보고자 여러 가지 상황과 결과를 고려하게 된다. 또한, 이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사랑에 대한 실천은 행위자의 인격에 따라 대부분 결정될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John C. Maxwell, There’s No Such Thing as “Business” Ethics (USA: Warner Books, 2003).
Joseph Fletcher, Situation Ethics (London: SCM, 1966).
세 가지 균형 원칙
목차로 돌아가기알렉산더 힐(Alexander Hill)은 "경영에 있어서 기독교적 윤리에 토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이라고 했다.[1] 인간이 따라야 하는 명령이나 원칙은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정의된다는 것. 차후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힐이 비록 하나님의 성품을 근거로 시작하긴 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성품을 근거로 한 윤리의 형태로 여겨지진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에 있어서 힐이 규칙과 원칙을 정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칙과 원칙은 윤리학의 명령 접근법이 갖는 대표적인 특징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해 가장 많이 반복되는 묘사는 신성함, 정의로움, 그리고 사랑이다. 따라서 우리의 법과 규칙, 그리고 관행은 신성함, 정의로움, 그리고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힐은 기독교적 윤리에 있어서 이 세 가지 원칙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다리가 셋 달린 의자처럼, 이 세 가지 원칙은 각각 나머지 두 개의 원칙의 균형을 맞춰준다. 다른 두 개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어떤 하나의 중요성만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항상 윤리적 사고의 왜곡으로 이어지기 쉽다. 예를 들어, 신성함에만 치중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는 규칙을 요구하게 되어 결국 일종의 무력한 고립주의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정의로움만 중시하면 규칙을 위반하는 것의 대가로 과도하게 심한 형벌을 가하게 될 수 있다. 또 사랑에만 치중하는 것은 막연함과 책임감의 부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힐의 접근법은 단 하나의 원칙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더 균형 잡힌 접근법처럼 보인다. 그의 접근법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윤리의 차원까지 살펴보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사랑과 정의로움, 그리고 신성함의 개념들 또한 다른 원칙들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따라서 방대한 양의 규칙들을 몇 개의 주요 원칙들로 요약하고자 하는 바람은 다시 한 번 미제로 남게 된다.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Downers Grove: IVP, 1997).
결과 접근법
목차로 돌아가기결과주의자가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 혹은 "어떠한 선택이 가장 최선의 결과를 낳을 것인가?"이다. 명령 접근법(행동에 내재된 선함을 보여주는 규칙들로 인해 최선의 선택이 결정되는 접근법)과는 달리 결과 접근법은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 가장 도덕적인 행위의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최종 결과인 것이다. 이는 행위의 다양한 방법에 따른 결과를 예상 및 산출해보고, 매우 긍정적이거나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선인 결과를 내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성경과 결과
목차로 돌아가기윤리를 십계명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성경을 하나의 규정집으로 여기는 많은 이들은, 실제로 성경 말씀이 얼마나 자주 독자들에게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살펴보고 그러한 결과가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라고 권하는지 알게 되면 적잖이 놀랄 것이다.
예를 들어, 잠언은 특정 행위가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결과를 자세히 설명하는 함축적인 격언들, 즉 이러한 경고와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예로, 잠언 14:14은,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가득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도 청중을 향하여 그들이 내리는 결정에 따른 결과를 신중히 따져보라고 경고하신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7:16).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의 일생과 사역은 공공의 선을 위한 결정의 살아있는 예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팔복의 가르침 또한 결과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배부르고" 싶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마5:6). 그리고 산상설교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과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5:25)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5)
결과를 고려하는 것은 우리의 윤리적 의사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성경적 접근법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고를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는 일에는 숨겨져 있는 지뢰들이 매우 많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누구에게 좋은 것인가?" "좋은 결과가 항상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맥락에 따라 좋은 것이 달라지는가?"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인격 접근법
목차로 돌아가기특정 상황마다 매번 "규칙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최선의 결과를 낳을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대신,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자꾸 묻는 것이 바로 미덕 접근법이다. 이 접근법은 만약 어떤 사람이 선한 성품을 발달시키면, 일생동안 여러 상황들 속에서 옳거나 선한 일을 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접근법은 행위보다는 변화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누군가 결과적 또는 명령적 윤리를 적용하여 무엇이 옳은 일인지 깨닫는다고 해서 반드시 그 옳은 일을 행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주장한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인격에 달려 있다. 인격 윤리는 옳은 일을 식별하는 능력과 함께 옳은 일을 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우리의 인격이 어떻게 빚어지는 지에 대한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세 가지 인격의 특징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가 더욱 신성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가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의사결정에 있어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그저 단순한 원칙들이 아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기본설정으로 점점 자리매김하고 있는 인격적 특징들이다. 이 문제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해 다음 몇 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로,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 우리는 판단을 통해 복잡한 문제들을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을 지닌 존재들로 스스로를 간주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해결할 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어떤가? 우리가 내리는 대부분의 결정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 황급히 내려지지 않는가? 우리는 이 사람과 어떻게 공감하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며, 고객에게 어떠한 상담을 해주고, 어떻게 실적이 좋지 않은 개인 또는 팀에게 동기부여를 해주는가?
둘째로, 우리가 내리는 윤리적 결정들은 대부분 우리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 거의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무엇을 하기로 결정내리는 것의 대부분은 우리의 인격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내리는 윤리적 결정은 우리가 어떠한 의사결정 과정을 택하는지에 따라 결정되기 보다는, 우리가 누구인지(인격의 유형이나 몸에 밴 가치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세 번째로, 우리는 개인적인 결정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내리는 개인인가? 아니면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일까? 인격과 공동체가 우리의 가치관과 함께 얽히고설켜서 윤리를 언급할 때 개별적으로 분리하지 못할 정도인 것은 아닌가?
데이비드 쿡(David Cook)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1]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생각 없이 그저 반응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우리의 반응이 거의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기르는 일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자동적으로 굉장히 많은 윤리적 결정들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들은 선한 결정을 내릴 확률이 더 높다.
David Cook, The Moral Maze: A Way of Exploring Christian Ethics (London: SPCK, 1983) 78쪽.
미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목차로 돌아가기명령 접근법과 결과 접근법이 어떤 명령이나 결과가 참으로 선한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것처럼, 인격 접근법 또한 어떠한 미덕이 선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고대 그리스의 덕목인 정의, 용기, 절제, 그리고 자제를 강조했다.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e, 339-397년)는 이러한 덕목들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특히 "신학적인” 또 다른 세 가지 덕목들을 성경에서 인용해 추가한다. 바로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이러한 덕목들에 상응하는 반대 죄악들을 언급했는데 바로 우리가 7대 죄악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다.
가톨릭 사상은 계속해서 미덕 윤리를 중시해왔으나 개신교 신학자들은 최근에야 인격 접근법을 열성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성경을 미덕의 근원으로 보아왔다. 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알렉산더 힐은 성경적 덕목인 신성함, 정의로움, 그리고 사랑을 하나님의 주요 덕목으로 보았다. 하지만, 힐마저도 미덕 접근법을 규칙 접근법의 하위개념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자기 내면에 있는 덕목을 개발시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은 하나님의 덕목에 따라 규칙을 확립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인간이 개발해나가야 하는 기독교적 덕목을 발견하고자 애써왔으나,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특히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스타센(Stassen)과 거쉬(Gushee)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평평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절정이자 중심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도덕적 문제도 그 문제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고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1]
스타센과 거쉬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마땅히 갈망해야 하는 구체적인 덕목들을 살펴보는 일의 확실한 출발점이 바로 산상설교, 특히 팔복의 가르침이라고 본다. 마음이 가난한 것, 자비,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것, 온유함,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 슬퍼하는 것 등은 우리가 길러야 하는 주요 성품들 중의 일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과 행위가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핵심적 태도, 동기, 그리고 인격 특성을 보여주는 거라고 말씀하신다(막7:21-22). 사도 바울 또한 인격 발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예수님께 속한 자들에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말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절제인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권고하고 있다(갈5:16-25).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3-5)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본보기이시다. 또한 우리는 그분을 그대로 본받고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말들은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야 한다는 점을 매우 크게 강조한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Glen H. Stassen and David P. Gushee, Kingdom Ethics: Following Jesus in Contemporary Contex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3) 97쪽.
진짜 예수님, 좀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목차로 돌아가기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한다(요일3:2).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과 소망하는 결과, 그리고 인격을 우리의 생활방식과 세계관과 너무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스스로 "재구성"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예수님을 우리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유혹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부유한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어마어마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인 의미를 무의식적으로 걸러내기 쉽다. 그래서 결국은 범위가 좁은 "개인적"인 도덕 문제들만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에게 남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이 보잘것없게 여겨지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규칙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비기독교인들과 구별되는 윤리적 이해를 실제로 실천하는 경우는 단지 성적 행위, 개인적인 정직함, 그리고 부의 축적과 관련된 소수의 문제들인 경우라고 한다.[1] 다른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예수님의 윤리보다는 우리의 문화가 중시하는 가치에 따라 우리의 모습이 정해진다.
이 연구 결과의 긍정적인 점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윤리적 이해에 있어서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굉장히 제한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꾸준히 다루는 윤리적 문제들이 대부분의 직장 혹은 사업과 관련된 윤리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엔론(Enron)이나 월드컴(WorldCom)과 같은 기업의 CEO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신들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 칭할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맹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를 알리고, 기념하며, 탐색하는 방식으로 더 많은 일터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도록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그저 개인의 변화의 결과를 통해 발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러한 성품이 처음부터 양육되어지는 공동체의 맥락에서만 가능하다. 벤저민 팔리(Benjamin Farley)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 성경은 히브리서 성경과 함께 믿는 공동체의 불가분한 상황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이 양육되는 상황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의 과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생경하고 적대적인 문화에 맞서는 것은 결코 개인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결코 개인이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행동의 진원지가 될 수 없다.[2]
우리가 복음의 이야기를 다시 전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실천하고자 하는 공동체에 속해있을 때, 비로소 미덕을 갖춘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 공동체 자체가 예수님의 성품을 좀 더 명확히 알아내고자 노력하고, 도덕적인 삶에 대한 우리의 제한적인 시각에 도전하는 어렵고 불편한 질문들을 던진다면, 그러한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비기독교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하는 안타까운 여러 사례들을 반복하게 될 확률이 줄어든다.
이것은 Robin Gill의 저서 Churchgoing and Christian Eth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의 결론이며, Alistair Mackenzie, “Evangelicals and Business Ethics: The Church” in Stimulus, Vol. 14, No.1 (February 2006) 2-9쪽에 의하면 New Zealand Values Surveys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지지되고 있다.
Benjamin Farley, In Praise of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5) 100쪽.
전체적인 종합
목차로 돌아가기
이제 명령, 결과, 그리고 인격까지 다 살펴보았다. 윤리의 세 가지 다른 접근법이었다. 실제로 현실의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이러한 접근법들이 결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명령이나 규칙을 적용하고자 할 때 그러한 행동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서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상되는 여러 결과들 중에서 선택을 내릴 때 어떤 것이 최선인지 알아보는 일은 우리가 어떠한 원칙을 최우선으로 삼고 싶은지 인지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론에 따라 어떻게 결정되었든 간에, 결국 어떠한 행동을 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이다.
따라서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다른 접근법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일종의 윤리적 춤을 추는 것이다.
세 가지 접근법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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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론 | 목적론 | 미덕 |
주요 개념 | 명령/규칙 | 결과/성과 | 인격 |
주요 질문 | 해당되는 규칙은 무엇인가? | 어떠한 선택이 최선의 결과를 낳는가? | 나는 선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
우리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우리가 맞닥뜨리는 상황의 본질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이들 접근법의 가장 일반적인 차이점은 우리가 굉장히 중대한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인지, 아니면 일상적인 도덕적 선택에 관한 것인지의 여부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중대한 도덕적 딜레마 해결하기
목차로 돌아가기경영 윤리 교육은 대부분 중요한 사례 연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심오한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반응을 통해 발전한다. 특히 중요한 원칙들이 충돌해 아예 다른 대안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위기 상황에 대응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는 위기에 맞서 도덕적인 사고 방법을 발달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곤 한다. 그러한 경우에는 주로 그 특정 맥락 속에서 어떠한 행동이 최선의 선택인지 구분해내기 위해 관련된 규칙들을 살피고 예상되는 결과들을 추정해 비교하고 측정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경우, 미덕과 인격에 강조를 둔 이유는 적절한 행동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우선적으로 충분한 동기와 결의를 확보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규칙/결과-우선(결정-행동) 모형
각 상황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 →
|
해당되는 규칙 정의하기 (명령)
↓ |
최선의 결과 식별하기 (결과) ↓ |
상황마다 옳은 일을 행하면서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 가기 → |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기 (인격) |
권장되는 방법은 주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다.[1]
- 관련된 모든 사실들을 수집하라.
- 주요 윤리적 문제들 명확하게 밝히라.
- 해당 상황과 관련된 규칙과 원칙을 찾아라.
- 상황의 해결을 위해 최선의 방법인 성경 읽기를 고려하면서 성경과 같은 지침이 되는 중요한 자료를 살피라. 이밖에도 다른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라.
- 여러분과 여러분이 처한 상황을 아는 공동체 내의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구하라. 이는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을 방지해주고 자신이 갖고 있는 편견에 치중하는 것을 막아준다.
- 행동의 대안 방법들을 모두 나열하라.
- 대안들을 원칙과 비교하라.
- 행동의 방법에 따라 각각 예상되는 결과를 추정해보고 결과를 살펴보라.
-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써 여러분의 결정을 살펴보라.
-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라.
- 조직/사회의 특성을 구분 짓는 체계와 관행을 만들어서 조직/사회가 여러분이 마땅히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라.
- 여러분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행하는 것과 관련된 활동들을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이 접근법은 Richard Higginson, Called to Account (Guildford: Eagle, 1993) 224-240; David Cook, Moral Choices: A Way of Exploring Christian Ethics (London: SPCK,2000)와 Scott B. Rae, Moral Choices: An Introduction To Ethics (Grand Rapids, MI: Zondervan, 1995)에서 차용되었으나, 다른 많은 글에서 또한 나타난다.
일상적인 도덕적 선택
목차로 돌아가기두 번째 모형에서는 우리가 일상생활 및 직장에서 내리는 대부분의 윤리적 결정들이 종종 압력으로 인해 거의 사전에 숙고할 틈도 없이 순간적으로 내려진다는 점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일생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습관의 결과물이며 우리가 일하는 장소와 동료 집단, 그리고 우리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의 문화에 따라 만들어진다. 또한, 이는 우리 존재의 핵심에 그리스도인의 덕목과 성품이 얼마나 자리 잡고 있는지 그 정도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이다. 이는 우리 행위의 근간이 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 도덕적 사고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인 삶 가운데서도 규칙을 이해하고 결과를 추정해야 하는 상황은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 규칙과 결과가 덕목에 종속되며 주인이 아닌 종으로 여겨진다. 이는 앞서 도표에서 살펴본 우선사항과 역행하는 것이다 :
인격-우선(윤리적 발전) 모형
도덕적인 사람 되기 → |
규칙을 따르고 최선의 결과를 추구할 수 있는 지혜와 의연함을 갖출 수 있도록 도덕적인 성품을 함양하기 (성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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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불분명할 때 어떠한 것이 옳은 일인지 결정하기 → |
각 상황에 해당되는 규칙 정하기 (명령) |
각 상황에서 비롯될 수 있는 최선의 결과 선별하기 (결과) |
이것은 덕목에 대한 강조가 도덕적 딜레마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립되는 덕목들이 서로를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용기와 신중함은 서로를 반대 방향으로 당기고 있으며, 정의와 평화, 충성과 진실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황에서 좋은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단 하나의 옳은 정답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다. 옳은 정답이 단 하나만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좋은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위한 자극이 될 수 있는 긴장 요소로서, 다른 대안들을 인식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타락한 세상에서 윤리적 결정 내리기
목차로 돌아가기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규칙을 따르고, 하나님이 구하시는 결과를 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성품을 지닐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를 계속해왔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권력이나 지위가 없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용기가 부족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스스로의 신성하지 못한 욕망이나 태도, 두려움, 관계 등의 요소로 인해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때로는 능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이나 생명 윤리와 같은 경우, 하나님의 원칙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기란 쉽지 않다. 만약 다른 대안이 매춘부가 되는 것이거나 자녀들을 굶기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직장에서 능력 있지만 비열한 동료들과 일한다든지, 혹은 능력은 없지만 친절한 동료들과 일한다면 예수님의 성품이 어떠한 것인지 상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대부분의 직장이나 삶의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간단히 완벽한 해결책에 도달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더 나은 것과 최선의 것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기독교적인 윤리 접근법은 우리가 완벽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패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원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해주거나 적어도 더 나은 결과를 얻도록 해준다. 부패한 제도 속에서는 진정한 차이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이 어떠한 방식으로 되어가길 원하시는지를 잘 묘사해준다. 비록 우리가 짧은 시일 내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이는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희망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제도 가운데 예수님이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인간의 삶에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 결과로 최악의 상황들을 겪어야 하셨지만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를 거두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결국 모든 것은 은혜로 귀결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명확하게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옳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행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는 용서 받으며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인격 접근법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 중 하나는 세상이 타락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규칙에 따르지 못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결과를 갈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어제 했던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오늘 행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어제였더라면 거짓말했을 것을 오늘은 그저 단 한번이라도 진실을 말한다면, 우리의 인격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조금씩 바뀌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아주 조금씩 윤리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결국 큰 변화로 이어진다.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따라야 할 명령, 구해야 할 결과, 그리고 지녀야 할 성품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자료다. 기독교적 윤리에 있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성경에 수록된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결과와 인격 또한 기독교적 윤리의 필수 요소이다. 대부분의 경우, 더욱 윤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직장에서의 행동과 결정이 우리의 인격을 어떻게 만들어나가는지 더욱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가 직장과 같은 곳에서 내리는 최선의 윤리적 결정들을 통해 우리의 성품은 예수님을 더 닮아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일3:2).
윤리에 대한 서술적(사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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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변속기"
그리스도인인 웨인은 자동차 딜러다. 지금으로부터 12개월 전, 웨인은 신뢰하는 고객에게 도요타 캠리 중고차를 팔았다. 그 차는 판매하기 전에 종합 점검을 받았으며, 가격대에 비해 상태가 우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12개월이 지난 지금, 고객이 웨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전부터 자동 변속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웨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자동차를 판매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웨인은 고객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했다. 과연 그는 (웨인도 궁금해했다) 자동차에 발생한 문제의 책임을 지고 변속기 수리비용을 대주어야 할까? 그렇게 할 경우, 실제로 캠리로 인해 비롯되는 금전적 손실을 웨인이 떠안게 되는 것이다. 수리로 인한 비용이 추가되면서 캠리의 실제 가격은 웨인이 청구한 금액보다 더 높아지는 것이다. 웨인은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은 채 고객에게 그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말한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웨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누가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할까? 웨인일까 아니면 고객일까? 웨인은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까? 그리고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그의 신앙심이 어떠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까?
-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명령을 따라야 할까?
- 그리스도인이 구해야 하는 결과는 무엇일까?
-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성품은 무엇일까?
우리는 웨인이 이 세 가지 접근법을 고려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볼 것이다.
명령 접근법
목차로 돌아가기웨인은 자동차와 관련된 딜레마에 대해 고민해보다가, 옳은 일을 결정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어떤 간단한 규칙이나 명령이 없을까 궁금해졌다. 한 가지 출발점은 명백했다. 이 세상의 법이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가? 법은 무엇인가?
법적으로 웨인이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는 무엇일까?
목차로 돌아가기웨인은 (뉴질랜드의) 소비자보호법에 따라 차량을 구매한 고객들에게 6개의 보장 항목이 제공되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항목은 판매되는 차량의 품질이 반드시 합격품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매되는 차량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
- 그 종류의 차량이 주로 쓰이는 용도에 적합해야 한다.
- 마감과 외관에 있어 합격품질이어야 한다.
- 부수적인 결함이 없어야 한다.
- 안전해야 한다.
- 내구성이 있어야 한다. 즉, 구매 이후 적정 기간 동안 차량의 일반적 용도에 맞게 사용될 수 있어야 한다.
- 합격품질 여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차량의 수명과 가격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가 구매 이후 "적정" 기간이라 여겨지는가? 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웨인의 법적 의무는 정확히 규정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웨인이 판매한 캠리처럼 출고된 지 7년이 지났으며 주행 거리가 평균 정도인 경우, 3개월 혹은 5,000킬로미터 정도가 웨인에게 자동차를 법적으로 수리할 의무가 있는 "적정" 기간이라고 여겨진다. 고객이 6개월 혹은 12개월을 "적정"하다고 생각한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상황이다. 하지만 만약 법정에서 판결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12개월과 같이 긴 기간은 인정받기 어려울 확률이 높다.
웨인은 고객에게 12개월 동안 주행한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본다. 돌아오는 대답은 22,000킬로미터였다. 이는 웨인이 그 결함을 수리해주어야 할 법적 책임이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판매 후 경과한 시간이나 주행한 거리를 보아도 자동차가 보증되는 "적정한" 수준은 훨씬 넘어선 것이다.
법적 혹은 도덕적 명령?
웨인은 자신에게 수리비용을 대주어야 하는 법적 의무가 없다는 사실에 만족했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웨인은 적법성과 도덕성이 같은 이슈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법은 사회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주로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사항을 정의하는 것이다. 웨인은 최근에 친구가 이야기해준 한 가지 사건을 떠올렸다. 어떤 회사의 이사회가 경영 제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제안이 합법인지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으며, 얼마 안 가서 그 계획에 법적인 문제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한 이사가 입을 열었다. "합법적이긴 하죠. 하지만 옳은 것입니까?"
웨인의 친구가 말했다. “그 질문이 제기되자마자, 긴 침묵이 이어졌지. 다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왜 옳지 않은지에 대해 논의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이미 다 알고 있었어.”
웨인은 법 조항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법적 기준을 넘어서 생각하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이 아니다. 회사가 따라야 하는 더 높은 기준은 무엇일까? 한때 서구 사회에서는 기독교적 윤리가 더 높은 기준을 제시했으며 ‘보편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널리 인정되었다. 미국의 J.C. 페니(J. C. Penney Company)라는 대규모 백화점 체인은 "황금률 매장"으로 유명했으며 그 체인점은 성경 말씀을 토대로 고객 서비스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적절한 것으로 여겼다. 물론 하나의 종교 혹은 철학이 크게 지배적인 다른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혹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서구 사회가 세속적으로 변해가면서 종교적인 고려사항들이 기업 윤리의 근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태가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어떠한 윤리적 지침 근거도 과거에 성경적 윤리가 차지했던 위치의 자리에 오르진 못했다. 이것은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 이상의 윤리적 지침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많은 경영 대학원들이 윤리에 대해 의논하고자 할 때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세상적인 면을 강조하고 그 어떠한 편견이나 종교적 개입과 무관함을 보여주기에 급급해 결국 도덕과 가치들을 크게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그 결과 합법적인 것에 무미건조한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기업 이사들의 논의는 이러한 태도가 부적절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사들 전부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기 때문이다.
법률을 넘어서는 명령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윤리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법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확실히 명시해줄 하나님의 명령을 구한다. 예를 들어, 일이나 고용 문제와 같은 경우에는 관련된 성경 말씀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성경적 말씀을 찾거나 이해하고 이를 적절히 적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각 상황에 어떠한 규칙과 원칙이 적용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경을 적용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다른 체계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웨인은 그의 딜레마에 합당한 그런 종류의 답을 어디서부터 찾기 시작해야 할까?
각 상황에 맞는 규칙?
목차로 돌아가기절박해진 웨인은 그의 책장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마침 찾고 있던 종류의 책인 <비즈니스맨을 위한 주제 성경>[1]을 발견했다. 언뜻 보니 책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책은 특정한 성경 말씀을 찾아 우리가 직면하는 특정한 직장 문제를 다루는 규칙을 제공하는 책이었다.
웨인은 페이지를 넘겨가며 책을 훑어봤다. 저자인 마이크 머독(Mike Murdock)은 “오늘날 비즈니스 업계에서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상황과 환경에 하나님의 통찰력을 제시”하기 위해 성경에서 1550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었다. 이 말씀들은 “여러분의 태도,” “당신의 직장,” “당신의 일상 스케줄,” “당신의 가족,” “당신의 재정 상태,” “비즈니스맨과 정직,” “고객이 불만족이라면” 등의 주제들로 나뉘어져 있었다.[2] 거의 100개에 달하는 주제가 포함되어 있었고 흔하게 벌어지는 비즈니스 상황들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었다.
항목들을 살펴보던 웨인은 책의 저자가 의사 결정에 대하여 그 어떤 상세한 방법도 서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그저 자신이 생각하기에 각 상황에 적절할 것 같은 성경 구절들을 설명이나 해설 없이 나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이 직접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부가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웨인은 처음에 그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주제를 몇 개 찾았다 :
- "고객이 불만족이라면"이라는 항목에는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딤후 2:24)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눅 6:35)와 같은 말씀이 수록되어 있었다.
- "비즈니스맨과 정직함"에는 시편 112:5 말씀이 인용되어 있었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 "비즈니스맨과 협상"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었다.[3]
웨인은 책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고 이런 무작위로 발췌된 성경 구절들이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디모데후서 2:24 말씀은 디모데후서 1:7 말씀과는 정반대의 조언을 주는 듯 했고,어찌됐든 디모데후서 1:7 말씀은 환불에 관련된 내용이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내용이었다. 누가복음 6:35 말씀은 대적 관계에 있는 이들에 대한 것이지, 고객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다. 결국 이러한 말씀들은 실제로 웨인의 상황에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그러한 접근법의 문제 중 하나가 성경을 우리가 맞닥뜨릴 수 있는 모든 여러 상황들에 대한 "해답집"으로만 보는 경우, 말씀이 맥락에서 벗어나 원저자의 의도와 다른 의미로 해석되기가 쉽다는 것이다. (이는 "제멋대로 갖다 붙이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리가 "문제"에서 시작해 "해답"을 구하려 든다면, 실제로 성경을 거꾸로 사용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초래하는 위험은 우리가 단순히 미리 구성된 계획에 맞는 것만 취하고 다른 모든 것들은 무시해버린다는 것이다. 성경이 스스로 뜻을 전하고, 일관성 있는 주제와 메시지들이 성경을 읽는 행위와 읽는 본문을 통해 스스로 나타나도록 두지 않고서 말이다.
예를 들어, 웨인이 "고객이 불만족이라면"을 자세히 읽어보니,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라는 누가복음 21:19 말씀이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원래 그 말씀이 속한 구절을 읽었을 때, 그는 비즈니스에 있어서 불만족한 고객과는 전혀 관련 없는 구절임을 깨달았다. 그 누가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을 인용한 것으로 제자들이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체포되거나 박해받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려주시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씀은 맥락에서 따로 떨어져 수록되어 있었고, 웨인이 살펴본 항목들의 말씀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모든 상황마다 성경적 규칙을 찾아다니는 것에는 또 다른 위험이 존재한다. 그러한 행위는 일종의 환원주의 혹은 율법주의로 빠져들기가 쉽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경우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한 진정한 열망으로 인해 율법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너무 시시콜콜 나누었고, 결국 하나님을 따르기보다는 율법주의와 교만에 빠지고 말았다.
만약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심한 비난으로 들린다면, 이들이 하고자 했던 일이 감탄할 만한 것이었음을 잠시 짚고 넘어가자. 이들은 사업 문제를 포함한 자신들의 평생의 삶에 믿음을 진지하게 적용시키고자 했던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에 속한다. 이들은 성전 의식을 따르고 유대교 회당의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믿음의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고자 했던 일은 삶의 모든 방면에서 경건한 것이 뜻하는 바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행하기 위해 모든 상황에 맞는 규칙을 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성경이 실제로 뜻하는 바를 훨씬 넘어서는 규칙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모든 상황을 통제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을 살펴보자. 이 율법이 실생활에서 행해지는 모습을 명백히 정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그 행위의 본질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 뻔뻔하다며 질책하기까지 한다. 결국 이들은 스스로 만든 규칙의 노예가 되었으며 그에 따라 다른 이들이 율법의 목적대로 행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직장의 맥락에서 직면하는,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윤리적 딜레마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한 권의 완전한 규칙서를 만들고자 시도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무의미한 일이다. 성경은 비즈니스 상황에서 발생하는 수천 가지의 상황을 전부 설명하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시도를 하게 되면 실제 의도와 다른 뜻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다. 혹은 더 심한 경우, 성경의 중요성을 축소시키고 핵심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
성경이 일터에서 윤리에 대한 포괄적인 규칙서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되지만, 성경에는 중요하고 유의미한 명령/규칙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성경에는 복잡하지 않고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구절들이 많다. 우리가 직장에서 직면하는 모든 상황들이 복잡한 것은 아니다. 많은 비즈니스 활동의 경우, 어렵지 않게 성경을 통해 조언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성경이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상사와 비슷한 개념)에게 순종하며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말한다면(예: 골 3:22),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만약 성경이 우리에게 게으르게 행하지 말고 자기 양식을 위한 책임을 지라고 말한다면(살후3:10-12),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또한 갈등에 있어서 문제의 당사자에게 직접 이야기함으로써 해결하라고 말한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가 따라야하는 지침인 것이다. 그리고 도둑질하거나 살인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그러한 명령들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Mike Murdock, The Businessman’s Topical Bible: Wisdom and Inspiration for Today’s Businessman (Tulsa: Honor, 1992). 비즈니스 여성용 버전도 있다.
본 섹션들 내의 각 "챕터"는 “When…(…할 때)” or “The Businessman and …(비즈니스맨과 …)”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When a customer does not pay his bills(고객이 계산을 지불하지 않을 때)" 혹은 "When you face illegal or unfair competition(당신이 불법적이거나 부당한 경쟁에 직면할 때)" 혹은 "The Businessman and Negotiation(비즈니스맨과 협상)" 등이 있다.
Murdock은 이 구절들을 NIV버전으로 사용했다.
더 큰 원칙들?
목차로 돌아가기실망한 웨인은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놓았다. 그러던 중, <성경 속의 경영학>[32]이라는 책에 눈길이 갔다. 흥미를 느낀 웨인은 책을 꺼내보았고 곧 성경 속의 원칙들을 알아보는 것이 저자 래리 버켓의 접근법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원칙"이란 규칙보다 더 넓고 보편적인 개념의 수칙으로 옳은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 성경적으로 도출된 명령들의 형태를 지닌 것이다.
웨인은 그 책의 부제가 "비즈니스맨과 비즈니스우먼을 위한 성경원리에 입각한 완벽 지침서"인 것을 보고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성경 속의 경영학>은 "그분의 방식으로 경영"을 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지침을 하나님께서 원칙으로 규정지어 놓으셨다고 가정하고 있었다. 버켓에 의하면, 성경은 "비즈니스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그분의 계획"을 제공하는 법률과 율법, 그리고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1]
이의 근간이 되는 것은 십계명으로, 버켓은 이를 두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본다. 그리고 비즈니스 업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들과 아닌 이들을 구분하는 또 다른 최소한의 기준들이 있다.[2]
이 와 관련해 버켓은 "성경적 비즈니스의 6가지 최소 기준"을 세우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경영 실무를 할 때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라.
-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라.
- 적당한 가격에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제공하라.
- 채권자들을 존중하라.
- 직원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라.
- 고객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라.
이러한 규칙들은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래리 버켓이 성경 규칙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 원칙들이다. 이러한 규칙들은 구체적인 규칙처럼 세부적이지 않기 때문에, 직장에서 발생하는 실제 상황들을 더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이것이 웨인을 도울 수 있을까?
"적당한 가격에 좋은 품질의 제품을 제공하라"는 것과 "고객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라"는 두 개의 "최소 기준"은 웨인의 상황과 연관이 있다. 그건 확실하다. 이러한 원칙들을 알아보는 것이 유용하긴 하지만, 실제로 웨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웨인은 여전히 이러한 상황에서 "공정한" 처사라 할 수 있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그리고 공정한 것을 세우기 위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웨인은 버켓의 두 원칙에 모두 바로 동의했지만 그 이상 일을 진행해 나가는 데는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는 명령을 기반으로 한 방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일련의 명령들이 세부적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광범위한 상황들을 전부 다루지 못한다. 반대로 명령들이 보편적이라면 다루는 문제들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그런데 책에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친구들과 상의해보라는 제안이 나와 있었다. 웨인은 이것이 유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웨인은 그의 딜레마를 보는 시각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좀 더 공동체적인 환경을 만드는 아이디어가 맘에 들었다. 이는 우리가 모두 겪고 있는 극심한 개인주의에 정반대로 작용하는 것이며, 많은 윤리적 문제들이 복잡하기 때문에 통찰력 있는 타인들의 관점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웨인은 성경을 활용함에 있어 상당히 지시적으로 느껴지는 접근법에는 그다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이는 마치 성경을 일련의 이해하기 쉬운 원칙과 규칙으로 축소해 마치 "사용설명서"처럼 만들어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성경 속의 경영학>처럼 우리의 믿음이 현실적인 방법을 통해 비즈니스 업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진지하게 시도하는 접근법들을 살펴보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긴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접근법은 버켓의 특정 관점에 따라 제한적으로 선택된 원칙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와 비슷하게 비즈니스에 대한 성경의 접근방법을 요약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시도들과 마찬가지로, 이 접근법 또한 일부 문제들에 있어서는 유익한 통찰력을 제공해주지만 그 책이 전달할 수 있는 내용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약속한다.
Larry Burkett, Business by the Book: The Complete Guide of Biblical Principles For Business Men and Women (Nashville: Nelson, 1990).
Burkett, 15쪽.
Burkett, 16쪽.
단 하나의 원칙 혹은 명령?
목차로 돌아가기웨인은 여전히 그의 딜레마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는 도움이 될 만한 다른 것이 없나 살펴보기 위해 다시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존 맥스웰의 <결정적 순간의 원칙(원제: There’s No Such Thing as “Business” Ethics)>이라는 책이 금방 그의 눈에 띄었다.
존 맥스웰은 우리가 기독교적인 의사결정을 너무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성경의 모든 도덕적 명령들이 본질적으로 단 하나의 포괄적 명령으로 축약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맥스웰에 따르면 기업 윤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는 단 하나의 규칙만 존재한다.[1] 이것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설파하신 "황금률"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 하나의 지침("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접받고 싶은가?")에 따라 모든 윤리적 결정이 좌우돼야 한다는 것이다.[2] 맥스웰은 이 규칙을 두고 간단하지만 쉽진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맥스웰은 그 규칙이 포함하는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많은 원칙들이 필요하단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 원칙들은 다음과 같다 :
- 다른 이들이 여러분을 대해주는 것보다 더 잘 대해주어라.
- 또 누군가 여러분에게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라(마5:41 참고).
- 여러분을 도울 수 없는 이들을 도와주어라.
- 옳지 않은 일을 행하는 것이 당연하더라도 옳은 일을 행하라.
- 약속을 지키는 것이 손해라고 해도 약속을 지켜라.
성경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맥스웰의 접근법은 분명 마태복음 7:12 말씀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3] 지난 200여 년 동안 이 말씀은 황금률로 전해져 왔으며,[4] 맥스웰은 이 계율의 핵심을 다른 종교와 문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원칙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인에게도 권고되는 원칙인 것이다.
맥스웰이 설명을 위해 언급한 여러 원칙들 또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 가르쳐주신 다른 요소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다른 이들이 여러분을 대해주는 것보다 더 잘 대해주어라" 같은 원칙의 경우, 마태복음 5:43-48 말씀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으며, "누군가 여러분에게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라"는 원칙은 마태복음 5:41 말씀을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영 윤리와 관련해 이러한 황금률 접근법에 웨인이 끌리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예수님과 예수님의 윤리를 회피하면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고무적인 것이다.
웨인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것은 어떻게 도움이 될까?
황금률은 웨인에게 있어서 매우 유용하고 문제를 명확하게 해주는 원칙임에 틀림없다. 그로 인해 웨인은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고객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대우받고 싶을까?" 그리고 이와 관련된 원칙들인 "다른 이들이 여러분을 대해주는 것보다 더 잘 대해주어라"와 "누군가 여러분에게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라"는 웨인이 자신의 법적인 책임 그 이상까지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맥스웰의 접근법은 웨인이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 구체적인 사항을 정하는 것에 있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황금률이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의 핵심에 가깝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원칙 하나의 중요성을 높이는 것의 단순함은 단연 매력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확실히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면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현혹적일 수 있다. 맥스웰이 더 많은 적절한 규칙들을 통해 살을 붙여야 하는 걸 보면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윤리적 행동은 (적어도 장기적으로 볼 때) 이득이 된다는 맥스웰의 기본 가정들 중 일부는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러한 가정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5] 실제로 스콧 레이(Scott Rae)와 켄맨 웡(Kenman Wong)은 만약 이러한 가정들이 항상 (혹은 대부분이라도) 사실이라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 찾아왔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금전적인 보상에 대한 기대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건실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며, 경영 윤리에 대한 서적이나 강의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6]
맥스웰의 접근법에는 또 다른 한계점이 있다. 그의 접근법은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선택을 하는 사람과 그 선택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 이렇게 단 두 사람만 연관된다고 본다. 이 두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만 한다면 황금률에 따라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웨인은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에서 그 접근법이 대체적으로 적용됨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자연환경에까지 미치게 될 결과를 고려했을 때 그가 내려야 하는 다른 많은 결정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웨인은 4륜구동 차량을 판매했다. 웨인은 고객에게 황금률을 잘 적용했다고 느꼈다. 고객을 정중히 대했고 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거래를 제공했으며,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인은 해당 차량의 높은 연료 소비량이 환경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칠지에 관한 더욱 광범위한 문제를 판매 과정에서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Maxwell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챕터 5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다.
Maxwell, 21쪽.
누가복음에서 상응하는 부분은 6:31이다. -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Craig Keener는 John Wesley가 1750년 했던 설교에서 이를 처음으로 이렇게 불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Craig S. Keener, Matthew, IVP New Testament Commentary Series (Downers Grove: IVP, 1997) 161쪽을 보라.
Amar Bhide와 Howard H. Stevenson은 광범위한 연구 끝에 "진실을 말하거나 약속을 지키는데 강렬한 경제적 이유란 없다 - 실제 세상에서 배반자에 대한 처벌은 신속하지도 확실하지도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설들력있게 주장한다. 그들의 글 “Why Be Honest If Honesty Doesn’t Pay?”, originally published in Harvard Business Review (Sept-Oct, 1990) 121-129쪽을 보라. 허가를 받고 Rae와 Wong에 의해 Beyond Integrity, 70-78쪽에 재판되었다.
Scott Rae and Kenman Wong, Beyond Integrity: A Judeo-Christian Approach to Business Ethics (Grand Rapids: Zondervan, 1995) 85쪽.
세 가지 균형 원칙
목차로 돌아가기 웨인은 이제 참고할 서적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책장을 올려다보면서 알렉산더 힐의 <공정한 비즈니스(Just Business)>를 발견한다.[1] 경영학 및 경제학 교수인 힐은 그 책에서 지나치게 단순한 단일 규칙 접근법과 여러 규칙이 수반되는 좀 더 복잡한 다른 접근법들의 중도를 찾고자 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경영에 있어서 기독교적 윤리는 규칙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성품에 입각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공부하고 관찰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는 행동은 윤리적인 것이며 일치하지 않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다."[2]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원칙들에 따라 행동하라고 부르심 받았다.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중요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에 대해 힐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는 하나님의 성품 세 가지를 들고 있다 :
- 신성함
- 정의로움
- 사랑
힐은 이러한 성품을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
신성함
신성함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가장 높은 우선순위로 두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이는 물질적 재화, 직업적 목표, 개인적 관계 등과 같은 다른 문제들을 덜 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함을 추구하는 것은 열정, 순결, 책임, 겸손을 포함한다.
정의로움
"정의는 공동체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상호적인 권리와 의무를 세움으로써 인간관계에 질서를 제공한다."[3] 두 가지 본질적인 개인적 권리는 존엄한 존재로서 대우 받는 권리와 자유의지를 행할 권리이다. 의무 혹은 책임(실제로 정의와 함께 동전의 양면으로 여겨짐)은 이웃들이 이러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대우해줄 것을 요구한다. 권리와 의무는 긴장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균형을 이루어준다. 예를 들어, 생활 가능한 임금을 받을 근로자의 권리는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공정한 임금을 지불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로자에게도 자신의 급여에 맞게 성실히 일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정의로움은 권리와 의무 모두 똑같이 적용된다.
사랑
힐은 사랑이 일반적으로 가장 으뜸인 덕목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4] 하지만 사랑은 나머지 두 특성에 의해 조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신성함-정의로움-사랑의 조합에 있어 사랑이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공감, 자비, 자기희생을 통해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은 사람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형성하지만, 역으로 이러한 관계가 깨지게 되면 고통이 생겨난다.
세발의자
그렇다면 힐의 관점은 "하나님이 지니신 신성함-정의로움-사랑의 성품을 반영하는 비즈니스 행위는 윤리적인 것이다."[5]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성품이 나열된 순서는 중요성과 관련이 없다. 실제로 이 성품들은 서로 뒤얽혀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힐이 사용하는 이미지는 세발의자다. 우리가 만약 성경적인 경영을 하고자 한다면 이 모든 세 가지 면들(혹은 다리들)이 일관되게 고려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심하게 불균형적인 의자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만약 신성함이 사랑과 정의에 비해 지나치게 강조된다면, 그 결과로 율법주의와 독선적인 판단주의, 그리고 사회로부터의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약 정의로움이 우세하다면, 감정적인 냉담함과 비난과 같은 냉혹한 결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사랑이 유일한 대책으로 여겨진다면 방임과 편파주의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랑이 요구하는 것의 한계를 지킬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줄 다른 윤리 기준들이 없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힐은 성경을 특정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규칙서로 압축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모두 비난하고 있다.[6] 또한 힐은 비즈니스 업계의 복잡함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다. (바로 이것이 웨인에게 필요한 것이다!)
힐의 접근법은 세 가지 원칙(하나님의 성품이 시사하는 광범위한 명령들)에 의거해 세워졌다 하지만 그는 특히 정의로움이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기 위해 결과를 고려하기도 한다.
이 접근법은 웨인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웨인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신성함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졌지만, 이와 균형을 이루는 정의와 사랑과 같은 원칙들은 꽤 유용함을 깨달았다. 웨인의 판매자-고객 관계에 존재하는 특정한 권리와 의무는 무엇일까? 그리고 고객의 요구에 어떻게 응하는 것이 판매자와 고객 둘 다에게 공정한 것일까? 웨인은 자신에게 수리비를 보태야 하는 의무가 있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고객에게도 수리비를 보탤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정의가 고객과 판매자 모두에게 공정하게 적용된 것이다.
웨인은 자신이 애초에 고객에게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자동차를 판매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자신이 수리비 전부를 부담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랑의 원칙에 따라 그는 "이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일까?"라는 질문을 신중하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 역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주진 않았지만 웨인은 이를 통해 고객의 금전적 상황을 고려해보게 되었다. 높은 가격의 수리비가 이 특정 고객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몇 가지 일반적인 평가
힐의 접근법이 갖는 강점 중 하나는 좀 더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를 살펴볼 때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으면서 문제를 명료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신성함-정의로움-사랑이라는 세발의자는 황금률 단 하나의 원칙보다 더 균형 잡혀 있으면서도 앞서 살펴보았던 다수의 규칙을 세우는 접근법보다 훨씬 덜 번거롭다.
세발의자의 주된 한계는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에게 무엇이 신성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을 주는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우리가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정의가 사랑과 충돌한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것이 더 높은 우선순위를 지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인은 조금씩 진전을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리는 일이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은 항상 명백했었으나, 힐의 세발의자가 웨인에게 시도해볼 수 있는 생각을 제공해준 셈이다. 윤리에 대한 접근법 중 그 어느 것을 채택하더라도, 관련된 규칙과 원칙을 찾고 균형을 맞추는 부분은 확실히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어떠한 결정이 가장 사랑스럽고 정의롭고 신성한 결과를 낳는지 알아보기 위해 각기 다른 행동 과정들에 의해 초래된 결과들을 추정해보아야 한다.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Downers Grove: IVP, 1997).
Hill, 13-14쪽.
Hill, 34쪽.
비록 Hill이 두 가지 큰 계명 -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마22:37-39) - 이 거룩함(하나님을 우리의 최우선순위에 두는 것)과 정의(다른 이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를 포함한다고 언급했지만. 47쪽을 보라.
Hill, 15쪽.
Hill, 12쪽.
결과 접근법
목차로 돌아가기지금까지 웨인은 "내가 따라야 하는 규칙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왔다. 그리고 성경에서 규칙과 원칙을 찾아왔다.
하지만 웨인이 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접근법은 어떠한 선택이 가장 최선의 결과를 낳는지를 평가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웨인이 각 방법의 잠재적 결과를 살펴보고, 그럴듯한 결과들을 비교해본다면, 그는 이상적인 결과에 근거해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을 택한다면, 웨인은 모든 단계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규칙을 더 이상 구하지 않고 그저 적당한 결과를 낼 수 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행하면 된다.
이렇게 결과를 산출해내고 비교해보는 접근법은 종종 "결과주의" 혹은 "목적론적 윤리(teleological ethics)"라고 불린다. 명령 접근법(최선의 선택은 행위가 해당되는 규칙을 따르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는 접근법)과는 달리 결과 접근법은 성과에 따라 결정된다. 가장 도덕적인 행위의 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최종 결과인 것이다.
성경과 결과
목차로 돌아가기 성경을 규칙서로 여기고, 십계명의 관점에서 윤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실제로 성경이 독자들에게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고 이를 참고해 의사결정을 내리라고 얼마나 자주 권고하고 있는지 알게 되면 놀랄 것이다.
잠언은 이를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잠언은 특정 행위가 초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결과를 자세히 설명하는 함축적인 격언들, 즉 경고와 약속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예로, 잠언 14:14은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가득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고 말한다.[47]
예수님께서도 청중을 향하여 그들이 내리는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신중히 따져보라고 경고하신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의 일생과 사역은 “공공의 선”을 위한 결정의 살아있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팔복의 가르침 또한 결과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배부르고" 싶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산상설교의 다른 부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과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5:25)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3-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5)
별도로 표기하지 않는 한 모든 구절들은 NRSV 버전이다.
선한 것 판단하기
목차로 돌아가기결과를 고려하는 것은 우리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웨인이 곧 깨닫게 되는 사실은 결과주의가 네 개의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선한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선함을 정의할 수 있을까? 예컨대, 그것은 아마도 고객이나 웨인을 그저 금전적으로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어주는 것보다는 더 높은 차원일 것이다.)
- 누구에게 선한 것인가? (실제로 누가 이러한 선택에 따른 혜택을 받는가?)
- 선한 정도가 측정될 수 있을까?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것이 선한 것이며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예견할 수 있을까?)
- 어떠한 상황에서 선한 것인가? (이 상황에서 선한 것이 다른 상황에서는 악할 수 있을까?)
선한 것은 무엇인가?
목차로 돌아가기 선한 것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가장 잘 알려진 형태의 결과론적 사고는 행복이나 즐거움을 최고의 선으로 여긴다. 이러한 형태의 결과주의적 윤리는 "공리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선하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행복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본다. (이는 곧 고통을 불러오는 모든 상황은 최소화하거나 피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행복을 가장 궁극적인 선으로 보지 않는다. 성경 속에서 행복이 관심의 주제가 될 때에도, 우리의 문화가 이해하는 것과는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가르침에서 우리의 사고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괴롭거나 슬프다고 느낄 수 있는 상황들이 바로 우리가 축복을 받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성경적인 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는 무엇이 선이라고 여겨지고 있을까?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하기 이전 세상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좋았더라," 그리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다(창1:4, 9, 12, 18, 21, 25, 32, 2:18-24). 그러한 세상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돌아오셔서 요한계시록 21-22장 말씀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이하실 때 회복될 것이며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모두 그러한 세상의 모습을 재건하고자 하는 목적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성경 구절에서 많이 묘사되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기쁨이 넘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창2:19-25).
사람들이 즐겁게 일을 하며 이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제공받는다(창2:7-9).
사람들이 인종이나 경제적 격차 혹은 성별로 인한 차별 없이 사회 안에서 모두 동등하게 대우받는다(갈3:23).
아픔이나 질병이 없다(계21:4; 22:2).
사회가 평화와 번영 속에서 살아간다(미4:3-4).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타락한 세상보다 위에서 묘사한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지만, 하나님의 주 목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창조되었던 본래의 목적처럼 우리를 하나로 만들고자 하신다. 신약성경은 고통과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자신이든 혹은 우리의 아픔으로 인해 도움을 받는 이들이든 간에, 이들을 온전함으로 이끄는 길임을 명백히 보여준다.[1]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예수님의 선택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자유와 삶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2]
예를 들면, 고난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보라. —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 (골1:24)
자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와 같은 구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누구를 위한 선인가?
목차로 돌아가기결과론적 윤리의 문제는 누구의 결과가 최적화되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이다.
개인적 이익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측정의 기준으로 본다. 이들은 만약 어떠한 결정이 자신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이러한 접근법을 취한다. 이러한 관점은 윤리적 이기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다지 탐탁지 않은가? 이 접근법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단정 짓기 전에, 웨인의 딜레마에 좀 더 적용시켜보자. 개인적 이익은 완벽하게 이기주의적인 관점에서 행동하는 것을 항상 의미하진 않는다. 웨인은 개인적 이익에 따라 고객의 차를 수리해주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장기적 평판이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고객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일에 달려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밖에서 보기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가 실제로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경우는 종종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부정적이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흔히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에게 좋은 것은 대부분 모든 이들에게도 좋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근대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비즈니스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개인의 이익추구 행위는 의도한 것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공공의 선을 달성해내곤 한다. 나는 공공의 선을 표방한 교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이를 제대로 이룬 경우를 본 적이 없다.[1]
오늘날 이러한 말들은 순수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단 비판을 받을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고객과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법들을 추가했음에도 말이다.)
공공의 선
두 번째로,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방법은 공공의 선을 측정 기준으로 한 결과에 따라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최선의 선택이란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결정이라는 접근법을 취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선(공리주의의 경우에는 행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이로 인해 소수의 사람들만 행복을 느끼고, 설상가상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행동은 선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반대로, 소수의 사람들을 희생한 채 다수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행위는 선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이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혹은 암담한 결과를 줄 수 있는 상황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특히 소수의 사람들이 소외된 사회적 약자 집단인 경우엔 말이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러한 조건 하에서 온갖 종류의 악이 용납되어 왔다.[2]
성경은 빈곤층 및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나서고 이들을 보호하라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예언서에서는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촉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 살펴보는 척도가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대표적인 세 개의 사회적 약자 집단)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떠한 대안도 완벽하게 선하거나 옳지 않은, 결정하기 어려운 선택들이다. 그러한 경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대안들의 상대적인 악의 정도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정전론"(just war theory)이라고 불리는 전쟁이론은 그러한 상황에서 윤리학자들이 어떠한 지침을 제시하고자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3] 때로는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선택이 존재한다. 그러한 고통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에 대한 선택을 내릴 때는 진정한 연민과 겸손함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것이 웨인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웨인이 처한 특정 상황에서는 그가 내리는 결정의 결과를 고려해보는 것이 다른 상황들보다 훨씬 더 간단하다. 그 이유는 웨인이 보기에 그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당사자는 웨인 자신과 고객, 이렇게 두 명이기 때문이다. 웨인이 자동차 딜러로서 환경이나 사회적, 공동체적 문제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복잡한 결과들을 고려해야 하는 다른 여러 결정들과는 달리, 이 선택은 훨씬 간단하다. 수리비를 부담하겠다고, 아니면 일부만이라도 부담하겠다고 결정하게 되면 어떠한 선한 결과가 수반될까?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웨인은 만족한 고객을 얻게 될 것이며, 그 고객은 막대한 금전적 어려움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 이는 수리비를 지불하지 않고서 웨인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것보다 공공의 선을 더욱 잘 실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Adam Smith,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7).
고전적인 성경적 예시는 예수님의 처형으로 이끈 Caiaphas의 결정이다. 유대교 의회에서 그가 선포하기를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11:50) 이 구절의 아이러니는 저자 요한이나 그의 독자들에게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사악한 나치 정권에 대해 어찌 해야할지 고뇌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딜레마이다.
선한 정도가 측정될 수 있을까?
목차로 돌아가기결과는 측정하거나 수량화하기가 어려우며, 때로는 불가능하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결과에 대해 인식하고는 있지만 그 결과를 측정할 방법이 부족할 때도 있다. 일이 즐거울 때와 연봉이 높을 때 중에서 어떤 경우가 더 행복할까? 이 밖에도, 우리의 결정에 따른 모든 결과들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들과 환경이 영향을 받는 데도 우리가 이를 고려하지 않는 경우들도 종종 있다. 때로는 이들을 미리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성경은 많은 면에서 우리의 한계와 극도로 제한적인 관점을 깨닫게 도와준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결과를 신중히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서 겸손함이 요구되며, 겸손함 속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만 의존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혹은 실제로 선을 측정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 없을 때도 있다. 이러한 상황만 보더라도, 결과를 고려하는 것이 종종 의사결정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단 하나의 윤리적 접근법으로는 불충분함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명령과 결과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명령은 대개 선한 결과로 이어질 확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자체로도 선한 행동들로 우리를 이끌어준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특히 거짓말의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려운 복잡한 상황들, 심지어는 의도적인 "하얀" 거짓말과 같은 경우에도 그 반대보다 더 긍정적인 결과로 우리를 이끌어줄 확률이 높다. 이와 동시에,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상황에 따라 어떠한 규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도와준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은 모든 상황에서 적용된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인간의 힘으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식일을 지켜라"는 명령은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도와주지 못하는 식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아픔과 고통의 결과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상태인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과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눅13:10-16, 요5:1-9).
어떠한 상황에서 선한 것인가?
목차로 돌아가기 상황은 윤리적으로 중요하다. 때로는 다른 문화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행위가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혹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이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는 바울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문제의 윤리적 결정을 다루는 부분인 고린도전서 8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이 지적하는 핵심 문제는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믿음이 약한 신도들"에게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바울은 스스로에게 만족함을 주는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보다 남을 위한 배려와 사랑을 더 앞세우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이게 옳은가?"가 아니라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 것인가?"인 것이다. 바울은 다른 상황에서는 해도 된다고 느꼈던 행동을 범죄나 다른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상황에서는 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 특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결과에 따라 행위의 옳고 그름이나 지혜를 결정한다.
이는 도덕적 상대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상황에서는 선했던 행동이 다른 상황에서는 선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적 가치가 상황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 문화의 특징인 완전한 상대주의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진리나 도덕에 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짓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절대적인 기준이다. 하지만 여러 맥락에서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이거 벌써 계산한 거야?"와 "이 셔츠 나한테 잘 어울려?"와 같은 질문들은 서로 이 원칙을 다르게 적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점점 다문화로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맥락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바꾸어야 하는 많은 상황들에 맞닥뜨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직원 중 친척이나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1년에 몇 번씩 며칠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하는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이 있다면, 고용주로서 이들에게 어떻게 경조사 휴가를 분배해 줄 것인가?
아니면 여러분이 텐트를 제조하는 회사를 운영하는데,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는 이유로 다른 가난한 국가에서 텐트를 제조하기로 결정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직원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적정한 임금은 어떻게 정해야 할까?
상황에 관한 문제는 다문화의 문제 그 이상이기도 하다. 이웃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들을 다르게 대우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들의 연봉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 진료비를 청구할 수도 있다. 아니면 자동차 딜러가 가격을 협상할 때 구매자의 경제적 조건을 고려할 수도 있는 것이다. 플로우 오토모티브(Flow Automotive)사가 가난한 사람들이 협상을 덜 하는 경향이 있어서 결국 차를 구매할 때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한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상황적인 관심사들이 웨인의 의사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웨인은 이러한 특정 상황들이 행동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들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요소를 이해하고 예상해보고자 했다.
앞서 우리는 고객의 금전적 상황과 관련한 문제를 언급했었다. 만약 웨인이 수리비를 부담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일부분만 부담하겠다고 한다면, 그 고객과 가족들에게 어떠한 금전적 영향을 미칠까? 상황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은가? 웨인은 이 문제를 고려사항에 넣을만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더 광범위한 사랑과 정의의 문제에 포함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그 고객이 이웃을 돕고 이 세상에 진정한 변화를 만드는 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웨인이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한 상황이라면, 아마도 웨인은 그에게 좀 더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웨인은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지불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가 만약 그 거래에서 수익을 거의 혹은 전혀 내지 못한다면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웨인은 자신이 남기게 될 선례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까? 만약 웨인이 온화한 행동을 취한다면, 다른 고객들도 도움을 받으러 몰려들지 않을까? 웨인은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며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웨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꼼꼼히 살펴보았던 다른 요소들은 그에게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이었다. 그가 내린 타당한 결정에 스스로 만족하기만 한다면, 웨인은 "어수룩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에 따라, 웨인은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인격 접근법
목차로 돌아가기지금까지 웨인이 그의 자동차 거래 딜레마를 분석하면서 사용한 두 가지 접근법인 명령 접근법과 결과 접근법은 행동/선택 자체의 도덕성에 주목했다. 하지만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결정을 내리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윤리적 선택을 고려하는 방법도 있다. 이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행동을 취하는 사람의 인격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흔히 "미덕" 윤리 혹은 "인격" 윤리라고 불린다.
미덕 접근법은 특정 상황마다 매번 "규칙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최선의 결과를 낳을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지지 않고,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접근법은 만약 어떤 사람이 선한 성품을 발달시키면, 일생동안 여러 상황들 속에서 옳은 일, 혹은 선한 일을 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이 접근법은 행위의 윤리라기보다는 존재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문제를 지적한다. 무엇이 옳은지 안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일을 행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움으로써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충분히 알아보았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 정의, 신성함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 목적은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이러한 성품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는 성품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고자 하는 시도였기 때문에, 명령 접근법의 범주에 들어간다. 인격 접근법은 우리의 행동이 인격을 어떻게 형성하거나 만들어 나가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를 위해 주안점을 살짝 바꾸어보자.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우리의 인격을 만들어가는지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목표는 더욱 신성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서 이러한 특성들이 우리 내면에 기본설정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이제 강조할 부분은 우리의 인격이다.
이 문제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 그 이유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로, 우리가 지금까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한 것들은 좀 더 이상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제시해왔다. 우리가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복잡한 문제들을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해결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은 대부분 바쁜 상황에서 아주 짧은 찰나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상사의 불만에 대응하고, 고객과의 오해를 해결하며, 경험이 없는 구매자에게 조언을 해주고, 실적이 좋지 않은 팀에게 동기부여를 해줄 때, 이러한 과정들은 대체로 고민 없이 이루어진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결정이나 행동으로 우리를 즉시 이끌어줄 수 있는 내재된 인격적 특성이나 덕목에 의존할 수 있다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내리는 윤리적 결정들의 많은 부분은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 거의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우리가 무엇을 하기로 결정내리는 것의 대부분은 우리의 인격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정을 신중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에도, 우리의 결정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의 습관이나 인격에 큰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내리는 윤리적 결정은 우리가 어떠한 의사결정 과정을 택하는지에 따라 결정되기 보다는 우리가 누구인지(인격의 유형이나 몸에 밴 가치관)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은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선택을 내리는 일은 대부분 이미 끝나있다."라고 말했다.[1]
세 번째로, 인격을 기반으로 한 접근법은 윤리적 형성과 결정에 있어서 공동체의 역할을 쉽게 고려할 수 있다. 우리가 종종 스스로를 자유롭게 개인적 결정을 내리는 개인으로 인식하더라도,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인격 기반의 접근법은 대게 공동체가 줄 수 있는 윤리적 자원을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선한 의사결정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선한 인격을 함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우리 삶에서 미덕과 선이 형성되면, 선한 결정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고 주장한다.
Iris Murdoch, The Sovereignty of Good (London: Routledge, 1970) 37쪽.
무엇이 미덕인가?
목차로 돌아가기만약 인격과 미덕을 형성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가 해결해야 되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 어떻게 미덕을 정의할 수 있을까?
- 무엇이 미덕인지 실제로 누가 판단하는가?
- 미덕은 어떻게 함양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질문이 아마 답하기 가장 쉬운 질문일 것이다. 옥스퍼드 사전은 "미덕"을 "도덕적으로 바르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성품"으로 정의한다. 모든 문화는 각자 높이 평가하는 성품들이 있다. 그 성품들은 해당 문화의 맥락 안에서 미덕으로 여겨진다.[1]
하지만 두 번째 질문, 즉, “누가 특정한 성품들을 선하다고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좀 더 복잡하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철학자, 이론가, 사상자들은 덕목을 나열하고 정의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덕목인 정의, 용기, 절제, 그리고 자제를 강조했다. 초대 교회 지도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339-397년)는 이러한 덕목들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특히 "신학적인” 또 다른 세 가지 덕목들을 성경에서 인용해 추가한다. 바로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이다. 6세기에는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러한 덕목들에 상응하는 반대 죄악들을 언급했는데, 바로 우리가 7대 죄악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다.[2] 개신교 신학자들은 최근에 와서야 덕목들을 열성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글렌 스타센과 데이빗 거쉬는 이렇게 말했다. "덕목이란 우리가 공동체에 (긍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해주는 인격적 특징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누구를 통해 혹은 어떤 것을 통해 어떤 것이 도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이 문제의 답은 바로 성경이며, 성경 속에서 기독교적 덕목을 정의하는 데 있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중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떠한 덕목을 발달시켜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 직접 본보기가 되셨던 성품들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일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 스타센과 거쉬의 말에 동의한다.
성경은 평평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절정이자 중심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도덕적 문제도 그 문제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고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은 산상설교에 가장 많이 담겨 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마땅히 갈망해야 하는 구체적인 덕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산상설교는 아주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가르침을 통해 주요 덕목들, 즉 예수님께서 특히 가치 있게 여기시는 특성과 행동을 강조해 보여주신다. 마음이 가난한 것, 자비,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것, 온유함,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 슬퍼하는 것(마5:1-12) 등은 우리가 길러야 하는 주요 성품으로 보인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의 행동을 우리의 인격, 즉 중심적 태도 및 동기와 결부시키신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다른 말씀들 또한 이러한 연관성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그 예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막7:21-22).
초대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빨리 깨달았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인격 발달을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말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절제인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권고하고 있다(갈5:16-25).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3-5)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할 예시이자 본보기시다.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말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야 한다는 점을 매우 크게 강조하는 신약성경을 반영한 것이다.
"virtue"라는 단어의 역사는 이러한 문화적 성향을 보여준다. 우리의 영어 단어는 라틴어 virtus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는 "남자, 남성"이란 뜻의 vir로부터 왔다. 그들의 초기 왕국 건국 시절에 로마인들은 침략하는 정복자들의 세계로부터 살아남아야 했다. 그 결과 그들의 단어 virtus는 "미덕(virtue)" 혹은 "용기(courage)"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초기 로마인들에게 미덕이란 남자다움과 기꺼이 그들의 가족과 집을 지키려는 마음이었다.
욕정, 폭식, 탐욕, 나태, 분노, 질투 그리고 교만
웨인의 인격이 그의 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목차로 돌아가기덕목에 관한 이런 이야기들은 웨인을 조금 혼란스럽게 했다. 자신의 인격이 어떻게 발달되고 있는지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실 진정한 인격은 아마도 자기 자신의 분석이 아닌 타인의 관찰에 의해 더 정확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웨인은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중요한 반응의 과정을 거치면서 뭔가를 점점 깨닫게 되었다. 고객의 자동차에 대한 불평과 수리해달라는 요구에 저항하는 것이 쉽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은 고객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웨인은 정말로 배려와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가 일생에 걸쳐 더디게 진행되어왔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발달되어온 과정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는 특히 동정심과 친절함, 그리고 관대함이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중요시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고객의 요구에 긍정적으로 답하고 싶어졌다. 따라서 웨인이 결과를 추정해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고객의 요구를 어떻게 거절할까에 대해서 계산하지 않고, 오히려 얼마나 그 고객을 도와줄 수 있을까를 계산해보았다. 그의 기본설정이 그의 성품을 만들어가는 가치들에 의해 정해진 것 같아 보인다.
인격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발달하고 성장할까?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는 삶 속에서 선한 인격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일터에서 이들이 일하는 모습은 정직해 보이며 그들의 평소 삶과도 일관되어 보인다. 이들은 정확히 어떠한 방법으로 그러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이 된 것일까?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문화를 고려할 때, 이들의 성품은 대게 그리스도를 향한 강한 헌신, 엄격한 규율과 독실함,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의 결과일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분명 중요한 것이고 성령께서도 사람에 따라 매우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지만, 그러한 변화는 좀 더 넓은 상황 밖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미덕 윤리의 지지자인) 매킨타이어(Maclntyre)와 하우어워즈(Hauerwas)는 둘 다 도덕적인 삶을 만들고 체화시키는 데 있어 공동체가 지닌 지대한 역할을 강조한다. 이들은 특정 공동체의 이야기들이 그 공동체의 인격을 결정짓는 주된 요소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대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이야기 속에는 인격과 공동체를 모두 성장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사회를 몇 년 간 지배해온 이야기는 바로 자기주도적으로 사회적 순응의 억압을 극복한 인물들에 대한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마이웨이(My Way)"부터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Pirates of the Caribbean)>(이 밖에도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는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조금씩 변형만 시킨 것이기 때문에 하나만 언급한다), 그리고 베이브 루스(Babe Ruth)의 인기 등에서 볼 수 있는 두드러진 이야기는 바로 사회적 기대의 압박을 극복하는 개인의 내면적 인격의 승리이다. 신문을 읽을 때 특정 사건과 신문이 그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방식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러한 이야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경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제공해준다. 성경 또한 예수님께서 사회적 억압을 누르고 승리하신 이야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주도적이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의 방향이 외부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말씀하신다(요12:49-50).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닮아야 된다고 말씀하신다(요일3:2).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과 가치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성경 이야기는 그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찾을 수도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매우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우워어즈, 스타센, 그리고 거쉬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분의 성품과 덕목을 닮으라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문화와 신앙 공동체를 거쳐 걸러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이 이야기를 다시 전하는 방법, 즉 우리가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덕목은 어떤 것인지, 강조해야 하는 실패는 어떤 것인지, 또 그 이야기가 묘사하는 습관과 행동들을 기르기 위해 서로를 어떻게 격려할 수 있는지, 등은 우리가 미덕을 함양해가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모든 믿음의 공동체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생활방식이나 세계관과 너무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유혹이다. 오늘날 서구 교회들은 부와 풍요로움이 만연하고, 자기주도적인 승리에 대한 이야기가 과거 그 어떤 때보다도 가장 박수갈채를 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한 상항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위험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어마어마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인 의미를 무의식적으로 걸러내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그리고 안타깝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인데— 우리에게 남는 믿음 공동체의 이야기는 좁은 범위의 "개인적" 도덕 문제들만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만 그리는 이야기뿐이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묘사되는 예수님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관된 윤리적 삶에 대한 본을 보이시고 가르침을 주시지, 성적인 행위와 개인적 정직함에 국한된 문제들만 다루시지 않는다. 그 문제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말이다. 예수님의 윤리는 그 이상의 훨씬 많은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경건한 인격은 그저 개인적인 변화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성품이 처음부터 양육되는 공동체의 환경 속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반드시 예수님에 대해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불가피한 맹점들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벤저민 팔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 성경은 히브리서 성경과 함께 믿는 공동체의 불가분한 상황을 강조한다. 이 경우에 이 공동체는 에클레시아(ekklesia) 즉, 교회다.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이 양육되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의 과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생경하고 적대적인 문화에 맞서는 것은 결코 개인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개인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행동의 진원지가 될 수 없다.[1]
Benjamin Farley, In Praise of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5), 100쪽.
일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함양하려면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는 미덕 윤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 일터에서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올바른 의사결정 과정을 발달시키는 것 이상의 일이다. 이는 심지어 "윤리 강령"을 따르는 것 이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감에 따라 우리의 윤리적 선택이 크게 결정된다.
- 우리는 혼자서 하나님의 성품을 만들어갈 수 없다.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복음의 이야기를 다시 전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실천하고자 하는 공동체에 전념할 때, 우리는 덕목을 갖춘 사람들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비즈니스 세계에는 인격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한 공동체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성품을 좀 더 명확히 알아내고자 노력하고, 도덕적인 삶에 대한 우리의 제한적인 시각에 도전하는 어렵고 불편한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비기독교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하는 안타까운 여러 사례들을 반복하게 될 확률이 낮아진다.
모든 탐구를 아우르는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명령, 결과, 그리고 인격은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세 가지 접근법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맥락 안에서 많은 변화 요소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이 접근법들을 결합시켜 사용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명령이나 규칙을 적용하고자 할 때 그러한 행동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이와 동시에 그러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규칙들을 알아보고자 한다면 다른 결과들을 계산하고 비교해보아야 한다. 결국 어떠한 이론을 따르기로 결정했든지,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인격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따르고자 하는 개방적인 마음이다.
따라서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접근법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일종의 윤리적 춤을 추는 것이다.
세 가지 접근법 요약
윤리에 대한 접근법 |
의무론 |
목적론 |
미덕 |
주요 개념 |
명령/규칙 |
결과/성과 |
인격/덕목 |
주요 질문 |
규칙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
어떠한 선택이 최선의 결과를 낳는가? |
나는 선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
여러분은 이 중에서 어떤 접근법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가장 선호하는가? 이는 종종 여러분이 처한 상황의 본질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중대한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상적인 도덕적 선택에 관한 것인가?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중대한 도덕적 딜레마
목차로 돌아가기때때로 중대한 도덕적 딜레마는 장기간에 걸쳐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경우, 의사결정 과정을 시작하는 하나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
- 관련된 모든 사실들을 수집하라.
- 주요 윤리적 문제들을 명확하게 밝히라.
- 이 경우에 해당하는 규칙과 명령들을 찾아라.
- 상황을 해결하는 데 있어 최선의 방법인 성경 읽기를 염두에 두고 성경과 같은 지침이 되는 중요한 자료를 살피라. 이밖에도 다른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라.
- 대안이 될 수 있는 행동 과정들을 모두 나열하라.
- 대안들을 원칙들과 비교하라.
- 행동의 방법에 따라 각각 예상되는 결과를 추정해보고 결과를 살펴보라.
-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써 여러분의 결정을 살펴보라.
-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라.
이와 같이 중대한 도덕적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방향을 정하는 일은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이 필요한 일이다. 특히 조직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으로서 맞닥뜨리는 일상적 문제들을 해결하게 되면 인생의 속도가 더욱 물 흐르듯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 접근법은 Richard Higginson, Called to Account (Guildford: Eagle, 1993) 224-240; David Cook, Moral Choices: A Way of Exploring Christian Ethics (London: SPCK,2000); 그리고 Scott B. Rae, Moral Choices: An Introduction To Ethics (Grand Rapids: Zondervan, 1995)에서 차용되었으나, 다른 많은 글에서 또한 나타난다.
일상적인 도덕적 선택
목차로 돌아가기우리는 앞서 우리가 일상생활 및 직장에서 내리는 대부분의 윤리적 결정들은 종종 압력으로 인해 미리 숙고할 틈도 거의 없이 순간적으로 내려진다는 점을 다뤘다. 이러한 경향은 본능적이며 삶 전체를 통하여 만들어진 습관의 결과물이고, 우리가 일하는 장소와 동료집단, 그리고 우리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의 문화에 따라 형성된다.
또한 이러한 결정들은 우리 존재의 핵심에 그리스도인의 덕목과 성품이 얼마나 자리 잡고 있는지 그 정도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이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행위에 근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우리가 더 이상 도덕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도덕적인 삶 가운데서도 규칙을 이해하고 결과를 추정해야 하는 상황은 항상 존재하지만, 이러한 경우 규칙과 결과는 미덕에 종속된다. 주인이 아닌 종으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정직함이라는 덕목을 가진 사람이라도 정확한 재무제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GAAP(국제회계기준)의 규칙을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 "우리의 의견에 따르면" 혹은 "예측불허"와 같은 표현들은 반드시 해당되는 정의가 수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항상 재무제표의 전반적인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규칙을 사용할 것이며, 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흐릴 수 있는 방법을 절대 찾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덕목에 주안점을 둔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딜레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 반대되는 덕목들이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끌어당길 수도 있다. 이러한 종류의 갈등은 정의와 평화, 충성과 진실, 용기와 신중함에 간혹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훌륭한 도덕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옳은 정답이 단 하나만 존재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단 하나의 옳은 정답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며, 대조되는 모든 특징들을 고려해 균형 잡힌 기독교적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완벽한 기독교적 조치를 구분하고 행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곧 완벽한 기독교적 조치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행동의 모든 방향들이 부정적인 결과를 함축하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용서받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옳은 일을 하고자 기를 쓰면서 애쓰지 말고, 나사렛의 목수,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주님의 성품에 따라 우리의 하루 일과 속에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옳은 일을 행하도록 노력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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