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서론
목차로 돌아가기전도서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경험하는 노동과 기쁨, 덧없는 성공, 해답이 없는 질문 등을 재치 있게 다룬다. 전도서는 일하는 크리스천들이 성경에서 매우 좋아하는 책이며, 그 해설자는(대부분의 영문판 성경에서 ‘ Teacher ’라고 불림) 일에 관해 할 말이 많다. 그의 가르침은 간결하고 실용적이며 현명하다. 여럿이 한 팀을 이뤄 일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음 금언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 4:9). 살아 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일하면서 보내는 사람이면 전도자(Teacher)의 다음 말에 고개를 절로 끄덕일 것이다.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전 8:15).
하지만 전도자가 일을 묘사한 내용 가운데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일을 너무 부정적으로 표현한 나머지 읽는 사람이 자칫 크게 낙담할 수도 있다. 전도자의 말은 “헛되고 헛되며”(전 1:2)로 시작해서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8)로 끝난다. 그가 가장 자주 반복하는 어구들은 ‘헛되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 ‘알지 못할 것’,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누그러뜨릴 만한 더 큰 견해가 없다면, 전도서는 매우 암울한 책이 되고 말 것이다.
전도서 전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전도서는 진실로 일을 헛된 것으로 묘사하는가? 아니면 저자가 헛된 일들을 많이 겪어 본 후 의미 있는 일련의 일들을 추려 냈다는 얘기인가? 아니면 역으로, 일을 “바람을 잡으려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많은 긍정적 금언과 관찰마저 부정하고 있는가? 이 몇 가지 질문에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우리가 전도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도서는 일과 삶을 관찰한 내용을 잘 버무린 샐러드와 같다. 우선 전도자는 현실적인 관찰자로서, 살면서 겪는 우여곡절을 보이는 대로 묘사한다. 그리고 각각의 관찰마다 나름대로 지혜가 담겨 있다. 만일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전 2:24)라는 유용한 조언을 도출해 냈다면, 우리는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2:26)라는 구절이 따라온다고 해서 그리 걱정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은 전도서에서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내용을 인식하지 못한다. 설령 인식하는 이들이라 해도 “주석자들 간에 의견이 엇갈린다.”[1]
그러나 그런 단편적인 접근법 또한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는 여전히 알고 싶다. ‘전도서 전체에서 말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그것을 찾고 싶다면, 이 책에서 살아 숨 쉬는 아주 다양한 관찰들을 한데 묶어 주는 구조를 알아내야만 한다. 우리는 애디슨 라이트(Addison Wright)가 1968년에 처음으로 제시한 구조를 따를 생각이다. 그는 이 책을 몇 가지 사상적 단위로 나눈다.[2] 라이트의 구조를 선택한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성경 본문 내용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전도서에 나오는 반복되는 핵심 구절을 기초로 구조를 잡음으로써 객관성을 지켰다. (2) 소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많은 학자들이 그 구조를 인정한다.[3] (3) 무엇보다 라이트의 구조에서는 일과 관련된 주제들을 전면에 배치한다.
라이트의 주장 전체를 다룰 시간은 없으므로, 그가 제시한 사상의 단위들을 묘사하는 반복적 어구들을 짚어 보고자 한다. 이 책 전반부에서는 각 단위의 끝에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어구가 등장한다. 후반부에서는 ‘알지 못할 것’, ‘알아내지 못할 것’ 또는 ‘누가 능히 통달하랴’ 같은 어구가 그런 기능을 한다. 라이트의 구조는 이 책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할 것이다.
전도서를 읽을 때 놓칠 수 없는 또 다른 어구는 “해 아래에서”이다. 이 단어는 성경의 다른 책에서는 전혀 안 나오는데, 이 책에서만 스물아홉 번이나 나온다.[4] “해 아래에서”를 보면 자연스레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타락한 세계에서”라는 어구가 떠오른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여전히 좋지만 악으로 인해 심각하게 망가진 모습을 묘사하는 어구다.
왜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라는 어구를 그토록 자주 사용하는 걸까? 해가 끊임없이 하늘을 도는데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에 빗대 일의 무상함을 강조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해 아래에서”가 아니라 타락을 초월한 세계가 있을 수 있으며 거기서는 일하는 것이 헛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상상한 탓일까? 전도서를 읽는 동안 이 질문을 계속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의 삶과 아주 대조적인,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살짝 비쳐 준다. 우리의 수고는 덧없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전 3:14).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할 수 있는 구절로, 그것을 이해한다면 삶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도서 곳곳에 하나님의 성품을 기록했다. 우리는 그 하나하나를 눈여겨볼 것이고, 이 책의 끝에 이르러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전도서는 일을 정직하고 솔직하게 들여다봄으로써 일의 신학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맡은 일을 사려 깊게 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의 신학과 연계되어 있다. 참신하고 정직한 전도서의 말씀들을 읽어 가노라면 일과 관련한 대화들이 절로 이어지고, 또한 자연스레 깊어질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집단에서 흔히 접하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하라’는 잘 정돈된 처방전보다도 훨씬 더 깊이 우리 생활의 폐부로 스며들 것이다.
Roland Murphy, Ecclesiastes,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2002), xxxv.
Addison G. Wright, “The Riddle of the Sphinx: The Structure of the Book of Qoheleth,” Catholic Biblical Quarterly 30 (1968), 313-334쪽을 보라.
J.S.M. Mulder, R. Rendtorff (partially), A. Schoors (partially), R. Murphy를 포함한다. Murphy, Ecclesiastes, Word Biblical Commentary, xxxvi- xxxviii를 보라.
Murphy, Ecclesiastes, Word Biblical Commentary, 7쪽.
해 아래서의 일 (전1:1-11)
목차로 돌아가기전도서의 핵심은 일에 관한 탐구다. 일은 일반적으로 “수고”(히브리어로 amal)라 불리며, 이 단어는 일의 고단함을 나타낸다. 전도서 1장 3절에서 이 주제를 소개한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전도자는 노동의 수고를 “헛되도다”라고 평가한다(전 2:1). 히브리어로는 ‘hebel[헤벨]’인데, 전도서에서 아주 자주 나오는 표현이며, 실제로는 ‘숨’(breath)이라는 뜻이다. 공허하고 덧없으며 영구적인 가치가 없는 것을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쓴다. 이 단어는 전도서의 핵심 단어로 딱 들어맞는다. ‘숨’이란 본질상 순간적이며 식별 불가한 실체로, 금세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이 순간적인 공기의 들이마심과 내쉼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머지않아 숨은 멎을 것이며 삶은 끝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헤벨은 덧없고 가치 없는 것, 즉 궁극적으로는 끝이 날 것을 묘사한다.
한편 어떤 의미에서 “헛되도다”는 오역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익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벨의 참뜻은, 어떤 것은 덧없고 일시적인 가치만 갖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숨을 한 번 쉬는 것은 영구적인 가치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런 순간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존재와 행동도 이와 같아서 이 무상한 인생에서 일시적이긴 하지만 나름 참된 의미가 있다.
배 만드는 일을 생각해 보라. 이 땅 위에는 배를 짓는 데 필요한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원재료가 널려 있다. 거기에 역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재간과 근면성을 더해 안전하고 성능 좋고 아름답기까지 한 배를 만들 수 있었다. 어떤 배는 군사용으로, 어떤 배는 음식, 자원, 제조된 물자 및 사람들을 필요한 곳으로 운반하는 용도로 쓰인다. 진수식이 시작되면 그 배와 관련 있는 모든 이들이 성공을 축하한다. 그렇게 그 배가 조선소를 떠나면, 이제 조선소 사람들은 그 배를 일절 제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자가 선장이 되어 배를 함정에 빠뜨릴 수도 있고, 그 배를 전세 내어 마약, 무기 또는 심지어 노예를 밀수입할 수도 있다. 선원들이 혹사를 당할 수도 있다. 물론 다행히 고상한 일을 맡아 할 수도 있겠지만, 무슨 일을 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낡아 폐물이 되는 상황은 면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박 해체 공장으로 보내져 재활용 금속과 폐기물로 구분되고, 최종적으로는 사람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훌륭하게 지어졌지만 영원할 수는 없다. 우리도 그 배와 같아서 살아 있는 한, 이런 긴장 가운데서 일을 해야 한다.
서론에서 논의했던, 지구를 도는 태양 이미지(전 1:5)가 생각난다. 이 커다란 천체가 하늘에서 하는 쉴 새 없는 활동은 빛과 열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매일 살아가지만 수천 년이 지나도 천체는 전혀 변화가 없다.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전 1:9). 이것은 우리의 일에 관한 영원한 선고는 아니지만 결코 감상적이지 않은 관찰에서 나온 논평이다.
일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 (전1:12-6:9)
목차로 돌아가기전도서 1장 1-11절에서 노동은 헛된 것이라고 선언한 전도자는 나아가서 삶을 잘 살기 위한 가능성을 여러 가지로 탐구한다. 그는 성취, 쾌락, 지혜, 재물, 시기, 우정 및 하나님의 선물에 담긴 기쁨을 차례로 고찰한다. 이런 것들 가운데 몇 가지에서 그는 어떤 가치를 발견하는데, 앞의 탐구에서보다는 뒤의 탐구에서 더 많이 발견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영구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으며, 각 섹션마다 일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성취를 추구하다 (전1:12-18)
목차로 돌아가기첫째로, 전도자는 성취를 탐구한다. 그는 왕이면서 현자였다. 표준 이상의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자기 이전에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전 1:16). 그런데 그 모든 성취가 그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는가? 별거 아니었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3-14).
영속적인 성취는 불가능한 듯이 보였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전 1:15). 목표를 달성했어도 행복이 없었다. 그가 성취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공허하고 제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을 뿐이다.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전 1:17-18).
쾌락을 추구하다(전2:1-11)
목차로 돌아가기다음으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전 2:1). 그는 재물, 집, 정원, 술, 종(노예), 보석, 오락, 성적 쾌락을 얻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전 2:10a).
그는 성취에서와는 달리, 쾌락 추구에서는 약간의 가치를 발견했다.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전 2:10). 그가 성취한 것으로 알았던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이 밝혀졌으나 쾌락은 최소한 기분을 좋게 했다. 목적(이 경우에는 ‘쾌락’)을 위한 수단으로 행한 일은 강박 상태에서 행한 일보다는 만족감이 컸다. ‘많은 처와 첩들’(전 2:8)을 두라는 건 아니나,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즐기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우리가 일 이상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를 그쳤다면, 만일 우리가 노동의 열매를 더 이상 향유할 수 없게 되었다면, 우리는 일의 주인이 아니라 일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단지 쾌락을 얻기 위해서 하는 노동은 궁극적으로 만족을 줄 수 없다. 이 섹션을 끝맺는 말씀을 보자.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지혜를 추구하다(전2:12-17)
목차로 돌아가기일 밖에서 목표를 찾는 것이 좋고, 또한 쾌락보다는 더 높은 목적이 필요하다. 따라서 전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전 2:12). 그는 오늘날의 교수 또는 연구원과 비슷한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성취를 위한 성취와는 다르게, 지혜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달성이 가능하다.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전 2:13).
그러나 지혜는 머리를 고상한 생각으로 채운다는 것 외에는 사실 삶에 별 도움이 못 된다.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기(전 2:16) 때문이다. 전도자는 지혜를 추구하다가 낙담하기에 이르는데(전 1:17), 오늘날 학문에 매진하는 사람들도 흔히 겪는 상황이다. 전도자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전 2:17).
재물을 추구하다 (전2:18-26)
목차로 돌아가기이번에는 노동의 결과로 얻는 재물을 언급한다. 일보다 재물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어떠한가? 이것은 쾌락을 얻기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악하다. 재물은 유산 문제를 초래한다. 당신이 죽을 때 당신의 재물 전체가 전혀 자격이 없는 이에게로 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전 2:21). 전도자가 이런 상황을 얼마나 마뜩치 않아 하는지 다음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전 2:20).
여기서 하나님의 품성 한 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전 2:26). 하나님의 이 같은 품성은 전도서에서 수차례 나오는데, 그분의 선물은 음식, 음료와 기쁨(전 5:18; 8:15), 재물과 소유물(전 5:19; 6:20), 영예(전 6:2), 정직(전 7:29),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전 11:5)와 삶 자체(전 12:7)를 포함한다.
오늘날 큰 재물을 축적한 많은 사람들도 전도자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함을 깨닫는다. 재물을 모으는 사람들은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혹여나 재산을 만족할 만큼 모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재물을 어떻게 해야 지혜롭게 물려 줄지가 견딜 수 없는 짐으로 다가올 수 있다. 앤드류 카네기는 이런 짐의 무게를 느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재물의 축적을 멈추고, 그것을 지혜롭게 분배해 주는 극히 심각하고도 어려운 과업을 시작하고자 결심했다.” [1]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나눠 주시는 분이라면, 재물을 모으는 것보다 나눠 주는 것이 보다 더 큰 만족을 가져올 게 너무나 분명하다. 그런데 전도자는 재물을 나눠 주는 것에서도 재물을 모으는 것 이상의 만족을 발견하지 못했다(전 2:18-21). 하나님이 ‘주는 일’에서 발견하신 만족도 어쨌든 해 아래에서 사는 전도자를 피해 갔다. 그는 재물을 투자하거나 더 높은 목적을 위해 나눠 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보지 않은 듯하다. 참으로 전도자가 발견한 것 이상의 더 높은 목적이 없다면, 재물을 모으고 분배하는 것 역시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 되고 만다(전 2:26).
Andrew Carnegie, Autobiography of Andrew Carnegie (Boston: Houghton Mifflin, 1920), 255쪽.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다 (전3:1-4:6)
목차로 돌아가기어떤 일에 단 하나 변치 않는 목적이 없다면, 아마도 수많은 목적들이 있을 것이고, 그 각각은 자신의 때에 의미를 드러낼 것이다. 전도자는 이 내용을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 3:1)로 시작하는 유명한 장에서 탐색한다. 핵심은 모든 활동이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어떤 때에 완전히 그릇된 일이 다른 때에는 옳고, 필요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에는 슬피 우는 것이 옳고 춤추는 것이 잘못이지만, 또 다른 순간에는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활동이나 조건 중 영구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 속에서 사는 천사들이 아니다. 우리는 시간 변화가 있는 세계에서 사는 피조물이다. 이것은 어려운 교훈이다. 노동이 영구적인 평안, 번영 또는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삶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전 3:3). 만일 우리의 일에 영구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면,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그 표징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전 4:1). 우리가 현재를 사는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우리 처지는 갑절로 어렵지만, 동물과는 달리 우리는 마음에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다(전 3:11). 따라서 전도자는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찾을 수는 없었지만,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을 동경하고 있었다.
더욱이 사람들이 행하려는 시기적절한 선(善)도 억압에 의해 위축될 수가 있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 4:1). 그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것은 정부가 가해 오는 억압이다.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전 3:16). 힘이 없는 이들은 더 나아질 수가 없다. 힘이 없는 사람들은 ‘시기’라는 감정에 쉽게 노출된다. 우리는 권력, 재물, 지위, 대인관계, 소유물 또는 우리에겐 없는 다른 것들을 갖고 있는 자들을 시기한다. 전도자는 시기가 억압 못지않게 나쁘다는 것을 인식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4:4). 억압이나 시기를 통해 성취감, 쾌락, 지혜 또는 재물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완전히 시간 낭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음에 빠진다.
그러나 전도자는 낙담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라는 선물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전 3:11a).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에서는 우는 것이 옳고,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기뻐하는 것이 옳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살면서 생기는 정당한 쾌락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2-13).
이런 삶의 교훈을 일에 적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 3:22a). 일은 저주 아래 있게 되었지만, 본질적으로 일 자체가 저주는 아니다. 미래를 훤히 다 내다볼 수 없는 것조차도 일종의 축복이다. 모든 것들의 종국을 예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전 3:22b).
만일 우리의 일이 우리가 예견 가능한 시간에 이뤄진다면, 그건 분명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품성 두 가지를 들여다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전지하시다.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다(전 3:14). 우리는 해 아래에서 삶의 조건에 묶여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께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이 있다. 전도서 7장 13-14절과 8장 12-13절에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반복해서 언급한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며’(전 3:15),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전 3:17). 이런 사상은 전도서 8장 13절, 11장 9절 및 12장 14절에서도 반복된다. 삶이 불공평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전도자는 공의는 반드시 집행된다고 단언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전도서는 타락한 세상에서의 우리 삶을 현실적으로 탐구한다. 노동은 고되다. 고된 노동 중에도 우리의 몫은 그 가운데서 기쁨을 찾고 노동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렷이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될 수 없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흔적(sign)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이런 다소 희망적인 통찰에도 불구하고, 타이밍에 대한 탐색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하면서 끝이 난다. 한 번은 전도서 4장 4절(앞에서 논의했음), 또 한 번은 전도서 4장 6절에서다.
직장 동료와 우정 쌓기 (전4:7-4:16)
목차로 돌아가기일의 참의미는 관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전도자는 직장에서 우정이 갖는 가치를 높이 칭찬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 4:9). 꽤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을 만난다. 비록 일한 만큼의 보상을 못 받는다 해도, 비록 일이 그다지 흥미롭지 못하다 해도, 동료와의 우정이 있다면 업무 관계에서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아쉬워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퇴직하고 나면, 직장 동료들을 그리워한다.
직장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개방적인 자세와는 별개로 사람들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전 4:13).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오만과 권력은 큰 장애가 된다(전 4:14–16). 이 진리를 하버드경영대학원에서 “어떻게 해서 강점이 약점으로 변하는가?”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탐구했다.[1]
직장에서 서로 친구가 되는 건 무엇보다 그들이 공통 목표를 향해 함께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통 목표가 없는 일반 사회에서보다는 직장에서 우정을 쌓는 사람들이 더 많다.
전도자는 앞선 다른 탐구보다 우정을 매우 낙관적으로 본다. 직장 내의 우정은 어차피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업무 분야가 달라지고, 새로운 팀을 조직하면서 원래 팀을 없애기도 하며, 이직이나 퇴직, 해고 등으로 동료들과 헤어지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자신과 잘 맞지 않는 동료와 부딪치는 일도 생긴다. 전도자는 이것을 새로운 젊은 왕에게 비유한다. 신하들이 그를 처음에는 흔쾌히 받아들였으나, 새로운 젊은 세대가 나와서 그를 또 다른 한 늙은 왕으로 취급하면서 그의 인기는 곤두박질친다. 이렇게 되면 경력이 제아무리 화려한들, 명성이 얼마나 자자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4:16).
Monci J. Williams, “How Strength Becomes a Weakness,” Harvard Management Update, December 1996.
삶과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때 (전5:1-6:9)
목차로 돌아가기전도자는 직장에서 직접 적용 가능한 짧은 교훈 몇 개를 제시하면서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탐색을 마친다. 첫째,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지혜롭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1-2). 둘째, 약속을 지키되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켜라(전 5:4). 셋째, 정부가 부패할 수 있다고 예상하라. 물론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감내해야 하며, 어찌 보면 무정부 상태보다는 낫다(전 5:8–9). 넷째, 재물에 대한 집착 또한 하나의 중독이다. 이것은 중독자들을 집어삼키면서도(전 5:10–12) 만족은 주지 못한다(전 6:7-8). 다섯째, 재물은 덧없는 것이다.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반드시 놓아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인생을 재물 위에 건축하지 말라(전 5:13–17).
이 섹션의 한가운데서 전도자는 하나님의 선물 탐구를 또다시 시작한다. 물론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과 재물, 소유물, 영예 등을 누리게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전 5:18).
비록 그 쾌락이 덧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실질적이다.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니라”(전 5:20). 이런 기쁨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성공하려고 애쓸 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일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일 때 다가온다. 만일 노동의 수고에서 얻는 기쁨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게 아니라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없다(전 6:1-6).
우정을 다루었던 부분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전도자의 어조는 비교적 긍정적이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여전히 좌절이다. 모든 삶이 무덤에서 끝난다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알기 때문이다. 지혜롭게 산 사람이든 어리석게 산 사람이든 더 나을 게 전혀 없다. 허탄한 망상 속에서 살려고 하는 것보다는 이 사실을 아는 게 더 지혜롭다. “눈으로 보는 것이 마음으로 공상하는 것보다 나으나”(전 6:9a), 모든 삶의 끝에 적용해 보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6:9b).
유한한 인생, 무엇을 해야 좋을까 (전6:10-8:17)
목차로 돌아가기수고의 삶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도자의 말처럼 일의 결과는 이 세상에서 영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으로 무엇을 하는 게 가장 좋을지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 책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전도서의 내용은 몇 부분으로 나뉘는데, 각 부분의 끝에서는 반복 어구가 나온다. 소망을 잃은 전도자는 각 부분의 끝을 ‘알지 못할 것’, ‘알아내지 못할 것’이나 혹은 그에 해당하는 수사학적 질문 ‘누가 능히 통달하랴’로 마무리한다.
우리 행위의 궁극적 결과를 알 수 없다 (전7:1-14)
우리의 수고는 죽음과 함께 끝이 난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묘지에 가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 보라고 권한다(전 7:1–6). 무덤들을 비교하며 어떤 무덤이 더 우월하다 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묘지에 가서도 그저 무덤 위를 밟고 지나가면서 휘파람을 불거나 하며 무덤이 주는 교훈을 내팽개친다. 이때 그들의 휘파람과 웃음은 가시나무가 탈 때 들리는 탁탁 소리와도 같다(전 7:6).
짧은 인생을 사는 우리는 이 세상에 우리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고사하고, 왜 오늘이 어제와 다른지조차 알아낼 수가 없다(전 7:10). 그날그날의 노동에서 얻는 좋은 결과를 기꺼이 누리면서도 우리 인생의 끝이 좋으리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인생의 끝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결말을 위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위의 끝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악한 수단을 통해 얻으려던 결과물을 망치거나 앗아갈 장애물은 어느 때든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옳지 않는 시작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지금은 여론을 달래고 있지만 나중에는 대중에게 해를 입히는 정치인, 다음 분기에는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이번 분기의 손실을 숨기는 재정 담당 공무원, 자격이 되지 않는 직책에 지원한 후 성공할 것을 기대하며 속이는 졸업생 등 이들은 모두 자기들이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의존하는 자들이다. 그러는 동안 비록 그들의 소망이 실현된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치유 불가능한 해를 끼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전7:15-28)
우리는 선을 좇아서 행동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행위가 전적으로 좋은지 또는 악한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고 상상하는 중에도 사악함이 스며들어올 수 있으며 그 반대 경우도 있다(전 7:16-18).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전 7:20). 선과 악에 대한 진리는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전 7:24). 이런 어려움을 강조하려는 듯 전도서 7장 28절에서 특징적 어구 ‘찾지 못하다’를 두 번 반복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전 7:18). 자만과 독선을 피하는 것이다. 훌륭한 자기 진단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왜곡된 논리와 복잡한 술책을 동원하지는 않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 7:29).
일에는 복잡한 면이 많고 고려해야 할 요인도 많으며, 도덕적 확실성은 대개 불가능하다. 그러나 윤리적 꽈배기 논리는 거의 언제나 적신호다.
왜곡된 권력과 공의 (전8:1-17)
권력 행사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권위를 가진 자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전 8:2-5).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권위를 정당하게 사용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십중팔구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것이다(전 8:9). 공의는 왜곡되었다. 의인이 형벌을 받으며, 사악한 자가 상을 받는다(전 8:10-14).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전 8:13)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의 기회를 향유하는 것이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전 8:15).
앞에서처럼 이 주제의 끝에서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어구를 세 번 반복한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 8:17). 전도자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제한된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좋은지를 알아내고자 하는 탐색을 끝낸다. 비록 그가 몇 가지 좋은 행태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인 결과는 무엇이 진실로 의미 있는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후일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사람이 알 수 없다(전9:1-11:6)
목차로 돌아가기후일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만 있다면, 살면서 무엇을 하는 게 가장 좋은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도자는 죽음(전 9:1-6), 음부(전 9:7-10), 죽음의 시간(전 9:11-12), 죽음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전 13-10:15), 죽음 후에 다가올 악(전 10:16-11:2), 그리고 향후 다가올 선(전 11:3-6)과 관련한 지식을 탐색했다. 다시 후렴 어구 ‘알지 못한다’와 그와 비슷한 어구 ‘지식이 없음’을 반복하면서 기술(記述) 내용을 몇 가지로 나눈다.
전도자는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결코 알 수 없음을 깨달았다.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전 9:12).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전 10:14).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2). “너는 ……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
미래를 모르지만 그래도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행하는 게 좋은 몇 가지를 발견했다. 여기서는 일과 관련 있는 구절들만 탐구해 보기로 한다.
맡은 일에 온 마음과 힘을 다하라 (전9: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일의 끝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일을 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창 2:15).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일해야 하며, 활력 있게 일해야 마땅하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일을 해서 얻은 열매를 즐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전 9:7).
성공도 실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라 (전9:11-12)
우리가 잘나서 성공했다거나, 우리가 못나서 실패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전 9:11).
운에 따라 성공이나 실패가 결정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노력이나 재능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우연을 최대로 활용해야 하며, 노력하고, 또 재능이 있어 얻은 기회 역시 잘 활용해야한다. 하지만 성공하는 자가 실패자보다 더 유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도 IBM이 개인용 컴퓨터(PC)라 불렸던 프로젝트를 위해 MS-DOS 운영 체계를 사용하기로 즉흥적인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성공할 기회가 있었다. 후일에 빌 게이츠는 이렇게 회고했다. “개인용컴퓨터를 목표로 하는 첫 번째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한 시기가 우리성공의 출발점이었다. 그 시기가 오롯이 운이었던 것만은 아니지만,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 IBM이 개인용 컴퓨터를 갖고 시도하고 있던 바로 그때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에서 태어났을 뿐이다.”[1]
부지런히 일하고 지혜롭게 투자하라 (전10:18-11:6)
이 단락에는 성경에서 발견 가능한 것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재정 관련 조언이 담겨 있다. 첫째, 부지런한 사람이 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의 가정 경제는 썩어 물이 새는 지붕처럼 무너질 것이다(전 10:18). 둘째, 이생에서는 재정적 안정 또한 중요하다.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전 10:19). 냉소적으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돈이 최고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모든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점을 짚어 준다. 이를 현대적인 용어로 기술한다면, 내 차에 새로운 변속기가 필요할 경우, 딸아이 대학 등록금이 필요할 경우, 또는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고 싶을 경우 돈이 들 거라는 의미다. 이것은 탐욕이나 물질주의가 아니라 상식이다.
셋째, 권세 잡은 이들을 조심하라(전 10:20). 만일 당신이 상사나 심지어 고객을 얕잡아 본다면, 후회할 날이 닥칠 것이다. 넷째, 당신의 투자처를 다양화하라(전 11:1–2).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이는 자선 행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투자를 언급하는 구절이다. 이 경우에 “물”은 해상 무역에서 하는 모험적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라는 말은 투자처를 다양하게 하라는 의미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2).
다섯째, 투자할 때 너무 소심하게 처신하지 말라(전 11:3–5). 일어날 일은 언젠가는 결국 일어나며, 그것을 통제할 힘이 당신에게는 없다(전 11:3). 그렇다고 덜덜 떨면서 돈을 침대 밑에다 숨겨 두라는 말은 아니다. 대신 합리적인 위험을 감수할 용기를 키워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전 11:4). 여섯째, 성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당신은 그분이 무슨 계획이나 목적을 갖고 계신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분의 의도를 예단하지 말라(전 11:5). 일곱째, 끈질기게 노력하라(전 11:6). 잠깐 노력하다가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라고 말하지 말라.
전도자는 그다음에 인생의 종국에 대한 지식을 탐색하는데, 전도서 11장 5–6절에서 ‘알지 못한다’는 어구를 세 번씩이나 반복한다. 이 말은 비록 성심껏 일하고 성공과 실패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부지런하게 일하며 지혜롭게 투자한다고 해도, 이는 모두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순응하려는 것뿐이라는 의미다. 만일 우리가 행하는 것마다 결실을 맺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성공을 위해 소신 있게 계획을 세울 것이다. 어떤 투자가 가치가 있고 잘될 것을 안다면, 손실 방지를 위한 대비책으로 투자처를 다양화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 타락한 세계에서 부지불식간에 재난을 만나 슬픔에 낙심할지, 아니면 아직 그럭저럭 잘 해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아니 어쩌면 이 두 가지 일이 다 닥칠 수도 있다.
“Bill Gates Answers Most Frequently Asked Questions” (온라인 문서). http://download.microsoft.com/download/0/c/0/0c020894-1f95-408c-a571-1b5033c75bbc/billg_faq.doc
(2010년 2월 12일).
청년의 때와 노년에 대한 시 (전11:7-12:8)
목차로 돌아가기전도자는 젊은이에게 용기를 내라고 권면하는 한편(전 11:7-12:1), 노년의 고뇌를 열거하는 시(전 12:2-8)로 결론을 맺는다. 이 단락은 이 책 앞부분에 나오는 형식을 그대로 따른다. 삶과 일에서는 좋은 것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덧없는 것들이다. 전도자는 시작했을 때처럼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8)로 끝을 맺는다.
수고의 열매를 온전히 누리는 하나님 나라(전12:9-14)
목차로 돌아가기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전도자가 지은 끝맺음이라기보다는 전도자에 관한 끝맺음이라고 할 만하다. 이 끝맺음 말은 그의 지혜를 기리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전도자의 권고를 반복한다. 이 끝맺음 말은 책 앞에 없는 내용을 덧붙인다. 즉,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감안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지혜롭다는 권면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이 타락한 세상에서 일에 섞여 있는 선과 악을 선별해 낼 핵심 장치로 장차 닥칠 하나님의 심판을 꼽는다. 이 책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관대하심, 공의, 초월성’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이 세상의 기초를 이루는 선이며, 우리는 그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님의 때가 되면 (전도자가 생생하게 묘사해 왔지만) 해 아래에 사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던 긴장 관계가 조화를 이루리라는 점이다. 이런 끝맺음은 타락이라는 상태가 우리삶과 일을 지배하지 못하는 날을 내다보고 한 말이 아닐까?
전도서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전도자가 삶과 일에서 발견한 선과 악, 의미와 공허, 행위와 무지의 혼합물을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전도자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켜 준 대로, 일은 “바람을 잡으려는 것”일 뿐이다. 바람처럼 일은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영향력도 있지만, 영속적이지는 못하다. 일이 있어 우리 삶이 이어지고, 기쁜 일도 생긴다. 하지만 일이 끼칠 영향의 끝이 선일지 악일지 예측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우리의 일이 현재를 넘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지도 알 수 없다. 일이 영속적인 것, 영구적인 것, 궁극적으로 좋은 것으로 변할 것인가? 해 아래에서 무언가를 확실히 안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하다고 전도자는 말한다.
물론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전도자와는 달리,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타락한 세계 너머의 세계를 확연히 소망할 수 있다. 우리는 해 아래에서 끝나지 않을 권세를 가지신 새로운 전도자, 즉, 예수님의 삶과 사망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기 때문이다(눅 23:44). 예수님은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구속하셨고, 또한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있다. 전도서의 필자가 알지 못하는 것(그의 말마따나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정죄하려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회복시키려고 보내셨다는 점이다(요 3:17). 해 아래에서 타락한 세상의 날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락한 세상의 잔재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계 21:2) 그리스도의 나라의 선봉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하는 일은 전도자의 눈에는 띄지 않는 영구적인 가치가 있다. 우리는 해 아래에 있는 세상에서만 일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일할 것이다. 신약성경에 비추어 전도서의 오류를 수정하고자 하는 엉뚱한 시도가 아니다. 우리는 전도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 이해하고 싶다.
우리 역시 전도자의 경우와 흡사한 조건에서 매일 살아간다. 바울이 말했듯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우리도 전도자가 겪은 것과 같은 고통을 겪으며 탄식한다.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서 이뤄지기를 여전히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다음 전도서는 두 가지 통찰 결과를 제공하는데, 이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필적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하나는 타락 상태에서 일을 액면 그대로 기술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소망이 있음을 증거한 것이다.
타락 상태에서의 일하기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일이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데도, 전도자가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의 말이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우선 일하는 중에 우리가 겪는 수고, 억압, 실패, 무의미함, 슬픔 및 고통은 분명히 실질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지만, 그분을 따르는 자들의 삶은 여전히 정원을 느긋하게 거니는 산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약속하셨는데도 당신이 일에서 어려움과 고통을 경험한다면, 당신은 다분히 정상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다 성취된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하나님 나라는 지금 땅 위에 임해 있다(마 12:28).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계 21:2). 하나님이 ‘주’가 되신다고 선포하는 이 순간에도 성경에 따르면 삶과 일의 현실은 여전히 가혹하다. 그런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만일 전도서가 가혹한 조건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좋은 조건에서 일하는 축복을 받은 이들에게도 위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 일이 모두에게 축복이 될 때까지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일꾼들의 유익을 위해 애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노동하는 축복을 받았고, 그 가운데서 먹고 마시고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애쓰는 가운데 (또는 기도하는 가운데) 그렇게 해야 한다.
가장 어두운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다는 증거
전도서는 타락한 세상의 가혹한 현실에서 어떻게 소망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실례도 보여 준다. 가장 고약한 것을 보고 경험하고 있음에도 전도자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기쁨의 순간, 지혜의 불꽃, 덧없지만 터무니없지는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발견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포기하셨다면 일 속에는 아무런 의미도 선함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도자는 일에서 의미와 선함을 찾는다. 전도자의 불평은 그것들이 언제나 일시적이고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고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전혀 안 계시는 세상이라면 이런 것들이 실제로 소망의 표상이 된다. 이런 소망의 표상들이 삶과 일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으리라.
또한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은 동료들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일에서 얻은 그들의 경험은 전도자의 경우와 매우 유사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약속이 없이 이런 어려움들을 견딘다고 상상한다면, 삶과 일이 우리 동료들에게 가져다줄 무거운 짐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 안에 보다 큰 연민을 키우기를 기도한다. 마음 안에 연민이 크면 더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증거하고 싶다면, 세상 사람들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증거는 의미 없고 가식적인 말이 되며, 이기적이고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전도서에 나타난 탁월함은, 그것이 우리 마음을 심히 어지럽힌다는 점이다. 인생은 혼란하며, 전도서가 정직하게 기술(旣述)하는 인생도 그렇다. 우리가 “해 아래에서”의 인생에 너무 순응할 때, 번영과 안일함의 상황에 너무 의존할 때 우리는 마음이 상하고 어지러워야 한다. 고난을 만나 냉소와 절망에 빠질 때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근심해야 한다. 어떤 일을 이루었다 해서 덧없는 성취감의 우상을 만들고 거만해지거나, 우리가 하는 일의 초월적인 의미와 함께 일하는 주변 사람들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상하고 어지러워야 한다. 전도서는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독특한 책이다.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