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50장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바벨탑 건축자들 VS 신실한 아브라함 (창12:1-3)

목차로 돌아가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신실하게 준수할 것을 말씀하신다. 본토와 믿음이 없는 친척을 떠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창세기 11장 말미에 나오는 바처럼 메소포타미아에 살면서 바벨탑을 건축한 그의 먼 친척으로부터 분연히 갈라섰다.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직계 가족과 11장에 나오는 노아의 다른 후손은 다섯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아브라함은 인간적 수단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했다. 그에 반해 바벨탑 건축자들은 자기 재능과 재간을 믿었으며,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창 11:4) 탑을 쌓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명성과 안전을 성취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고 말았다.[1]

 

   둘째, 바벨탑 건축자들은 그들 자신의 이름을 내려 했으나(창 11: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이름을 주시리라고 하신 그분의 약속을 신뢰했다(창 12:2). 차이는 위대함을 성취하려는 욕구 자체가 아니라 명성을 자기 방식으로 추구하려는 데 있었다. 하나님은 참으로 아브라함을 유명하게 해 주셨는데 아브라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려 함이었다(창 12:3). 바벨탑 건축자들은 자신을 위해 명성을 얻으려 했으나 그들은 오늘날까지 무명으로 남아 있다.

 

   셋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려 했으나 바벨탑 건축자들은 그들이 익숙해진 곳에 모여 있으려 했다. 그들은 지면에 흩어질까 두려워서 일을 벌였으며(창 11:4),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땅을 충만케 해야”(창 1:28) 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저버렸다.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흩어져 사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걱정한 듯하다. 그들은 창조적이었으며 혁신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나(창 11:3)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라는 하나님의 목적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창조의 충만함에 동참하기를 두려워한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대신에 인간적인 재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추구하지 못할 때 우리의 열망은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최초의 실업가로 만들어 주셨으며 새로운 땅에서 신선한 노력을 통해 늘 움직이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하란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는데, 거기서도 아브라함은 결코 고정된 장소에 정착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신 26:5)으로 알려졌다. 이런 생활양식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어서 명성, 안위, 성공과 관련해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과 인도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말하듯,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의 세계에서 신자는 근본적인 두 방향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에는 기획과 건설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불경건한 일은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발생하는데, 이는 자신과 그 주변에 있는 소수에게만 유익을 끼칠 수 있을 뿐이다. 경건한 일은 기꺼이 하나님의 인도와 권위에 의존하려고 하며 전 세계 모든 이에게 축복을 전하고 싶어 한다.

 

   넷째,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해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해 주시기 바랐으나, 바벨탑 건축자는 폐쇄적 성채(城砦) 안에 그들 자신을 유폐시키고자 했다. 아브라함은 그의 가족을 이끌어 큰 민족으로 성장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창 12:2; 15:5)을 신뢰했다. 비록 가나안 땅의 이방인 가운데서 살았으나(창 17:8), 그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창 21:22-34; 23:1-12). 이것은 공동체의 선물이었다. 여기서 일의 신학에 대한 또 다른 핵심 주제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설계는 사람들이 건전한 유대 관계 속에서 일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인내의 축복을 받아 장기적인 안목을 갖게 됐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자신의 때가 아니라 아브라함 후손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 “후손”을 예수님이라고 해석했는데(갈 3:19), 이는 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에 성취될 것임을 의미했다. 사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야 완전히 성취된다(마 24:30-31). 그 성취는 분기 보고서로 보고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바벨탑 건축자는 그들의 사업이 미래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었으며 하나님이 문제에 대해 그들을 분명하게 질책하셨다(창 11:6).

 

   요컨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성, 풍성한 결실, 좋은 관계를 약속하셨는데, 이것은 그와 그의 가족이 전 세계의 복이 될 것이며 때가 되면 그들 자신도 상상 이상으로 복을 받게 될 것임을(창 22:17) 의미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아브라함은 그런 것을 자기 힘으로 성취하려고 하는 시도는 아무리 해 봐야 헛되게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매일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하심을 의지해 살았다(창 22:8-14). 비록 이 약속이 창세기 안에서 완벽히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서 언약의 단초가 됐으며 이를 통해서 세상의 구속이 그리스도의 날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었다(빌 1:10).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족에게 새로운 땅을 약속하셨다. 땅을 사용하려면 여러 종류의 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땅이라는 선물은 일이 하나님의 필수 관심사항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일러 준다. 땅을 일구려면 목양 기술, 천막 제조술, 군사적 보호 기술, 다양한 재화와 용역 생산 기술을 가진 직업이 필요하다. 더욱이 아브라함의 후손은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되어 그 수가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대인관계 개발, 출산과 육아, 정치, 외교, 행정, 교육, 의술 및 기타 사회적 직업의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셋째, 그런 축복을 온 세상에 가져오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불러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라고 명하셨다. 그러려면 예배, 구속, 제자화, 다른 종교적인 직업이 필요하다. 넷째, 요셉의 일은 기근을 대비해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가끔 우리 일은 깨어진 심령을 치유하는 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유형의 일과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와 인도, 공급하심 아래 움직인다.

 

Bruce K. Waltke, Genesis: A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2001), 182-183쪽.

아브라함 가족의 유목 생활 (창12:4-7)

목차로 돌아가기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는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그의 가족은 이미 상당한 대가족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 사라와 그의 조카 롯이 그와 동행했다. 일단의 사람과 소유물도 함께 나왔다(창 12:5). 게다가 아브라함은 이내 매우 부요하게 됐으며 은과 금은 물론 노비와 가축도 얻었다(창 12:16; 13:2). 그는 애굽에 머무는 동안에 바로에게 사람과 동물도 받았으며 귀금속은 상업적 거래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이는 복을 주시는 궁극적인 분으로서의 여호와를 암시한다.[1] 아브라함과 롯이 모두 성공했다는 것은 땅의 목초지가 부족한 것을 두고 양가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기업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갈라섰다(창 13:11).

 

   이 기간과 지역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본문에 나오는 두 가정이 반유목과 농업을 혼합적으로 실시했음을 암시한다(창 13:5-12; 21:25-34; 26:17-33; 29:1-10; 37:12-17).[2] 이 가족들은 계절마다 이동해야 했으므로 가죽과 펠트와 모직으로 만든 천막 안에 거주했다. 그들이 소유한 재산은 나귀가 운반했으며 만일 재물이 많을 경우에는 낙타도 운반에 이용됐다. 사용 가능한 목초지와 물 사이에 최적의 균형을 이루려면 우수한 판단력이 필요했으며 기후와 지형을 잘 아는 것이 필요했다. 10월에서 3월에 이르는 우기에는 낮은 평지에서 방목이 가능했지만, 4월에서 9월에 이르는 고온 및 건기에는 목자들이 짐승 떼를 이끌고 푸른 초목과 흐르는 시내를 찾아 고지대로 향했다.[3] 목축만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역 농업도 하면서, 정주 생활을 하는 지역 사람과 교역도 하는 게 필요했다.[4]

 

   유목민은 양과 염소를 쳐서 우유와 고기(창 18:7-8; 27:9; 31:38), 양모, 가죽 등 다른 동물 제품을 얻었다. 나귀는 짐을 날랐으며(창 42:26) 낙타는 특히 장거리 여행에 적합했다(창 24:10, 64; 31:17). 이런 동물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방목과 물 공급, 분만시키기, 병든 짐승과 다친 짐승 돌보기, 포식자와 도적으로부터 동물 보호하기, 길 잃은 짐승 찾아내기 등이었을 것이다.

 

   기후 변화 및 양 떼와 소 떼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나약한 목자는 쉽게 쫓겨나거나 흡수되는 한편, 소유물이 늘어나서 더 많은 토지가 필요한 목자가 그들을 대신했을 것이다.[5] 목축에서 나오는 이윤은 소유자나 관리자를 위해 저축이나 투자로 적립되지 못하고 가족이 공유했다. 마찬가지로 기근으로 인한 고난의 영향도 모두에게 미쳤다. 물론 개인에게는 그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 있고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각자 책임을 져야 했지만, 가업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개인 성취와 이윤의 상시적 증가를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현대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적 책임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매일의 관심사였다.

 

   이런 생활 방식에서는, 공유된 가치가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식구 또는 부족 구성원 간의 상호 의존성과 그들의 공동 조상에 대한 의식은 커다란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그것을 파괴하려는 사람에 대해 극심한 적개심을 자아내기도 했다(창 34:25-31).[6] 지도자는 집단의 중지를 모아서 어디로 여행할 것이며 얼마나 오래 머물 것이며 짐승 떼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와 관련해 건전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했다.[7] 그들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짐승 떼를 치고 있는 목자와 교신하는 방도를 파악해야 했다(창 37:12-14). 방목지 및 수원지에 대한 권리와 관련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갈등을 해결하는 기교도 필요했다(창 26:19-22). 이동성이 큰 생활과 약탈자의 위협에 취약한 환경은 대접을 예의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다과, 식량 및 거처를 제공하는 것이 품위 있는 사람의 요건으로 간주됐다.[8]

 

   족장 이야기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큰 재산에 대한 언급이 반복적으로 나온다(창 13:2; 26:13; 31:1). 목축업과 축산업은 훌륭한 일의 분야였으며 수익성이 좋은 일이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매우 부요해졌다. 예를 들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만난 형제 에서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야곱은 그의 재산 중에서 550마리 이상의 동물을 선물로 선발했다. 암염소 200마리와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와 숫양 20마리, 암낙타 30마리와 그 새끼들, 젖소 40마리와 수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와 수나귀 10마리(창 32:13-15). 그러므로 야곱의 생애의 끝에 그가 아들들에게 축복을 전수(傳授)하면서 그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창 48:15)이라고 증거한 말은 적절했다. 부요가 종종 신앙에 유해할 것이라고 경고한 성경 구절이 많지만(렘 17:11; 합 2:5; 마 6:24), 아브라함의 경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번영 속에서도 표출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하나님 백성이 지속적으로 번영을 기대해도 좋다는 약속은 아니었다. 

같은 책, 216쪽.

Victor H. Matthews, “Nomadism, Pastoralism,”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eds. David Noel Freedman, Allen C. Myers, and Astrid B. Beck (Grand Rapids: Wm. B. Eerdmans, 2000), 972쪽.

John H. Walton, Victor H. Matthews, and Mark W. Chavalas,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Old Testament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0), 44쪽.

Matthews, “Nomadism, Pastoralism,”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971쪽.

T.C. Mitchell. “Nomads,” New Bible Dictionary, 3rd ed., eds. I. Howard Marshall, A. R. Millard, J. I. Packer, and D. J. Wisema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6), 828-831쪽.

같은 책, 829쪽.

Matthews, “Nomadism, Pastoralism,”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972쪽.

Julian Pitt-Rivers, “The Stranger, the Guest, and the Hostile Host: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Laws of Hospitality,” Contributions to Mediterranean Sociology, ed. John G. Peristiany (Paris: Mouton, 1968), 13-30쪽.

녹록지 않은 여정의 시작 (창12:8-13:2)

목차로 돌아가기

   아브라함의 초기 여행은 유망하지 못했다. 땅을 놓고 경쟁이 심했으며(창 12:6) 아브라함은 적합한 점령지를 찾아 오랜 세월을 허비했다(창 12:8-9). 결국 악화된 경제 여건 때문에 그는 온 가족을 이끌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애굽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창 12:10).

 

   경제적 이유 때문에 애굽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은 자신의 취약한 처지를 걱정했다. 아브라함은 애굽 사람이 그를 살해하고 그의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취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이를 막으려고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아내가 아니라 여동생이라고 둘러대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예상했던 대로, 애굽에서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바로가 사라를 탐냈으며 그녀는 ‘바로의 궁으로 불려 들어갔다.’ 그 결과로 ‘여호와는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창 12:17). 바로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했음을 깨달았을 때 바로는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고 즉시 그들에게 명하길 그 나라를 떠나라고 했다(창 12:18-19). 바로는 그들에게 양과 소, 암나귀와 수나귀, 여종과 남종뿐 아니라 낙타(창 12:16)와 은금까지 주었는데(창 13:2), 이는 아브라함의 부요(창 13:2)가 왕의 선물 덕분이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1]

 

   이 사건은 빈부 격차로 인해 드러난 도덕적 곤경은 물론 그런 문제에 직면해 믿음을 잃을 뻔한 위험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굶주림은 면했으나 외국에서 시민권이 없는 그들은 여전히 취약했다. 극심하게 가난하고 두렵다고 해서 경제적 생존을 위해 여성인 가족 구성원이 성적 관계에 빠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겠으나, 오늘날에도 수백만의 사람이 이런 처지에 처해 있다. 하나님은 이 취약한 여인과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성적 호의를 받아들인 바로를 벌하셨다. 수치를 당하게 된 바로는 사라가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에 대해 아브라함을 호되게 꾸짖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후에 또다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창 20:7-17), 정죄보다 긍휼함을 보여 주셨다.

 

   다른 한편으로 아브라함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직접 받은 자였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믿은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도 빨리 실패하게 됐을까? 진정 생존 때문에 그가 왕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기 아내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해서 왕의 첩이 되도록 할 수밖에 없었을까? 아니면 하나님이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시고자 한 것이었을까? 아브라함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것 같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종종 다른 방도가 없다고 느낀 나머지 그릇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설득한다. 하지만 어려운 선택을 앞두고 아무리 마음이 복잡하고 어렵다 해도, 어려운 선택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과는 다르다.

Waltke, Genesis: A Commentary, 216쪽.

조카 롯과 갈라서다 (창13:3-18)

목차로 돌아가기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가나안에 다시 들어가 벧엘 근처 지역으로 갔을 때, 아브라함의 짐승 떼와 조카 롯의 짐승 떼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서 아브라함이 다른 땅으로 가는 선택을 한다. 결국 서로 갈라서게 됐으며 아브라함은 위험을 감수하고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했다. 가나안 중앙에 있는 등성이 땅은 바위가 많아서 목초지를 충분히 제공할 수 없었다. 롯이 눈을 들어 동쪽을 쳐다보니 요단강 근처 평야가 “여호와의 동산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좋은 땅을 차지했다(창 13:10). 하나님을 신뢰하는 아브라함은 스스로 땅을 고르고자 안달하지 않았다. 아브라함과 롯이 장차 얼마나 번영할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줬다는 사실은 그의 너그러움을 나타냈으며 그와 롯 사이의 신뢰를 굳건하게 했다.

 

   너그러움은 대인관계나 사업 관계에서 긍정적인 자질이다. 너그러움만큼 신뢰 관계를 확립하고 좋은 관계를 굳건히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동료, 고객, 공급자, 심지어 적도 너그러움에는 강렬하게 반응하며 오랫동안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증오의 대상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해 들인 후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겠으며 사취한 것이 있다면 4배나 상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그러움과 회개의 열매를 보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셨다(눅 19:9). 물론 삭개오는 그 당시 사람들과 다른 예수님의 차별 없는 관계적 너그러움에 반응한 것이었다.

 

너그러운 환대의 힘 (창18:1-15)

목차로 돌아가기

   마므레 상수리나무 근처로 찾아온 세 명의 나그네를 아브라함과 사라가 너그럽게 환대했다는 이야기는 창세기 18장에 나온다. 그 나라의 반유목 생활에서는 종종 모르는 가족 간에 접촉이 이뤄졌는데, 지리 특성상 가나안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에서 선호하는 교역 통로가 됐다. 공식접대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지라 도시나 주거지에 정주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을 환대할 사회적 의무가 있었다. 구약 성경 및 다른 고대 근동 문서로부터 마태는 모범적 환대를 위한 일곱 가지의 행동 규범을 도출했다. 그것은 외부인을 받아들여 보호해 줌으로써 개인, 가족 및 공동체의 명예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었다.[1] 주거지 근처에는 개인이나 마을이 환대를 보여야 할 구역이 마련되어 있었다.

 

1. 이 구역에서 마을 사람은 외지인을 환대할 책임이 있었다.

2. 환대를 받고 난 외지인은 잠재적인 위협이 되지 않고 협력자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3. 집안의 남자나 마을의 남자만이 그런 환대를 위해 초청할 수 있었다.

4. 초청에는 환대 기간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양자가 합의하면 주인이 초청을 갱신할 경우 연장이 가능했다.

5. 방문객은 그에 대해 거부할 권한을 갖고 있지만, 이는 주인의 호의를 무시하는 처사로 받아들여져서 즉각 적대 행위나 갈등이 표출될 수도 있었다.

6. 일단 초청이 받아들여지면, 주인과 손님 역할은 관습법에 의해 규정된다. 손님은 아무것도 요청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 환대를 제의할 때 별것 없다고 말했다 할지라도 주인은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제공할 것이다. 손님은 대접받은 것에 대해 즉시 새로운 소식, 행운에 대한 예언 또는 감사의 표현으로 화답해야 하며 주인의 너그러움과 명예를 칭찬해 줘야 한다. 주인은 손님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해서는 안 되며, 손님이 자발적으로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7. 손님은 주인의 보호를 받으며 거하다가 주인의 의무 구역을 벗어나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신약에 나오는 계명의 배경이 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환대와 너그러움이 크리스천 사이에서 종종 평가절하된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을 너그럽고 풍성한 잔칫집으로 묘사한다(사 25:6-9; 마 22:2-4). 환대는 좋은 관계를 맺게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환대는, 함께 식사하는 것이 그 당시에 대인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외부인은 함께 식사하며 교제 시간을 오래 가짐으로써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함께 먹을 것을 나누거나 오락이나 여흥을 즐길 때, 그들은 종종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고 진가를 알게 된다. 보다 더 나은 업무 관계와 보다 더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종종 환대의 열매가 된다.

 

   아브라함과 사라 시대에, 환대는 대개 주인의 집에서 이뤄졌다. 오늘날 이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도 아니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접대 산업이 발달해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환대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대접을 하고 싶은데 당신 집이 너무 좁다거나 요리 솜씨가 너무 볼품없다면, 당신은 손님을 모시고 식당이나 호텔로 가서 우정을 쌓고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업원이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더욱이 종업원은 자발적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고 좋은 관계를 형성해 주고 쉴 곳을 제공하는 등 예수님이 포도주를 만드시고(요 2:1-11) 손님의 발을 씻겨 주시던(요 13:3-11) 때처럼 사람을 섬기기도 한다. 환대 산업은 GDP의 9퍼센트를 점하고 있으며 9800만 명의 사람을 고용하고 있다.[2] 거기에는 덜 숙련된 사람과 이주 노동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교인 중에서 빠르게 늘어나는 집단이기도 하다. 한층 많은 이가 무급으로 환대 산업에 종사하며 다른 이를 사랑, 우정, 긍휼, 사회적 약속의 일환으로 환대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실례는 이 일이 하나님과 인류를 섬기는 데 아주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지 간에, 너그럽게 환대하도록 서로를 격려하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게 무엇이겠는가?

 

Victor H. Matthews, “Hospitality and Hostility in Judges 4,” Biblical Theology Bulletin 21, no. 1 (1991): 13-15쪽 초록에서 발췌

World Travel and Tourism Council, Travel and Tourism Economic Impact 2012, World (London: 2012), 1쪽.

자원과 권리를 사수해야 할 때를 분별하라 (창20:1-16; 21:22-34)

목차로 돌아가기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비멜렉이 왕으로 있는 그랄에 들어갔을 때, 아비멜렉은 무심코 환대의 규칙을 어겼으며 그 보상으로 아브라함에게 원한다면 어디서든 자유롭게 방목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줬다(창 20:1-16). 후에 아브라함이 원래 팠으나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은 우물을 두고 다툼이 발생했다(창 21:25).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발의한 협약서에 서약하고 승인했다. 그 우물에 대한 아브라함의 권리를 공적으로 인정한 맹약이었다. 그 지역에서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는 맹약이었다(창 21:27-31).

 

   다른 곳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는 모습을 봐 왔다(창 14:22-24). 그러나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끈질기게 자기 권리를 주장했다. 21장 본문이 예배하는 것으로 끝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다시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은 듯하다(창 21:33). 따라서 그는 사업을 공개적으로 수행하고 적절한 법적 보호를 정당하게 이용하는 현명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모범이 됐다. 목축에서 물 공급은 꼭 필요했다. 아브라함은 물 없이는 동물, 일꾼과 가족을 지속적으로 공궤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물에 대한 권리뿐 아니라 그 권리를 확보할 수단까지 사수한 것은 중요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너그럽게 행동할 때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조직의 유익을 위해 자원과 권리를 주장해야 할 때를 분별해야 한다. 기계적인 답변으로 이끌 수 있는 일련의 규칙이나 규정은 없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원의 청지기가 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이 자원을 포기할 때 더 잘 달성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보호할 때 그렇게 될 것인지가 늘 분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결정은 누가 옳으냐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결정이 우리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의 실례는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면을 강조해 보여 준다. 앞서 나왔던 롯과 더불어 땅을 분배하는 문제의 경우, 아브라함이 흔쾌히 선택의 우선권을 양보했던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좋은 업무 관계를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맹약 조건에 따라 우물에 대한 접근성을 요구한 지금의 경우에, 아브라함은 사업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강력한 주장은 그와 아비멜렉의 관계를 개선했다. 이 분쟁은 처음 아비멜렉을 만났을 때 아브라함이 자기 입장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기억하라(창 20:2).

 

 

사라를 위한 매장지를 사다 (창23:1-20)

목차로 돌아가기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아내를 위한 매장지를 사기 위해 모범적인 협상을 진행했다. 그는 자신과 매도자의 필요를 다 감안하며 증인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협상을 진행했다(창 23:10, 11, 12, 13, 16, 18). 문제의 재산을 분명하게 적시했으며(창 23:9) 아브라함이 그것을 매장지로 사용할 의도임을 수차례 언급했다(창 23:4, 6, 9, 11, 13, 15, 20). 협상을 위한 대화는 지극히 분명했으며, 사회적으로 적절했고, 투명했다. 대화는 사업이 공적으로 이뤄지던 성문 앞에서 진행됐다.

 

   아브라함이 먼저 부동산 거래를 요청했다. 히타이트 사람(헷 족속)이 좋은 무덤을 무료로 제시했다. 이를 거부한 아브라함은 매장지로 쓰기에 적합한 동굴을 낀 벌판을 소유한 사람과 접촉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밭을 “충분한 대가”를 치르고 구매하겠다는 것이었다. 소유자인 에브론이 그 요청을 듣고는 그 땅을 선물로 주겠다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영구히 가질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는 공손하게 시가를 제시했다. 거래 협상에서 늘 그랬듯이 짐짓 꾸미는(잠 20:14) 대신에, 아브라함은 즉시 에브론이 제시한 가격에 동의하고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창 23:16) 지불했다. 이 표현은 부동산 매매에서 통용되던 표준 은화에 따라 거래했다는 의미다.[1] 아브라함은 충분히 부요해서 깎을 필요가 없었거나 땅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호의도 사고자 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그 땅의 매매나 그에 대한 권리와 관련해 발생할 어떤 의문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결국 그는 동굴과 나무가 포함된 그 땅에 대한 권리 증서를 받았다(창 23:17-20). 그것은 사라의 매장지로 귀중하게 쓰였으며 후에 아브라함의 매장지가 됐고 나중에는 이삭, 리브가 및 야곱과 레아의 매장지도 됐다.

 

   이 문제와 관련해 아브라함의 행동은 정직과 뛰어난 투명성, 뛰어난 사업적 통찰력의 핵심 가치를 모범적으로 보여 줬다. 아브라함은 애통해할 뿐 아니라 아내의 시신을 잘 돌봄으로써 아내의 존엄성을 지켰다. 그는 그 땅에서 자기 위치를 알았을 뿐 아니라 장기적인 거주민을 존중하며 대했다. 또 사업을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행하며 증인을 세우기도 했다. 아브라함은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했으며 협상 과정에 민감했고 그 땅을 선물로 주겠다는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아브라함은 합의된 금액을 신속히 지불했다. 그리고 그 땅을 그가 애초에 얘기했던 목적대로만 사용했다. 아브라함은 관련된 모든 이와 더불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Walton, Matthews, and Chavalas,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Old Testament, 55쪽.

이삭 (창21:1-35:29)

목차로 돌아가기

   이삭은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이자 위대한 아들의 아버지였지만, 정작 자신에 대한 기록은 잡다했다. 지속적으로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걸출한 인물로 묘사했지만, 이삭의 인생은 동떨어져서 아브라함과 야곱 이야기에 딸린 부록 정도로 취급된다. 이삭의 인생을 그린 부분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극히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인데, 각각에서 일에 대한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하면, 이삭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를 소중히 여겼으며 그들의 믿음과 가치관을 그에게 전수해 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그에게 재차 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드리려 할 때 이삭이 보여 준 믿음과 순종은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한 말을 진실로 믿었음에 틀림없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생애 대부분, 이삭은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좇았다.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졌던 이삭은 잉태하지 못하던 아내 리브가를 위해 기도했다(창 25:21). 아브라함이 사라를 고귀하게 장사 지냈던 것처럼, 이삭과 이스마엘은 함께 아버지 아브라함을 장사 지냈다(창 25:9). 이삭이 농업과 목축으로 성공하자 지역민은 그를 시기한 나머지 그에게 다른 데로 이사 가라고 요구했다(창 26:12-16). 이삭이 아브라함 당시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파자, 그랄 사람과 물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창 26:17-21). 아브라함처럼, 이삭은 서로를 공정하게 대우하기로 아비멜렉과 맹세하고 합의했다(창 26:26-31). 히브리서 기록에 의하면, 이삭은 믿음으로 장막에 거했으며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다(히 11:8-10, 20). 요컨대 이삭은 커다란 가업과 엄청난 부요를 상속받았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처럼, 이삭도 그것을 감춰두지 않고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그 복을 모든 민족에게 전했다.

 

   이런 사건을 보면, 이삭은 책임감 있는 아들이었다. 그는 그의 유능하고 경건한 아버지의 훌륭한 본을 따라 가정을 이끌고 가업을 관리하는 법을 배웠다. 부지런히 후계자를 준비시키고 오래 지속될 가치관을 확립한 아브라함의 근면은 다시 한 번 그의 사업에 복이 되었다. 이삭이 100세가 되자 이제는 그가 후계자를 지명하고 가정의 축복을 전해 줄 차례가 됐다. 비록 그는 이후로 80년을 더 살았지만, 이런 축복의 증여는 창세기에 기록된 이삭의 마지막 의미 있는 임무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삭은 이 임무를 달성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대신에 이삭은 그의 쌍둥이 아들에 관해 그의 아내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즉 통상적인 관습과 달리 장자 에서가 아니라 동생인 야곱이 집안의 우두머리가 되리라는 예언을 망각했다(창 25:23). 리브가와 야곱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삭을 다시 본 궤도로 돌리는 영리한 계책을 마련했다.

 

    가업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가정의 기본 구조가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확보하는 것이 아버지의 직무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생소한, 두 가지 관습이 이삭의 가정에는 두드러졌으니 바로 장자권(창 25:31)과 축복(창 27:4)이었다. 장자권은 물자와 땅 등 아버지 재산의 큰 몫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권한이었다. 가끔 장자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기도 했지만, 대개 그것은 맏아들의 차지였다. 관련법은 변했지만, 그것은 고대 근동 문화에서 안정적으로 전해 내려온 특징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축복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번영과 가정의 리더십 승계를 위한 기도였다. 에서는 장자권을 포기하더라도 여전히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는 그릇된 믿음이었다(히 12:16-17). 야곱은 그 두 가지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소유한 야곱은 가족의 유산을 경제적 및 사회적 견지에서뿐 아니라 믿음의 견지에서도 이어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창세기에서 펼쳐지는 구도의 중심은 이 축복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받는 것은 물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도 포함했다.

 

   이삭은 가족 공동체의 필요보다 자신의 위안을 더 앞세웠기 때문에 야곱의 장자권 승계와 축복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가 에서를 선호한 것은 사냥꾼 에서가 잡아오는 야생 짐승의 살코기 때문이었다. 이삭은 에서가 장자권을 한 그릇 식사보다 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에서가 가업을 이끌 만한 사람이 못 되고 그런 직책에 관심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삭은 장자권을 에서에게 물려주고 싶어 했다. 그런 개인적 상황은 이삭의 그런 행동이 비난을 불러일으킬 것임을 이삭은 미리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이야기의 유일한 긍정적 측면은 그가 실수로 야곱에게 전해 준 하나님의 축복이 변개 불가하다는 것을 이삭은 믿음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너그럽게도, 히브리서의 필자는 이 내용을 기억했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히 11:20). 이삭의 의도적인 배임 행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삭을 뽑아 축복을 이어가게 하셨으며 고집스럽게도 그를 통해 그분의 뜻을 관철하셨다.

 

   이삭처럼 우리도 자신의 사적인 관점에 너무 깊이 몰입하면 심각한 심판을 초래할 수 있다. 개인적 위안, 선입견, 사적인 이해관계에 이끌려 보다 크고 중대한 우리 일을 간과할 수 있다. 칭찬, 경제적 안정, 갈등 회피, 부적절한 관계, 단기적인 보상 또는 기타 개인적인 유익의 추구가 우리의 약점이 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우리 일과 배치될 수 있다. 개인적인 요인이 개입될 수도 있고 조직적인 요인이 개입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에서를 향해 가졌던 이삭의 편집적 성향이 오늘날에도 반복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일이 인식되든 안 되든 간에, 권한을 가진 자가 편견에 기초해 사람을 승진시킬 수 있다. 조직적인 차원에서도, 여전히 여러 기관의 지도자가 후계자 및 부하를 장기적이고 조화롭고 책임성 있는 방식으로 키우기보다는 제멋대로 사람을 채용하고, 해고하며, 승진시키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그런 권력 남용이 개인적이든 조직적이든 간에, 더 잘하려고 작심하거나 조직 흐름을 바꾸려고 하는 것만으로는 효과적인 해법에 도달할 수 없다. 오히려 개인과 조직이 하나님 은혜를 통해 변화되어 참으로 중요한 것을 개인적인 유익보다 앞세워야 할 것이다.

야곱 (창25:19-49:33)

목차로 돌아가기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이름이 종종 함께 나오는데, 그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고 동일한 믿음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크게 달랐다. 언제나 간교했던 야곱은 그의 생애 대부분을 그의 야만적 힘과 잔꾀에 의지해 살았다. 자주 갈등을 초래했던 야곱은 정욕에 이끌려 자기가 원하던 것을 취하고자 했다. 이런 투쟁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결국 야곱은 존재의 분수령에 도달하게 됐는데, 한 불가사의한 사람과 더불어 씨름하는 동안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했다(창 32:24, 30).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 야곱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했고, 마침내 은혜를 받고 변화됐다.

 

   목자였던 야곱의 직업은 일의 신학에서 관심사다. 이간질과 화해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그의 생활에 비춰 보면, 그 의미가 더해진다. 아브라함이 행했던 일들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지했던 목적과 뗄 수 없는 일부였다. 그 사실은 야곱에게도 적용됐으며, 그 교훈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을 비윤리적으로 취하다 (창25:19-34; 26:34–28:9)

목차로 돌아가기

   비록 야곱을 이삭의 후계자로 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긴 했지만(창 25:23), 리브가와 야곱이 속여서 그 계획을 탈취함으로써 그 가족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미래를 공고히 하려고 그들이 가족 구성원을 비윤리적으로 대하자 결과적으로 가족 간에 뿌리 깊은 소원함이 장기간 지속됐다. 하나님의 언약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탈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언약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해야지 감춰서는 안 됐다. 이 점을 야곱이 간과한 것이다. 야곱이 그의 형제 에서와는 달리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야곱은 그가 귀중히 여기던 권리를 확보할 때 자기 능력을 의지했다. 야곱은 에서의 배고픔을 이용해서 그의 장자권을 사 들였다(창 25:29-34). 야곱이 장자권을 귀히 여긴 것은 좋았으나 자기가 장자권을 얻을 것에 대해서는 크게 불신했다. 특히 야곱의 행동을 보면 그랬다. 그의 어머니 리브가의 조언을 따라, 야곱은 그의 아버지를 속였다. 리브가 역시 그릇된 방식으로 올바른 것을 좇았다. 야곱이 가족을 떠나 도망자가 된 건 그의 행동이 악취 나는 것이었음을 방증한다.

 

   야곱은 하나님 언약을 오랫동안 진실로 믿었지만, 하나님이 그 언약을 자신을 위해 이루실 것은 확신하지 못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용감하고 기민하게 내린 결정이 성공을 가져왔을 경우 그 효과는 당연히 칭찬해 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착취하거나 속여서 얻은 이익은 잘못된 것이다. 비윤리적인 방식 자체가 그릇됐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그런 방식을 이용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야곱이 자기 유익을 위해 무자비하게 몰아붙였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은혜에 얼마나 저항했는지를 보여 준다. 상황을 이용해서 자기 유익을 추구하려는 우리 성향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되기까지는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동기의 순수성과 관련해 우리는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인식해야 한다. 

 

큰 재산을 모은 야곱 (창30-31장)

목차로 돌아가기

   에서로부터 도망친 야곱은 결국 그의 외삼촌인 라반의 가족 농장에 도착했다. 야곱은 라반을 위해 21년 동안 죽도록 일했는데, 그 기간에 라반은 야곱에게 약속한 것을 연속으로 어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라반의 두 딸과 결혼하게 됐으며 가정을 일구었다. 야곱은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라반은 계속 머무르면서 일해 달라고 설득하는 한편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라고 약속했다(창 30:28). 분명히 야곱은 훌륭한 일꾼이었으며 라반은 야곱이 한 일로 복을 받았다.

 

   이 시기에 야곱은 목축을 배웠으며 이 기술을 사용해서 라반에게 앙갚음을 했다. 목축 기술을 통해 그는 라반의 비용으로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다 결국 라반의 아들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라고 불평하기에 이르렀다(창 31:1-2). 야곱은 그를 대하는 라반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음을 느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재산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창 31:42).

 

   야곱은 자기가 라반에게 푸대접을 받았다고 느꼈다. 야곱이 에서를 착취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의 교활한 반응과 책략은 또 다른 원수를 만들어 냈다. 야곱의 삶에서 반복되는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공평한 듯이 보였고 외면적으로는 그가 하나님께 신임을 받은 듯했지만, 그는 자신의 책략을 가지고 행동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야곱의 믿음이 순수했다는 것을 인식하기 어렵다. 히브리서에서 야곱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일컬은 것은 삶의 후반기에 나타난 그의 행동을 보고 말한 것뿐이다(히 11:21).

 

야곱의 변화, 에서와의 화해 (창32–33장)

목차로 돌아가기

   장인과의 갈등이 증폭되고 가업이 분리되어 두 사람이 전보다 덜 우호적이 되자, 야곱은 라반을 떠났다. 나쁜 책략으로 수년 전에 입지를 확보한 그는, 이제 소원했던 형제 에서와의 협상을 통해 자기 지위를 합법화할 기회를 찾았다. 야곱은 그 협상이 쉽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에서가 무장한 사람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한 나머지 야곱은 자기 가족과 가축을 두 떼로 나눠서 일부라도 생존할 수 있게 했다. 그는 화해하기 위해 엄청난 가축 떼를 선물로 앞서 보내면서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날 밤 만남의 장소에 도착하기 전, 불시에 한 사람이 책략가 야곱을 덮쳤다. 하나님이 친히 전사의 모습으로 그를 공격했다. 야곱은 밤새 더불어 씨름했다. 하나님은 예배와 신앙의 하나님이 되실 뿐 아니라 일과 가업의 하나님도 되시며, 야곱처럼 약삭빠른 수완으로 형세를 역전시킬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기회를 이용해 야곱의 환도뼈를 영구적으로 부러뜨리셨으나, 야곱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축복하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야곱의 생애에 전환점이 됐다. 그는 사람들과 수년 동안 다퉈 왔는데 그러는 중에 그는 하나님과도 다투고 있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을 만나 씨름하는 중에 축복을 받았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으며 그가 하나님을 대면해 만났다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그 지역 이름까지 고쳤다(창 32:30). 그날 아침 얼마 안 있어 에서와 만났는데 한때 불길하게 여겼던 그 만남이 야곱의 두려움을 가장 즐거운 방식으로 없앴다. 에서는 달려가 야곱을 얼싸안았다. 야곱이 선물을 받으라고 고집스럽게 말했지만 에서는 정중히 거절했다. 변화된 야곱은 에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창 33:10).

 

   야곱과 씨름하던 인물의 모호한 정체는 이 이야기의 의도적인 구성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양쪽과 씨름하는 야곱의 분리할 수 없는 요소를 조명했다. 야곱은 우리 믿음의 핵심 진리를 모범적으로 보여 줬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와 연계되어 있다.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과의 화해를 가능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화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보고 알게 된다. 화해하는 일은 가족, 친구, 교회, 회사, 심지어는 집단과 나라에도 적용된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평화가 될 수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전할 그분의 대사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처음 약속으로부터 나온 이 복은 전 세계에 미친다.

 

 

요셉 (창37:2-50:26)

목차로 돌아가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마다 핵심적인 약속을 주셨다는 점을 기억하라(창 12:2-3). 첫째, 하나님은 그의 후손을 번성시켜 큰 민족을 이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실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크게 만드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그의 명성에 걸맞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넷째,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될 것이다. 이 마지막 항목은 미래의 아브라함의 후손과 그 울타리 너머의 사람들, 즉 지상의 모든 족속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을 축복하실 것이고 그를 저주하는 사람을 저주하실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이 약속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 야곱 및 야곱의 아들 등 선택받은 계보를 통해 부분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들 모두 중에서 요셉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열국을 축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이 직접 성취하실 때 사용한 사람이었다. 참으로 “온 세상” 사람이 요셉이 경영한 식량 제도에 의해 유지됐다(창 41:57). 요셉은 이 사명을 알았으며 삶을 하나님 의도에 맞게 살았다.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그가 받은 사명이었다(창 50:20).

 

 

형제에게 거부당하고 종으로 팔린 세월 (창37:2-36)

목차로 돌아가기

   어릴 적부터 요셉은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위해 자신을 지명했다고 믿었다. 꿈속에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그가 부모와 형제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7:5-11). 요셉은 이 꿈이 자기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형제들은 그 꿈이 요셉이 아버지의 총애받는 아들로서 부당하게 누리던 특권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창 37:3-4). 우리가 옳다고 확신한다고 해도 우리는 동일한 견해를 갖지 못한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사지 못할 수도 있다. 좋은 지도자는 시기보다는 협력을 이끌어 내려고 애쓴다. 요셉은 이 점을 인식하지 못했고, 형제들과 심한 불화를 겪었다. 그를 살해하려고 모의했던 그의 형제는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던 대상(隊商)에게 요셉을 팔기로 결론내렸다. 그러자 그 장사치들은 요셉을 애굽 왕 “바로의 신하”이자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아 버렸다(창 37:36; 39:1).

 

 

보디발 아내의 계략, 투옥당한 요셉 (창39:1-20)

목차로 돌아가기

   보디발 밑에서 요셉이 맡은 일은 신임을 받은 노예로서의 책임이었다. 처음에는 요셉이 주인의 집 “안”에만 있었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일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보디발은 요셉의 전반적인 능력을 알아보고는 승진시켜 그를 개인 비서로 삼는 한편 자기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했다(창 39:4).

 

   얼마 후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성(性)적인 관심을 보였다(창 39:7). 요셉은 그녀의 요구를 단호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거절했다. 그는 보디발이 그에게 보여 준 폭넓은 신뢰를 상기시키면서 그녀가 꾀하는 관계를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용어로 “큰 악”이고 “하나님께 죄”라고 묘사했다(창 39:9). 그는 사회적 및 신학적 차원에 민감했다. 더 나아가 요셉은 반복해서 반대 의사를 표시했으며 그녀 앞에 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강제로 끌려간 요셉은 굴복하기보다는 반쯤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

 

   이 여인의 성적 괴롭힘은 요셉에게 불리한 권력 관계에서 발생했다. 그녀는 요셉을 이런 식으로 압박할 힘과 권한이 있다고 믿었으나, 그녀의 말과 접촉은 분명히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요셉은 일하기 위해 그녀가 거주하는 집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는 주인을 불러 보디발 아내의 행위를 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주인의 혼인 관계가 파탄 날 것이기 때문이다. 도망가다가 거짓된 고소로 감옥에 갇힌 뒤 요셉은 법에 의지하지 않은 듯하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직장에서 발생하는 성적 괴롭힘 문제를 세밀히 묘사한다. 부적절한 언어와 신체적 접촉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갖고 있지만, 힘 있는 자의 변덕스런 행동이 실제로는 종종 먹혀 들어간다. 잠재적인 괴롭힘을 상사에게 종종 보고해야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꺼린다. 보복당할 위험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괴롭힌 내용을 문서로 남길 수 있겠지만, 사건이 드러날 경우 도리어 피해자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셉의 경건함은 그를 거짓 고소와 투옥으로부터 구해 내지 못했다. 만일 우리가 비슷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거룩함이 우리가 상처를 받지 않고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교훈을 남겼다. 우리가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과 그분은 연약한 자를 지키신다는 것을 안다면, 궁지에 몰려서도 포기하지 않고 맞서 나아가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는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케 하는 현실적인 사건이다. 허나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선이 결국은 이길 것을 기대하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셉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줬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으로 고소를 당하고 그릇된 대우를 받을 때도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을 계속 수행하며 하나님이 바른 길로 마무리 지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감옥에서 꿈을 해몽하다 (창39:20-40:23)

목차로 돌아가기

   요셉의 감옥 생활은 여호와의 임재, 간수의 호의 및 요셉의 승진 등으로 특징지어진다(창 39:20b-23). 감옥에서 요셉은 감금되어 있던 바로의 신하 두 명을 만났는데 그들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었다. 여러 애굽 문서에 의하면, 술 맡은 관원장은 술의 품질을 시험하고 독이 들었는지 검사할 뿐 아니라 정치 권력자와 가까이 지내기도 했다. 그들은 종종 왕의 친구가 되기도 했으며 지혜로움으로 인해 소중히 여김을 받기도 했다(느 2:1-4).[1] 술 맡은 관원장처럼, 떡 굽는 관원장도 신뢰받는 신하로서 정부 내 최고위 관리와 무시로 상통했으며 음식 마련 이상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을 것이다.[2] 감옥에 갇힌 요셉은 이 왕실 관리들을 위해 꿈을 해석해 줬다.

 

   꿈 해석은 고대 세계에서 박식한 일로서, 꿈과 그 의미가 망라된 기술적 “꿈 해석서”를 가지고 푸는 것이었다. 과거의 꿈과 그에 대한 해석의 진상에 대한 기록은 해석자의 예측을 지원해 줄 경험적 증거를 제공했다.[3] 하지만 이런 전통을 교육 받은 적이 없는 요셉은 하나님이 해석을 보여 주셨다고 했는데 결국은 그것이 진실임이 밝혀졌다(창 40:8). 그 후 술 맡은 관원장은 그의 이전 직책을 회복했으나, 그는 요셉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역학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르지 못할 곳까지 오른 다른 이의 성공을 돕는 것에 투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유용성이 다하면 폐기 처분될 뿐이다. 이 말은 그런 일은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지위와 승진에 초점을 맞추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의미인가? 나아가, 요셉은 감옥에서 그 두 관원장의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검증할 길이 없었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잠 18:17). 하지만 판결이 내려지고 나면, 어떤 죄수라도 자기 무죄를 항변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 투자가 결국 어떻게 우리나 우리 조직을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의심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돕는 사람의 성격과 동기를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후에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반영될지에 대해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보통 이런 문제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기도와 분별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마비시킬 것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한다면, 선행을 실천해 나가기가 더 쉬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믿기 때문이다(롬 8:28).

Kenneth A. Kitchen, “Cupbearer,” New Bible Dictionary, 3rd ed., ed. I. Howard Marshall, A. R. Millard, J. I. Packer, and D. J. Wiseman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96), 248쪽.

Roland K. Harrison, “Baker,”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ed.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79), 1: 404쪽.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2001), 672-673쪽.

요셉을 승격시킨 바로 왕 (창41:1-45)

목차로 돌아가기

   이태가 더 지나자 요셉에게 비참한 감옥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졌다. 바로가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갇힌 젊은 히브리 사람을 기억했던 것이다. 암소와 이삭에 대한 바로의 꿈은 그의 가장 빼어난 술사도 당황케 만들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거했으며 그는 계시를 중개하는 역할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창 41:16). 바로 앞에서 요셉은 그의 민족에게만 적용되던 하나님의 언약적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일관되게 하나님을 보다 더 일반적인 용어인 “엘로힘”으로 지칭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불필요하게 거부감을 조성하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가 하나님이 꿈의 의미를 알려 주셨다고 인정한 사실을 봐서도 알 수 있다(창 41:39). 직장에서 신자가 종종 천박한 태도로 그들의 성공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될 수 있다. 요셉은 바로에게 인상 깊게 행동한 나머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공(公)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지라,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제2인자로 삼았으며, 특히 요셉으로 하여금 다가올 기근을 준비하도록 했다(창 41:37-45).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 말씀이 열매를 맺고 있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요셉처럼 우리도 우리 앞에 닥친 도전을 헤치고 나갈 힘이 없음을 고백하고 성공을 위한 해결책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대중의 갈채에 종종 따라오는 ‘자만’에 강력한 방벽(防壁)을 칠 수 있을 것이다.

 

   요셉의 승진은 그에게 대단한 지도력을 갖추게 했다. 바로의 인장 반지와 금 목걸이, 고위직에 맞는 훌륭한 복장(세마포 옷), 공식적인 운송수단(버금 수레), 새로운 애굽식 이름(사브낫바네아), 상류층 출신의 애굽인 아내 등이 그것이었다(창 41:41-45). 만일 히브리인의 유산을 저버리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다면,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와 패배를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분의 도우심이 한층 필요한 때는 우리가 성공했을 때다. 본문은 지위가 높아진 뒤 요셉이 얼마나 경건한 방식으로 처신했는가를 수차례 보여 준다. 그중 하나가 요셉이 승진에 대비했다는 것과 관련된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지도자가 될 꿈을 주셨는데, 그로 인해 요셉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과 사명이 있으며 이를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됐다. 요셉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신뢰했다. 그는 시기심 많은 형제에게 전혀 앙심을 품지 않았으며, 자신을 금세 잊어버린 술 맡은 관원장에 대해서도 그랬던 듯하다. 바로가 그를 승진시키기 전, 요셉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을 입증할 증거도 갖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하나님 덕분이라고 말한 것은 잘한 일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은사는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라고 요셉 스스로 확신하게 했다. 요셉은 예의 바르고 겸손했으며 바로와 애굽 사람을 돕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의사가 있었다. 애굽 사람에게 돈이나 가축이 남지 않아 온 애굽이 굶주릴 때도 요셉은 애굽 사람과 바로의 신뢰를 얻었다(창 41:55). 총리로서 시무하던 그의 여생 동안 요셉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 효과적인 관리를 하고자 변함없이 진력했다.

 

   여기까지의 요셉 이야기는, 깨어진 이 세계에서 우리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신속하게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을 때 요셉은 17세 소년이었다(창 37:2). 13년의 세월이 흘러 30세가 됐을 때 비로소 그는 종살이에서 해방됐다(창 41:46).

 

장기적인 농업 정책 및 기반구조를 만들다 (창41:46-57)

목차로 돌아가기

   요셉은 바로가 그에게 맡긴 일에 즉시 착수했다. 요셉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총리라는 나라의 수장으로서 새로 얻은 그의 직책으로 개인적인 이득을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직임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정서적 고통을 치유해 주셨고 그를 번성케 하셨다는 의미의 이름을 자녀에게 지어 줬다(창 41:51-52). 요셉은 자기 지혜와 분별력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인정했지만, 애굽의 땅과 특히 농업에 대해 배울 게 여전히 많다는 현실도 인정했다. 총리인 요셉의 일은 나라 살림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직책상 그는 입법, 통신, 협상, 운송, 안전하고 효율적인 식량 저장 방법, 건축, 경제 전략 및 예측, 기록 보관, 급여 지급, 통화 및 물물교환을 통한 거래 성립, 인적 자원, 부동산 취득에 대해서 많이 배워야 했다. 하나님 및 사람과 관련된 그의 특별한 능력이 별도의 영역에서 작동하지는 않았다. 요셉의 비범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 습득한 능력을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이 경건한 일이었다.

 

   바로는 이미 요셉을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으로 여겼으며(창 41:39) 이런 특징 때문에 요셉은 전략적 기획과 행정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지혜 있는”과 “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hakham[하캄]’과 ‘hokhmah[호크마]’는 높은 수준의 정신적 통찰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실용적 기술에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목각, 보석, 철에 대한 숙련 기술(출 31:3-5; 35:31-33), 재봉술(출 28:3; 35:26, 35), 행정 기술(신 34:9; 대하 1:10), 법적 정의(왕상 3:28)가 포함된다. 이런 기술은 비신자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지혜로운 이들은 이스라엘을 통해 만국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었다(신 4:6).

 

   첫 번째 행동으로서 “요셉이 …… 애굽 온 땅을 순찰”(창 41:46)했다. 그는 농민, 지형과 농토 조건, 작물, 도로, 운송수단에 대해 잘 알아야 했다. 요셉이 이 모든 일을 개인 차원에서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농림부나 국세청 같은 훈련 기관을 설립하고 감독해야 했다. 7년의 풍년 기간 동안 요셉은 도성 안에 곡식을 저장해 놓았고(창 41:48-49), 이어서 닥친 7년의 흉년 동안에 요셉은 애굽 사람과 넓게 퍼진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곡식을 분배해 줬다. 이 모든 일을 발의하고 실시하는 한편 전제 군주제의 정치 음모에서 살아남으려면 특출한 재능이 필요했다.

 

애굽 사람을 빈곤에서 구해 내다 (창47:13-26)

목차로 돌아가기

   사람들에게 돈이 떨어지자 요셉은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식량과 맞바꾸도록 허용했다. 이 계획은 1년간 지속됐는데, 이 기간 동안 요셉은 말, 양, 염소, 소, 나귀를 모아들였다(창 47:15-17). 그는 이 동물의 가치를 판정해 공평한 교환 체계를 확립했다. 식량이 결핍되면 사람들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생존을 극히 염려하게 된다. 식량 배급을 실시하되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것은 행정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든 가축을 팔아 버린 후에 사람들은 자진해서 그들 자신을 바로에게 노예로 팔 뿐 아니라 토지 소유권도 그에게 넘기려 했다(창 47:18-21). 지도자의 관점에서, 이것은 지켜보기 끔찍한 일이었다. 요셉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팔고 노예 생활로 들어가도록 허락했지만, 그들의 무력함을 기회 삼아 그들을 착취하지 않았다. 요셉은 그들 재산의 가치를 제대로 쳐서 씨 뿌릴 종자와 교환해 주도록 했다(창 47:23). 그는 수확의 20퍼센트를 바로에게 되돌리도록 하는 영속적인 법을 제정했다. 그 후 사람들이 그 법을 따르는지 감시하며 준수하도록 하는 체제를 확립했으며 그 수익을 관리하는 부서를 만들기도 했다. 이 모든 일에서 요셉은 제사장 가족은 땅을 팔지 않아도 되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바로가 그들에게 고정적으로 일정한 식량을 주어서 그들의 필요를 충분히 해결해 줬기 때문이다(창 47:22, 26). 이 특수 집단을 다루는 일은 결과적으로 그들만을 위해 마련된 소규모의 독특한 분배 체계를 갖도록 했을 것이다.

 

   빈곤과 그 결과는 경제적인 현실이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그런 결과가 없어지도록 돕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에는 완전한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자에게 사람들이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제거할 힘은 없지만, 우리는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이 대처할 수 있도록 그들을 지원할 방도를 찾을 수 있다. 두 가지 악 중에서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게 필요할 것이나, 정서적으로 황폐한 일이 될 수 있다. 일하는 중에 우리는 어려운 사람에게 동정하면서도 우리가 속한 조직의 선에 대한 책임을 느낌으로 긴장을 경험할 수 있다. 요셉은 이런 어려운 임무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했다. 우리 또한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다행히 하나님이 주신 기술과 지혜를 사용해서 요셉은 성공적으로 애굽을 이끌고 재난을 통과할 수 있었다. 7년간의 풍년이 닥쳤을 때 요셉은 비축 제도를 만들어서 곡식을 저장했다가 다가올 가뭄 기간에 사용했다. 7년 가뭄이 닥쳤을 때 “요셉은 창고를 열고” 충분한 식량을 풀어 나라로 하여금 기근을 넘기게 했다. 요셉의 현명한 전략과 효과적인 계획 집행은 애굽으로 하여금 기근 동안에 전 세계에 곡식을 공급할 수 있게 했다(창 41:57). 이 경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전 세계에 축복이 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을 이방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한 이방 나라, 즉 애굽의 산업으로 성취하셨다.

 

   사실상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이방인에 대한 축복을 통해서, 그 축복 이후에야 이뤄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서 한 이스라엘 사람을 일으켜서 기근 중에 이스라엘을 구제하도록 하지 않으셨다. 대신 애굽 정부를 위해 일하던 요셉이 이스라엘 사람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게 만드셨다(창 47:11-12). 그렇지만 우리는 요셉을 이상화해서는 안 된다. 종종 억압적이 되던 당시 애굽 사회에서 관리 노릇을 한 요셉은 그 권력 구조의 일부가 됐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노예 생활을 강요했다(창 47:21).

 

요셉의 행정 경험에서 배우기 (창41:46-57; 47:13-26)

목차로 돌아가기

   창세기에서 요셉이 식량 위기를 관리한 일에 갖는 관심은 효과적인 관리 원칙의 개발보다는 이스라엘 가족에게 미친 영향이 더 크게 표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비상한 지도력은 충분히 오늘날 지도자를 위한 실례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요셉의 일로부터 몇 가지 실제 원리를 도출해 낼 수 있다.

 

1. 당신이 임무를 시작할 때 존재하는 상황에 가능한 한 익숙해지도록 하라.

2. 미래에 대해 분별력을 얻어서 현명한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하라.

3.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한 후에 그분이 당신 계획을 지도하고 성취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라.

4.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선물을 감사함으로, 적절하게 인정하라.

5. 비록 다른 사람이 당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당신이 갖고 있는 특별한 재능을 인식한다고 해도, 존경을 받으려고 이기적으로 애쓰면서 그 사실을 널리 알리지 말라.

6. 당신의 직무를 감당하는 법과 훌륭하게 완수하는 법에 대해 스스로 깨달아 알도록 하라.

7. 당신이 축복이 될 수 있는 곳에 하나님이 당신을 갖다 놓으신 줄 알았다면, 다른 사람에게 실질적인 선이 되는 일을 추구하라.

8. 모든 거래에서 공평하게 행하라. 특히 상황이 어렵고 문제투성이일 경우에 그리 하라.

9. 비록 당신의 모범적인 근무 때문에 당신이 유명하게 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종인 당신의 근본 사명을 기억하라. 당신 삶의 목적은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있는 게 아니다.

10.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무수한 유형의 고귀한 일이 갖는 경건함을 귀중히 여기라.

11. 당신 노력의 결실을 그것을 참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능한 한 널리 펼치되, 생각 속에서라도 그들에게 차별을 두지 말라.

12. 하나님이 당신을 조건이 특히 까다로운 업무 분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그렇다고 그것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거나 당신이 하나님 뜻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13.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 임무에 맞도록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라.

14. 때때로, 매우 달갑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두 상황에서 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15. 당신이 하는 일이 매일 보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향후 여러 세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으라.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충분히 성취하실 수 있다(엡 3:20).

 

요셉과 형제들 사이의 거래 (창42-43장)

목차로 돌아가기

   한창 위기가 심각할 즈음에 극심한 기근이 가나안 땅에도 덮치자 요셉의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왔다.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고 요셉도 자신을 그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요셉은 형제들과 대화할 때 주로 상업적 언어를 사용했다. “은”(keseph)이라는 단어가 42-45장에서 20번이나 나오며 “곡식”(sheber)이라는 말은 19번 등장한다. 이 상품의 거래를 둘러싸고 그들의 개인적 역학 관계가 뒤얽혀 있었다.

 

   이때 요셉의 행동은 아주 기민했다. 첫째, 그는 자기 정체를 형제들에게 숨겼는데, 이는 (창세기 27장 35절에 나오는 야곱의 경우처럼) 노골적인 책략의 수준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해도 덜 솔직한 것은 분명했다. 둘째, 요셉은 알려진 죄과를 들어 그 형제들을 심하게 나무랐다(창 42:7, 9, 14, 16; 44:3-5). 요컨대, 요셉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된 집단을 자기 권한을 이용해서 꾸짖었는데 그들이 이전에 요셉을 학대했기 때문이었다.[1] 요셉의 동기는 형제들의 현재 성품을 파악하고자 함이었다. 그는 20년도 더 전에 형제들에게 크게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 행동, 가족에 대한 약속을 믿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요셉의 방식은 사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숨기면서 갖가지 방식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요셉은 어려운 심문을 수행하는 형사처럼 행동했다. 그는 완전히 투명하게 진행해서는 그들로부터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책략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기민함’(Shrewdness)이다. 기민함은 선을 위해서 행사할 수도 있고 악을 위해서 행사할 수도 있다. 한편에서 보면 뱀이 “들짐승 중에 가장 기민[the Shrewdest]”(창 3:1, NLT)하여 극악한 목적을 위해 기민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기민함에 대한 히브리어, ‘ ormah[오르마]’ 및 그 동족어는 “good judgement”(좋은 판단), “prudence”(신중함), “clever”(영리함)로 번역되기도 하므로(잠 12:23; 13:16; 14:8; 22:3; 27:12 - 개역개정은 모두 “슬기로운”으로 번역했다 - 편집자 주),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가능한 한 경건한 일을 추진하는 데 이 단어가 사용될 수도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뱀같이 기민하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라고 타이르셨다(마 10:16, NLT). 성경은 고상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기민함을 종종 칭찬한다(잠 1:4; 8:5, 12).

 

   요셉의 기민함은 형제들의 정직성을 테스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형제들은 요셉이 남 모르게 자루 속에 넣어 뒀던 은을 되돌려 줬다(창 43:20-21). 그가 막내 동생 베냐민을 너그럽게 대함으로 그들을 추가로 시험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을 때와 같은 원한 관계에 빠지지는 않게 될 것임을 알게 됐다.

 

   요셉의 행동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언제나 책략을 정당화해 준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피상적인 판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면서 고난을 당한 요셉은 그의 형제들보다는 상황을 깊이 이해했다. 그들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미해결 상태에 빠진 듯이 보였다. 요셉은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의 인간적 권한에 달린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권위과 지혜를 사용해서 그들을 돕고 섬겼다.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요셉을 차별화했다. 첫째, 요셉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자기 유익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복받은 자이며 그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일에만 기여했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에 그는 형제들의 절망적인 곤경을 이용해 앙심을 품고 더 많은 은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둘째, 요셉의 행동은 그가 복을 전해 줄 수 있었기에 필요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자기 형제들을 보다 더 공개적으로 대했다면, 그런 식으로는 그들의 신뢰성을 시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Waltke, Genesis: A Commentary, 545쪽.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유다 (창44:1-45:15)

목차로 돌아가기

   요셉이 그의 형제를 시험한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서 요셉은 베냐민에게 가상의 죄를 뒤집어 씌워서 베냐민을 종으로 추포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베냐민을 놔둔 채 집에 있는 야곱에게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창 44:17). 그러자 유다가 집안의 대변인으로 나섰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나서서 이런 역할을 떠맡게 했을까?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가족과의 신의를 저버렸으며(창 38:2) 그가 키운 아들 중 둘은 너무 사악해 여호와께서 죽이셨다(창 38:7, 10). 유다는 며느리를 창녀 취급했고(창 38:24), 자기 형제를 종으로 팔자는 계획을 구상한 사람이었다(창 37:27).

 

   그러나 유다가 요셉에게 한 말은 그가 변화됐다는 것을 보여 줬다. 유다는 가족이 경험하고 있는 가슴 아픈 배고픔,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의 꺼지지 않는 사랑, 야곱이 슬픔으로 인해 죽을까 염려되어 베냐민을 반드시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아버지에게 한 약속 등을 얘기하며 예상치 못한 연민의 정을 내비쳤다. 그리고 마침내는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갇히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베냐민을 집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 주기만 한다면 평생 애굽에 머물며 총리의 종이 되겠노라고 간청했다(창 44:33-34).

 

   유다의 변화를 본 요셉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그들을 축복했다. 그는 그들에게 진실을 다 공개했다. “내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결국 그의 형제가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인식한 듯했다. 우리를 착취하고 속이려는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하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신 대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마 10:16). 어떤 사람이 말한 대로, “신뢰는 신뢰할 만한 품성을 필요로 한다.” 요셉이 그의 형제와 나눈 대화를 통한 모든 계획은 종국에는 이리 됐으니, 곧 요셉은 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다. 그는 겁에 질린 형제를 달래면서 온 애굽을 책임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먼저 보내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 설명했다(창 45:8). 브루스 월키는 요셉과 그 형제간의 상호관계가 갖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장면은 화해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것은 어려움에 처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변치 않는 애정을 나타낸다. 심지어 그 식구가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죄와 그 결과에 대해 모조리 자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편애를 눈감아 주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며, 신뢰받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진실한 사랑을 보여 주고, 친밀함을 위해 통제권과 지식의 힘을 저버리며, 깊은 연민과 다정함과 민감하게 반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품으며, 서로 더불어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비록 역기능이 있었지만 이런 덕목을 받아들이는 가족이라면 장차 전 세계에 빛이 될 것이다.[1]

 

   하나님은 흠이 많은 사람을 통해서 그분의 축복을 전 세계에 전하실 능력이 아주 충분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악한 행위를 끊임없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와 변화를 받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이생에서 완벽하게 우리의 실수, 연약함, 죄를 제거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이스라엘 주변 사회의 가치관에 반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는 지도자가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흔쾌히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지도자의 표상으로 인식됐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사건과 관련해 죄를 지었을 때 모세가 그것을 보여 줬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다윗도 여호와의 사자가 백성을 치는 것을 봤을 때 그렇게 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삼하 24:17). 유다 지파의 사자인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

 

같은 책, 565-566쪽.

야곱의 가족, 애굽으로 이주하다 (창45:16-47:12)

목차로 돌아가기

   요셉과 바로는 요셉의 형제들에게 “애굽의 온 땅에서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줬으며(창 45:20)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으로 돌아가 가족을 이끌고 오도록 했다. 하지만 이 좋게 보이는 결말에도 어두운 면이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신 것이지 애굽을 주신 것은 아니었다. 요셉이 무대에서 사라진 지 오랜 후, 이스라엘과 애굽의 관계는 적대적이 되고 말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요셉이 자기 가족에게 보여 준 자비는 하나님의 축복을 지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달해 줘야 할 사람인 그의 역할에 얼마나 어울리는 것이었나?(창 12:3) 요셉은 통찰력 있는 사람이었으며 미래에 대비하는 한편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축복을 실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장차 일어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 1:8)에 대해 계시해 주시지 않았다. 각 세대는 하나님을 충실하게 섬기고 하나님이 그때그때 내리시는 축복을 받아들이면 된다. 유감스럽게도 요셉의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불신에 빠져들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 후손 중에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전할 새로운 사람을 일으키셨던 것이다.

 

 

 

모든 일에 선을 의도하시는 하나님 (창50:15-21)

목차로 돌아가기

   형제들이 뉘우치면서 요셉에게 한 말은 요셉에 대한 핵심 신학 중 하나이며, 창세기의 전반적인 요점 중 하나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을 학대한 것을 보복하지 않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20-21). 요셉이 언급한 “많은 백성”은 “지상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창 12:3)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은 요셉이 구하거나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내려 주셨다(엡 3:20).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일은 실질적이고 중대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바로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직장에서 전도하기를 원하신다든가 우리 일에서 하나님께 중요한 부분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뿐이라는 인상을 우리가 받았다고 해도, 요셉의 일은 다른 차원의 얘기를 한다. 우리가 일하는 중에 하는 행동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극히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보다 더 큰 일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 일의 결과를 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자기 일에 대해 보다 더 넓은 시각을 가졌고,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우여곡절을 만날 때도 낙담하지 않았다.

 

   이 말은 일터에서 관계가 가장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마도 크리스천들은 직장에서 사람들을 용서하는 특별한 은사를 갖고 있을 것이다. 요셉이 자기 형제를 대한 태도는 용서의 모범이 된다. 아버지의 명을 좇아서 요셉은 그 형제들을 용서했으며 그들을 죄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의 용서는, 다른 모든 진정한 용서와 같이 말로만 한 게 아니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관리하도록 해 주신 엄청난 애굽의 자원을 사용해서 그들을 물질적으로도 지원해 번성할 수 있게 했다. 요셉은 심판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님을 인식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 50:19). 그는 하나님을 대신해 판단하지 않고 그의 형제를 구원자 하나님께 연결해 줬다.

 

   요셉이 자기 형제와 맺었던 관계는 가족으로서 맺은 관계이자 경제적인 면에서 비롯된 관계였다. 둘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없었다. 용서는 이 둘에 다 해당됐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앙의 가치는 주로 지역 교회처럼 동일함을 식별할 수 있는 종교권에서 작용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우리 일의 대부분은 공적 영역에서 발생하며, 우리는 다른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참작해야 한다. 그러나 생활의 영역을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정확히 분리하는 것은 성경의 세계관이 아니다. 따라서 용서가 직장 내 건강한 관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 아니다.

 

   살다 보면 언제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런 것을 당하지 않는 회사나 조직은 없다. 일반적으로 그 누구도 고의적인 언행으로 해를 주려 하는 이는 없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요셉은 사람들이 그를 해하려 했다고 인정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판단 속에 보다 더 큰 진실이 숨어 있다. 하나님은 선을 의도하신다는 점이다. 상처받을 때 이것을 기억한다면, 고통을 감내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셉은 자신을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집행하는 도구요, 하나님의 대리자로 봤다. 그는 사람이 가할 수 있는 해악에 대해 알았으며 가끔은 사람이 가장 고약한 원수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의심과 신의가 뒤엉킨 가족 이야기, 신실한 섬김과 적나라한 자기 보호 가 뒤섞인 이야기, 진실과 거짓의 이야기를 알았다.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하나님이 그 가족을 축복하시겠다고 한 언약,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불과 물을 통과하게 하시며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도 알고 있었다. 요셉은 그들의 죄를 덮어 두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원대한 일 속으로 끌어들였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섭리에 의해 반드시 성취될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의 수고는 그 대가가 무엇 이든 간에 보람 있게 될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일에 대한 여러 교훈 중에서, 특히 이것이 유용한 것 이며 구속과 영광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에 대해서도 설명해 준다(고 전 2:8-10). 우리 직장은 우리 가치관과 성격이 드러나며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게 되는 무대다. 지혜로우시고 능력 이 크신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함을 사용하시고, 우리 약함을 고치시며, 우리 실패를 쇠를 벼리듯 벼리시면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친히 세워 놓으신 계획을 성취하실 수 있다.

 

 

창세기 12-50장에 대한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

   창세기 12-50장은 하나님이 전 세계에 복을 퍼뜨리시기 위 해 택하신 한 가족의 처음 3대의 이야기를 전한다. 특별한 권 능이나 지위, 부요, 명성, 능력, 우월한 도덕성을 갖고 있지 못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그분이 그들 을 위해 갖고 계신 위대한 꿈을 성취하시리라고 믿었다. 하나 님은 모든 면에서 신실하셨지만, 그들은 변덕스럽고 적극성이 없으며 불안정했다. 여느 가정처럼 그들도 역기능 가정이었지 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 속에 넣어 주신 믿음의 씨를 지켰고, 최소한 계속해서 그리로 돌아왔다.

 

   적대적인 사람과 세력에게 둘러싸인 채 부서진 세계에서 살고 있던 그들은 믿음으로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 축복 하였으며”(히 11:20)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았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6). 그 성에서는 우리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일하는 자다(마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