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마태복음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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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은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다. 세리였다가 사도가 된 마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새 나라 안에서 어떻게 일하며 살아가길 바라시는지를 보여 주려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활동들을 자세히 이야기해 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두 개의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한 발을 인간 세상에 딛고 서 있으며, 이곳에서 우리 일은 무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그 기대는 하나님의 방식에 부합할 수도 있고,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동시에 크리스천인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가치와 기대에 철저히 따라야 한다.


  마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침판을 사용해 어떻게 인간 세상을 항해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천국”으로서의 세상의 진짜 정체성을 우리에게 가리킨다(마태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번갈아 가며 쓴다 - 마 19:23-24). 하나님 나라는 여기서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이 땅에 ‘이미 왔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그 나라가 완전히 실현될 때까지는 현재 세상에서 “임시로 거주하는 외국인”[1]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면서 일해야 한다.


  삶과 일에 대해 이런 식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리더십과 권위, 권력과 영향력, 공정한 사업 관행과 불공정한 사업 관행, 진실과 속임수, 근로자에 대한 처우, 갈등 해소, 부와 생활 필수품, 직장 내 대인관계, 투자와 저축, 휴식, 성경적 기준과는 잘 맞지 않는 정책이나 관습을 가진 조직에서 일하기 등 일터에서의 여러 가지 문제를 논의해 가신다.

 

Stanley Hauerwas and William Willimon, Resident Aliens: Life in the Christian Colony (Nashville: Abingdon Press, 1989).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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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선언하셨다. ‘천국’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우리는 구름이나 천사들의 합창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천국이 이 땅에서의 하나님 통치를 가리킨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것은 여기 이 세상에 왔다는 얘기다.


   하나님 나라의 삶에서 업무 현장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엄청나다. 왕국은 통치, 경제, 농업, 생산, 재판, 국방 등과 관련 있으며, 이는 대부분의 직장에서 우리가 접하는 이슈들이다.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직장 내 우리 삶과 직결되어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이 새 나라의 가치와 윤리, 삶의 모습을 향해 이끌어 가신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시고, 이 땅에서 그들이 하는 일 가운데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서 일하라고 위임하시는 것으로 끝난다(마 28:18-20).


   마태는 이 나라가 (우리가 아는 바대로)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으나,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마 24:30)을 볼 때 완성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예전 노동 방식을 버리고, 그럼으로써 우리 삶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방식을 본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실행 방식에 따라 일하게 됐다. 

이미 그러나 아직 (마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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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신학자들이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고 부르는 상황 속에 살고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에 의해 그분의 지상 사역에서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전히 다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가 왕으로 오셔야 완성된다. 그 사이의 시간을 사는 (우리의 일, 여가, 예배, 즐거움, 슬픔을 포함해) 우리 삶은 타락으로(창 3장) 부패한 옛날 방식의 삶에 틀이 맞춰진 부분도 있고, 참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는 부분도 있다.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 아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 이 땅에서 현재 우리가 보여 주는 습관은 앞으로 다가올 천국을 반영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경건하다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을 받아들여 성장하는 사람이 되라는 도전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서로 다른 많은 역할과 직업으로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 이 모든 역할과 직업 안에서 우리는 참 실상, 즉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그대로 살아 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인류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고전 15:15-26), 죄(요 1:29), 사탄(계 12:9)을 포함한 세상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수님이 비록 일시적이긴 했지만 친히 죄인의 손에 끔찍스러운 고난을 당하셨고, 우리도 시련을 겪는다. 일하다 보면 우리는 강제 노동, 영구 실업, 심지어는 죽음이라는 산재도 만날 수 있다. 아니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직장 동료나, 열악한 근무 환경, 마땅히 해야 할 승진에서 탈락하는 것,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오만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때로 직장에서 우리가 저지른 잘못으로 고통을 받기도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 이보다 훨씬 더 시달리는 직장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는 어떻게 하면 타락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 마태복음에서 배울 수 있다.

 

예수님께 귀 기울이고 있는가 (마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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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장은,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그분의 오심이 이 땅에 천국을 출범시키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련의 이야기를 아주 빠른 속도로 설명해 나간다. 그 이야기들은 구약을 성취시킨 분(메시아)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을 설명하고,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대하시는 중심점이라는 걸 보여 준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혈통과 출생으로 시작한다. 즉 베들레헴의 구유에 나신 아기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인 다윗의 혈통이며,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참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이다(마 1:1-2:23). 이야기마다 마태가 구약 성경을 참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특정한 고대 본문을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보여 준다.[2]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분이시며, 약속하셨던 메시아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 1:14).

 

 

예를 들면, 마태복음 1장 18-25절은 이사야 7장 14절을 가리키고 있으며, 마태복음 2장 1-6절은 미가 5장 1-3절과 사무엘하 5장 3절과 역대상 11장 2절을, 마태복음 2장 13-15절은 호세아 11장 1절을 가리킨다.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마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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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장과 3장 사이에 거의 3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서 예수님의 진짜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군중에게 계시했다(마 3:17).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뒤 예수님은 (시험에 실패했던 아담이나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이겨 내신다(마 4:1-11).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에 대해서는 이 책의 3장 “눅 4:1-13” 부분을 보라.] 여기서 우리는 다가올 나라의 아주 오래된 뿌리,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의 ‘이스라엘’을 미리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나라가 갖는 혁명적 측면, 즉 타락한 세상의 임금을 이기고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도 볼 수 있다.
 

   일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즉시 아담에게 할 일을 주셨다(창2:15). 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도 할 일을 부여받았다(출 20:9). 따라서 예수님도 근로자였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마 13:55). 예수님의 세례받으심, 광야 시험, 공생애 전 목수로서 노동하셨던 경험 등은 이제 그분이 시작하려 하는 공적인 일(사역)을 준비한 것이었다(마 4:12).
 

   여기서 우리는 소명의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첫 단락을 접한다. 천국이 오고 있다는 것을 전파하기 시작한 직후에 예수님은 최초의 네 제자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신다(마 4:18-21). 다른 이들도 나중에 그 부름에 응답해 결국 열두 명의 제자가 됐다. 이 열둘은 그분의 친밀한 제자들이요, 새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리더로 처음 부름받아 따로 구별 된 무리였다(마 10:1-4; 19:28; 엡 2:19-21). 그 열두 명의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지역을 다니기 위해 각자 자신의 기존 직업과 수입, 관계를 다 떠날 것을 요구받았다.[개인적 · 가족적 · 사회적 희생을 요구한 것에 대한 논의는 이 책 2장의 “막 1:16-20” 부분을 보라] 이들 외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안전할 것이라는 희망이나, 가족 간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 갈지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부르신 것은, 앞으로 마태가 세금 거두는 일을 포기하게 될 것을 암시했다(마 9:9).[3]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르심이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설교자나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걸 의미하는가? 이 본문은 제자가 되려면 그물과 배, 톱과 끌, 급여와 이윤을 내던져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대답은 ‘아니요’(No)다. 이 본문은 당시 갈릴리 바닷가에 있던 네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묘사할(describe) 뿐이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똑같이 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는(prescribe) 게 아니다. 열두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떠도는 자기 스승과 함께 다니기 위해 자신의 직업이나 가족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무수히 많은 직업 가운데 군 복무나, 원양어선 근무, 또는 외교관처럼 열두 제자와 비슷한 희생이 요구되는 직업이 있다. 동시에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분을 따르기 위해 자기 직업을 그만두진 않았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집에 남아 있고, 직업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사람도 많았다. 예수님은 자신과 일행에게 식사나 숙박을 제공하고, 재정 지원을 해 주는 그들의 능력을 이따금 활용하셨다. 예를들면, 마가복음 14장 3절의 나병 환자 시몬, 누가복음 10장 38절과 요한복음 12장 1-2절의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종종 예수님께서 그들이 속한 지역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도록 도왔는데, 그런 일은 함께 여행하던 제자 일행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삭개오 역시 세리였다(눅 19:1-10). 세리로 살던 삭개오의 인생은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바뀌었지만, 그의 직업을 버리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본문은 우리가 하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더 심오한 진리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직업을 포기하지는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목적에 반하는 시스템이나 사람이나 우리 자신에게 충성하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요원이다. 우리는 우리 직장에 남을 수 있다. 하던 일을 그대로 수행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주인을 섬기기 위해 그 일을 받아들인다. 여전히 월급을 집에 가져다주기 위해 일하지만, 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 주인이 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일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 헌신한 것 때문에 당신이 사람들을 섬길 때 ‘당신은 그리스도를 섬기게 된다’(골 3:24).

   이것은 처음에 얼핏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우리는 하던 일을 그대로 하라는 도전을 받는다. 가능한 한 우리는 창조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구속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든지, 사람들을 성공하게 하는 일을 하려고 애써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사람들의 꿈을 지지해 주고, 우리 주변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해야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우리 일을 바꿀 수도 있고 바꾸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는 확실히 바꾼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무엇보다 그분을 섬기기 위해 일한다. 그렇게 우리의 일하는 방식, 특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세상의 옛날 임금이 하던 방식이 유린과 차별과 압제와 사기와 보복이었다면, 새로운 왕의 방식은 긍휼과 공의와 진실과 자비다. 이제 옛 방식은 우리가 하는 일에 더는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것은 보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앞으로 마태복음 5-7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새로운 방식에 요구되는 삶과 일의 방식은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잠재적으로 제자가 될 사람에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마 8:18-22)라고 하신 지시에서 우리는 급진적인 삶의 변화에 대한 동일한 요구를 본다. R. T. 프란스(R. T France)가 The Gospel of Matthew, New Internatinal Commentary on the New Ta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2007), 331쪽에서 말한 것처럼 “천국은 분명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리듬을 기꺼이 중단하려는 어느 정도의 광신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라 (마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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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5-7장은 예수님이 하신 산상수훈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 준다. 이 긴 단락(111절)은 흔히 별개의 조각을 하나로 묶은 시리즈로 다루어져 왔으나(어떤 학자는 여러 가지 다른 가르침을 선별해 모은 것으로 여긴다), 그 설교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과 일,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는지 우리 이해를 깊게 해 주는 사상의 흐름과 일관성이 담겨 있다.

 

 

팔복,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하다 (마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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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상수훈은 팔복, “복이 있나니”라는 말로 시작하는 여덟 번의 진술로 문을 연다.[4] 이 단어는 이미 존재하던 복된 상태를 확증해 준다. 각 복은 일반적으로 고생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자들이 실제로는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선포한다. 복 있는 자는 이런 복을 받기 위해서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예수님은 그냥 그들이 지금까지 복을 받아 온 사람이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팔복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로드맵도 아니다.
 

   복 받은 각 무리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 천국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두 번째 복을 생각해 보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마 5:4).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애통하는 것을 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슬픔이다. 그러나 천국이 오면서 애통은 복이 된다. 애통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하나님이 친히 위로해 주시리라는 것이다. 애통하게 하는 그 역경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게 해 주는 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복이다!
 

   팔복의 기본 목적이 하나님 나라가 주는 복을 선언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나라의 특징을 보여 주는 하나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5] 하나님 나라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우리는 복으로 명시된 것을 더욱 닮고 싶어진다. 즉 더 온유하고, 더 긍휼을 베풀고, 더 의에 주리고, 더 화평케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팔복에 도덕적 명령을 덧붙인다. 나중에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 28:19)라고 말씀하셨을 때, 팔복은 이 제자들이 갖춰야 할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준다.
 

   팔복은 하나님 나라의 성품을 묘사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 천국에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루기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지 않으셔서 참 다행이지 않은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이 말씀만 놓고 볼 때 과연 누가 ‘마음이 청결하다고’(마 5:8) 말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복을 받을 수가 없다. 팔복은 조사한 결과 실패로 판명된 사람 모두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함께하기로 동의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복인 것이다.
 

   팔복의 또 다른 은혜는, 팔복이 하나님께 속한 개개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도 축복한다는 점이다.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아직 하나님 같은 성품을 다 갖추지 못했는데도 하나님 나라가 임함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그 팔복이 말하는 특징의 일부나 전부를 이룰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변에 있는 전체 공동체의 모습에 의해 복을 받는다. 하나님 나라 시민권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성격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마 24:30) 때 완전히 이루어진다.
 이런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팔복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성격을 탐색하고, 그것을 어떻게 우리 일에 적용해야 할 것인지 준비를 갖춘 셈이 된다. 모든 복을 하나씩 철저하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그 복을 받고, 그 팔복대로 살아가는 기초가 되기를 소망한다.
[6]

”복이 있나니”(blessed)라는 단어는 헬라어 ‘makarios[마카리오스]’를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복을 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이미 복이 주어진 상태를 확정하는 것이다. 영어로 “blessed”로 번역된 또 다른 헬라어는 ‘eulogia[율로기아]’라는 단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든지 한 개인이나 어느 공동체에 무언가 좋은 것을 가져다주시기를 비는 데 사용된 단어다. 그 단어는 팔복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Donald A. Hagner, Matthew 1-13,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2002), 97쪽. 이 견해는 (비록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견해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다른 대안적 견해에 대해서는 W. F. Albright, C. S. Mann, Matthew, Anchor Bible (New York: Doubleday, 1971), 50-53쪽을 참조하라.

예수님께서 잠재적으로 제자가 될 사람에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마 8:18-22)라고 하신 지시에서 우리는 급진적인 삶의 변화에 대한 동일한 요구를 본다. R. T. 프란스(R. T France)가 The Gospel of Matthew, New Internatinal Commentary on the New Ta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2007), 331쪽에서 말한 것처럼 “천국은 분명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리듬을 기꺼이 중단하려는 어느 정도의 광신을 포함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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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령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혜에 내던지는 자들이다.[7]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했음을 인정한다. 자기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한 사람은 세리였다(눅 18:9-14).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도덕적인 미덕이 전혀 없는 자라는 게 정직한 고백이다. 그것은 거만의 반대다.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형태로 우리가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야만 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복이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산상수훈 첫 부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영적 자원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충족할 수 없다.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했음을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해 주며,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들이 창조 목적에 맞는 일을 할 수도 없고, 창조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산상수훈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런 축복된 상태를 획득할 수 있으리 라는 자기 착각에서 깨어나도록 우리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산상수훈은 우리 안에 진짜 영적인 가난을 만들어 내는 데 목적이 있다.
 

   이 복이 가져다주는 실질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 심령이 가난해지면, 우리는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를 정직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력서를 부풀리거나 직책을 자랑하지 않게 된다. 부풀려진 자기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고, 배우고 성장하고 남의 충고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일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정직해진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나무를 다듬으며 일을 시작하셨을 때 누군가의 안내와 지시를 받을 필요가 있으셨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도우실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로 하여금 실천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서 매일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임재와 힘을 추구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한 것은 성공하고 승진하는 데 장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자주 빠지는 착각에 불과하다. “두려워하지마.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말한 대로만 해!”라고 말하는 사람과, “우린 함께 그 일을 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 각자는 그 어느 때보다 한층 더 분발해서 일해야 해!”라고 말하는 지도자 중에 과연 누가 끝에 가서 더 성공할 것 같은가? 거만하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지도자가 겸손하고 힘을 실어 주는 지도자보다 더 위대해 보인 적이 혹시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최고의 조직에서는 그런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짐 콜린스(Jim Collins)의 유명한 연구에 의하면 꾸준히 위대함을 유지해 나가는 회사의 첫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그 회사에 겸손한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다.[8] 물론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자신에 대한 평가를 부풀리는 구 시대적인 모습 안에 고착된 지도자와 일터도 아직 많다. 이직하는 것이 항상 가능할 순 없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직장을 찾아보라는 것이 최고의 조언일 수도 있다. 또 직장을 떠나는 게 가능하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조직에 크리스천으로 남는 것이 선을 위해 중요한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것이 주변 사람에게 더욱더 복이 된다.

 

누가는 이것을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 6:20)로 표현한다. 학자들은 두 설명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는지를 놓고 격론을 벌여 왔다. 누가복음 4장 16-18절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절을 인용해 읽으심으로써 자신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밝히시며 자신의 사역을 여셨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메시아인지를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여기서 “가난한 자들”이란 겸손하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그 기본뜻이라고 말한다. 이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는 이사야서 66장 2절과 부합한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가난한 자들”을 열다섯 번 언급하시는데, 그중 세 번은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자를 가리키시지만, 열한 번은 겸손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가리키신다. 최상의 해결책은 어쩌면 ‘가난한’ 자의 성경적인 개념은 사회 경제적 빈곤과 영적 파산 상태 둘 다 가리키고, 그 결과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

Jim Collins, Good to Great: Why Some Companies Make the Leap...And Others Don’t (New York: HarperBusiness, 2001), 20쪽. 짐 콜린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김영사 역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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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복 가운데 두 번째 복은 슬픔이라는 감정적 반응을 더함으로 우리 심령의 가난함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삶에서 직면하는 악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즉 우리 직장 안에 있는 악을 포함해서, 세상 가운데서 악에 부딪칠 때 슬픔이라는 우리 감정이 건드려진다. 그 악은 우리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서, 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근원에서도 올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악한 말과 악한 행위, 직장에서의 악한 정책들을 정직하게 애통해할 때, 하나님은 우리 슬픔을 보시고, 상황이 늘 그렇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자기 잘못을 애통해하는 복 있는 자들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함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직장 동료, 학생, 환자, 고객, 상사나 부하, 거래처 사람에게 실수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한 행동에 대해 슬퍼하는 감정적 복이 없이는, 결코 우리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이는 배짱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사람들이 우리를 용서해 줄 마음이 있는지 깨닫고 깜짝 놀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이용할 경우, 우리는 첫 번째 팔복에서 흘러나오는 ‘교만하지 않음’의 복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한 회사가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경영에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걸 찾아냈다. 트랙터와 잔디 깎는 기계를 생산하는 ‘토로’(Toro)라는 회사는 자사 제품을 사용하다 부상을 입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자는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누군가 부상당했다는 걸 회사가 아는 즉시, 부상당한 사람을 찾아서 슬픔을 표하고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제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물었다. 이런 접근 방식은 해를 거듭할 수록 소송을 제기하던 고객의 수를 실제로 현저히 줄여 줬다.[9] 버지니아 메이슨병원(Virginia Mason Hospital)의 의료진들도 환자가 사망한 것에 대한 병원의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10]
 

“Caring about People: Employees and Customers, A Conversation with Ken Melrose,” Ethix 55 (http://ethix.org/2007/10/01/caring-about-people-employees-and-customers).

“Determined Steps to Transformation, A Conversation with Dr. Gary Kaplan,” Ethix 73, (http://ethix.org/2011/01/11/dr-gary-s-kaplan-determined-steps-to-transformation).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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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복 중 세 번째 복에서 상당수의 직장인은 어리둥절해진다.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는 게 그 한 가지 이유다. 많은 사람이 온유함을 ‘약함’, ‘길들여짐’, ‘용기 없음’이라는 뜻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온유함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통제하에 있는 힘’을 뜻한다. 구약에서 모세는 이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묘사된다(민 12:3). 예수님도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묘사하셨는데(마 11:28-29), 그것은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그분의 활력 넘치는 행동과 부합한다(마 21:12-13).


   통제하에 있는 힘은 두 가지를 뜻한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부풀리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해 스스로 주장하는 걸 삼가는 것이다. 바울은 그 첫 번째 모습을 로마서 12장 3절에서 완벽하게 찾아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볼 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다.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최대한 각광을 받기 위해 자기 모습을 꾸미려고 계속 애쓰는 대신, 자신의 단점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장점과 능력까지도 부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아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4-6). 자기 이미지를 부풀리지도 않았고 열등감 콤플렉스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종의 마음을 가지셨다. 후에 바울은 이것을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롬 12:3)이라 표현했다.


   종의 마음은 온유함이 갖는 두 번째 측면의 핵심이다. 그것은 ‘우리들’을 위해 ‘우리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보다 신중하는 것이다. 힘을 행사하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그 힘을 쓰는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라는 말로 시작해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로 끝나는 시편 37편 1-11절 전반부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말씀은 남들이 우리한테 잘못한 것에 대해 복수하려는 우리 의지에 재갈을 물리고, 대신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다 써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팔복의 두 번째 복인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슬퍼하는 데서 흘러나온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슬퍼한다면, 과연 다른 사람의 죄에 복수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 힘을 하나님의 통제하에 둔다는 건 우리로선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앞서 가려면 공격적으로 살고 자신을 널리 알려야 할 것만 같다. ‘당신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는 게 아니라, 당신이 협상해서 얻어 낸 것만 얻는다’라는 표현에 담겨 있듯이 말이다.[11] 직장에서는 거만하고 힘을 갖는 게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진다.그들은 대인관계에서 이기지 못한다. 거만하고 자기만 아는 친구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어라 권력을 좇는 사람은 대부분 외롭다. 그들은 심지어 금전적으로도 안전한 느낌을 갖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세상이 그들을 소유하고 있다. 돈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들은 재정적으로 더 불안을 느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앞에서 본 것처럼, 땅은 천국이 위치하는 곳이다. 우리는 천국을 지금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곳과는 완전히 다른 ‘하늘’(heaven)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황금 길, 진주 문, 산꼭대기 저택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계21:1)이다. 자신의 힘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사람들은 이 땅에 오는 완전 한 나라를 물려받을 것이다. 이 나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만한 자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열렬히 추구해도 얻지 못하던 좋은 것들을 받고, 더 많이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장래에 생길 일만이 아니다. 지금 깨어진 이 세상에서도 자신의 참된 강점과 약점을 인정하는 사람은 실상에 맞게 삶으로써 평안을 누린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힘을 사용하는 사람은 보통 칭송을 받는다. 온유한 자는 다른 사람을 의사결정에 참여시켜 더 나은 결과와 더 깊은 관계를 경험한다.
 

Chester Karass, In Business and in Life: You Don’t Get What You Deserve, You Get What You Negotiate (Stanford Street Press, 199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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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복 중 네 번째 복을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이 의미하신 “의”가 무엇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준다. 고대 유대교에서 의는 ‘무죄라 선언하다, 명예가 회복되다, 올바른 관계로 회복하다’라는 뜻이었다.[12] 의인은 하나님과도 주변 사람과도 의로운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의로운 관계에 근거한 것이라면 무죄로 선언되는 것이다.
 

   의로운 관계로 가득한 사람이 받는 복을 당신은 받았는가? 그것은 세번째 팔복인 온유함에서 흘러나온다. 왜냐하면 ‘나 중심’으로 그 주위만을 맴도는 모든 행위를 멈출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과 의로운 관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과, 당신의 동료와, 가족과, 공동체와 의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목마르고 주리고 있는가? 굶주림은 살아 있음의 표식이다. 진실로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가벼운 식사로서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염두에 둘 때만 우리는 좋은 관계에 굶주리게 될 것이다. 이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는 걸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가 같이 일하며 살아가는 다른 사람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목말라하고 굶주려 할 것이다. 
 

   이런 굶주림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식욕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직장에서 잘못된 것들을 보고, 그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싸움을 하고 싶은 마음까지 나아가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며, 잘못된 것이 올바르게 되는 걸 보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 가운데서 많은 위대한 개혁의 원천이 되어 왔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 영국과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한 것과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팔복의 흐름은 중요하다. 우리는 그런 싸움을 우리 힘으로 하지 않고, 다만 우리가 궁핍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불의를 애통해하며, 우리 힘을 하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David Noel Freedman, vol. 5, 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1996), 737쪽.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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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자신의 실패로 ‘애통’(팔복의 두 번째 복)해하고, ‘올바른 관계’(팔복의 네 번째 복)로 복 있는 자가 되었다면, 당신은 직장에서든 어디에서든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게 어렵지 않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긍휼은 누군가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보다 더 나은 대접을 해 주는 것이다. 용서도 긍휼히 여기는 것의 한 유형이다. 도와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는 누군가를 돕거나, 누군가의 연약함을 이용하지 않는 것도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이런 모든 의미에서 긍휼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의 원동력이었다. 그분을 통해 우리 죄를 용서받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로 도움을 받는다(고전 12장). 성령이 우리에게 이런 긍휼을 보여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그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 3:16).
 

   일에서 긍휼은 대단히 실질적인 효과가 있다. 다른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그들이 최선의 결과를 얻도록 도와주니 말이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 과거에 당신한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그를 도와주면 당신은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오디션을 보는데 당신이 첫 경연자인 경우, 당신 차례를 마치고 나서 다음 순서 경연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과 진심 어린 격려의 말을 건넨다면 당신은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경쟁 상대의 자녀가 아플 때 당신이 고객에게 할 발표를 대신해 줌으로써, 그 경쟁자가 자녀를 돌볼 수 있게 해 준다면 이 또한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긍휼을 베풀면,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혹시라도 얻었을지 모를 어떤 이득을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대가를 치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될 뿐 아니라 일의 결과에도 유익을 가져온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은, 설령 그것이 당신에게는 개인적 유익이 안되더라도, 당신이 속한 부서가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는다. 아니면 경쟁자의 자녀가 아픈 경우처럼 비록 그것이 당신의 조직에는 도움이 안 될지 모르나 당신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상인 고객에게는 유익이 된다. 긍휼이 갖는 보이지 않는 실체는, 긍휼이 당신 이외의 누군가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이다.
 

   어떤 조직 내에 용서하는 환경이 갖춰지면 그것은 또 다른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조직의 업무 능력을 향상시킨다. 누군가 실수를 했는데 그 조직에서 전혀 긍휼이 베풀어지지 않는다면, 당사자는 아무에게도 실수가 알려지지 않고 자기가 비난받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그 실수에 대해 덮으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업무수행력을 떨어뜨린다. 첫째, 그렇게 덮어둔 잘못은 나중엔 처리하기 더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건축 현장에서 기초 토목 공사를 담당한 사람이 실수했다고 상상해 보라. 그 자리에서 바로 밝히고 드러내서 바로잡는다면 고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구조물이 세워지고 기초가 다 덮인 후에야 그것을 바로잡는다면, 비용이 엄청나게 들 것이다. 둘째, 가장 큰 학습 경험은 실패를 거치면서 얻게 된다는 점이다. 혼다 소이치로(Honda Soichiro)가 말한 것처럼 “성공은 오직 반복된 실패와 자기 관찰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성공은 실패라고 불리는 99퍼센트에서만 나오는 당신 행위의 1퍼센트에 해당한다.”[13] 만약 실패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조직은 배울 기회를 얻을 수 없다.
 

Tom Peters, Thriving on Chaos (New York: Knopf, 1987), 259-266쪽. 톰 피터스, 《톰 피터스의 경영혁명》(한국경제신문사 역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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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복 중 여섯 번째 복은 시편 24편 3-5절의 메시지를 되풀이한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다’라는 것은 진실함(integrity), 한결같은 헌신, 일관된 충성 등을 뜻한다. 진실함은 거짓과 나쁜 행위를 피하는 것, 그 이상이다. 진실함의 뿌리는 온전함인데, 그것은 우리 행위들이 우리가 보기에 편하도록 행하거나 회피하는 선택이 아니라, 우리 존재 전체에서 유래한다는 의미다. 주목하라.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한 복’ 다음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한 복’ 다음에 선언하신다! 마음이 청결한 것은 우리의 완전한 의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서 온다.


   다음 질문을 해 보면 우리가 이 복을 얼마나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노련한 속임수로 얼마든지 진실함을 버릴 수 있음에도 끝까지 진실하려고 얼마나 애쓰는가?’ ‘나는 달콤하게 들리는 다른 사람의 험담이나 빈정대는 말로 누군가에 대한 견해를 쉬이 바꾸는가?’ ‘내 행동과 말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어느 정도나 정확하게 반영하는가?’
 

   직장에서 어떤 사람의 진실성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는 어렵지만, 타락한 이 세상에서 진실함은 종종 그저 농담의 대상이 되고 만다. 진실함은 긍휼과 온유함처럼, 연약함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게 될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 가운데 계신다’(딤전 1:17; 6:16)라고 말하지만, 심령이 청결한 자는 이생에서 하나님의 실체를 인식하고 감지할 수 있다. 실제로 진실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 퍼뜨리는 거짓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만든 헛것을 믿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직장에서 모든 걸 망친다. 실상에 근거하지 않은 일은 금세 효력을 상실해서다. 마음이 청결치 않은 자는 하나님을 보고 싶은 열망이 없으나, 그리스도 나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실체를 포함해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복이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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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복 중 일곱 번째 복은 모든 크리스천 근로자를 ‘갈등 해결’이라는 과제로 이끌어 간다. 의견이 다르면 어디든 갈등이 일어나는 법이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갈등을 무시하거나, 위협하거나 겁을 줘서 갈등을 억누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모두 여섯 번째 복인 진실함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갈등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어울리는 게 복이다. 오직 그럴 때 갈등을 해결하고 관계를 회복하는게 가능하다. (마태복음 18장 17-19절에서 예수님의 갈등 해결방법을 더 깊이 찾아볼 것이다.)


   갈등을 해결한 결과는 화평이며,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불린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 거룩하신 분의 성품을 반영할 것이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살전 5:23). 우리가 직장과 지역사회와 가정과 온 세상에서 화평을 추구할 때, 우리가 그분의 자녀임을 보여 주게 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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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복 중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복은 우리에겐 부정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지금까지 복은 겸손, 온유, 바른 관계, 긍휼, 마음의 청결, 화평케하는 것 등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를 위한 박해’를 받을 가능성을 포함시키신다. 이것은 앞의 일곱 번째 복으로부터 야기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적하는 힘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의한 행동 때문에 받게 된 박해는 복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하라. 스스로의 잘못으로 넘어졌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에 따른 부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예수님은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당하는 복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의를 위해 박해를 받아야 하는가? 타락한 세상에서는 참된 의로움을 보여 주려 할 때 많은 사람이 우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실제 이유다. 예수님은 자신처럼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선지자들도 박해를 받았다는 점을 가리키심으로써, 그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직장에서 의로운 사람은 그 직장 내에 존재하는 불의에 가담해 이익을 챙기는 사람(또는 자신이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적극적이고 심각한 핍박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당신이 직장 내에서 험담의 대상이 되거나 차별의 희생양이 된 사람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려 한다면 (또는 그냥 그들과 가까이 지내기만 해도) 박해를 예상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무역협회 회장인데, 협회 임원 누군가가 몰래 받은 떳떳치 못한 돈을 거론하려 한다면, 그들이 다시는 당신을 회장으로 뽑지 않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기대를 아예 접어야 한다. 정당한 이유 때문에 받는 심한 박해가 가져다주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한 박해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을 어둠의 세력들이 믿는다는 표시다.

  
   최고의 조직도, 최고의 칭찬을 받는 사람도, 여전히 타락해 있다. 완벽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팔복의 여덟 번째 복은 타락한 세상에서 일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빛과 소금답게 행동할 때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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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상수훈에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복 있는 자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당신이 산상수훈대로 살아 내는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신은 중요한 사람이다. 세상의 소금인 당신에겐 중요한 역할이 있다. 소금은 보존하는 데 쓰이는 바, 크리스천은 문화 안에 있는 선한 것을 보존한다. 고대 세계에서 소금은 아주 비쌌다. 헬라인은 소금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여길 정도였고, 로마인은 때로 군인의 월급을 소금으로 지불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한 군인은 ‘자신의 소금 값도 못한’ 사람이었다. 당신은 맛을 내는 요소다.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모든 생명에게 ‘하나님의 가치’라는 독특한 맛을 내게 하는 존재다. 당신은 삶에 풍미가 깃들게 할 수 있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고기나 생선에 닿아 그것을 보존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효과를 내려면 우리도 우리가 일하는 곳과 사는 곳에 반드시 관여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를 긴장하게 한다. 지금 주류를 이루는 문화가 반드시 우리를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팔복대로 살면 대부분의 경우는, 일에서도 더 크게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에도 대비해야 한다. 만약 긍휼을 베풀거나, 화평케 하거나, 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우리 일자리를 위협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세상으로부터 움츠려드는 건 크리스천에게 해답이 아니다. 그러나 항상 예외 없이 세속의 방식에 도전할 준비를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건 어렵다. 마태복음 5장 10-12절에서 예수님은 박해가 실제라는 걸 인정하셨다. 그럴지라도 이 시대 문화 속에 사는 우리는 우리의 독특함인 ‘짠맛’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소명을 받은 우리의 균형 잡힌 행함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크리스천의 직무기술서에는 개인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건 물론이고, 주변 모든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직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많은 사람을 만난다. 어쩌면 직장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에 가장 좋은 곳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직장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방법을 선택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일하는 시간을 전도 시간으로 사용하는 건 우리의 고용주에게 정직하지 못한 처사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직장에서 분란을 야기하거나 비신자들에게 적대적인 환경을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개종시켜 조금이라도 신실함을 인정받으려는 시도 같은 큰 실수는 추호라도 피해야 한다. 특히 전도는 열심히 하면서 막상 업무는 성실하게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하는 짓이다.
 

   이런 위험성을 잔뜩 안고서 어떻게 직장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우리가 하는 말보다는 우리 행위, 즉 ‘착한 일들’ 속에 우리의 빛이 더 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팔복은 이런 착한 행실 몇 가지를 이미 나열했다. 하나님께 겸손히 복종하는 가운데, 올바른 관계를 위해, 긍휼이 넘치는 행동을 위해, 화평을 위해 우리는 일한다. 우리가 복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갈때, 우리는 우리 직장과 가정과 나라에서 빛과 소금이 된다.
 

분노, 올바르게 처리하라 (마 5: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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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깜짝 놀랄 만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당시 일반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의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의’를 깊이 존경했고, 자신들이 그들의 경건에 필적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직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자에게만 천국에 입장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의를 외적인 경건과 동일시하는 데 있다. 그 말씀을 그런식으로 이해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그러나 성경을 통틀어 ‘의’라는 단어는 팔복 중 네 번째 복에 나타나 있듯이 항상 하나님이나 주변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직장 안의 사람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은 그 뒤에 나오는 예에서 아주 분명해진다. 마태복음 5장 21-26절은 말한다. 누군가를 살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모욕을 주고, 관계를 깨뜨리는 분노를 쌓아 두지 않도록 절대 조심해야 한다. 분노를 느끼는 게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분노를 올바르게 처리하는 방법은 갈등을 해소하려고 시도하는 것이지(마 18:15-19), 그 사람을 모욕하거나 중상모략해서 쫓아 버리는 게 아니다. 당신과 당신 형제자매와의 올바른 관계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종교적 관례보다도 그것을 해결해 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분명히 하신다.
 

   직장 내에서 분노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데 쓰일 수 있다. 아니면 자신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껴 분노에 완전히 압도당할 수도 있다. 그 문제를 맞닥뜨려 해결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을 수치스러운 자리까지 내몬다 하더라도, 화해를 향한 첫걸음을 당신이 내디디라. 공정하고 공개적으로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새 나라의 방식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복 있는 자는 화평케 하는 자다.

부富와 공급하심 (마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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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부(wealth)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부와 공급하심은 그 자체가 일은 아니지만,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한 일의 결과인 경우가 많다. 경제학의 핵심 내용은 ‘일의 목적은 부를 증진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경제라는 주제가 일과 얽힌다. 산상수훈을 통해 부와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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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를 하기 바로 전에 우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는 내용을 본다. 하나님 나라에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건 명확하다. 그러나 죄로 얼룩진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을 유지해 나간다는 건 확신이 서지 않는 일이다. 비록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셨지만, 아직도 우리는 굶주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부와 일용할 양식을 두고 예수님이 첫 번째로 간구하신 것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말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필요한 양식을 위해 하나님께로 향한다.
 

   그러나 그 간구의 주체가 복수라는 점을 주목하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는 ‘내 자신’의 양식만 구하는 게 아니라 양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 나가길 열망하는 한, 우린 다른 사람의 양식의 필요성도 염두에 두게 된다. 즉 우리가 가진 것으로 가지지 못한 자들과 나눈다. 만일 모든 개인, 사업체, 기관, 정부가 하나님 나라의 목적과 원리에 따라 일한다면 어느 누구도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마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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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지만, 물질적 부와 다른 재물들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경고도 받는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하늘에 쌓아 둔 보물’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자비로운 생각에 대한 실체 없고 진부한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하늘의 보물’은 공의,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생산해낼 수 있는 기회, 모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 모든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같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소중히 여겨지는 것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축적해 놓은 잉여의 부를 보호해 주는 유가증권보다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활동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은퇴 이후를 대비한 금융자산을 갖거나,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신경 쓰는 건 잘못일까? ‘아니다’이기도 하고, ‘그렇다’이기도 하다. ‘아니다’는, 성경 가운데 오로지 이 본문만 부와 공급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이다.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잠 13:11)라든가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쳐도”(잠 13:22) 등, 성경의 다른 구절은 우리에게 신중할 것과 사전에 대비할 것을 조언한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기근이 오기 7년 전에 미리 곡식을 비축해 두도록 인도하셨고(창 41:25-36), 나중에 우리가 돈의 투자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게 될 달란트 비유에서, 예수님도 그렇게 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말씀하셨다(마 25:14-30). 성경의 나머지 본문에 비춰 볼 때, 마태복음 6장 19-34절을 포괄적인 금지로 받아들여선 안된다.
 

   그러나 ‘그렇다’라는 대답은 하나의 경고로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21절에 멋지게 요약되어 있다. 우리는 이 문장의 의미와 달리 이렇게 생각한다.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보물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실제 말씀은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마음이 돈을 어떻게 쓸지를 결정하기보단 돈이 마음 자체를 바꾼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요점은 ‘너희는 너희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돈을 넣어 두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너희가 가진 것들이 너희를 바꿔 놓을 것이며, 그 결과 너희는 다른 것보다 거기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될것이다’라는 의미다. 당신은 어떤 걸 소유할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필연적으로 당신이 소유한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느라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보물의 원칙’이라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 보물 자체가 변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가장 아끼는 보화를 세속의 것에 투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돈을 섬기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마 6:24). 그것은 돈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염려에 빠지게 만들 수 있다(마6:25-34).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돈의 가치가 떨어지진 않을까? 주식 시장이 붕괴하는 건 아닐까? 증권이 지불중지 되는 건 아닐까? 은행이 파산하는 건 아닐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저축한 것이 넉넉한 안전망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염려를 씻은 듯이 사라지게 하는 해독제는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주는 방식으로 투자하는 것이다.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잘 만든 옷을 공급하는 회사는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인 동기가 내재된 보조금이나 과열된 주택 시장, 원자재 부족 등을 보고 실행하는 투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마태복음 6장 본문은 포트폴리오 관리를 위한 규칙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방식과 수단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우리의 자세가, 우리가 소유한 부를 관리하는 방법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필요와 자원의 비축에 대해 우리는 어떤 종류의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 만약 당신이 ‘염려’라는 형태로 관심을 기울인다면 어리석은 노릇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그런 염려로 끙끙 앓는 것은 신실한 태도가 아니다. 염려하는 것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다면 당신은 탐욕스런 사람이 되어 버릴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당신은 하나님 나라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압제하는 존재가 된다.
 

   부에 대해 적절한 관심을 쏟는 것과 부적절한 관심을 쏟는 것, 이 둘을 어떻게 또렷이 분별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대답하신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문제다.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며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위의 질문은 우리가 보물을 어디에 쌓아 두는지를 신중하게 점검해 보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성찰을 통해 우리 마음 상태가 어떤지를 말해 줄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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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남을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상식적으로 접근하게 만드신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이것은 직장에서 한 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맡은 업무를 성공시키는 것은 종종 다른 사람의 성품과 일에 대한 평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상사는 반드시 자기 부하들을 평가해야 하며, 어떤 조직에서는 그 반대이기도 하다. 누구를 믿어야 하고, 누구를 파트너로 골라야 하며, 누구를 채용하고, 어떤 조직에 들어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5절은 “외식하는 자”라는 단어와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라는 권면 등을 고려할 때, 예수님이 거짓 판단이나 불필요한 판단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정직한 평가를 금하신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 준다.
 

   문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속 모습들은, 실상보다는 훨씬 더 편향된 인식에 바탕을 둔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스스로에 대해 기분이 좋게 만드는 것을 남들 가운데서 찾거나, 남을 섬기지 않는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우리가 그때그때 느끼는 타인의 인상을 축적해 두는 대신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그들에 대한 진짜 정보를 모으려는 시간이나 태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잘못된 ‘판단주의’(judgmentalism)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이 불가능할지 모른다. 일관성 있게 사실에 근거한 직장 내 평가 시스템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근무 평가 시스템은 관리자가 업무에 대한 실제 증거를 수집하고, 관점 상의 차이를 직원들과 함께 논의하며, 누구나 편향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것을 요구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서로서로의 상사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판단하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그 일에서 내가 지금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 거지? 무슨 증거로 내가 그런 결론을 내린 거지? 이런 판단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지? 이런 판단에 저 사람은 어떻게 대응할까?’ 등의 질문을 함으로써, 동일한 수준의 공평성을 확보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판단을 바로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우리 인식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물어보는 것이, 우리 눈의 들보를 먼저 빼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리라. (갈등 해결에 대한 내용은 이 장의 “마 18:15-17” 부분을 보라.)


 

황금률 (마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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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것은 다시 우리를 참된 의로 돌아가게 해 주고, 일터에서는 물론 다른 모든 곳에서의 올바른 관계를 다시 손보고 유지하게 해 준다. 우리가 행동을 위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질문은 아마도 ‘이것이 정말 내가 남들이 나한테 해 주기를 바라는 방식인가?’일 것이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마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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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5-7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천국이 이 땅에 가까이 오고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을 들었다. 8-9장에서는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행위로 그 나라의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본다. 그분은 배척당한 어느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마 8:1-4), 점령군인 로마 군대의 장교를 불쌍히 여기셨으며(마 8:5-13),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귀신들린 두 사람을 건져 주신다(마 8:28-34). 이 모든 사례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창조물들을 다시 하나님 것으로 되찾아오도록 이끈 힘은 그분의 긍휼하심이었다.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보여 주는 긍휼도 실질적인 방법으로 똑같이 표현될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음을 입증해 보이시면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일꾼”으로 부르신다(마 9:37-38).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을 예수님이 하신 일과 비슷한 신체적 · 정서적 치유의 일을 하도록 인도하신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목수 일을 하신 것처럼 음식과 물, 주거지, 교통, 교육, 건강, 보건, 공의, 안전, 좋은 정부 등의 분야에서 일하라고 인도하신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신 시간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사가 아닌 설교자로 생각한다는 게 놀랍다. 또 우리가 창조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창 1장), 예술, 기업, 디자인, 패션, 연구 개발 등에서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인도받은 사람들도 있다. 어쨌거나 요점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께는 성과 속,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건 당연하다 (마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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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다가오는 나라를 선포하시고, 강력한 긍휼과 자비의 행동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시려고 제자들을 파송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마 10:9-10), 대신 다른 사람들의 호의에 의존하라고 지시하셨다. 복음은 ‘상업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예수님은 명백히 하셨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돈을 벌고 재물을 생각한다고 해서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해 주시는 공급은 사실 우리의 일을 통해서 주어진다.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 그러나 돈을 버는 것이 우리 일 가운데 최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새 나라의 주님 아래서 일하는 일꾼으로서, 우리의 최우선 초점은 일로 받는 돈이 아니라, 하는 그 일의 가치에 두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이 지시하시는 것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우리 마음 가장 최전방에 두라는 것이다(약 4:13-16). 이 땅에서 우리가 받는 월급이 누구의 서명으로 지불되건, 궁극적으로 모든 서명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두 나라의 충돌 속에서  (마 11-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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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을 읽어 보면, 예수님의 메시지와 활동에 대한 반발이 점점 더 강해지는 걸 볼 수 있다. 그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분의 활동을 중단시키려는 결정을 내리는 마태복음 12장 14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한다. 이것은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예고해 주는 지점이요, 그 이야기가 가리키는 마지막, 즉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는 것의 시발점이 된다. 자기 앞에 어떤 일이 놓여 있는지를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만약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우리 일을 한다면, 우리는 만족감도 찾고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도 경험할 것이다.[14] 하나님이 아담에게 에덴 동산에서 할 일을 주셨을 때 그 일은 쉬웠고,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그 짐은 가벼웠다. 최초의 인간 부부가 자신의 창조주에게 반역했을 때, 일의 성격이 가시와 엉겅퀴에 맞서야 하는 힘든 노동으로 바뀌었다(창 3장).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안식을 약속해 주시며, 우리더러 예수님께 와서 그분의 멍에를 메라고 부르고 계신다. [멍에를 메고 하는 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서신서 · 요한계시록》 3장의 “고후 6:14-18” 부분을 보라.]

 

Frederick Dale Bruner, The Christbook, Matthew 1-12, Matthew: A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2007), 537-540쪽.

안식일에 일하는 문제 (마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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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과 그분을 반대하는 이들 사이에서 충돌이 빚어진 주요한 영역 가운데 하나가 안식일 준수 문제였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잘라 먹도록 허락했다는 것 때문에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안식일에 일은 금지되어 있었는데, 바리새인은 이것을 일로 간주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동기 모두를 배척하신다. 그분은 그 자리에서 당장의 굶주림을 면할 만큼 곡식 이삭을 잘라 먹는 건, 다윗 왕과 제사장들이 그렇게 했으나 하나님께서 책망하시지 않은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안식일을 어긴 게 아니라고 주장하셨다(마 12:3-5). 더 나아가 모세의 율법을 정말로 지키는 것은 긍휼과 자비가 그 동기가 되어야 한다(마 12:7). 이미 미가서 6장 6-8절에 나타나 있는 대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의 사랑(배고픈 사람에게 곡식을 먹이는 것)은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바람(안식일 규례를 지키는 것)보다 더 위에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안식일을 선물로 주시는 것은, 그저 필요를 채우기 위해 우리가 쉬지 않고 일만 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안식일에 누군가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 주거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은 심판받을 일이 아니다.

   유대인의 안식일과 기독교인의주일 예배의 연결점, 유대인 율법의 안식일 규정을 기독교인의 삶에 적용하는 것에 관한 심층적인 논의는 이 책 2장의 “막 1:21-45”와 “막2:23-3:6”, 3장의 “눅 6:1-11; 13:10-17” 부분을 보라.

영원한 나라를 보여 주는 도구 (마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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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대자들의 반발에 직면한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이 시작되면서 가르치는 스타일을 바꾸신다. 하나님 나라를 명백하게 선포하는 대신, 신자에겐 의미가 있지만 비신자에겐 이해가 안 되는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신다. 여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짧은 이야기들은 일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다. 땅에 씨를 뿌리는 사람(마 13:3-9), 빵을 만들기 위해 누룩을 넣어 반죽을 부풀리는 여인(마 13:33), 보물을 찾아다니는 사람(마 13:44), 진주 장사꾼(마 13:45-46), 몇몇 어부들(마 13:47-50), 집주인(마 13:52). 대부분의 경우, 이것들은 이 책에서 서술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씨를 밭에 적절하게 뿌려야 하는지, 빵을 어떻게 구워야 하는지, 또는 어떤 상품에 어떻게 투자를 해야 하는지에 관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이야기의 소재로서 물질적인 대상과 인간의 수고를 사용하신다. 우리의 일은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영원한 실체를 예증해 줄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납세 문제 (마17:24-27과 22: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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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 성전과 로마에 있는 이방 정부 두 곳에 다 세금을 냈다. 이런 세금 납부에 대한 예수님의 견해를 보여 주는 두 가지 경우를 마태는 기록한다. 첫 번째 사건은 마태복음 17장 24-27절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 성전세 수납원이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시는지 물었다. 둘의 대화를 알고 계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라고 물으신다(마 17:25). 베드로는 “타인에게서니이다”라고 대답한다(마 17:26).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신다.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마 17:26-27).
 

   로마에 세금을 납부하는 문제와 관련된 두 번째 사건은 마태복음 22장 15-22절에 나온다. 여기서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 싶어서 이렇게 묻는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폐부를 찌르는 질문으로 답하신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마 22:18-19). 그들이 예수님께 데나리온 하나를 드리자 그분은 이렇게 물으셨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마 22:20). 그들은 “황제의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예수님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대화를 마무리하신다(마 22:21).
 

   우리의 진짜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자원을 하나님의 목적에 바친다. 그러나 이 땅의 권력자에게도 줄 만큼은 줘야 한다. 세금 납부는 어떤 문명사회에서든 우리가 제공받는 사회서비스를 위해 시민으로서 마땅히 져야 할 기본 책임이다. 그런 공공서비스에는 긴급 대응 업무(경찰, 소방관, 의료인 등)는 물론, 사법체계의 확립이나, 영세민이나 노인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지원이 포함된다. 로마제국은 일반 평민에게 줄 혜택을 주된 목적으로 조세 제도를 운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도로나 용수 공급, 치안, 때로는 빈민 구제 등이 제공됐다. 우리 정부가 제공해 주는 봉사의 유형이나 범위에 우리가 항상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내는 세금이 우리 개인의 보호는 물론,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들을 돕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부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건 아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의무를 경멸하지 말 것을 요청하신다(롬 13:1-10; 살전 4:11-12).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세금 납부는 원칙의 문제로서, 우리가 납부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신다. 가능한 한 우리는 어둠에 빛을 비추는 삶을 살면서도(마 5:13-16; 빌 2:15),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살아야 한다(롬 12:18; 히 12:14; 벧전 2:12). 직장에서 일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세금 납부를 거부해서 하나님 나라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은 평화롭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일에 직접 적용된다. 직장들은 세금뿐 아니라 법과 권력기관에 복종해야 한다. 1세기 로마 정부가 그랬듯이 기독교인의 목적이나 윤리를 위반하는 법이나 규례를 가진 정부도 있다. 정부나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이 뇌물을 요구할 수도 있고, 비윤리적인 규칙이나 규제를 가하기도 하며, 사람들을 고난과 불의로 몰아넣거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목적에 세금을 쓸 수도 있다. 세금 문제에서 그러셨듯이, 예수님은 이런 모든 남용에 일일이 다 저항하라고 요구하진 않으신다. 우리는 적국에 있는 스파이나 게릴라 같은 사람들이다. 적국의 모든 요새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꼼짝달싹 못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는 전략적으로 행동하고, 항상 무엇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장 크게 확장시킬지를 물으며 행동해야 한다. 당연히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착취하는 행위에는 절대 참여해서는 안 된다. (이 주제도 이 책 3장의 “눅 19:1-10; 20:20-16” 부분을 보라.)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가기 (마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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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마태복음 18장-25장에서 예수님은 그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보여 주신다. 많은 경우 이 모습들은 특별히 일에 적용된다.

지혜로운 갈등 해결 (마18: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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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직장인은 갈등을 겪는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대하는 하나의 본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너도 똑같이 해!’ 또는 ‘대갚음을 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일대일로 화목을 모색하는 과정을 제시하신다. 팔복의 온유함은 당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존중하는 자세와, 사실에 입각해 자기 정당화를 배제하고 충분히 오랫동안 상대의 관점에 당신 자신을 열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마 18:15). 이것은 상대가 당신을 더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인식이 보편적이지 않을 가능성을 열어 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준비된 두 번째 단계는 당신에게 아픔을 안겨 줬거나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다시 그 주제로 문제를 제기할 때, 당신과 상대방 양자를 모두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그래도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때는 그 문제를 리더(마태복음 18장 16-17절은 특별히 교회 갈등을 다룬다)에게 가져가라. 그 판결도 쟁점을 해결하지 못할 때는,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은 가해자를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한다(마 18:17).


   예수님이 ‘교회 안 다른 성도’와의 갈등을 말씀하시긴 하지만(마 18:15), 그분이 취하신 방법은 현재 직장에서도 최고의 실행 방안으로 간주되는 놀라운 선구자적 방법이다. 정말 좋은 직장에서도 갈등은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효과적인 유일한 해결책은 당사자 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하지 말고, 직접 양자 대면을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 앞에서 개인적인 갈등을 드러내기보다는 그와 사적으로 해결하라. 지금과 같은 전자통신 시대에 예수님의 접근 방식을 본받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다. 간단한 의견 충돌을 사무실 전체의 불화로 만들려면,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참조’란에 한두 명의 명단을 포함시키거나 ‘전체 답장’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난다. 심지어 둘 사이에서만 이메일을 주고받는 상황일지라도, 이메일 같은 비인격적인 수단이 사용될 땐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라는 예수님의 충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책일 수도 있다.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도 우린 똑같이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은 세 개 구절에서 ‘경청’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언급하신다. 경청이야말로 핵심 요소다. 갈등 해소의 현대적 모델은 대개 서로의 의견이 어긋날 가능성을 안은 채로, 서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도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집중해서 경청하면, 상호 수용가능한 해결책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게 해도 안 되면, 그때는 적절한 갈등 해결 방법을 알고 있는 권위자의 개입이 요구된다.

당신의 보물은 무엇인가 (마19: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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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6장에서 이미 논의했던 돈의 문제는 예수님께 이끌려 나온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함께 다시 등장한다. 청년은 예수님께 묻는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고, 그 청년은 자신은 어릴 때부터 그 계명을 지켜 왔다고 말한다. 마태의 설명에서 두드러진 점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청년이 예수님께 묻는 것이다. 그는 이 질문으로써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 준다. 우리는 옳게 보이려는 건 뭐든지 하면서도, 내면에서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한다.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우리는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자들 모두에게 그들의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는 걸 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부자 청년처럼 그들의 소유 때문에 짐을 지고 사는건 아니다. 청년의 경우엔 그가 지나치게 부에 집착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 도전은 너무도 급진적이었다(마 19:22).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뭐가 있는지, 우리가 그분을 섬길 때 필요한 게 뭔지를 정확히 알고 계신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 일인가, 직업인가, 업무수행능력과 기술인가? 혹시 우리의 퇴직 연금은 아닌가?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고(마 6:33),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구한 다음에 와야 하는 부차적인 것들이다. 우리는 그 부자 청년처럼 슬퍼하며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부와 일을 움켜쥐어선 안 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 책 2장의 “막 10:17-31”과 3장의 “눅 18:18-30” 부분을 보라.)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 (마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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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포도원 주인이 하루 중 다양한 시간에 품꾼들을 고용한다. 아침 6시에 고용된 사람들은 온종일 일을 하지만, 오후 5시에 고용된 사람들은 딱 한 시간만 일한다. 그러나 주인은 모든 사람에게 하루 일당(한 데나리온)을 지급한다. 일한 시간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임금을 받았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하기 위해, 주인은 자기 방식대로 해 나간다. 당연히 맨 처음 고용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루 종일 일했는데도 늦게 일을 시작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주인이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3, 15-16).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 18-23)와는 달리, 여기서 예수님은 명확하게 해석해 주지 않으신다. 그 결과 학자들은 많은 해석을 내놓았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일꾼들이고 관리자들이라서, 어떤 학자들은 이 비유가 일에 대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럴경우 그 비유는 ‘네 월급을 다른 사람의 월급하고 비교하지 말라’거나, ‘혹 다른 사람이 너와 비슷한 일을 하는데, 월급을 더 받거나 일을 덜 한다고 불평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이 내용을 직장인에게 아주 좋은 관습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버젓한 급여를 받는다면, 왜 당신은 다른 이들이 더 많이 받는다고 해서 굳이 그렇게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가?’ 그러나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불공정한 근로나 노동착취 관행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어떤 근로자들은 인종이나 성별, 이주민 신분이라는 정당치 못한 이유 때문에 낮은 급여를 받는다. 우리나 다른 근로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만족해야 한다는 게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였을까?
 

   더욱이 이것은 근로 시간과는 상관없이 급여를 지급하는 의문스런 사업 관행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꾼들이 모두 오후 5시나 돼서야 인력시장에 나오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하는 건 아닐까? 모든 사람의 임금을 공개하는 것에 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영역에 비밀스럽게 쳐진 커튼을 확 걷어 젖힌다. 그러나 한 시간만 일하고도 똑같은 임금 받는 걸 온종일 일한 사람한테 보여 주는 게 과연 현명한 생각일까? 그것은 마치 노동 분규를 조장할 목적이 있는 듯 보인다. 이 비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하지 않은 일에 임금을 주는 건, 사업 성공을 위한 비결은 아닐 것 같다. 예수님이 정말로 이런 임금 지급 관행을 옹호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비유는 ‘실제 일’에 관한 메시지가 아닐 수 있다. 본문의 문맥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이들, 예를 들면 법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권리도 소유하지 못하는 어린이들(마 19:14)에 관해 깜짝 놀랄 예를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그 나라가 부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적어도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속해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마 19:23-26). 그 나라는 그분을 따른 자들, 곧 어떤 경우엔 손해를 보면서도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속해 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이 비유 바로 다음에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라는 똑같은 내용의 또 다른 끝말이 나온다. 이는 곧 이 이야기가, 누가 그 나라에 속해 있느냐 하는 논의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일이나 행위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후하심에 의해 얻어진다.
 

   그 비유가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후하심에 대한 메시지라는걸 이해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비유가 어떻게 일에 적용되는지 여전히 의문을 가질 것이다. 당신이 공정한 월급을 받고 있다면, 월급에 만족하라는 충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만약 다른 근로자가 예상치도 않은 상여금을 받았다면 불평할 게 아니라 도리어 은혜를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거기엔 또 폭넓게 적용할 점도 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모든 일꾼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지급했다는 점이다.[15] 예수님 당시의 사회 상황은 많은 소규모 농부들이 로마에 세금을 내기 위해 진 빚 때문에 자기 땅을 내놓아야 했다. 이것은 땅에서 일하는 사람을 그 땅에서 몰아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지만(레25:8-13), 로마인에겐 당연히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실업자들이 매일 아침 모여들었고, 그날의 일당을 벌 수 있게 누군가 자신을 고용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선택을 받는 사람보다 못 받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실업자가 넘쳤으며, 하루 운 좋게 일했다고 해도 다음 날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오후 5시까지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날 하루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릴 돈을 벌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그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도 하루치 임금을 다 지불해 줬다.
 

   만약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을 나타낸다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도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한 일을 찾게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라고 말씀하신 것을 봤다. 이것은 이 땅의 고용주들이 반드시 모든 피고용인의 필요를 채워 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땅의 고용주들은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적절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일을 찾게 될 거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또한 이 비유는 오늘날 사회에서 노동시장의 구조를 형성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주는 하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 하나님 나라의 이런 측면을 확장하기 위해 크리스천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1데나리온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하루치 표준 임금이었다.

섬기는 종의 리더십 (마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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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은혜와 후하심에 관한 이 비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그 요점을 못 찾았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두 아들이 그분의 나라에서 가장 으뜸의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 두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물으신다. “너희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마실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다른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화를 냈다. 예수님은 이 기회를 이용하셔서 그들이 가진 으뜸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
 

   진정한 리더십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섬김의 실제 모습은 일터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것은 회사 사장도 돌아가며 회사 바닥을 쓸고 화장실을 청소해야 한다거나, 회사 직원들이 다른 누군가를 돕는다는 핑계로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일함에 있어 우리 고객들과, 직장 동료들, 주주들, 우리가 하는 일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맥스 드프리(Max De Pree)는 오랫동안 허먼 밀러(Herman Miller)의 사장이었으며 〈포춘〉지 명예의 전당 위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쓴 책 《성공한 리더는 자기 철학이 있다》(Leadership Is an Art , 북플래너 역간)에서 “지도자의 첫 번째 책무는 실상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일은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서 지도자는 종이 되고 빚진 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의 조합이 곧 능수능란한 리더가 되어 가는 과정이다”라고 썼다.[16]
 

   종은 자신의 영적 궁핍을 알고(마 5:3),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주어진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다(마 5:5). 섬기는 리더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마 5:4), 다른 사람이 실패했을 때 긍휼을 보여 주며(마 5:7), 가능한 한 화평케 하고(마 5:9), 하나님을 섬기려다 당하는 무고한 비난을 진실로써(마 5:8) 감내한다(마 5:10). 예수님은 섬기는 리더십을 손수 행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고(마 20:28), 우리는 그분의 본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임을 보여 준다.

Max DePree, Leadership is an Art (New York: Doubleday, 1989), 9쪽. 맥스 드프리, 《성공한 리더는 자기 철학이 있다》(북플래너 역간).

말뿐인 순종, 말뿐인 계획 (마21: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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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들의 비유(마 21:28-32)는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한 두 형제에 대한 이야기다. 한 아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하겠다고 말하고는 안 한다. 다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는 안 가겠다고 말했다가 결국 포도원에서 하루 종일 일한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하신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대답은 명확하다. 처음엔 그렇게 안 하겠다고 거부했지만 실제로 일을 한 아들이다. 이 비유는 앞서 마태복음에서 했던 실제 천국의 일원에 관한 이야기의 연장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던 청중 속 종교 지도자들에게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라고 말씀하신다.17 가장 종교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무리가 종교 지도자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에 있어서 행동이 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초기에는 고객에 대한 봉사, 질 좋은 제품 생산, 시민으로서 책임 완수, 직원 우선 등의 사명 선언문을 내세우는 조직이 많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조직이 형편없는 봉사, 허접한 품질, 불성실, 엉망인 노사관계를 갖고 있다. 개인도 똑같을 수 있다. 멋진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그 계획을 실행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 빠진 조직이나 개인은 의도는 좋을지 모르나 자신이 내세운 논리대로 살지 못함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직장에는 그들의 사명과 목표를 완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스템과, 꾸밈없이 솔직한 피드백을 해 줄 수 있는 편견 없는 모니터링 시스템, 둘 다 필요하다.
 

   그 비유 다음에는 곧바로 악한 소작농의 비유(마 21:33-41)가 포도원이란 일터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을 경영하는 법을 논하는 게 아니라, 당시 유대 종교 권력자들의 선동으로 자신이 배척과 죽임당할 것을 이야기한다는 점(마 21:45)을 분명히 하신다. 이 비유를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열쇠는 43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누구나 각자의 책임이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그 책임을 거부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가 상충하게 된다. 무슨 일이든 우리의 궁극적인 수행 평가는 하나님께 받는다.

 

예수님은 21:32에서 이것을 예시해 보이신다: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었지만 그를 비웃었다; 세리들은 그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선지자의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듣거나 회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배제시켰다.

지상대계명, 이웃 사랑의 커다란 틀 (마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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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한가를 놓고 이따금 다퉜다. 어떤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할례를 다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다. 현대의 많은 유대인처럼, 신명기 6장 5절에 담긴 명령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가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라고 질문한 것은 해당 주제로 벌어진 기존의 논쟁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계명이 큰지에 답하실 뿐 아니라 그 계명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도 말씀하심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이 말씀 후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두 번째 계명을 덧붙이신다.(이 시리즈 1권 4장의 “레 19:17-18” 부분을 보라.) 첫 번째 계명에 대해 두 번째 계명도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두 계명을 하나로 합치신다. 예수님의 논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떼려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요한의 서신에는 이 말씀의 취지가 그대로 메아리치는 문구가 들어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요일 4:20).

   일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주된 통로다. 우리의 일터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장소이고, 매일매일 그들 곁에서 지내는 것은 타인을 사랑해야 하는 특별한 과제를 안겨 준다. 고객이나 다른 주주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도 우리가 일을 통해 다른 이를 사랑할 기회가 된다. (더 많은 사례가 궁금하다면 이 책 2장의 “막 12:28-34”와 3장의 “눅 10:25-37” 부분을 보라.)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실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일터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누군가 햄버거를 가리키며 “저거 괜찮아 보여요?”라고 말한다면 요리사는 햄버거 패티가 잘 익었는지 다시 확인할 것이다. 자기가 먹을 햄버거를 만든다면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은 판매원은 적당히 맞겠거니 하며 답변을 둘러대지 않고 더 노련한 동료 직원을 부를 것이다. 자신이라면 상품을 구매하기 전에 정확한 정보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금 브레이크 수리를 끝내고 조립을 마친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면 차량정비사는 브레이크를 다시 분해할 것이다. 자기가 운전할 차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여직원이 다른 직원에게 무시를 당한다면 “혹시 저 사람이 여자라서 함부로 대하는 건 아닙니까?”라고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자신이 그런 입장이라면 누군가가 옹호해 주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사례지만 하나같이 대가를 치러야 할 일들이다. 수수료를 못 받는다거나, 비용을 받지 못한 채 한 시간 동안 꼬박 일한다거나, 밤잠을 줄여야 한다거나, 미운털이 박혀 사내에서 입지가 약화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노동은 이웃을 섬길 잠재력, 곧 이웃을 사랑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때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분명히 감수할 위험이지만,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일이 대단히 부담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아주 높은 기준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상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을 통해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합쳐 놓으신 게 아닐까.

위아래로 섬기기 (마24: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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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비유는 한 집 전체를 맡게 된 어느 종에 대해 말한다. 여기엔 적당한 때에 다른 종들에게 양식을 나눠 주는 책임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6). 그것을 잘 처리하는 종은 승진해 추가 책임까지 맡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이런 점도 관찰하셨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48-51).

   오늘날 직장 상황에서 그 종은 다른 근로자들을 관리하면서 경영진에게도 책임을 지는 중간 관리직에 해당할 것이다. 직원들의 요구가 충족될 때만 사장의 이익은 충족될 수 있다. 그 중간 관리자는 자신의 권위 위로도, 아래로도 다 책임을 지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 위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는 물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도 돌봐주는 것이 섬기는 리더가 해야 할 책임이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권위 위의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아랫사람들을 홀대해서는 안 된다. 자기 이익에만 신경 쓴 일꾼에게 내린 형벌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이것의 실상을 극적으로 묘사하신다(마 24:48-51).

받은 은사를 힘써 사용하라 (마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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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과 관련해 예수님이 하신 비유 중 가장 의미심장한 한 비유가 투자라는 맥락에서 설정되어 있다(마 25:14-30). 한 부자가 자기 부를 종들에게 맡기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오늘날의 투자자들이 투자 시장에서 하는 것 같다. 부자는 한 투자자에게는 다섯 달란트(아주 큰 돈)[18]를 맡겼고, 다른 투자자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투자자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 그 중 두 명은 투자를 해서 100퍼센트 이익을 벌었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어 한 푼도 벌지 못했다. 부자가 돌아와서 돈을 번 두 종에게는 상을 주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은 가차 없이 벌을 줬다.
 

   이 비유의 의미는 재정적인 투자를 훨씬 뛰어넘는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양한 범위의 은사를 주셨고, 우리가 그런 은사를 활용해서 그분을 섬기길 기대하신다. 그런 은사를 벽장에 처박아 두고 무시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세 명의 종들처럼, 우리가 받은 은사도 각각 다 같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이윤은 우리가 받은 은사에 비례한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정죄를 받은 게 아니라, 자신한테 주어진 것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정죄를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에는 기술, 능력, 가족이나 친척 관계, 사회적 지위, 교육, 경험 등이 포함된다. 이 비유의 요점은 우리가 무엇을 받았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성이 없는 종에게 내려진 무서운 처벌은, 단지 평범한 사업으로 일어난 결과를 뛰어넘어, 우리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어딘가에 인생을 투자해야 한다는 심오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비유에서 투자된 특별한 달란트는 돈으로써, 오늘날 US 달러로 환산하면 백만 달러에 달한다. 현대 영어에서는 ‘talent’라는 단어가 주로 기술이나 능력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비유는 돈에 관한 것으로, 만약 경건한 방법으로 경건한 목적을 성취하는 한, 돈을 (쌓아 두는 것이 아닌) 경건한 행위로서 투자하는 것을 묘사한다. 끝에 가서 그 주인은 신실한 두 종을 이렇게 칭찬한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3). 이 말에서 우리는 주인이 그 결과와 (“잘하였도다”), 방법(“착하고”), 동기(“충성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있다.
 

   직장과 연결해 본다면, 이익을 내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자본을 투자하는 것을 칭찬하고 있다는 말이다. 때로 크리스천은 성장이나 생산성, 투자 이익 같은 것이 하나님께 거룩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런 개념을 뒤집어엎는다. 우리는 우리의 기술과 능력을 투자해야 하며, 더 나아가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쓰라고 제공해 주신 부나 자원은 전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써야 한다. 여기엔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 생산도 포함된다. 예컨대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자원봉사자는 이 비유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새 사업을 시작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업가나, 에이즈 인식 개선 캠페인을 벌이는 보건 행정관, 생산 과정에서 혁신을 이끄는 기계 오퍼레이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똑같거나 반드시 균등한 은사를 주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그 은사를 이용해 최대한으로 잘 해낸다면, 당신은 “잘했도다”라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은사들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동시에 그 비유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받았던 자에게 주는 것으로 끝난다. 동등한 같은 가치라 해도 반드시 똑같이 보상을 받는 건 아니란 얘기다. 어떤 직책은 더 많은 기술이나 능력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보상을 받는다. 잘한 두 종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양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똑같은 칭찬을 들었다. 이 비유가 암시하는 것은 우리는 어떤 달란트를 받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그 능력을 사용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충성스럽고 신뢰할 만한 하나님의 종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것과 아주 유사한 열 므나 비유에 대한 논의는 이 책 3장의 “눅19:11-27” 부분을 보라.)

 

 

NRSV의 각주에 따르면,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치 임금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오늘날 화폐로 계산하면 US 달러로 약 100만 달러(한화 11억 정도)에 해당한다. 헬라어의 ‘talanton[탈란톤]’은 처음엔 무게를 재는 단위로(대략 30-40킬로그램) 쓰였다가, 나중엔 같은 무 286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사복음서 · 사도행전 주 287 게의 금, 은(아마도 본문의 의미는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는 구리에 해당하는 돈의 단위로 쓰였다(Donald A. Hagner, Matthew 14-18,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1995]). 오늘날 영어에서 “talent”라는 단어의 사용은 이 비유에서 파생되어 어떤 능력이나 은사를 가리키고 있다(Walter C. Kaiser Jr. and Duane Garrett, eds., Archaeological Study Bible [Grand Rapids: Zondervan, 2006], 1608쪽).

양인가 염소인가 (마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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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는, 그분이 보좌에 앉아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사람들을 나누실 것이다(마 25:32). 어느 쪽으로 나눠질지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분은 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4-36).

 
   그 자리에는 양으로 분류된 이들이 섬겨 줬던 어려움에 처했던 형제들이 모두 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또한 예수님은 염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 25:41-43, 45).

   개별로든 단체로든 우리는 모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라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의 돌보심 아래 생명 싸개 속에 싸여 있으며’(삼상 25:29, NRSV), 우리는 굶주림, 목마름, 헐벗음, 정처 없음, 병듦, 옥에 갇힘 등 다른 사람이 처한 곤경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일하는건 우리 자신의 필요와 우리를 의지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지만, 우리가 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나누기 위해서다(히 13:1-3).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우리가 당연시하는 삶의 기본 필요마저 채우지 못하는 사람들 곁에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베푸는 일에 매달릴 것이다.


   예수님은 양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던 사람들을 어떻게 섬겼는지는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는다. 어쩌면 선물을 주거나 자선 사업을 통해서 도왔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 중 상당수는 먹고 마시는 것을 재배하며 준비하는 등의 일상적인 일, 즉 신입 사원이 일에 신속하게 적응하도록 돕거나, 의상을 디자인하고 생산하고 판매하도록 도와주는 등의 일을 통해서 했을 것이다. 모든 합법적인 일은 그렇게 생산한 제품과 그 일이 가져다주는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섬길 것이고,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게 된다.

 

인간의 수고의 산물로  자신을 예표하신 그리스도 (마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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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을 넘기겠다는 제안을 가지고 종교 지도자들을 찾아감에 따라,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추진된다. 십자가 처형을 향해 신속하게 움직여 나가는 사건과 함께,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다. 그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자신에게 다가올 희생을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라는 생산품을 택하신다. 빵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예수님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하셨고(마 26:26), 포도주가 담긴 가죽부대를 잡고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마 26:28)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느 누가 만들어 낸 생산품이 아니며, 심지어 성부가 만드신 것도 아니다. 니케아 신조에 보면 그분은 “만들어진 분이 아니라 독생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성자는 자신의 희생을 예로 들기 위해 사람들 손에 만들어진 흔하고 손에 잡히는 ‘빵’과 ‘포도주’ 같은 것을 택하신다.
 

   앨런 리처드슨(Alan Richardson)이 말한 것처럼 이것을 생산하는 데 전 공동체가 다 참여한다.
   

농부의 솜씨와 고생, 제빵사의 수고, 운송하는 사람의 일, 은행과 회사 사무실의 일, 가게와 배달하는 사람의 수고 없이는, 광부들이나 조선소 및 철강회사 등의 일꾼들의 노고 없이는 오늘 아침 우리 제단의 이 빵은 없었을 것이다. 진실로 인간이 일하는 온 세상이 우리가 제공받는 이 빵과 포도주를 생산하는 일에 관여되어 있다. 여기에 인간의 얼굴에 맺힌 땀을 통해 얻은 빵과, 대가 없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이 생명의 빵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이상한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이다.[19]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자연의 물품이나, 추상적 아이디어, 자신이 직접 설계한 이미지가 아닌 손에 잡히는 인간의 수고의 산물을 택하셔서 자신을 예표하려 하셨는지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무한하신 존엄성에 대한 예표로서 이런 노동의 산물을 친히 귀하게 여기셨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그분이 신체적인 몸을 입고 있었다는 것도 기억한다면(마 28:9, 13),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적인 실체와는 무관한 영적인 실체로만 상상할 여지가 우리에겐 없다. 우리를 창조하신 후에(창 2:7; 요 1장)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우리가 손으로 만든 물품을 택하셨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은혜다.

Alan Richardson, The Biblical Doctrine of Work, Ecumenical Bible Studies No. 1 (London: SCM Press for the Study Department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1952, reprinted 1954), 70쪽.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마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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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복음서 기자보다 마태는 천지를 흔들리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갖는 충격적인 의미를 강조하며, 우리를 천국과 땅이라는 중심 모티프로 되돌아가게 해 준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리며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는 것은(마 27:45-54) 유대인에겐 현 시대가 끝나고 앞으로 올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명백한 신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과 일은 언제나처럼 계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평소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상에서 정말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마태복음은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인간의 권력과 지혜라는 자부심에 기반을 둔 세상 시스템에 치명타를 날린 것이었다. 그분의 부활은 세상 안으로 하나님의 방식이 개입한 명백한 표시였다.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아직 온 세상을 다 차지하진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분을 따르는 모든 자를 다스리신다.

 

가라, 제자 삼으라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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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지상 사역이 끝나가고 있었다. 마태복음 28장 16-20절은 그분을 따르던 자들에게 위임하시는 예수님을 이야기한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단락은 흔히 ‘지상대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라 불리며, 크리스천은 그 말씀의 ‘전도’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제자를 삼으라’라는 것이지, 단순히 ‘전도 개종자’를 얻으라는 게 아니다. 이 글 전체에서 살펴봤듯이, 일은 제자가 되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라는 맥락에서 일을 이해하는 것은 지상대 명령 성취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행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우리는 복음(기쁜 소식)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태복음 28장 전체를 쭉 돌아볼 때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우리를 감동시키는 많은 명령을 본다. 이 가르침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요, 또 우리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마태복음에 대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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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우리의 일에 관심이 있으시며, 성경도 이 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처음에 주목했던 것처럼, 마태복음은 여러 면에서 리더십과 권위, 권력과 영향력, 진실과 속임수, 근로자에 대한 처우, 갈등 해소, 부와 생활필수품, 직장 내 대인관계, 투자와 저축, 휴식, 세상에서 일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기 등에 대한 신학과 실천을 말해 준다.
 

   크리스천은 흔히 우리 삶이 세속 영역과 거룩한 영역의 두 가지로 나뉜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일은 단순히 생활비를 버는 수단, 경건한 의미는 전혀 없는 세속적 활동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가는 것과 개인의 경건 생활을 하는 것이 삶의 거룩함의 유일한 요소인 것처럼 여겨진다. 마태복음을 잘못 읽으면 이런 이분법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이 땅 위의 나라는 우리 삶의 물질적이고 세속적 부분을 대변하고, 천국은 거룩하며 천상의 부분을 대변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제대로 읽어 보면 이 두 나라 모두가 우리 삶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 · 영적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타락한 이 땅의 나라도 마찬가지다. 크리스천의 길은 그리스도에 의해 지금도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데 (우리의 일은 물론이요) 우리의 일생을 오롯이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하나님의 목적과 미덕과 원칙을 고수한 채, 타락한 세상의 한복판에서 살며 일할 것을 요구하셨다. 크리스천 각자에게 성과 속은 분리될 수 없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 6:24). 하나님이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이 우주 안에는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거나, 그분이 주관할 수 없거나, 그분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실 수 없는 ‘세속적’ 장소는 없다.
 

   어둠의 나라가 그대로 있긴 하지만, 하나님 나라 역시 가까이와 있다. 세상 사람들과 시스템들은 종종 하나님의 방식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식에 대적하는 아주 실질적인 세력들 한복판에서 존재하는 방법을 배워가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방법을 배우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이 세상을 벗어나거나 무시한 세계관이 아니다. 크리스천은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직장을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반영한 구조들을 창조해 나가는 일에 올바르게 개입해야 한다. 우리는 직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는 데 본이 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의 힘과 부를 하나님께 맡기고 실제로 그분의 능력과 공급하심을 의지하는 데 본을 보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살아 낸다는 의미다.

 

마태복음의 요절과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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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

주제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의 소명은 급진적이며 삶을 변화시키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자신의 직장이나 일을 떠나라는 뜻은 아니다.

마5:1-1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팔복은 직장인을 포함해 모든 신자가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성품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 결과는 때로 박해일 수도 있으나, 어둠 가운데서 신실한 빛의 증인이 될 것이다.

마5:33-37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그리스도인은 그의 행동이 자신이 한 말과 일치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은 직장생활은 물론 개인생활에도 적용되는 덕목이다.

마6:19-3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크리스천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돈과 이 세상에서의 소유보다 더 소중히 하는 걸 옳다고 믿는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 중심에 하나님의 온전히 이루어질 나라와 그 분의 방식을 놓아야 한다.

마8:18-22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마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9:37-38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 제자로의 부르심은 때로 우리에게 직업을 바꾸게 하거나 삶의 급격한 와해를 요구할 수도 있다

마10:5-1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크리스천이 돈에 대해 가져야 할 관계는 불안정한 것이라,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이 일을 통해 얻게 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주의 깊게 명심해야 한다.

마17:24-27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크리스천은 이중 시민의 삶을 산다. 충성은 오직 하나님께만 해야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일과 돈, 그리고 세금 등에서 이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 빛을 발하기 위해 (가능할 때는) 세상의 규칙에 맞게 살아서 규범을 어기지 않아야 한다.

마19:16-30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세상에서의 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걸 정말 어렵게 만든다. 쟁점은 우리의 일과 소유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인지, 우리가 마음속에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20:1-16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제육 시와 제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제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제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비유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겸손한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불평하거나 스스로를 치켜세우지 않는 본을— 그리스도인의 미덕으로 세우고 있다.

마20:20-28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27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진정한 리더십은 자신을 널리 알리는 것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 위대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진짜 리더십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요, 돌봐주는 것이다.

마21:33-41     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마24:45-51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8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마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그 중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 6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 8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12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25:14-30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일을 포함하여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우리는 충성심과 신실함이라는 인품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우리의 삶에 반영되는 방식으로 살아가며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