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 사사기 서론
목차로 돌아가기여호수아서와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정복하고 국가 정부를 형성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두 책의전반적인 대 주제는,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계명과 인도하심 안에 거한다면 그들이 하는 일은 형통하고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지만, 만약 그들의 본성대로 행하고 그들 스스로에게 모든 권위가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는 궁핍과 다툼과 온갖 종류의 악이 슬픔과 고난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영토를 정복하고 정착하고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도자와 선지자와 군대와 모든 백성에게 맡겨 주신 일이었다.이 책들이 성경적 관점에서 본 일에 대한 우리 이해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지만, 여호수아와 사사기에서 보는 일을 오늘날 일터 상황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우리 노력이 필요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리더십 개발과 관리,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간의 상호 관련성, 자원을 두고 벌이는 갈등, 성공을 추구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사이의 긴장 상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항상 존재하는 일을 우상화할 위험등과 같은 오늘날 쟁점에 대한 통찰을 찾아볼 수 있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사건들은 직장 내 갈등이나 분쟁을 해소하고, 근로자들에게 동기부여하고, 선출직의 과제를 해결하고, 은퇴하거나 이직하는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리더를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 데 좋든 나쁘든 우리에게 본을 보여 준다. 이 책들에 나오는 여러 인물은 여성 리더십의 놀라운 가치, 전쟁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권력자가 일터에서 취약계층을 학대하는 공범임을 예시해준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기본 줄거리는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이 거듭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망각해 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항상 응답하시고, 그들을 건져 주실 준비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조차 바라지 않을 때가 되고 나서야 그들은 불행해지고 사회적 황폐함을 겪는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놀라운 메시지다. 우리도 우리가 하는 일에서 제기되는 많은 기회와 어려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할때 종종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는가. 우리도 그분의 사랑을 받고 우리 일을 통해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기보다 다른 것을 우선시해 왔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께로 돌아가 우리 삶과 일에서 복을 받아 누리길 기다리신다는 것이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메시지다.
우리는 정복, 협력, 언약, 혼돈의 4개의 큰 주제로 나눠서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볼 텐데, 이 주제들이 이야기 흐름에도 얼추 들어맞는다.[1]
여호수아서의 핵심 주제에 대한 유익한 개요를 위해서는 David M. Howard, Jr. Joshua,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and Holman, 1998), 56-64쪽을 보라.
정복 (수1-12장)
목차로 돌아가기여호수아서는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의 재출발과 하나님의 임재로 시작한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 1:2-4).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여호수아, 땅, 하나님의 임재는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여호수아 (수1장)
목차로 돌아가기여호수아는 모세의 계승자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 그는 왕은 아니었지만, 어떤 면에서 그는 앞으로 올 세기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의 그림자 역할을 했다. 여호수아는 국가 전투를 이끌었고, 필요할 때 재판을 했으며,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백성을 붙들어 두려고 애썼다.
오늘날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우리는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이양한 것을 훌륭한 승계 계획의 사례로 볼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모세 자신의 성품에 딱 맞는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여호수아를 임명했다. 여호수아는 용기와 배움, 강함과 담대함(수 1:6-7)이 있던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하나님 율법에 정통하며 순종했다(수 1:8-9).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영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호수아 리더십의 토대는 여호수아 자신의 힘도 모세의 후견도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수 1:9)라고 약속하셨다. 모세의 뒤를 잇기 위해 여호수아가 한 준비는 이 책 5장의 “민 27:12-23”과 6장 “신 31:1-34:12” 부분을 보라.
오늘날 지도자에 대한 예로써 가장 주목해 봐야 할 여호수아의 성품은 평생에 걸쳐 덕을 쌓아 가려는 그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치한 고집에 발목 잡힌 것같이 보이는 삼손과 달리, 여호수아는 성미 급한 청년에서(민 14:6-10) 군대 총사령관으로(수 6:1-21), 국가 최고 행정수반으로(수 20장), 마침내 예언적 선각자(visionary)로 변모해 갔다(수 24장). 여호수아는 모세 밑에서 오랜 세월 동안 훈련받기를 자청했고, 자기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기꺼이 배우고자 했다(민 27:18-23 신 3:28). 여호수아는 행동해야 할 때에 명령 내리길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그러면서도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열두 지파 장로를 포함한 팀과 계속해서 리더십을 공유했다(수 19:51). 그는 인품을 성장시키거나 다른 사람의 지혜에서 유익을 얻을 기회가 생기면 한 번도 그것을 거부한 적이 없는 듯하다.
땅 (수2-12장)
목차로 돌아가기여호수아서와 사사기 모두에서 땅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주요한 특징이 될 만큼 중요하다. “그 땅이 …… 평온(rest, NIV)하였더라”(삿 3:11, 30 등). 여호수아서의 주된 활동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수 2:24 1:6).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공연해 나가시는 드라마의 중심 무대이며, 하나님이 그 나라에 하신 약속의 핵심이다. 모세의 율법조차 그 땅과 뗄 수 없게 얽혀 있다. 율법의 주요 조항 중 많은 것이 그 땅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의미 있으며, 그 언약 아래서 가해지는 가장 무거운 벌이 그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내가] 그 땅을 황무하게 하리니 거기 거주하는 너희의 원수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놀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레 26:32-33).
그 땅, 우리가 밟고 서 있는 흙은 우리 실존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심지어 바다로 나가거나 하늘로 나가는 사람도 대부분의 시간은 땅에서 보낸다.) 자기 백성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실체 없는 추상이 아니라, 그분의 의지가 실현되고, 그분의 임재가 보이는 아주 명확한 장소다. 매 순간 우리가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우리가 그분의 일을 해 나가야 하는 유일한 곳이다. 창조는 선 아니면 악이 거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실제 창조물들과 문화 안에서 선하게 일하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함으로써 가나안 땅을 거룩한 땅으로 만들라는 사명을 받았다. 우리도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게 일함으로써 우리 일터를 거룩하게 만들라는 똑같은 사명을 받았다.
땅을 경작하다 (수5장)
목차로 돌아가기그 땅은 고대 근동의 기준에 의하면 당연히 윤택한 땅이었다. 그러나 그 땅의 축복은 창조주의 손길로 공급되던 온화한 기후, 풍부한 물, 그 외 천연 혜택을 넘어섰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이 잘 갖춰 놓은 사회 기반시설도 물려받을 것이다.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수 24:13 신 6:10-11 참조). 심지어는 그 땅을 묘사하는 표시도 일정 수준의 가축 관리와 양봉업을 짐작하게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수 5:6 출 3:8)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땅과 노동 간에는 뗄 수 없는 연결 고리가 있다. 우리 생산 능력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근면함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쓸 수 있는 자원에서도 나온다. 반대로 땅은 그 자체가 일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땀을 흘리면서 빵을 생산해 내야 한다(창 3:19). 이 점은 여호수아 5장 11-12절에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다.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이스라엘은 광야 유랑 기간 동안 하늘로부터 온 선물인 만나로 살아남았으나, 하나님은 이것을 식량 공급을 위한 항구적 해결책으로 삼으실 의도가 전혀 없으셨다. 이제는 땅에서 일해야 했다. 풍부한 자원과 결실을 맺게 하는 노동은 약속의 땅의 빠질 수 없는 구성 요소였다.
그 요점은 아주 당연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하나님은 때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 물리적 필요를 공급해 주실 수도 있으시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노동한 결실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땅의 정복을 허락하시는가 (수6-12장)
목차로 돌아가기이스라엘의 풍성한 경제가 가나안 족속을 그 땅에서 쫓아내는 것에 기반을 뒀다는 사실은 조금은 불편한 질문을 갖게 한다. 하나님은 땅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정복을 인정해 주시는 걸까? 하나님은 종족 전쟁을 용인하시는 걸까?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보다 그 땅을 차지할 자격이 더 있었다는 말인가? 정복에 대한 자세한 신학적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1] 그렇게 야기된 무수한 질문에 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몇 가지 명심할 것은 있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해 소집된 세력이 방대하고 대단히 강하던 고대 근동의 무법천지 같은 곳에서 자기 백성 만나기를 의도하셨다.
2. 군사 정복이라는 일이 여호수아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일이지만, 그것은 그 뒤에 나오는 다른 모든 일의 모델로 제시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서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한 일과 리더십의 면면을 찾아볼 수 있으나, 사람을 땅에서 쫓아내는 것은 그런 적용점의 하나가 아니다.
3.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라는 명령은(수 1:1-5) 대단히 특수한 명령이지 하나님이 이스라엘 족속이나 다른 인종에게 하시는 일반적인 성질의 명령은 아니다.
4. 가나안 족속의 멸절은 악명 높았던 그들의 사악한 생활방식 때문이었다. 가나안 족속은 어린아이 공양, 신접, 무당 및 강신술 등에 참여했는데, 그것은 온 세상을 축복하는 통로가 되길 원하셨던 하나님이 택한 백성(신 18:10-12) 가운데서는 용납하실 수 없던 것이었다. 그 땅은 우상숭배가 근절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온 세상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2]
5. 라합같이 회개한 가나안 사람은(수 2:1-21 6:22-26) 살아남았다. 실제로는 가나안 족속이 완전히 멸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6.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할 자격이 더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확실하게 답할 수 있을 만큼 이스라엘도 결국 가나안 족속 못지않게 사악한 행위를 그대로 했다. 가나안 족속처럼 이스라엘 족속도 다른 나라의 정복으로 그 땅에서 쫓겨나는 고난을 겪을 것이며, 성경은 이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이다(암 3:1-2).
7. 힘에 대한 완전한 크리스천 윤리는 여호수아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 전부를 구체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 부활에서 찾아야 한다. 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여러 나라를 정복하시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목숨을 내주신 데서(막 10:42-45 요 10:11-18) 찾아볼 수 있다. 힘에 대한 성경적 윤리는 궁극적으로는 희생과 겸손을 바탕으로 한다.
정복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책을 보라. C. S. Cowles, Eugene Merrill, Daniel L. Gard, and Tremper Longman III, Stanley N. Gundry, ed., Show Them No Mercy: 4 Views on God and Canaanite Genocide (Grand Rapids: Zondervan, 2003).
J. Gordon McConville and Stephen N. Williams, Joshua: The Two Horizons OT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2010), 113-114쪽을 보라.
그 땅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다 (수4:1-9)
목차로 돌아가기그 땅의 백성에게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것이다. 백성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을 구현한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강 가운데에서 기념하는 돌들을 가져다 세움으로써 이 복을 축하했다.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번성과 안정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게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일은 항상 그들을 위해 앞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에서 나왔다.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에서 끊어질 때마다 그들의 수고의 궤적은 하향곡선을 그렸다. 사사기 2장 10-11절에서 들리는 칙칙한 곡조가 증거한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이 그로 인해 직면한 문제는 그들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
우리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스스로 물어볼 수 있다.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을 잘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릴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에서 우리 대부분은 우리 자신이 잘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사이의 긴장, 혹은 로라 네쉬(Laura Nash)가 이 역동성을 탁월하게 분석한 대로, “사리사욕이라는 나 중심 시스템”과 “다른 사람의 행복한 삶” 사이의 긴장을 느낀다.[1] 그것은 아무도 우릴 돌봐주지 않는 게 두려워서 우리가 기어이 일등이 되려고 지나치게 애쓰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일을 기억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 중 상당수는 일에서 우리가 거둔 성공의 기념물(상장, 기념패, 사진, 훈장, 자격증 같은 것)을 간직한다. 만약 우리가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내가 마땅히 얻을 걸 가진 거야’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매일매일 여기서 나와 함께해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이것이 다른 사람을 더 돌보게 우리를 좀 더 자유롭게 해 주면서, 우리도 여전히 돌봄을 받고 있다는 기분을 받게 하지 않을까? 이것을 시작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하루를 지내는 동안, 당신에게 직접 일어나는 일이든 당신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든 간에,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좋은 일들을 마음속으로 기억해 두거나 적어 놓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셨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요단강변에 세웠던 돌처럼, 이런 것 하나하나가 하나님께 일종의 기념석이 된다. 본문에 따르면 그 기념하는 돌들은 그들에게 아주 강력한 회상이었고, ‘그 돌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다’(수 4:1-9).
Laura Nash, Believers in Business (Nashville: Thomas Nelson, 1994), 96쪽.
협력 (수13-22장)
목차로 돌아가기여호수아 13-22장에 나와 있는 땅의 분배에 대한 긴 본문은 (물론 분량상, 우리가 사건의 큰 그림을 못 볼 경우에는 맹목적으로 읽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데 땅이 수행하는 필수적인 역할을 반영한다. 이 장들은 경계선을 정하고, 성읍을 배정하며, 분쟁 해결 절차를 마련하는 등과 같은 세부적인 일, 인간의 번영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회를 구성하고 문화를 창달하는 일을 자세히 다룬다. 여호수아는 땅의 분배를 공정하게 하기 위해 빈틈없는 방법을 취했다(수 14:1-2). 이런 구절은 생산적인 노동이 조직화와 공의를 뜻하는 ‘협력과 정정당당한 시합태도’에 대부분 의존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스라엘 족속은 어떤 것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아야 했고, 그렇게 한 후에야 그들은 그들의 공동체를 평화롭고도 생산적인 방법으로 조직할 수 있었다. 지리적, 사회적 조직의 실상을 다루기 위해서는 꽤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이런 실상은, 요단 동편 지파가 그들의 지경에 제단을 세운 후에 분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은 여호수아 22장에서 특별한 힘을 발휘하며 떠올랐다. 그러나 나중에 실상이 밝혀지자, 기념 제단을 쌓은 건 그쪽 지파 입장에서는 지혜롭게 한 처신임이 드러났고 그들을 이스라엘 안에 남기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이스라엘도 장차 알리라 이 일이 만일 여호와를 거역함이거나 범죄함이거든 주께서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지 마시옵소서 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 또는 화목제물을 드리려 함이거든 여호와는 친히 벌하시옵소서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 르우벤 자손 갓 자손아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 하여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여호와 경외하기를 그치게 할까 하여 우리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한 제단 쌓기를 준비하자 하였노니 이는 번제를 위함도 아니요 다른 제사를 위함도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우리의 번제와 우리의 다른 제사와 우리의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 너희 자손들이 후일에 우리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다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수 22:22-27).
땅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통치 조직을 만들고, 분쟁을 해결하며, 단일한 사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복잡한 과정이었다. 여호수아가 모든 책임을 지고 있었지만, 모든 백성이 저마다 해야 할 역할이 있었고, 심지어는 불완전한 개인이 조화를 이루어 일하는 데는 심한 난투와 교활한 직책까지 필요했다는 세세한 사정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경영의 실제와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국제적인 공급망을 갖추는 작업은 인센티브를 조정하는 것, 구체적 사항을 의사소통하는 것,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 경쟁하되 이익을 위해 갈등을 해결하는 것, 다른 요소의 손실 없이 수익성을 높이는 것, 노련한 기여자를 끌어오고 동기 부여하는 것, 예기치 못한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해야 했던 것과 비슷하다. 대학, 정부 기관, 은행, 농업 회사, 미디어 회사, 거의 모든 종류의 일터도 마찬가지다. 또한 사회는 경영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과 기업과 정부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도 의지한다.
만약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다른 지도자 및 백성을 인도하셨다면, 오늘날의 관리자들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거라고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 기도, 예배, 그룹 성경공부, 다른 크리스천의 조언이라는 자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행사하는 행정, 경영, 리더십에 대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도록 우리는 어떻게 이 자원들을 연관시킬 수 있을까?
비록 땅의 소유와 백성의 통치가 국가에 가장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이 본문의 뒷부분은 땅의 정복도 국가 제도의 정비도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우리는 그 땅에 남아 있던 여러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는 못하였더라’(수 15:63 16:10 17:12-13)라는 걱정스러운 후렴구를 듣는다. 여호와는 예전에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가나안 사람의 가증한 풍습에 물들어 타락하지 않도록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라고 명령하셨다. 비록 여호수아서가 다루는 기간 동안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가나안 족속이 계속 그 땅에 남아 있는 것은 훗날 하나님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믿음을 흐려지게 하는 주된 요인이 된다.
언약 (수 23-24장)
목차로 돌아가기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갱신이 여호수아서의 결론이다. 가장 중요한 요점이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데, 거기서 여호수아는 오직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헌신하라고 백성을 깨우고 도전하고 있다. 여호수아의 연설은 커뮤니케이션의 모델이다. 먼저 그는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이 애굽과 광야, 약속의 땅에서 하셨던 놀라운 일을 되새긴다. 그런 다음 여호수아는 어째서 그들이 아직도 우상과 거짓 신을 가지고 다니는지를 묻는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역심리학(逆心理學)을 사용해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이렇게 도전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 24:15). 이 말은 그들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수 24:16).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더 큰 도전을 한다.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수 24:19-20). 이것이 그들을 실제로 결단에 이르게 했다.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수 24:21). 여호수아는 그것을 기록해 두자고 말하고, 그는 백성에게 그들의 헌신을 서명하게 하고 증인을 서게 한다(수 24:15-27). 근세에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언약 갱신 예배서를 출판했고, 많은 교회가 언약 갱신을 하기 위한 그들 나름의 접근법을 개발해 왔다.[1]
사람들이 그들이 헌신한 것에서 갈팡질팡할 때, 지도자들은 당면한 과제를 최소화하거나 사람들이 처한 실제 상황보다 상황이 더 쉬울 거라는 생각하게 끔 사람을 오도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런 기법이 잠시 동안은 순응하게 해 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로널드 하이페츠(Ronald Heifetz)가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리더십 수업》(Leadership Without Easy Answers, 더난출판 역간)[2]이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자기 아랫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은 리더의 권위를 급속도로 약화시킨다. 단순히 아랫사람이 그 속임수를 언젠가는 찾아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그 그룹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가로막기 때문이다. 리더가 모든 어려움에 대한 모든 해결책을 다 알고 있지 않은 이상 해결책은 그룹에 속한 사람의 창의성과 헌신에서 반드시 나와야 한다. 그러나 만약에 리더가 그 문제의 본질에 대해 사람들을 잘못 이끈다면, 사람들은 해결책을 찾는 데 기여할 수 없다. 이것은 결국 그 리더가 실패한다는 것을 담보하는 셈이다. 자기 아랫사람에게 당면한 도전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말해 주는 리더는, 자기 사람에게 해결책을 만들어 내는 데 참여할 기회를 준다.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여호수아는 은폐와 거짓 희망 대신 정직과 투명성을 통해 어려운 행동 방향을 향한 헌신을 추구하는 리더들에게 탁월한 본을 제공한다.
John Wesley, Covenant Renewal Service (1781). 현대적인 적용을 담은 본문은 http://wesley. nnu.edu/john-wesley/covenant-service-directions-for-renewing-our-covenant-with-god/에서 찾아볼 수 있다.
Ronald Heifetz, Leadership Without Easy Answer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4). 로널드 하이페츠,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리더십 수업》(더난출판 역간).
혼돈 (삿1-21장)
목차로 돌아가기여호수아가 죽은 다음 이스라엘에는 항구적인 국가 지도자 직책이 없었다. 대신 위협이 생길 때마다, 예를 들면 군사 공격을 당할 때 이런저런 사람들이 리더 자리에 올랐다. 영어로 “judges”(사사)라는 단어는 실제로는 이들이 나라 안에서 한 역할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사사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shopet)의 뜻은 분쟁의 중재자, 군사 사령관, 지역 총독 등이다.[1] 사사는 분쟁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주변 백성에 맞서 국가의 군사 및 국정도 책임진다. 우리는 사사에 대한 전통적인 호칭을 그대로 쓰긴 하겠지만, “구원자들”(delivers)이라는 통칭이 이 지도자들을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사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지켜보며 여호수아서보다 더욱더 우울한 모습을 발견한다. 사사들이 대를 이어 계승될수록 차츰 자질이 떨어지고, 마침내 이스라엘은 완전한 혼란에 빠지고 만다. 이 책은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라는 준엄한 종결부를 가지고 간음, 살인, 내전으로 끝맺는다. 그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말은 자신의 고유한 규범에 따라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미덕을 갖췄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 표현대로 해 본다면, 일등을 차지하기 위해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던 모습을 가리킨다. 그것은 여호수아를 통해 주신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8)라는 하나님 계명을 순종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계명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편향되고 자기만족적인 시각에서 좋아 보이는 것을 행하는 게 아니다. 사사는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이끄는 데 실패했으며, 그 때문에 나라에 공의를 행하고 국가를 다스리는 데도 실패했다.[2]
Temba L. J. Mafico, “Judge, Judging,” ed. David Noel Freedman, 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1992), 1105쪽.
Daniel I. Block, Judges, Ruth,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83-84쪽
우상숭배가 파고들다 (삿1-2장)
목차로 돌아가기사사기 1-2장은 여호수아서 13-22장이 끝난 곳, 곧 이스라엘이 그 땅의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했다는 데서 이어진다.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수 17:13). 이제 막 자유를 맛본 이스라엘 족속이 기회를 얻자마자 제일 먼저 노예 소유주로 변모하다니 다소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야 할 주된 이유는 이스라엘을 감염시킬 우상숭배를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에덴 동산에서의 뱀처럼 가나안 족속의 우상은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심을 시험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담이나 하와가 했던 것보다 더 나은 게 없었다. 가나안 족속의 유혹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얼마 못 가서 가나안 신인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기” 시작했다(삿 2:11-13 10:6 등 - NRSV는 이 히브리어를 “worshipping”으로 번역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영어 역본은 좀 더 정확하게 “serving”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가끔 어떤 형상에게 절하거나 이방 신에게 기도하는 정도가 아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이 성공하는 게 그 지역 가나안 족속의 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삶과 그들의 수고는 우상을 헛되이 섬기는 데 소모되었다.[1]
오늘날 우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어떤 사람 또는 그 무엇을 섬기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비즈니스는 고객과 주주를 섬기고, 정부는 국민을 섬기며, 학교는 학생을 섬긴다. 가나안 족속의 신을 섬기는 것과는 달리 이런 대상을 섬기는 건 그 자체로는 악한 게 아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방식이다. 그러나 만약 고객과 주주, 국민과 학생을 섬기는 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해지거나, 그것이 단순히 우리를 크게 보이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면, 우리는 가짜 신들을 섬기게 된 고대 이스라엘 족속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 팀 켈러는 우상은 고대 종교에서 사라져 가는 유물이 아니라, 비록 거짓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매일 접하는 대단히 복잡한 영성(spirituality)이라고 말한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중요한 것, 당신 마음과 상상력을 하나님보다 더 많이 앗아가는 것,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길 바라면서 추구하는 것은 전부 우상이다. 당신 삶의 중심에 너무도 깊이 자리 잡고 있고 핵심이 되어 있어서, 만약 당신이 그것을 잃었을 때는 당신이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가짜 신이다. 우상은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하는지 당신의 거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 감정, 재정, 자원을 한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거기에 쏟아 붓게 한다. 가족이나 자녀, 경력, 돈 버는 것, 업적, 비평가의 갈채, ‘체면’을 세우는 것, 사회적 지위 같은 게 바로 그것이다. 또한 낭만적인 연애 관계, 동료의 인정, 능숙함과 기술, 안전하고 안락한 환경, 미모나 두뇌, 대단한 정치 사회적 명분, 도덕성과 미덕, 심지어는 기독교 사역에서 성공하는 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2]
예를 들면, 선출직 공무원은 대중을 섬기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 사람은 계속 섬겨야 할 대중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선거에서 계속 당선돼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대중을 섬기는 것이 그의 최후 목적이 되면,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남을 속이거나, 겁주거나, 거짓 소문을 내거나, 심지어는 투표 조작을 포함해 선거에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뭐든지 정당화하게 된다. 대중을 섬기겠다는 무한 욕망은 대중을 효과적으로 이끌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결부된다.
이는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리처드 닉슨이 가졌던 동기와 비슷할 것이다. 대중을 섬기겠다는 무한 욕망은 그로 하여금 워터게이트호텔의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까지 하게 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선거에서 이기겠다는 막다른 골목으로 그를 몰아갔다. 결국에는 이것이 탄핵을 몰고 왔고, 그는 대통령직을 잃고 수치를 당했다. 우상숭배는 항상 재앙으로 끝난다.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은 배우자, 부모, 자녀라는 역할까지도 그것을 수행하면서 얻는 중간 유익을 하나님 섬기는 것보다 우선하려는 유혹에 직면한다. 어떤 이익을 위해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표현이 아니라 궁극적 목적이 되면, 우상숭배가 파고든다. 일을 우상화하는 것의 위험성에 관해서는 이 책 3장의 “출 20:3”과 “출 20:4”, 6장의 “신 5:7; 출 20:3”과 “신 5:8; 출 20:4” 부분을 보라.
John Gray, Joshua, Judges and Ruth, The New Century Bible (London: Nelson, 1967), 256쪽.
Timothy Keller, Counterfeit Gods: The Empty Promises of Money, Sex, and Power, and the Only Hope That Matters (New York: Dutton Adult, 2009), 17-18쪽. 팀 켈러,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두란노 역간).
최고의 사사 드보라 (삿4-5장)
목차로 돌아가기사사 중 최고의 사사는 드보라다. 사람들은 그녀의 지혜를 알아보고 상담과 갈등 해결을 위해 그녀에게 나아왔다(삿 4:5). 군대 조직도 그녀를 최고 사령관으로 인정했고, 실제로도 그녀의 명령만 따라서 전쟁에 나갔다(삿 4:8). 드보라의 통치는 너무도 훌륭해서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했는데”(삿 5:31),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어떤 시기에 비춰 보아도 아주 드문 일이다.
오늘날, 어떤 남성 통치자의 딸이나 미망인이 아닌 일반 여자가 근대화 이전 국가에서 그 국가의 중심인물로 부각됐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기는 드보라를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과 동등하게 여긴다. 사사 가운데 홀로 드보라는 선지자 또는 여선지로 불리는데(삿 4:4),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께서 대면해서 말씀하셨던 모세와 여호수아와 대단히 밀접하게 닮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비밀 요원 야엘을(겐 사람 헤벨의 아내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주해 온 시스라를 자기 장막 안에서 쳐 죽임으로 이스라엘의 칭찬을 받은 여자 - 삿 4:17 5:24) 포함한 어떤 여자도, 군대 총사령관 바락을 포함한 어떤 남자도 여성 리더를 따르는 것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 않고 있다. 드보라가 선지자이자 사사로 섬긴 것은, 하나님은 여성이 정치, 사법, 군사 지도자가 되는 것을 문제로 보지 않으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드보라가 ‘이스라엘 자손이 그녀에게 재판받으러 나올 때’(삿 4:5)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앉아’ 자기 책임을 감당할 시간을 낼 수 있도록 그녀의 남편 랍비돗과 직계 가족이 가정 일을 분담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늘날 어떤 사회에서, 상당수의 일터와, 특정 기관에서 여성의 리더십은 드보라가 그랬던 것처럼 논쟁이 되지 않게 됐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많은 문화, 권역, 기관에서 여성은 리더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남성이 당하지 않는 속박에 시달려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드보라의 리더십을 되새겨 보는 것이 오늘날 크리스천이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히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여성의 리더십에 장애가 되는 부적절한 것을 없애도록 도와줌으로써 우리 기관이나 사회를 섬길 수 있을까? 우리 일에서 여성을 우리 상사나 멘토, 롤 모델로 삼으려는 노력에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전쟁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삿6:1-11)
목차로 돌아가기드보라 이후 사사의 자질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사사기 6장 1-11절은 이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준다. 전쟁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짐승과 장막을 가지고 올라와 메뚜기 떼같이 많이 들어오니 그 사람과 낙타가 무수함이라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전쟁이 일에 끼치는 영향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다. 경제적 목표물에 직접 타격한 결과 입은 손해뿐 아니라, 무장 충돌로 빚어진 불안정이 사람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지역의 농부는 추수기가 오기 전에 혼란스러울 것이 걱정돼 파종을 꺼릴 것이다. 투자자는 전쟁으로 찢어진 나라를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사회 기반 시설 확충을 위한 자원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 개발 희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국민은 그나마 남아 있는 자원이라도 약탈하기 위해 싸우는 무장 파벌을 따를 수 있다. 따라서 우울한 전쟁의 악순환과 피폐함은 계속되는 것이다. 평화가 풍요보다 중요하다.
미디안 족속 하에서의 이스라엘 경제 상황은 너무도 피폐해서 우리는 미래의 사사인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에게 밀을 숨기기 위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삿 6:11)하는 것을 본다. 대니얼 블록(Daniel Block)은 기드온이 그렇게 행동한 이면에 있는 이유를 이렇게 본다.
현대적인 기술이 없던 당시에, 탈곡할 때는 먼저 도리깨로 곡식 낱알을 두들겨 턴 다음 짚을 골라내고, 그다음에는 알곡과 왕겨가 뒤섞인 것을 공중에 까불러서 무거운 알곡은 땅에 떨어지게 하고 왕겨는 멀리 날아가게 했다. 현재 같이 위중한 상황에서 보면 이렇게 탈곡하는 것은 분명 지혜롭지 못한 것이었다. 언덕 꼭대기에서 탈곡하는 것은 약탈을 일삼던 미디안 족속의 주의를 끄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기드온은 포도주 짜는 데 쓰던 가려진 큰 통에서 탈곡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도즙 틀은 바위에다 두 개의 구렁을 만든 것이었는데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높았다. 포도를 윗 구렁에 모아 밟으면 그 관을 타고 즙이 아래 구렁으로 흘러내려 갔다.[1]
오늘날,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사업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데 신자와 비신자 모두 의견을 같이한다. “분쟁 다이아몬드”(conflict diamond)를 국제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현대의 한 예다.[2] 크리스천이 이런 노력을 주도해 가는가? 우리가 일하는 기업, 정부, 대학이나 기관이 부지중에라도 폭력에 가담하는지 안 하는지를 우리는 추적하고 있는가? 우리 상사가 그런 상황을 무시하려고 할 때 우리는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위험을 무릅쓰는가? 아니면 기드온처럼 그냥 우리 할 일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숨는가?
Block, Judges, Ruth, The New American Commentary, 258-259쪽.
http://www.amnestyusa.org/our-work/issues/business-and-human-rights/oil-gas-and-mining-industries/conflict-diamonds, accessed December 14, 2013.
기드온의 양면적인 리더십 (삿6:12-8:35)
목차로 돌아가기기드온은 일터나 다른 곳에서 이스라엘 사사의 인품상의 역설적 특징과 양면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준다. ‘기드온’이라는 이름은 문자적으로 “난도질하는 자”(hacker)라는 뜻이며[1] 그것은 사사기 6장 25-27절에서 보여 주는 대로 자기 아버지가 세웠던 우상을 기드온이 난도질할 때 이름 뜻의 긍정적인 방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서 이 일을 밤에 했다는 것은 불편한 부분이다.)[2] 그러나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표적을 구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사사기 6장 36-40절에 나오는 양털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 사건에서 기드온에게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양보하시지만, 그것은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특히 직업의 인도하심을 구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따라야 할 하나의 본으로 보기는 어렵다. 도리어 그것은 그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서 결국은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흔들리는 헌신에 대한 하나의 표적이었다.[3] 기드온의 분별 방법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위해서는 Decision Making by the Book(책으로 하는 의사결정)[4]과 《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Decision Making and the Will of God, 생명의말씀사 역간)[5]을 보라.
물론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요점은 기드온이 미디안에게 놀라운 승리를 거둔 것이다(삿 7장). 그에 비해 기드온이 뒤이어 지도자로서 저지른 실패는 덜 알려졌다(삿 8장). 숙곳과 브누엘 거민은 그 전투 후에 그의 부하를 돕기 거부했는데, 기드온이 그 성읍들을 잔인하게 파괴한 것은 그들의 행위와 다소 어울리지 않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기드온은 다시 그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 침범하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단칼에 죽여 버린다.[6] 왕이 되고 싶지 않다는 그의 완강한 항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목만 빼고는 실제로 전제 군주가 됐다(삿 8:22-26).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드온이 나중엔 우상숭배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에봇이 그의 백성에게 “올무”가 됐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서 그것을 음란하게 예배(worshipping, NIV)했다(삿 8:27). 위대한 자가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잘 보라!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위대한 사람의 은사를 우상화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감사하는 법을 찾아내는 것일 수 있다. 기드온처럼 오늘날 장군도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 수는 있겠지만 평화로운 시기에는 폭군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천재는 음악이나 영화에 있어 우리에게 숭고한 통찰력을 줄 수 있지만, 부모 역할이나 정치에 있어서는 우리를 잘못 인도할 수도 있다. 기업의 총수는 위기에서 회사를 건져 낼 수도 있지만, 평안한 때에는 회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 이와 똑같은 불연속성은 우리 스스로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에서는 직급이 올라가지만 가정에서는 불화하며 살 수 있으며, 그 반대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개인 업무 처리 능력은 인정받지만 관리에는 실패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선한 것을 훨씬 많이 성취하지만, 성공 때문에 자신을 의지할 때는 거대한 파멸로 역풍을 맞을 수 있다.[7] 사사기의 사사들처럼 우리도 모순의 사람이요, 깨어지기 쉽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자 한편으로 절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용서와 변혁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점이다.
Robert G. Boling, “Gideon (Person),” ed. David Noel Freedman, 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1992), 1013쪽
Daniel I. Block and J. Clinton McCann, Judges, Interpretation (Louisville: John Knox, 1989), 61쪽
양털 사건에 대한 맥켄(McCann)의 주석을 참조하라(66쪽). “한마디로 기드온은 약간 우스꽝스럽게 시작하고 있다. 갈수록 믿음이 더 커지는 게 아니라, 그는 점점 더 믿음이 없어지고 더욱 겁을 먹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Haddon W. Robinson, Decision-Making by the Book (Wheaton, Ill.: Victor Books, 1991)
Garry Friesen and J. Robin Maxson, Decision Making & the Will of God: A Biblical Alternative to the Traditional View (Portland, OR: Multnomah Press, 1980). 게리 프리슨, 《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생명의말씀사 역간).
Block, Judges, Ruth, The New American Commentary, 287쪽의 “Gideon, the fearful young man, has become a brutal aggressor”을 참조하라.
Tomas Chamorro-Premuzic, “Less-Confident People are More Successful,” Harvard Business Review, July 6, 2012, accessed at http://blogs.hbr.org/2012/07/less-confident-people-are-more-su/ on May 23, 2014.
사사들의 리더십의 실패 (삿6-9장)
목차로 돌아가기기드온이 저지른 실패는 그 뒤를 잇는 사사들에게서 더욱 심각해진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권력을 하나로 모으긴 했으나 자기 앞길에 장애가 되는 형제 70명을 죽여서 이뤄낸 통일이었다(삿 9장). 입다는 산적으로 출발해 백성을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구해 오지만, 자기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맹세를 함으로써 가족과 자녀를 무너뜨린다(삿 11장). 가장 유명한 사사인 삼손은 블레셋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이방 여인 들릴라의 유혹에 굴복하는 바람에 스스로 멸망을 초래했다(삿 13-16장).
이 모든 이야기를 오늘날 우리 일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먼저 사사기는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명백하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등 상당수의 사사가 신약에서 라합과 더불어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다(히 11:31-34). 사사기는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운 고난에 직면했을 때 사사에게 구원의 행동을 하도록 하나님의 성령이 힘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을 주저 없이 기록한다(삿 3:10 6:34 11:29 13:25 14:6-9 15:14). 더 나아가 사사는 단순히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은 도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능동적으로 반응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거듭 구하셨다.
그러나 사사기의 전반적인 이야기 흐름은 사사들을 우리의 롤모델로 삼으라고 권면하지 않고 있다. 이 책에 나타난 괴로움은 나라가 엉망진창이고, 타협으로 꽉 차 있으며, 나라의 지도자들은 하나님 언약에 불순종해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는 데 있다. 성공은,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성공까지도 반드시 하나님의 호의를 선언하는 공표가 아니다. 일터에서 우리가 수고한 것이 복이 될 때, 특히 어려운 환경에서 복이 될 때, ‘음, 하나님이 이 일에 분명히 함께하시네. 내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분이 내게 상을 주시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온다. 그러나 사사기 역사는 하나님은 그분이 하시고 싶을 때,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방법으로, 그분이 일하시고 싶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우리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신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성공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라도 있는 듯이 복을 받아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로마서 2장 1절에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들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번영 신학의 초기 형태가 얼굴을 드러내다 (삿17장)
목차로 돌아가기사사기의 중심 부분이 압제와 구원의 사이클에 갇혀 절망하는, 결함 있는 영웅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면, 17장부터 21장까지의 마지막 부분들은 구속의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것 같은 타락한 백성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사사기 17장은 우상숭배 패러디로 시작한다. ‘미가’라는 사람이 돈이 많아서 그의 모친이 그 돈으로 우상을 만들고, 미가는 프리랜서 레위인을 자기 개인 제사장으로 고용한다. 미가가 집에서 키워 온 값싸고 번지르르한 신흥종교가 구제불능 신학(abysmal theology)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 놀랍지 않다.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삿 17:13). 다시 말하면, 자신의 우상숭배 사업에 종교적 권위를 갖게 됨으로써 미가는 자신이 갈망하는 좋은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님을 제멋대로 써도 된다고 믿은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이 여기서는 최악의 방법으로 낭비되고 있다. 탐욕과 교만을 가리기 위해 신을 만드는 데 쓰이니 말이다.
하나님을 ‘번영하게 해 주는 기계’로 둔갑시키고 싶어 하는 충동이 없었던 시절이 없다. 오늘날에는 소위 ‘번영(형통)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부와 건강과 행복을 반드시 보상받는다고 선동한다. 일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번영 신학은 하나님께서 소나기처럼 퍼부으시는 부요함의 단비를 내려 주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일을 방치하게 만들고, 방탕에 빠지게 한다. 이것은 가족과 공동체를 태만히 대하게 만들고, 동료들을 학대하게 하며, 사업을 비윤리적으로 하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므로 자신은 일반인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에서는 예외라고 확신하게 만든다.
인간의 부패와 종교적 권위의 결탁이 드러나다 (삿18-21장)
목차로 돌아가기사사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오랫동안 이스라엘이 타락과 우상숭배,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는 가장 끔찍한 사건이다. 단 지파 자손이 미가의 우상과 레위인을 포함한 종교 사업 전부를 그대로 취해 가져갔다(삿 18:1-31).
한편 한 레위 남자가 멀리 있던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했으나, 가정불화로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레위인은 그녀를 달래서 데려오려고 베들레헴으로 갔다. 닷새 동안 머물며 장인과 먹고 마신 레위인은 무모하게도 해가 지기 전에 집을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의 어느 성읍 광장에 이르렀는데 아무도 맞이해 줄 사람이 없었다. 누구도 그를 맞아 주지 않다가 마침내 에브라임 지파의 한 노인이 그날 밤 묵고 갈 숙소를 제공해 줬다.
그날 밤 그 성읍 불량배들이 집을 에워싸고 노인에게 그 방문객을 강간하겠다며 내놓으라고 요구했다(삿 19:22). 노인은 나그네를 보호하려고 애썼지만,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 그 노인이 내놓은 생각은 가슴을 에이게 한다. 레위인을 살리기 위해 노인은 자신의 어린 딸과 레위인의 첩을 폭도들에게 내 주기로 한 것이다. 그 레위인이 직접 자기 첩을 문 밖으로 내보냈는데, 어쩌면 이것은 종교 권력과 성적 학대가 결탁된 최초의 기록일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첩을 강간했고 날이 밝을 때까지 그녀를 능욕했다(삿 19:25). 레위인은 그녀의 시체를 토막 내서 이스라엘 각 지파에 보냈고, 그 시체를 받은 이스라엘 지파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베냐민 지파를 거의 멸절했다(삿 20-21장).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 족속화된 것이다.[1]
사사기의 결론 부분은 그 끔찍한 사건을 이렇게 간결하게 요약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이것은 백성이 여호와를 섬기도록 인도해 주는 지도자가 없이는 사람은 각자 자신의 악한 방법과 욕구를 따라 살지, 누구의 감독 없이도 옳은 일을 행하도록 인도해 주는 내재적 도덕적 나침반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의 일터 반경 안에서 (여성과 외국인의 학대를 포함해) 힘없는 자를 위협하는 일은 충격적일 만큼 흔하게 일어난다. 우리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불의에 직면한 사람 편에 설지 아니면, 그 피해가 지나갈 때까지 바짝 엎드려 있을지 개별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조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리는 인간 행위의 악을 제어하는 시스템과 구조를 위해 일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편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심지어는 우리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도 우리 일터에서 가해지는 학대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으며, 우리가 권위의 자리에 있지 않을 때는 특히 더 심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당신이 힘이 있다고 여길 때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나이가 많아서든, 그곳에서 더 오래 일했기 때문이든, 회사 상사와 자주 얘기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든, 또는 어떤 특정 인종에 속했거나 언어권에 속했기 때문이든, 교육을 더 받아서 그렇든, 당신 의견을 더 잘 표현해서든 간에 말이다. 그때 당신이 학대받는 사람 편에 서 주지 않는다면, 학대를 가하고 당하는 시스템에 일정 부분 기여하는 셈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오는 경우가 많다면, 당신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인지한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 천박한 농담을 던지는 사람 편에 서거나, 또는 신입 사원이 왕따 당하는 것을 본체만체한다면, 당신은 희생자에게 더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며, 다음 단계 학대를 위해 길을 닦는 것이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들에 펼쳐지는 소름 끼치는 사건들을 읽노라면 우리가 그 시대에 살지 않은 것에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깨어 있다면, 날마다 출근하는 우리의 일상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어떤 사람이나 지도자가 하는 일에 못지않게 도덕적 중요성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블록(Block)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화(化)를 자신의 사사기 주석의 주제로 삼고 있음을 주목하라. Block, Judges, Ruth, The New American Commentary를 참조하라.
여호수아서 · 사사기의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여호수아서에서 사사기까지의 여정은 우리를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든다. 우리는 영감을 불어넣는 여호수아의 모범에서 출발했다. 여호수아에게는 기술과 지혜와 경건한 덕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여호와가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은 전심으로 여호와를 따르기로 약속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타락과 지배와 제도화된 불의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출발로, 폭정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사회를 허락해 주셨다. 필요할 때면 하나님은 지혜롭고 용감하며 널리 갈채를 받는 리더를 세우셔서 나라를 위협에서 건져 내셨다. 여호수아와 드보라가 그 예다.
우리는 그 땅에서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는 데 필요한 구조를 세워 나가는 이스라엘의 초기 리더와 백성을 본다. 그들은 자원을 공평하면서도 생산적으로 배분했다. 그들은 다양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문화를 유지하면서 하나된 사명을 추구했다. 그들은 힘을 분산 시키면서도 동시에 상호간에 책임을 나눠졌고, 생산적이며 창의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법도 배워 나갔다. 그들은 형통했고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우리는 잘 다스려지고, 조직이 똑똑하게 짜여있으며, 안정되어 있던 언약 국가 이스라엘이 폭력적이며 서 로 충돌하는 오합지졸로 전락하는 모습을 본다. 그들의 일을 포함한 그들 삶의 모든 면이 하나님의 율례와 교훈을 버림으로써 점점 부패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산 노동에 최적화된 비옥한 땅을 주셨지만, 그들은 그들을 위해 하신 하나님의 일을 망각했고, 그들의 자원을 우상에게 탕진해 버렸다. 그들은 전쟁과 경제적 궁핍에 문을 열어 두었고, 얼마 안가 주변 민족의 악행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마침내 그들은 스스로 최악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수 세기가 지난 후에 요한이 서신서 말미에서 권면한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와 동일하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일하며 그분의 언약에 순종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면,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자신과 사회에 상상을 뛰어넘는 유익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불의를 행하면, 우리의 노동이 우리가 빠져 섬기는 우상만큼이나 허무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