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서론
목차로 돌아가기로마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서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에 대한 비전으로 유명하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우리 개개인과 온 세상은 크고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 잘못된 상태에서 구원받아야만 한다. 로마서는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여기서 구원하시는지 말해 준다.
로마서는 대단히 신학적이지만, 결코 추상적이지는 않다.‘하나님의 구원’은 로마서를 분석하고 논의하기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라, 삶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부르심이다(롬 6:22).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지혜와 정직성, 관계, 판단력, 좌절을 견디는 능력, 인격, 윤리적 추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 주는데, 이 모든 요소들은 우리가 하는 일에 꼭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관계의 본질과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갈망 가운데 강력하게 힘을 발휘한다.
로마 황제 네로의 통치 기간(AD 54-68년) 중에 기록된 만큼, 로마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께 회심한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로마 가정교회들을 둘러싼 위험과 어둠을 담아낸다. 회중 가운데는 AD 49년 클라우디오 황제가 발표한 칙령에 따라 로마에서 추방당했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유대인 신자들도 있었는데, 아마 그 기간 동안에 그들은 재산을 손해 보고 재정적 안정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행 18:2). 로마에 널리 퍼져 있던 반유대인 정서는 분명히 교회에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양쪽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집중적으로 묵상한다. 이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들과 그 결과들을 신학적으로 전문가답게 숙고한 것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살아가며 일하는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생활의 질에 이르게 해 주는 도덕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로마서 말씀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받는다.
로마서는 기독교 신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로마 가톨릭이 이해하는 로마서와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로마서가 다르다는 이유로 교황과 갈라섰으며, 칼바르트(Karl Barth)가 쓴 《로마서》(Der Romerbrief , 복있는사람 역간)는 단언컨대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 작업이었다.[1]
로마서와 바울이 쓴 나머지 서신서들을 두고, 지난 25-30년 동안 구원과 선한 행위 간의 관계와 관련해 심각한 신학적 논쟁이 제기돼 왔다. 이를 흔히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 부른다. 로마서를 다룬 일반 주석들은 이 쟁점을 길게 다룬다. 우리는 이 서신이 특별히 어떤 점에서 일의 신학에 기여하는지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물론 그것들을 일에 적용하기에 앞서 바울이 말하는 일반적 요점들을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므로,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일반적인 신학적 탐구도 할 생각이다.
예를 들면, Ian A. McFarland, Creation and Humanity: The Sources of Christian Theology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138쪽을 보라.
바울의 사명, 구원의 복음이었다(롬1:1-17)
목차로 돌아가기
로마서의 첫 구절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셔서 하게 하신 일, 즉 말과 행위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의 사명(vocation)을 선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인가? 바울은 말한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롬 1:16-17).
바울에게 복음은 단순한 말 그 이상이다.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는 이 구원이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게 되도록 도우려는 것임을 강조한다. 로마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서로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잠시 후에 보겠지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죄와 사망의 악한 세력들이 풀려 나오는 바람에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및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무엇보다 먼저 깨어진 관계의 치유이며, 창조주와 피조물, 곧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는 치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은 죄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사망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생명의 새로움에 이르게 해 준다.
크리스천들은 때때로 바울의 복음을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어요”로 요약하곤 한다. 천국과 관련해서 하는 말이라면 맞는 말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부적절하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진술에는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 전혀 없다. 하지만 바울은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 사람과 ‘하나님께 지음받은 다른 피조물' 과의 관계에 관해서도 쉬지 않고 말한다. 또 나아가 믿음, 예수님의 생애, 하나님 나라, 죽음 전후의 삶의 특질 등 단순히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을 말하고 있었다.
구원 또한 마찬가지여서 시간의 개념에서 특정한 어느 순간이라 말할 수가 없다. 바울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롬 8:24)라고도 말하고, ‘우리가 구원받을 것이다’(예를 들면, 롬 5:9)라고도 말한다. 구원은 한순간의 사건이라기보다는 계속되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성한 은혜와 인간의 신실함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각 개인과 소통하신다. 물론 구원받는 과정에는 결단의 순간이 있다. 가장 핵심적인 순간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순간이다. 바울은 우리가‘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라고 말하고(롬 5:10), 또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라고 선포한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던 그때를 우리 구원에서 결단의 순간이라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는 구원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일 뿐이라거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창고에 저장해 둘 물건으로 말하지 않는다. 로마서는 개인의 구원을 어느 한순간이라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신 순간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할 때만 구원을 과거시제로 사용한다. 개별 신자의 경우와 관련해서 바울은 구원의 지속적 과정을 항상 현재와 미래시제로 말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믿었고’나 ‘시인했고’라는 과거시제가 아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라는 미래시제로 연결된다. 구원은 우리에게 (과거에)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다. 구원은 항상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다.
우리가 구원의 지속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이유는, 삶에서 우리가 역량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장소가 일(터)이기 때문이다. 만약 구원이 우리에게 과거에만 일어난 사건이라면, 우리가 일하는 행위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만약 구원이 우리 삶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것이라면, 그 구원은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원이 깨어진 관계의 회복이기 때문에 구원의 과정이 자리를 잡아 갈수록, 일에서 (그리고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와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면, 우리가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진리를 말하기 위해 용기를 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때, 직장 동료들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와줄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잘되도록 도와주는 제품들을 생산해 낼 때, 우리의 구원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것은 구원받으려면 일해야 한다는 의미인가? 절대 아니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로만 가능하다(롬 5:15). 그것은 “믿음”(롬 4:16)만 의지하지, 다른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N. T. Wright)가 말한 대로 “참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위대한 그 선물을 가리켜 우리가 어떤 용어, 어떤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은 정확하게 선물 그대로 남아 있다. 이는 결코 우리의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에게 빚을 지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늘 빚을 지고 있다.”[1]
우리는 일을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다. 구원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는 노동을 하는 것이다(롬 7:4). 이 이야기는 뒤에 로마서 3장을 다루는 섹션에서 ‘다시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가?’라는 질문으로 살펴보겠다.
한마디로 구원은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가장 궁극적인 일이며, 바울이 묘사한 대로 신자들이 항상 “푯대를 향하여”(빌 3:14) 나아가야 할 목적지다. 구원은 바울과 모든 신자가 삶과 일에서 하는 모든 것의 기반이다.
N. T. Wright, After You Believe: Why Christian Character Matters (New York: HarperOne, 2010), 69쪽. 톰 라이트, 《그리스도인의 미덕》(포이에마 역간).
우리 삶의 현장에 구원이 절실하다(롬1:18-1:32)
목차로 돌아가기구원은 하나님의 화해로 시작한다(롬 1:1-17). 사람들은 자기들의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롬 1:18)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했다’(롬 1:21). 우리는 에덴 동산의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도록 창조되었다(창 1 -2장).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너무도 철저하게 깨어져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바울은 이 상태를 “타락한 마음”(롬 1:28, 새번역)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진짜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려는 마음이 없다 보니 저마다 자신의 신을 만들어 내려고 애를 쓴다. 우리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다(롬 1:23).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완전히 망가졌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우상숭배’를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참되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어지자 우리는 거짓 신들과 가짜 관계를 만들어 냈다. 당시 우상숭배는 다른 여러 죄들 가운데 하나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핵심 역할을 했다. 우상숭배에 관해 더 알려면 이시리즈 1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모세오경 · 역사서》 3장의 “출20:4” 부분을 보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지고 나면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관계도 깨진다. 바울은 연달아 일어나는 깨어진 인간관계의 몇 가지 측면들을 열거한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우리는 일터에서 이런 깨어진 관계의 거의 모든 형태를 경험한다. 탐욕과 분쟁, 다른 사람들의 지위나 임금에 대한 시기, 권력자들을 향한 적의와 반란, 동료들에 대한 험담이나 중상모략, 의사소통과 헌신에서의 속임과 신실치 못함, 오만,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의 거만함과 자랑, 형편없는 의사결정,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저지르는 무정함과 무자비함 등등.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다. 어떤 일터는 그나마 좀 나은 편이고 어떤 일터는 상태가 심각하다. 그러나 어떤 일터든 깨진 관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고 있다. 또 우리 모두 그런 결과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또 누구나 알게 모르게 이런 상황을 일으키는데 기여한다.
그 일만이 우리에게 의미와 목적과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허황된 희망으로 스스로 일에 빠져든다. 그렇게 일 자체를 우상시하며 그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다.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해고 되거나, 구조 조정을 당하거나, 퇴직을 당하기 전까지는 이런 것들이 통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다가 퇴직을 하고 주변을 돌아보면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우리가 낯선 사람이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과 새와 네 발 달린 짐승들과 땅에 기어 다니는 벌레들과 같이 ‘일’도 하나님에 의해 창조됐고(창 2:15), 본래는 선했으나 그 일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까지 높아지려 했을 때 악해지고 말았다.
우상숭배와 남을 판단하는 죄(롬2-3)
목차로 돌아가기 안타깝게도 이 깨어짐은 바울의 일터인 고린도 교회 및 로마의 특정 크리스천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롬 1:7)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롬 9:25),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그들 서로간의 관계에서 깨어짐을 경험했다. 특히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기대를 따르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동시에 그 반대 일도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라고 바울은 묻는다(롬 2:3). 각 진영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을 위해 말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을 위해 말한다는 주장은 자기들의 말을 우상화하는 것이고, 우상숭배(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가 어떻게 심판(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에 이르게 하는지를 보여 준다.
양쪽 다 틀렸다.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하나님에게서 벗어났다. 그것이 진실이다. 창조 그 자체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달았어야 할 이방인들은 그들 스스로를 우상숭배에, 그리고 이 기본적인 실수에 뒤따르는 온갖 파괴적인 행위들에 자신들을 내맡겼다(롬 1:18-32). 반대로 유대인들은 판단하는 자 혹은 위선자들이 되었고, 자신들이 율법 백성이라고 으스대고 다녔다. 바울은 두 상황을 이렇게 말하면서 요약한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양 진영이 하나님의 기대를 오해했다는 게 아니었다. 양 진영이 서로서로를 판단함으로써 하나님이 맺도록 허락하신 관계를 파괴시킨 것이 잘못이었다. 바울의 주장에서는 판단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판단은 관계를 깨뜨리는 주요 원인이다. 로마서 1장 29-31절에 열거한 구체적인 죄들은 우리 관계를 깨뜨린 원인들이 아니라 그 결과다. 우리 관계를 깨뜨린 원인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우상숭배와 (사람들을 향해서는) 판단이다. 실제로 우상숭배는 판단의 한 형태로, 곧 하나님이 적절하지 않은 분이심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 더 나은 신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판단의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2- 3장에서 바울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보이는 관심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1-3).
우리가 저지른 일 중에서도 다른 무엇보다 가장 구원이 필요한 영역은 ‘판단’(정죄)과 ‘우상숭배’라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그럴 권리도 전혀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결국은 진짜 정의를 회복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다. 현대적 은유를 사용해 볼까? 그건 마치 일차적으로 재판권조차 행사하지 않은 하급심의 잘못된(타락한) 판결을 대 법원이 기각한 것과 같다.
이 말은 크리스천들은 사람들의 행동을 진단하거나 또는 일하는 사람들을 대적하지 말라는 의미인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터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기여하는지 아니면 방해하는지, 또 그에 상응하게 행동하는지를 진단할 의무가 있다. (바울의 몇 가지 사례를 보려면 로마서 12장 9절부터 13장 7절까지 참조하라.) 감독자는 자신이 맡은 일을 만족스럽게 해내지 못하는 근로자를 징계하든지 아니면 해고시켜야 한다. 근로자는 윤리강령이나 규정 위반을 보고하기 위해 감독관을 찾아가야 할 수도 있다. 교수는 학생에게 학점을 낮게 주어야 할 때도 있다. 유권자나 정치가는 후보를 반대해야 할 수도 있다. 사회운동가는 기업이나 정부가 저지른 부정에 대해 시위를 할 수도 있다. 학생이 다른 사람의 레포트를 베껴서낸 다른 학생의 행동을 교수에게 알려야 할 경우도 있다. 학대나 차별을 당한 희생자는 학대한 자와의 접촉을 끊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의 결과나 일터의 정직성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행동과 의도를 진단하고, 부정을 예방하며, 선을 행하기 위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가치를 판단한다거나 도덕적으로 우리를 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둔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들을 반대할 때조차 우리는 그들을 판단해선 안 된다.
때로는 그 차이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으나 바울은 우리에게 놀라울 정도로 실질적인 지침을 제공해 준다. 다른 사람의 양심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거나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게’(롬 2:15) 모든 사람을 창조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건 당신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여겨 그들 스스로의 도덕적 잣대에 따라 행하는 것을 정죄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핑계하지 못할”(롬 2:1) 방식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일 수 있다.
판단, 깨어진 관계의 근원 (롬3:1-20)
목차로 돌아가기우상숭배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판단으로 서로가 멀어진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하나님의 참된 의’가 바로 그 답이다. 로마서 3장에서는 구원의 때에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Justice)라는 용어를 쓴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롬 3:5).
더 진도를 나가기 전에 “의”(justice)와 “의로움”(righteousness)이라는 용어를 살펴보자. 로마서에서 바울은 의(justice)를 가리키는 헬라어로 ‘dikaiosyn?[디카이오쉬네]’와 그것의 여러 변형된 꼴들을 서른여섯 차례 사용한다. “righteousness”(의로움)로 가장 많이 번역했고, “justice”(의) 또는 “justification”(의롭다 하심)으로 번역한 경우는 적었다. 그러나 바울의 언어에서 이 둘은 똑같다.
디카이오쉬네는 법정에서 사람들이 옳지 않은 상황을 회복시키거나 공의를 요구할 때 사용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righteousness)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며,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도 올바른 관계(justice)가 성립된다는 뜻이다. ‘구원’, ‘칭의’, ‘의로움’이라는 단어들 사이의 관계를 너무 상세히 다루는 일은 이 글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서에 대한 일반 주석에는 어디에나 이를 설명해 놓았을 것이다.[1]
만약 이것이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면 당신이 일에서 구체적인 시사점을 찾아볼 수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사람들이 서로서로에 관해 내리는 (잘못된) 판단이 당신의 일터에서 관계를 파괴하고 불의를 일으키는 근원은 아닌가? 예를 들면, 만약 어떤 관리자와 근로자가 그 근로자의 업무 수행평가서를 놓고 의견이 다를 경우, 수행평가에 대한 차이 자체와 서로서로에 대한 판단에서 나온 적대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큰 손해를 끼치는가? 또는 일터에서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험담을 했는데, 그 험담한 내용으로 유발되는 손해와 당혹감이 더 큰가, 아니면 험담자의 어조와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에 드러나는 판단에 대한 분노가 더 큰가?
만약 우리의 잘못된 판단이 우리와 하나님, 다른 사람들, 세상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원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구원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의와 의로움이 있어야만 가능한데, 이는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가장 무능한 요소다. 설령 우리가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싶어도, 바르게 판단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함은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키기만 한다. 이런 운명에 처한 바울은 부르짖는다.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어느 누구도 우리를 건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우리와 한 배에 타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거짓되다!’(롬 3:4) 바울은 우리에게 말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렇지만 희망은 있다. 다만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다. 바울은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롬 3:3)라고 물은 다음 이렇게 대답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롬 3:4). 오히려 불의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롬 3:5). 이것은 우리의 일터가 우리 가족이나 교회와 마찬가지로 은혜가 임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혹시 일터가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너무나 비윤리적이며, 신앙에 지나치게 적대적이고, 탐욕과 영혼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느끼는가? 바로 그곳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한 곳이다. 성당이나 수도원 또는 교회 안에 충만하게 임하시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공장과 사무실 칸막이, 또는 주유소에도 충만하게 화해와 의를 가져다주실 수 있다. 바울의 복음은 교회만을 위한 게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N. T. Wright, “The Letter to the Roma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을 보라. 톰 라이트, 《로마서》(에클레시아북스 역간)
하나님의 의, 우리의 잘못된 판단을 해결하는 최선책 (롬3:21-26)
목차로 돌아가기우리의 판단이 잘못되고 위선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과연 우리는 옳음과 의를 찾아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로마서 3장의 극적인 핵심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나님의 대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의와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의를 이루시는데,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이 친히 옳으시고 그가 예수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해 주신다’(롬 3:26)는 걸 증명해 보이신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성취하시는 수단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치 유대인 성전에서 드려졌던 대속의 제물처럼 받아 주기로 작정하셨다(롬 3:25). 대속죄일에 그렇게 하듯이, 하나님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확립하기 위해 사람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모든 민족에게 구원으로 제시하셨다. 십자가를 통해 이 땅 모든 민족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비록 우리에게는 의와 의로움이 없지만, 하나님은 둘 다를 무한히 제공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 다른 사람들, 모든 피조물들과 우리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의와 의로움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의로움과 의도 함께 주신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righteousness]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 [justified]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justifies] 하심이라(롬 3:21-26).
십자가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의다. 왜 놀라운 걸까? 하나님은 죄인이 아니시지만 몸소 희생제물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세속적인 일터에 대단히 희망적인 표시일 수 있다. 일터에서 우리가 실수하고 불의해 문제들이 발생한 상황이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의가 우리 잘못을 극복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 비록 우리 스스로는 바로잡을 수가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그분의 의로우심과 의를 역사하실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실수나 불의로 문제들이 발생한 경우는 어떨까? 비록 우리가 일으킨 문제가 아닐지라도, (우리 주님이 하신 것을 본받아) 우리 자신의 어떤 것들을 희생해서 문제들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남을 탓하는 문화가 만연한 어떤 팀을 한번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보다는 문제만 생기면 남을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당신의 일터에 남 탓을 하는 문화가 있다면 그 문화가 당신 잘못은 아닐 수 있다. 어쩌면 남을 탓하는 주범이 당신의 상사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이 하는 희생으로 화해가 찾아오고 의가 세워질 가능성이 있는가? 다음번에 그 상사가 또 누군가를 탓하기 시작하면, 그때 당신이 나서서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 보자. “지난번에 그것을 논의할 때 저도 이 아이디어에 찬성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저도 비난받아 마땅하니 저도 탓해 주십시오.”
그 이후로 두어 명이 당신과 똑같은 행동을 더 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결국 비난 게임은 와해되지 않겠는가? 그로 인해 당신의 명성이나, 상사와의 우정이나, 심지어는 당신의 일까지 끝장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당신이 속한 그룹 안에서의 비난과 판단의 고리도 끊어 버리지 않을까? 우리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믿음과 신실함, 하나님의 의에 들어가는 입구(롬3:27-31)
목차로 돌아가기로마서 3장 22-26절에서 하나님께서 구원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로움과 의를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았다. 이제 그 본문을 믿음의 역할을 위해서 다시 살펴보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하려 하심이라(롬 3:21-26).
하나님이 주시는 의와 의로움의 선물은 믿음(faith)과 믿는 것(belief)이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가장 유명한 주제 중 하나인, 구원에서의 믿음의 역할이라는 주제에 도달하게 해 준다. 여러 면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로마서에서 이 본문과 다른 유사한 본문에 주의를 기울여 토대를 닦았고, 그들의 중요성은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중심으로 남아 있다. 이를 설명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그 핵심은 사람들이 믿음에 의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헬라어 어근 ‘pistis[피스티스]’는 ‘faith’(믿음)로 번역하지만(때로는 ‘believe’로 번역한다), 로마서 3장 3절에서처럼 ‘faithfulness’(미쁨, 충실함, 신실함)로 번역하기도 한다. 영어는 ‘faith’(정신적 동의, 신뢰 또는 헌신)와 ‘faithfulness’(자신의 믿음에 일치되는 행동들)를 구분한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믿음과 미쁨(신실함)을 가리키는 단어가 둘 다 피스티스 하나뿐이다. 어떤 사람이 믿고 있는 것과 그 믿는 것이 행동에 나타나는 증거는 구분되지 않는다. 만약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면 당신은 신실하게 행동할 것이다. 대부분의 일터에서는 신실함(우리가 하는 것)이 믿음(우리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증명된다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 피스티스가 지닌 두 측면 간의 관계는 일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울은 로마서 3장 22절과 3장 26절에서 ‘예수님의 피스티스’를 두 번 언급한다. 그 헬라어 단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수님 안에(in) 있는 피스티스’가 아니라 ‘예수님의(of) 피스티스’다. 로마서 3장 22절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신실하심(예수님의 피스티스)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로마서 10장 9절 같은 다른 본문에서 피스티스는 분명히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신실함을 가리킨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진실로 예수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신실하심과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하신 신실하심에서 나오며, 우리는 그분을 향해 충성스럽게 살고,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신앙 상태가 아닌 예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온다. 이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나는 예수님을 믿어요”라고 말하면 구원을 얻는 것인 양, 신앙을 가지는 것을 새로운 형태의 의로운 노동(worksrighteousness)으로 삼으려는 태도를 삼갈 수 있다.
바울의 글에서 믿음과 신실함이 갖는 온전한 의미는 일과 관련해 두가지 중요한 점을 암시한다. 첫째, 일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구원은 믿음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에 의해서만 온다는 온전한 인식이 흔들릴 때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걱정을 없애 준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 이미 구원의 일을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면 우리가 일에서 하나님을 향해 드러내는 우리의 신실함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맡은 일을 신실하게 해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값없이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우리 자신이 갈수록 더 신실해져야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실한 행위가 구원을 얻게 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진지하게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믿음의 순종’(롬 1:5, 26)이라고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순종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면 우리는 순종으로 반응할 수 있다. 실제로 로마서 후반부 내용 상당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더욱더 순종할 수 있는지 잘 보여 준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시다(롬4장)
목차로 돌아가기로마서 1-3장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의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과 서로서로를 향해 올바른 관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분열해 다투는 로마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을 보고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깨어진 관계를 화목케 하는 일에 로마서 전체에 걸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이런 해석은 바울에게 하나의 문제를 야기한다. 바울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뿐 아니라 율법을 중시하는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도 이 글을 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바울의 해석은 유대인들이 ‘조상’으로 여기던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징표로 할례를 받았던 아브라함(창 17:11)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려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창세기 12장 1-3절, 15장 6절 및 17장 1-14절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해석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소중히 여기시며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을 그의 불임 아내인 사라를 통해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짓는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다(롬 4:3, 9, 22). 바울은 로마서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 여겨 주신 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오래전에 일어났으며, 할례는 그가 이미 하나님을 믿는다는 하나의 징표로써 나중에 온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롬 4:10-11).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었음을 인정하셨을 무렵에, 아브라함은 바울이 살던 세계의 할례 받지 않던 이방인들과 같은 신분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율법하에서 의롭게 된 게 아니라 믿음의 의로움을 통해 유대인들과 이방인 모두의 조상이 된 것이다(롬 4:11-15).
로마서 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예는 우리에게 일과 일터에 대한 큰 희망을 안겨 준다. (환경의 어려움과 불가능할 것처럼 보여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의 사례는, 우리가 일터에서 도전에 직면하거나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도록 용기를 갖게 해 준다(롬 4:19).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들을 즉시 이루어 주시지 않았는데, 그것은 우리 인생에서 닥치는 환경들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거나 구속하실 때까지 우리가 더욱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해 준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은혜의 능력(롬5장)
목차로 돌아가기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이 의라는 선물을 그리스도의 순종, 그리고 그분을 통해 세상으로 흘러나오는 은혜와 연결시킨다. 이번 장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우리가 일터에서 겪는 여러 가지 경험에 빛을 비춰준다.
은혜로 고난을 통과하다 (롬5:1-11)
목차로 돌아가기로마서 5장 1-11절에서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미 우리가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줌으로써(롬 5:2) 더욱 용기를 준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한다. 은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또 그들을 통해서, 세상에 새롭고 더 많은 풍성한 삶을 계속 가져다 준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순종하는 믿음과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일터와 가정,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마다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삶은 수많은 도전이 도사리고 있어서 굳건한 인내가 필요하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사신 믿음과 신실하심의 삶을 구현할 때 고난을 경험할 수도 있다. 바울은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려는 자신의 사명이(롬 8:17-18) 예수님이 경험하신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의 고난을 ‘자랑한다’고까지 말했다(롬 5:3). 나아가 고난은 종종 성장을 가져다준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하나님은 일과 삶이 신자들에게 항상 행복을 안겨 줄 것이라고 약속하시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일에서 고난을 당한다. 일이 지겨울 수도 있고, 굴욕과 수치를 주기도 하고, 진이 빠지게도 하고, 무자비할 수도 있다. 노동의 대가를 못 받을 수도 있고, 위험에 빠질 수도 있으며, 차별을 당할 수도 있다. 양심과 하나님의 원리들을 어기라는 압박을 받을 수도있다. 또한 권고사직, 강제휴직, 정리해고, 계약만료로 실업자 그것도 장기실업자가 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의 교만이나 부주의, 무능력, 탐욕, 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의 때문에 스스로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좋은 일터에도 시련은 있다. 우리는 일터에서 벌어지는 학대나 차별을 절대 당연시해서는 안 되지만, 고난을 감내해야만 할 때에도 전혀 미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며, 우리가 신실하게 참아 낸다면 이것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준다.
예를 들어 보자. 밭을 갈아 놓고 곡식을 돌본다고 해서 그 곡식이 크게 자라거나 채소가 잘 익을 거라는 보장은 받아 놓을 수 없다. 날씨가 안 좋거나, 가뭄이 오거나, 병충해가 생기거나 마름병 등이 수확을 망칠수 있다. 그러나 은혜를 통해 농부는 자연의 이런 모든 측면들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하나님의 돌보심도 신뢰한다. 이것이 결국은 농부의 인내와 신실한 인격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해서 그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깊이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깊은 감사가 농사일을 하는데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고용주가 불황으로 경영을 그만둘 때조차 은혜는 우리가 신실하고 소망을 잃지 않도록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다. 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고등교육을 받고도 아직 보람 있는 일자리를 못 찾아 어려움을 겪는 청장년들을 지탱해 준다. 은혜는 또한 실패를 거듭하는 어떤 팀이 실패를 통해 더 나은 제품을 기획하고 생산하기까지 인내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삶과 일에서 우리가 온갖 종류의 고난을 다 겪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이겨 나가게 해 준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됨이니”(롬 5:5). 고난이 우리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 때조차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받은 화목케 하는 직책을 감당할 요원들로 만들어 준다(롬 10-11장).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다 (롬5:12-21)
목차로 돌아가기로마서 5장 12-21절은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 간에 대조되는 점들을 상당히 많이 담아 밀도 있고 복잡한 신학적 주장을 반영한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의롭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다. 이 단락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으므로, 누구든 그분을 믿으면 곧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실하심에 참여하는 자로서 우리는 거룩한 의의 선물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의 분깃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아담의 불순종에 참여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하신 순종에 참여함으로써 영생을 찾는다.
바울은 현재에도 그리고 영원에서도 작동하는 하나님의 원리를 말한다.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이 주어졌기 때문에(롬 5:11)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능력이 생겼다. 그러나 하나님의 화목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영생으로 인도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롬 12:21).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화목을 받았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끌어 가시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하나의 기회다. 혁신가는 공공선을 증진시킬 제품들을 창안해 설계하고 만들어 낼 새로운 기회들을 얻는다. 서비스업계 종사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갖는다. 예술가나 음악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의 삶을 향상시켜 줄 심미적 아름다움을 창조해 낼 수 있다.
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영생의 수단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세상에 더 가까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할 때마다 영생을 미리 맛보게 된다. 일터에서 믿음과 신실함이라는 그리스도의 방식에 끝까지 순종할 때,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처한 상황 여부와 전혀 상관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새 생명 안에서 행하기(롬6장)
목차로 돌아가기비록 하나님의 은혜가 화목과 공의를 가져오기 위해 세상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세상에는 생명을 주는 하나님 은혜의 능력에 대적하는 악한 영적 세력들이 여전히 있다(롬 6:4). 바울은 이런 악한 영적 세력들을 “죄”(롬 6:2) “육신”(롬 7:5) “사망”(롬 6:9) 또는 “이 세대”(롬 12:2)라고 부르며 종종 의인화한다. 인간은 일상의 삶에서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거쳐 하나님과 협력을 하든지, 아니면 이들 악한 영적 세력들과 협력을 하든지 선택해야만 한다.
바울은 “새 생명 안에서 행함으로”(롬 6:4) 하나님과 협력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그는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을 죽음에서 살아나신 후의 그리스도의 새 생명과 비교한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듯이, 우리는 화목과 의로움 안에서 살아가기(또는 ‘행하기’)를 시작할 수 있다.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는 건 우리의 판단주의를 포기하고, 우리 자신을 섬기려는 습관들을 헤아리지 말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라고 요구한다 (롬 6:12-13). 하나님의 의의 도구인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진 생명을 주는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과 공동체를 세워 간다. 이는 단순히 나쁜 행위를 삼가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방법이다. 우리 부르심을 받아 일꾼이 되어 고통당하는 세상에서 죄의 영향력들을 뿌리 뽑기 위해 일함으로써 의와 화목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원들은 경영을 악하거나 불공평한 것으로 판단하는 나쁜 습관에 빠질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가능하다. 전자의 경우, 사원들이 월급을 받고 일하는 시간을 개인 용도로 소모하거나 업무를 탁월하게 해내지 못함으로써 회사를 속이는 데 편리한 핑계가 될 수 있다. 반대로 경영진에게는 개인적으로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원들을 차별하거나, 작업장의 안전이나 평등 규정을 위반하거나, 아니면 사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단순히 규정을 따르거나 아니면 속이지 않는 것만으로는 새 생명으로 행하는 게 아닐 수 있다. 도리어 새 생명으로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다른 편 판단하는 일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일단 우리가 ‘더 이상 그들은 우리가 존중할 대상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버리면, 그때 우리는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를 공평하고 정당하게 대하는 관계를 재확립해 더불어서 조직을 세워 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을 분별해 낼 수 있다.
우리의 삶과 일에서 이런 변화를 일으키기란 매우 어렵다. 바울은 죄가 계속해서 ‘너희의 죽을 몸에 역사하여 너희가 그것에 종노릇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의도는 좋을지 몰라도 우리는 금세 우리의 깨어진 방식으로 되돌아간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실재하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판단하는 습관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능력이 있다(롬 6:6).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옛 고질병으로 되돌아가 “마음대로” 헤매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에다 묶어 놓을 수 있는 줄을 제공해 주신다. 그 결박은 우리가 코스를 벗어나 헤맬 때마다 쓸려서 고통을 줄 것이다. 또 바울은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이 처음에는 노예처럼 느낄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새 생명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옛 죄의 노예가 될 것인가, 그 사이에서 어떤 종류의 노예가 될 것인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새 생명 안에서 행함으로 얻는 이점은, 그 최후가 수치와 사망이 아닌 생명과 의라는 것이다.
일터에서도 하나님의 종으로(롬6장)
목차로 돌아가기일터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종’이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이는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 일이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토대로 의사결정을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결정을 내린다. 이는 크리스천 신앙에서나 세상 일터에서 실제로 모두 익숙한 개념이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시는 청지기의 본을 보여 주셨다. 그와 비슷하게 일터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섬겨야 할 의무를 안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변호사, 회사 간부, 정부 직원, 이사, 판사 등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일터의 청지기들이나 요원들이 예수님만큼 헌신하지는 않겠지만 (자신들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칠 각오는 안 되어 있잖은가) 타인을 위한 대행 개념은 현대 일터에서도 매일 볼 수 있다.
크리스천이 다른 점은 우리의 의무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것이지, 국가나 주주들 또는 다른 어느 누구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는 점이다. 가장 우선적인 우리의 사명은 단순히 법을 지키거나 이윤을 내거나 또는 인간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화목을 이루는 것이다. 사업은 정상적인 윤리 규범이 먹히지 않는 하나의 게임이라는 앨버트 카(Albert Carr)의 주장과는 달리[1],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일을 하는 우리의 삶 안으로 의와 화목을 통합시켜 넣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 교사에게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을 거듭 용서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교실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그 학생에게 다가가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정치가에게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다양한 이념적 관점에 대한 의견들이 반영된 새로운 법안을 입법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관리자에게는 어떤 직원의 허물을 알고 있는 다른 직원들 앞에서 그 직원을 용서해 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새 생명 안에서 행하려면 먼저 우리가 일하는 방식을 돌아봐야 한다. 제빵사나 요리사는 자신들의 일이 어떻게 굶주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는데, 그렇게 돕는 자체가 이미 정의의 한 형태다. 나아가 조리실에서 개인적으로 다른 동료들과 자신이 상호 교감하는 모습을 좀 더 깊이 들여다 봐야 한다. 동료들을 존귀하게 대해 주고, 그들이 성공하도록 도와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것은 목표를 이루는 것 못지 않게 목표 달성을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Albert Z. Carr, “Is Business Bluffing Ethical?” Harvard Business Review 46 (January/February 1968).
죄의 강력한 침입력(롬7장)
목차로 돌아가기7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이 “묵은” 율법의 ‘얽매임’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다는(롬 7:6) 것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 자체는 인간의 실존에 문제가 안 된다. 그 이유는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기 때문이다’(롬 7:12). 도리어 그는 인간 속에 자리 잡은 ‘죄’라고 불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힘(롬 7:13)이 문제라고 결론짓는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을 언급하며 사람들을 속였고 (롬 7:11) 그렇게 해서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대로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롬 7:14, 17, 23).
죄의 힘은 단순히 나쁜 선택을 하거나 또는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일을 하도록 만드는 것만이 아니다. 악한 힘은 각자의 영적인 영토까지 쳐들어와서는 통제권을 행사한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죄의 종으로 팔리게 만들었다’(롬 7:14). 이런 죄 아래서 종이 된 우리는 마음 안에 있고, 이미 아는 계명들이 요구하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롬 7:15-20). 이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를 행하고자 하는 선한 의도가 있어도 일어난다(롬 7:15-16, 22).
다시 말하면, 침략해 들어오는 죄의 힘을 극복할 만큼 우리가 선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얘기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우리는 더 강력한 다른 영적인 힘인 성령이 함께하셔야 이런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로마서 8장에서 바로 이 성령을 다룬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일터에서 만나는 여러 상황에서 올바른 입장에 서기에는 역부족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존중하길 원하신다는 걸 마음속으로는 다 안다. 하지만 때로 동료를 좋지 않게 평가함으로써 우리가 그 사람보다 더 나을 거라는 잘못된 인식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부모 역할에서도 엄마 아빠들은 어린 자녀에게 화가 나서 소리 지르는 것이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종종 죄의 힘에 사로잡혀 그렇게 행동하고 만다. 고객의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는 자신이 시간을 들여 그 서류들을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는 걸 잘 알지만, 죄에 물들어 그저 수입을 늘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힘에 특히 취약하다. 어디서 일을 하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애쓰고(롬 12:5). 옳고 선한 일을 하려는 우리 의지를 꺾으려는 힘에 맞서기 위해 서로서로 돕는다. 예컨대 비슷한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인 작은 ‘공동체’에 아직은 적지만 차츰 그 수가 늘어 가는 크리스천들이 가입을 한다. 공동체는 종종 일터가 있는 지역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또는 한 달에 한 번 반나절도 모임을 갖는다.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일터에서 처하는 실상을 자세히 얘기하며, 신앙적 관점에서 그것을 논의하고 대안적 실천 사항들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어떤 구성원이 동료와의 갈등이나 윤리적인 잘못, 무의미한 느낌, 불공정해 보이는 회사 정책 등의 얘기를 꺼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취합한 후에 그 구성원은 그에 따른 대응책으로 일련의 행동을 추진하고, 다음 모임에서 그 결과를 보고할 수 있다.
삶의 질이 새로워지다(롬8:1-14)
목차로 돌아가기신자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나 새 생명으로 행하는 것은 확고한 도덕적 구조(“성령의 법” - 롬 8:2)에 토대를 두고 사는 것이다. 바울은 이 도덕적 구조를 “영을 따르는 자” 또는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롬 8:5)이라 부른다. 이 두 용어는 모두 우리가 새 생명 안에서 행할 때 우리를 인도해 가는 도덕적 추론 과정을 가리킨다.
이런 종류의 도덕적 긍휼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 옳고 그른지 귀로 들어서는 통하지가 않는다. 대신 신자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킨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롬 8:1-2)을 실행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생명”과 “사망”이라는 단어가 열쇠다. 성령에 따라 산다는 것은, 사망 대신 생명을 가져다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뜻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성령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각각의 상황에서 더욱 많은 생명을 가져다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추구한다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의 율법은 “살인하지 말라”라고(출 20:13) 가르쳤다. 그러나 성령에 따라 산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죽이지 않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이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한다는 얘기다. 그것은 예를 들면 호텔 객실을 깨끗하게 청소해 손님이 건강하게 머물도록 해 준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혹은 이웃집 대문앞 눈을 치워 지나는 행인들이 안전하게 오가도록 해 주는 걸 의미할 수도 있다. 아니면 새로운 암 치료제 개발을 위해 박사 학위를 따려고 여러해에 걸쳐 공부하는 걸 의미할 수도 있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해 보자.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질의 삶을 산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당연히 받아야 할 판단을 유보하고, 대신 그들이 그럴 자격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들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기 위해 애쓰는 태도에서 나온다. 업무를 줄 때 상사는 부하 직원들이 이미 감당할 수 있는 것에 국한시키지 말고, 매일 자신에게 와서 지침을 받으라고 하면서 그들의 능력을 키워 줄 수 있는 과제를 맡길 수 있다. 일하다가 연장을 망가뜨려 대체할 연장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노련한 선임이라면 신입 일꾼에게 연장을 빌려 주는 대신 다음에는 연장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전수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우리 강아지가 왜 죽었어요?”라고 물었을 때 부모는 아이에게 그 애완동물이 죽은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네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는다는 게 두렵니?”라고 물을 수 있다. 이런 하나하나의 상황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도덕적인 목적은 단순히 율법의 요구만 채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더 나은 질의 삶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단계를 넘어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보여야 할 도덕적 긍휼이다. 우리에게는 율법에의 종노릇이 아니라 성령에 따라 살 자유가 있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롬 8:1).
성령의 일을 생각하는 데 바울이 “평화”를 포함시킨 것은 (로마서 13장6절 앞 구절들처럼)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사회적 측면을 짚어 준 것이다. 왜냐하면 평화가 사회적 현상이기 때문이다.5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새로운 질의 삶을 가져오려고 애를 쓴다. 이것은 일터에서나 다른 곳에서 삶을 위축시키는 사회적 상황에 관심을 갖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일하는 사람들이 더 잘 살도록 해 주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동시에 우리는 노동 환경을 조성하는 사회 시스템에 의와 의로움을 가져다주기 위해 애를 쓴다.
만약 우리가 속한 조직이 새로운 질의 삶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면, 크리스천들은 진보를 위한 (심지어는 생존을 위한) 긍정적인 힘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원하는 만큼 우리의 조직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으며 다른 데서는 못 듣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의 조직이 관례를 파괴하도록 도울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생명을 살리는 데 우리를 사용할 수 있다는 비밀스런 믿음을 품고 있지 않은가!
반대로 만약에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동료들, 경쟁자들, 고객들, 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교만해지고 파괴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음에 성령님을 모셨다면,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지 아닌지를 항상 물으면서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 또는 열매를 계속해서 평가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진단에 정직한 태도를 취한다면, 이 또한 매일매일 회개와 변화를 위한 은혜를 요구할 것임에 틀림없다.
Robert Jewett, Romans: A Commentar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7), 487.
언제라도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롬8:15-17)
목차로 돌아가기바울은 성령 안에서의 삶과 유대인 율법하에서의 삶을 대조시킨다. 그는 신자들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한다(롬 8:15).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누구든지(롬 8:9-10) 이제 하나님께 입양된 양자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죄의 세력 아래서 두려움으로 종노릇하는 사람들은 불순종했을 때 받을 처벌에 두려움을 느끼며 산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롬 8:1) 신자들은 이런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간다면, 설령 일상의 삶과 일에서 잘못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율법에 처벌받는 위협에 직면하지는 않는다. 어려움과 실패가 우리 일에 흠이 가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반응은 정죄가 아니라 구속(救贖)이다. 우리가 한 일이 현재로서는 정말 나쁘게 보일지 몰라도, 충성스럽게 해낸 그 일에서 하나님께서는 가치 있는 뭔가를 이끌어 내실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적어도 일터에서의 우리 삶과 일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준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 삼으셨으므로 우리는 절대로 우리가 하는 일에서 혼자가 아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일 때문에 우리가 낙심하고, 불만족해하며, 심지어는 가족들조차 우리가 하는 일을 지지해 주지 않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고난을 구속하시고, 그것을 우리 삶에서 선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바꾸고자 하신다. 로마서 5장과 관련해서 이미 앞에서 본 대로, 우리가 일에서 겪는 어려움과 고난을 신실하게 견뎌 내는 것은 우리의 인격 형성에 이르게해 주고 장래에 소망을 갖게 해 주는 토대가 될 수 있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저런 경우에 그들이 하는 일에서 실패와 좌절 그리고 어려움을 겪는다. 매일 정시에 출근해야 하는 것 같은 아주 간단한 의무도 그렇다. 이런 과제를 신실하게 잘 감당하는 것은 실제로 그 일에서 우리가 더 많은 보상을 받게 하고, 더 큰 만족을 갖게 해 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경험들은 우리에게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기를 부여해 주고,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을 더 크게 경험하도록 해 준다. 이 장의 “롬 5: 11” 부분을 보라.
당신이 일터에 화목과 의를 가져다준 보상으로 승진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반대로 당신이 저항에 부딪치고, 위협을 받고, 처벌을 받거나 해고될 수도 있다. 안 좋은 관계는 일터에서 흔히 나타나는 광경들이다. 예를 들어 한 부서가 다른 부서의 업무 성과에 대해 상습적으로 방해공작을 할 수도 있다. 경영자와 근로자들 간의 불화가 고착화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사무실에서의 왕따나 학벌에 따른 파벌, 작업 현장의 왕초 노릇, 인종 차별 또는 학대하는 상사 때문에 겁에 질릴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화목을 가져와 부서와 회사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직원들의 이직이 줄어들며, 직원 사기가 충천해 고객서비스가 다시 좋아진다면, 당신은 칭찬을 받거나 승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약자를 괴롭힌다든지 파벌을 만들거나 왕초 노릇을 하거나 차별하고 학대하는 상사라면 거의 확실히 당신을 반대하고 당신과 대립할 것이다.
느리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롬8:18-30)
목차로 돌아가기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되는 것’(롬 8:17)이 장차 우리의 소망이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이 소망은 이미 시작된 하나의 과정의 일부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시점이 되면 그것이 완성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롬 8:18-25) 끈기 있게 참여해야 한다. 이 과정의 “처음 익은 열매”로써(롬 8:23) 우리가 이미 받은 성령이라는 선물은,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라는 것을 확실히 해 준다(롬 8:14-17, 23). 이것은 그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증거다.
이 과정은 “우리 몸의 속량”(롬 8:23)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는 우리 몸에서 우리 영혼을 건져 내는 게 아니라 전체 피조물과 함께 우리 몸이 변화되는 것이다(롬 8:21). 이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그 첫 열매들’(롬 8:23)을 우리 삶과 일에서 오늘 경험한다. 그러나 훨씬 더 좋고 나은것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해산의 고통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다(롬 8:19-23). 바울은 아담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썩어짐과 죽음에 굴복하게 된 창세기 2-3장에서 나온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뿐만 아니라 온 피조물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걸 우리들이 되새겨 보게 해 준다. 이 주제를 더 자세히 보려면 이 시리즈 1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모세오경 · 역사서》 1장의 “창1:26; 2:5” 부분을 보라.
이 과정은 느리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신음하는데, 단지 우리 개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해산의 고통 가운데서 신음해 오고 있다(롬 8:22-23). 이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할 때의 신음을 메아리로 들려주는 것이며(출 6:5) 지금도 이 세상에는 거의 3천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노예로 살고 있다는 걸 우리에게 되새겨 준다.[1] 우리는 단순히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게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 할 수가 없으며, 도리어 하나님께서 세상 구석구석을 전부 구원하시기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구원은 확실하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롬 8:28). 하나님은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며,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이 완료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라는 하나님의 맨 처음 판단이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혁으로 확증되고, 나아가 하나님의 시간에 완성될 것이다.
변혁이 아직 완전히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 어려움이 있음을 예상해야 한다. 우리는 선을 행하지만, 때로 현재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악에 의해 그 모든 선이 낭비되거나 파괴되는 결말을 본다. 설령 우리가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 선의 결과들이 파괴돼 버릴 수 있다. 우리의 권고 사항들이 김빠지게 될 수도 있다. 자본이 모자라 선거에서 불한당들에게 질 수도 있으며, 관료적 형식주의에 익사할 수도 있고, 학생들의 관심사에 전혀 개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한동안은 성공을 하지만 나중에 가서 보면 뒤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우리가 기대한 결과가 전혀 안 나타나는 걸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건 의료 종사자들은 여러 경우에 소아마비가 거의 박멸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정치적 반대, 무지, 백신 관련 감염 및 현대의 신속한 이동 수단 때문에 새로이 병균이 창궐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2]
“Inaugural Global Slavery Index Reveals More Than 29 Million People Living in Slavery,” Global Slavery Index 2013, October 4, 2013, http://www .globalslaveryindex.org/category/press-release.
“Poliomyelitis Eradication,”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Poliomyelitis_eradication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을 붙들고 있다(롬8:31-39).
목차로 돌아가기‘우리 모두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심으로써(롬 8:31-3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신다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다(롬 8:35-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여기 나오는 것들 상당수가 일의 영역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거나 또는 능력 없는 상사들(혹은 통치자들)을 만날 수 있다. 막다른 골목 같은 일들에 붙들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지 모른다. 나중에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으로 현재를 희생하지만 (장시간의 노동, 근무 후 수업 듣기, 형편없는 월급의 인턴 생활, 일자리를 찾아 외국으로 이주 등)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경기 불황이나 정부 규제 때문에, 또는 심지어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권력자들의 신중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환경, 어리석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강제로 급이 낮아지거나 위험한 일을 맡을수도 있다. 우리가 이 모든 것들에 받는 상처의 고통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결코 이것들이 우리를 이기지는 못한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은 우리의 신실함으로 삶과 일이 우리에게 가하는 최악의 상황들을 이겨 낼 수 있다. 혹시 경력을 쌓거나 수입을 늘리거나 아니면 특권을 누리는 것을 일의 최대 목표로 삼는다면, 실망만 안고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구원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화목, 신실함, 그리고 의가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라면, 우리는 일을 하면서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가리지 않고 소망을 찾아낼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일에서 제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혹은 일터에서 동료나 상사들과 제아무리 복잡하고 버거운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현재 겪는 역경 한가운데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힘이며, 동시에 언젠가 우리 몸이 부활할 것이라는 소망이다.
모든 사람에게 베푸신 긍휼(롬9-11장)
목차로 돌아가기로마서 9-11장에서 바울은 이 서신이 말하고자 했던 문제로 되돌아간다.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 간의 불화가 바로 그 문제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다루는 일과 신학에서 주 관심 분야가 아니므로 간략하게 요약만 하고자 한다.
바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역사, 특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한다(롬 9:14-18). 그는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도 이르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먼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는데, 그 시작은 아브라함이었다(롬 9:4-7).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떨어져 나갔고, 현재는 이방인들이 더 신실한 것처럼 보인다(롬 9:30-33). 그러나 이방인들의 구원은 유대인들의 구원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롬 11:11-16) 이방인들이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남은자들’을 남겨 놓으셨는데(롬 9:27; 11:5), 하나님의 은혜로 그 남은 자들의 신실함이 세상을 화목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구원이 인간이 순종하여 얻은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의 행위라는 점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모두 똑같다(롬 9:6-13). 바울은 이를 염두에 두고 양쪽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을 펼쳐 나가는데, 결론은 항상 ‘하나님은 자신이 긍휼을 베푸시기로 선택하신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이다(롬 9:18). 유대인도 이방인도 그들의 행위 덕분에 구원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오며 예수를 주로 믿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 데서 온다고 바울은 말한다(롬 10:9-10).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예수를 주로 따르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삶을 부요케 하시는,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온다는 말이다(롬 10:12-13). 불순종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에게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롬 11:33). 이 서신에서 바울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깨어진 관계를 화목케 하는 것이었다.
로마서 9-11장은 우리 모두에게 소망을 준다. 먼저 바울은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을 강조한다. 일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든 일의 어떤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그리스도의 믿음과 신실하심을 구체화시키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면(롬 11:30) 우리도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라는 요구를 받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형편없는 업무 처리를 눈감아 주라거나, 괴롭힘이나 차별을 보고서도 침묵을 지키라는 의미는 아니다.
긍휼은 압제하도록 힘을 실어 주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실패가 오로지 그만의 실패인 양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같이 일하던 누군가가 실수했을 때 경쟁력이 없다며 그를 비난할 게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런 잘못에서 회복되도록, 또 어떻게 하면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지를 배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누군가 우리의 신뢰를 깨뜨렸을 때 우리는 그 사람편이 돼 주거나 함께 책임을 져 주어야 하며, 만약 그가 회개해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간다면, 그를 용서해주어야 한다.
둘째, 로마서의 이 부분은 신실한 크리스천들인 우리가 끝까지 견디고, 그 결과 지금 일시적으로 믿음으로 순종하는 길에서 넘어진 자들을 대신해 우리가 신실한 “남은 자들”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 준다(롬 11:5).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넘어지는 자들을 보고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신실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진 그 손해를 완화시켜 줄수도 있고, 심지어는 그것을 유발시킨 사람들이 심한 처벌을 받지 않도록 그들을 건져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만약 동료가 고객이나 부하 직원을 잘못 대하는 광경을 목격했다면, 그것이 ‘호떡집에 불 난’ 사건으로 번지기 전에 그 상황에 개입하여 바로잡을 수도 있다. 우리도 얼마나 넘어지기 쉬운 존재인지, 또 얼마나 여러 번 실패했는지를 명심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것과 같은 긍휼히 여기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는 걸 우리가 허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죄의 힘에 눌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의 구속을 위해 우리 스스로 위험을 무릅쓴다는 의미다.
셋째, 이 장들은 매일의 일과 삶에서 동료들을 위해 믿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가 몸소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만약 우리가 정말 새 생명 안에서 행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질의 삶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마음을 둔다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일터에서 우리가 보여 주는 행동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의 찬양이 될 수 있으며, 우리 동료들이 목격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전도가 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그들이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고, 서로서로 화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과 영위하는 삶의 모든 측면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기회이며, 이 세상을 화목케 하는 요원이 될 기회다.
넷째,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야 한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써 보냈던 대상, 당파를 만들고 있던 그 당사자들처럼, 우리가 스스로의 지위를 주변 사람들보다 더 높은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내면의 행로가 우리에게 있다고 상상하는 셈이다. 바울은 이런 교만에 단호하게 반대해서 말한다. 미국 연합사 합참의장이었던 피터 페이스(Peter Pace) 장군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한다. “당신은 알고 있는 대로의 진실을 항상 말해야 하지만, 아울러 당신이 모르는 전체의 어느 부분도 있다는 걸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1]
이 세상에서 우리가 화목케 하는 이 직책을 실현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은 우리의 일이나 일터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일터에서 어떻게 이행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분별해 내는 요령을 바울에게서 더 알아보기 위해 로마서 12장으로 넘어가 보자.
Peter Pace, “General Peter Pace: The Truth as I Know It,” Ethix 61 (September/October 2008, http://ethix.org/2008/10/01/the-truth-as-i-know-it.
은혜받은 한 사람을 통해 변화하는 공동체(롬12장)
목차로 돌아가기
로마서 12장은 구원의 사회적 · 공동체적 측면을 집중 조명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개인이 아니라 크리스천 공동체에 편지를 썼으며, 그가 계속 관심을 쏟는 것은 (그들의 일을 특별히 강조하지만) 함께하는 삶이다. 로마서 1- 3장에서 본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은 화목, 의로움과 의, 그리고 믿음과 신실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각각에는 명령의 요소들이 들어 있는데,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라’, ‘사람들 가운데서 공의로우라’, ‘다른 사람들에게 신실하라’ 등이다.
마음 변화 (롬12:1-3)
목차로 돌아가기삶에 구원의 공공적인 성격을 더한다는 것은, 자신을 섬기던 쪽에서 공동체를 섬기는 쪽으로 우리 마음과 의지의 방향을 재설정한다는 의미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2-3).
바울의 공동체성을 명확히 하는 이 단락의 두 번째 부분부터 시작해보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나 자신은 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더 많이 생각하며, 공동체 또한 더 많이 생각하라는 말이다. 12장 뒤에서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롬 12:10),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 그리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라는 말을 덧붙여 이 말을 확장시킨다.
이 단락의 첫 부분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타인을 우리보다 우선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지적한 대로, 사람들은 “타락한 마음”(롬 1:28, 새번역)의 종이 되어 있어서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롬 1:21)에 의해 어두워졌고, 그것이 결국 서로서로를 향해 온갖 종류의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결과를 초래했다(롬 1:22-32). 구원은 이처럼 마음의 종 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마음이 자기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바뀌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자신을 섬기려는 목적을 넘어 화목과 의와 신실함을 앞세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변화되면 우리의 목적은 자기중심적인 우리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서 다른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전환된다. 예를 들면, 어느 식당에서 당신이 직원들의 근무교대 시간 책임자로 일하는데 마침 지배인으로 승진될 후보가 되었다고 치자. 이때 당신의 마음이 그리스도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당신의 기본 목표는 다른 후보들을 누르는 것이 될 것이다. 식자재 공급상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다른 후보들에게 알려 주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교대 때만 드러나는 위생 문제들을 모른 체하거나, 직원들 사이에 반대 의견을 퍼트리거나, 고객 만족을 향상시키기 위한 협업을 회피하는 등 무수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당신의 그런 행동을 (당신 자신에게)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후보들에게도 해가 될 뿐 아니라, 그들과 같은 교대조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나아가서 그 식당 전체와 고객들에게까지도 손해를 끼칠것이다. 반면 만약 당신의 마음이 다른 사람들을 우선 배려하는 쪽으로 변화한다면 당신은 다른 후보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뿐 아니라 그 식당과 식당 종업원들 및 고객들을 위해서도 일을 더 잘하도록 도울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 가치 있는 희생(롬12:1-3)
목차로 돌아가기내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하다 보면 나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 몸을 ……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 “몸”과 “산”(살아 있는)이라는 단어는 바울이 세상에서 하는 매일의 일과 삶에서의 실질적인 행동을 의미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든 신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전체 피조물에게 유익이 되게 하는 일에 그들의 시간, 재능, 에너지를 바침으로써 산 제물이 된다.
우리 삶에서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칠 수 있다. 일터에서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해 주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끼리 불화할 때 해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면, 우리는 그렇게 산 제물로 우리를 바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 유한한 지구 자원 사용을 유보할 때, 이것이 바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완전한 일자리를 찾는 것보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하므로 불만스럽고 낮은 일자리라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배우자가 어떤 곳에서 오매불망 원하던 일자리를 갖게 하기 위해서 상당한 보상이 따르는 자리를 사양한다면, 이 역시 우리의 산 제물이 된다. 상사인 우리가 밑에 있는 직원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대신 그 비난을 받아들인다면, 이 또한 우리가 산 제물이 되는 것이다.
함께 분별하며 결정하는 훈련(롬12:1-3)
목차로 돌아가기마음의 변화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롬 12:2)은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는 것과 병행해서 온다. 우리는 구원받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로서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결정 과정에 참여시킨다. 바울이 ‘분별’이라는 의미로 쓴 용어는 헬라어(dokimazein)로는 ‘검정하다’ 또는 ‘인정하다’라는 뜻이다. 우리가 한 결정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다는 확신을 갖기 전에 반드시 다른 신자들에게 검정을 받고 인정받아야 한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롬 12:3)라는 바울의 경고는 우리의 의사결정 능력에도 적용 가능하다. 당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지혜, 도덕적 수준, 폭넓은 지식, 또는 다른 어떤것을 가졌노라고 생각하지 말라. ‘실제보다 더 지혜롭다고 주장하지 말라’(롬 12:3).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가 가진 은사와 지혜의 다양성에다(롬12:4-8) 서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며(롬 12:16) 그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참여시킴으로써만 신뢰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고, 그 결정들을 검정 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이걸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것은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공동체인 우리는 도덕적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일 수는 있지만,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 실제로 서로서로 얼마나 자주 얘기를 하는가? 그저 몇몇 사람들에게 조언을 받은 다음, 그 문제를 책임져야 하는 개인이 결정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도덕적 논의가 불편하거나, 로널드 하이페츠(Ronald Heifetz)의 표현대로 그것이 “핫”(hot)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쟁점들을 피하고 현상 유지를 원하기 때문에” [1] 사람들은 열띤 토론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게다가 종종 공동체의 결정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가 가진 힘에 대해 위협적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내리는 결정은 대개가 이미 굳어진 시각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 곧 ‘이 세대를 본받는 것’(롬 12:2)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시각 때문에 일을 하다가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세속의 회사, 정부, 교육 기관, 또는 다른 상황에서 일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행동을 동료들에 맞춰 진단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반대로 우리 행동을 우리의 교회 소그룹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맞춰서 진단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둘 다든, 또는 둘 중 하나든 다른 것보다 나을 게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터에서 신자 그룹을 하나 만들어서, 혹은 적어도 비슷한 상황에서 일하는 신자들끼리라도 모여서, 그들과 우리의 행동을 비추어 보는 것은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프로그래머로서, 소방관으로서, 공무원으로서, 또는 학교 교사로서 화목과 의와 신실함을 이행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행동하고 있는지를 진단해 보고 싶다면, 우리에게 그것에 대해 어느 누가 다른 크리스천 프로그래머들이나 소방관들이나 교사들보다 더 잘 말해 줄 수 있겠는가?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양육하는 교회’의 “양육하는 교회들은 모든 이들이 책임을 지도록 장려한다” 부분을 보라.
Martin Linsky and Ronald A. Heifetz, Leadership on the Line: Staying Alive Through the Dangers of Leading (Boston: Harvard Business Review Press, 2002), 114쪽.
각자 다른 모양으로 공동체를 위하다(롬12:4-8)
목차로 돌아가기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우리가 서로서로 얼마나 의존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이런 상호의존성은 약점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하나의 선물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지금도 구원을 받고 있기에 서로서로 점점 더 통합되어 가고 있다.
바울은 이를 일에 적용해서 우리 모두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받은 은사가 다르다’(롬 12:6)는 점을 주목하면서 그중 몇 가지를 열거하는데,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풀기 등과 같이 일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각각은 ‘우리가 받은 은혜대로 주어진 것으로’(롬 12:6) 우리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힘을 실어 준다.
바울은 특정 공동체(교회)라는 정황 안에서 이 과정을 전개해 나간다. 이것이 적합한 이유는 서신 전체가 교회 내의 어떤 한 가지 문제(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갈등)를 중심으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록이 특별히 ‘교회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목록은 교회 밖의 일에도 다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예언(“신적으로 전달된 메시지를 선포하거나” 또는 “감춰져 있던 어떤 것을 밝히 드러내는 것”[1])은 하나님의 말씀을 암담한 상황에 적용하는 능력으로, 모든 일터에 절실하게 필요한 요소다. (원래 ‘행정’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섬김(ministry)은 일을 조직화함으로써 그 일이 마땅히 섬김을 받아야할 사람들, 예를 들면 고객, 시민, 또는 학생들이 섬김받도록 해 주는 능력이다. 그것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가 바로 ‘경영’(management)이다. 가르침, 위로(또는 격려), 그리고 다스림 등은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세속의 상황에도 얼마든지 적용 가능하다. 구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시간이나 기술, 우리의 인내 또는 일에서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우리의 전문성을 발휘하는 모든 것들이 다 구제의 여러 가지 형태다.
긍휼 베풀기는 일에서 과소평가해 온 요소다. 일이라는 경쟁의 세상에서 긍휼 베풀기가 짐짓 장애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이는 우리가 일을 잘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하는 일의 가치는 단순히 투자한 시간의 양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재화와 용역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관심을 두었느냐 하는 것, 다시 말하면 긍휼에서 온다. 자신이 조립한 부품이 제자리에 잘 맞게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자동차 공장 작업자는 그 회사나 고객, 또는 동료들에게 아무 쓸모가 없으며, 오래지 않아 해고자 명단에 오를 것이다. 또 만약 공장 근로자들이 회사 고객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에 그 자동차 회사가 전혀 신경을 안 쓴다면, 머잖아 고객들은 다른 회사 브랜드를 찾아 떠날 것이다.
여기서 예외의 경우가 있다면, 고객들의 약점을 이용해 이익을 찾아내는 제품과 서비스들이다. 예컨대 마약, 포르노, 자기 신체와 관련해 가지는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를 이용한 제품 등이다. 이런 경우에 돈을 버는 것은, 고객들에게 긍휼을 베풀 필요가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이런 영역에서 고객들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은, 성공에 긍휼이 필수적이지 않은 그런 일터들은 크리스천들이 피해야 한다는 걸 시사한다. 제대로 된 회사라면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참된 필요들을 채워 줌으로써 수익을 창출한다.
이런 모든 은사들과 더불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일을 하는 특별한 행위와 방식에서 경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취한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온다는 얘기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이익을 얻도록 행동을 하게 만든다.
Gerhard Kittel, Gerhard Friedrich, and Geoffrey William Bromiley, eds., Theo 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5), 960쪽
거짓 없는 사랑으로 (롬12:9-21)
목차로 돌아가기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흘려보내는 통로로써 우리가 섬기는 데 도움을 주는 구체적인 지침이 될 여러 가지 원리를 밝혀 준다. 그는 사랑이란 문자 그대로 ‘거짓이 없어야’(롬 12:9) 한다는 자신의 전체적인 관심사로 이 섹션을 소개한다.
로마서 12장 9-13절 나머지 부분은 존경, 환난 중의 인내, 기도에 항상 힘씀,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함, 손 대접하기를 힘씀 등을 포함한 거짓 없는 사랑을 정성스럽게 다룬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로마서 12장 16-18절인데 거기서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할것’을 권면한다. 특별히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힘없는 자들을 사귈 것과,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사는 걸 의미한다고 그는 말한다.
만약 우리에게 거짓 없는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직장 상사나 우리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돌보아줄 것이다. 정의상으로 보면, 우리는 일할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일을 한다. 그러나 같이 어울려 일하는 사람들을 절대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각 개인은 근본적으로 고귀한 존재이며, 그리스도께서는 똑같이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고, 모두에게 새 생명을 주시려고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셨으며, 이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하는 바로 그것이 거짓 없는 사랑이다.
거짓 없는 사랑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지위에 상관없이 그들의 가족, 문화, 언어, 열망, 그리고 하는 일을 존중해 주고, 그 각각의 이름을 불러 주며 존경을 표한다. 거짓 없는 사랑은 실수한 부하 직원, 배움이 느린 학생,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장애를 가진 직장 동료를 참아 준다. 거짓 없는 사랑은 새로 채용된 직원, 밤늦게 도착한 사람, 분별력을 상실한 환자, 길 잃은 나그네, 막 진급한 상사에게 호의를 베풀 줄 안다. 우리는 매일매일 크든 적든 우리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보호는 자기 방어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거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다”(롬 12:21). 이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만 가능하다.
진정한 권세자의 권세 아래에서 살아가기(롬13장)
목차로 돌아가기“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로마 통치 제도가 하나님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음을 알고 있던 로마 교회에게 바울의 이런 조언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고 잔인한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란 말인가? 바울의 대답은 하나님이 지상 모든 권세의 주관자시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권세자들을 다루신다는 것이다. 그 힘이 강력하여 견줄 바가 없던 로마제국조차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권세에 굴복하게 되어 있었다.
“치안관들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두려움이 됩니다”(롬 13:3, 새번역)라는 말은 일터에도 어울리는 말이다. 많은 기업체의 상사들은 조직을 효과적으로 짜고, 분쟁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공정한 환경을 만든다. 법원은 특허나 토지 소유권, 노사관계, 계약의 공평성 등을 다룬 사건을 정기적으로 처리한다. 입법자들은 시시때때로 환경을 보호하고, 사기를 예방하며, 근로 안전을 의무화하고 주택 분양에 공평한 기회를 주려고 애쓴다. 경찰은 크게 보면 죄를 범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무고한 자들을 지원해 준다. 심지어 예수를 안 믿는 당국도 종종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이 세상 가운데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한 표시다.
하지만 사업이나 정부 또는 모든 일터의 권력자들은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수 있으며, 때로는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기도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인간이 만들어 낸 권세와 (비록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모든 피조물 위에, 배후에, 그리고 그 피조물을 통해서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간의 권세가 우리에게 너무도 밀착해서 다가오면, 우리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움직임을 감지해 낼 수 없다. 이 단락은 우리더러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역사하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분별하라고 권면하며, 우리 모두를 위한 인생의 참된 충만함을 촉진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우리가 삶을 통해 참여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데니스 코즐로브스키(Dennis Kozlowski)가 타이코 인터내셔널(Tyco International) 회장으로 있을 때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왜 그가 호화로운 사생활에 돈을 대기 위해 회사 금고를 들고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성실하게 일하려고 애써 왔던 사원들은 아마도 실직이 두려웠을 것이다. 도덕적인 다른 사람들은 코즐로브스키의 음모에 가담하라는 압박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에 코즐로브스키는 발각됐고, 중절도죄와 범죄음모와 사기죄로 피소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1] 정의가 반드시 회복될 거라 믿었던 사람들이 과연 옳았다는 것으로 그 이야기는 끝이 났다.
바울은 서구 세계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력자들의 도시 한복판에 살던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실질적인 조언을 해 준다. 법을 지키고, 국세와 관세를 납부하며, 권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라는 것이다(롬 12:7). 크리스천으로서 자신들은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태도에서 하나님 중심보다는 자기중심성을 본 것 같다. 자기만족을 위한 반역은 그들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날’(롬 13:12)을 대비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나라에서는 탈세가 너무도 심해서 세금으로 제공하는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탈세를 가능하게 해 주는) 뇌물에 움직이는 부패한 공무원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조세 부담은 형평성이 깨져있다. 정부는 납세의 정당성을 상실했다. 납세자들이 봐도 그렇고, 탈세자들이 봐도 그렇다. 공공서비스가 불안정하면 경제성장과 인간 개발이 지지부진해진다. 의심할 여지없이 거둔 돈의 상당수가 크리스천의 가치에 맞지 않는 목적에 쓰이고 있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방법으로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크리스천들이 조직적으로 자신들의 세금을 납부하고, 또 정부의 재정 운영을 감시하는 데 헌신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런 식으로 정부를 개혁하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긴 하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결국에는 통하지 않을까?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끝에 가서 반드시 통할 것임을 시사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많은 크리스천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를 표현하고, 현명한 법에는 투표할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단 개표가 되고 나면, 설령 우리가 동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법과 권위를 지켜야 할 의무도 져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수단을 통해 불의한 권세를 바꾸기 위해 애를 쓰기는 써야 하지만, 동시에 합법적인 권세에 대해서는 반드시 복종해야 함을 암시한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의 이익보다는 항상 공공의 유익을 우선하면서 모든 불의한 시스템을 변혁시키고 저항하는 데 계속 책임을져야 한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일터에서든,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정부에서든, 또는 공공생활에서든 어디에서나 위의 권력자들을 존경해야 한다. 변화는 우리가 강력하게 항거를 해야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덕분에 일어난다고 우리는 믿는다.
바울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그 계명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로마서 13장을 마무리한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본래 유대인들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게 된다. 설령 유대인의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바울은 이것이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언급한다. 그의 결론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롬 13:14)
Michael J. De La Merced, “Released from Prison,” New York Times, De cember 4, 2013, B6.
서로를 받아들이는 연습(롬14-15)
목차로 돌아가기이제 바울은 지금까지 해 온 자신의 도덕적 추론을 마무리한다. 그는 로마 교회라는 독특한 정황 속에서 발생한 몇 가지 시사점들을 제시해 주느라 잠시 숨을 고른다.
로마 교회들을 위한 가장 주된 시사점은 ‘받아들임’(welcome)이다.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서로서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바울이 이런 시사점을 끌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도덕적 추론의 목적은, 로마서 6장에 따르면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인데, 즉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의 삶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다. 만약 당신과 누군가와의 관계가 깨졌다면,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질의 삶이다. 받아들임은 화목을 실천하는 것이다. 말다툼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려 애쓰는 것이지만, 받아들임은 때로는 그 사람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포용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의견 차이로 인한 다툼 (롬14:1–23)
목차로 돌아가기“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라는 말로 바울은 시작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논쟁이 일어난 사안에 확신이 없어 자신감이 부족하고(롬 14:23), 자기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규정된 엄격한 기준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어떤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의 음식 규례인 코셰르(kosher)를 따르고 있어서, 비코셰르(non-kosher) 고기나 음료를 먹는 다른 크리스천들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틀림없이 코셰르 규범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과는 같이 식사하는 것조차 거부했을 것이다.[1]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엄격함을 장점으로 여겼으나, 바울은 그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이유가 될 때 그것은 도리어 약점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코셰르 규범을 지키는 자들에게 “[코셰르 방식으로 요리하지 않은] 고기를 먹는 자들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약함을 대하는 바울의 방식은 그들과 말싸움을 하거나 그들의 신념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아 준다는 느낌을 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는 자세다. 아울러 코셰르 규범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뭐든지 먹을 수 있는 그들의 자유를 자랑하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런 자랑은 코셰르 규범을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과의 교제를 끊게 하든지, 아니면 그들의 양심을 어기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코셰르 고기가 없는 상황이라면 비코셰르인들도 코셰르인들과 어울려 코셰르인들이 양심을 어기라고 요구하는 대신 야채만 먹어 주면 된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롬 14:20). 바울의 말이다.
양쪽 그룹 다 자기네 견해가 도덕적으로 중요하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한쪽(강한 자들)은 이방인들이 코셰르 규례를 따라야 한다고 믿은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다른 한쪽(약한 자들)은 코셰르를 따르지 않는 것, 그리고 코셰르를 따르지 않는 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무례이며, 유대인 율법을 위반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 문제가 치열한 쟁점이 된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하나님 언약에의 순종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정말 중요한 쟁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어떤 특정 쟁점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서로 간에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대한 문제다(롬 14:17).
도덕적 견해차는 공통분모가 거의 없는 직장에서는 훨씬 더 어려운 문제다. 바울은 이와 관련된 한 가지 흥미 있는 측면에서 약한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비록 바울이 두 그룹 모두에게 서로 판단하지 말것을 권하기는 하지만, 그는 강한 자들에게 훨씬 더 무거운 실천적 부담을 준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이에 대한 우리의 본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신’(롬 15:3) 예수님이시다. 이것은 옳은 편, 또는 다수의 편에 있는 사람들, 혹은 다른 면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원해서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어기게 하는 걸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일터에서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양심을 어기는 것임을 알면서도 약한자들이 강한 자들의 횡포에 휘둘릴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일하는 일터에서 누군가가 종교적 · 도덕적인 이유로 머리나 어깨, 다리를 가려야 한다면서 특별한 복장이나 복식을 요구하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이런 강한 신념 때문에 자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하나의 약점이 된다. 아마도 당신은 그들 스스로 그런 복장을 입는 것까지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주장은 적어도 당신이 일하는 직장을 ‘받아들임’과 화목의 장으로 만들길 원한다면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 모두 주장자의 기준에 맞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걸 시사한다. 강한 자들(복장 규범이라는 율법주의에 별로 영향 받지 않는 사람들)은 약한 자들(다른 사람들의 복장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의 약점을 받아들여 줌으로써 그들을 받아 주어야 한다.
꼭 명심하자! 바울이 우리 양심의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그러는 것은 도리어 우리를 약하게 만든다. 바울은 우리 믿음이 강해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옷이나 말, 또는 음악적 취향을 의심하는 그런 사람들이 돼서는 안 된다. 도리어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의 취향이나 취미를 판단하기보다 누구든지 다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일터에서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까, 아니면 방해가 될까?
Wright, “The Letter to the Roma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735쪽. 톰 라이트, 《로마서》(에클레시아북스 역간).
받아들임,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다(롬14:19-15:33)
목차로 돌아가기받아들임의 또 다른 측면은 공동체를 튼튼하게 한다는 점이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롬 15:2) 할거라는 말처럼, 받아 주는 주인은 찾아온 손님을 강건하게 한다. 여기서 “이웃”은 공동체의 또 다른 구성원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은 공동체에서 함께 일해 나가는 걸 의미한다.
14-15장에 걸쳐 보았듯이 받아 줌은 아주 강력한 실천이다. 바울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품고 그냥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라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는 공동체로서 깊은 도덕적 분별에 참여하되, 아주 중요한 문제들에서 도덕적으로 다른 결론에 이른 사람들하고도 따뜻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바울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동체 안에서의 지속적인 관계는 실제 도덕적 결론보다 더 중요하다. 관계는 어떤 한 쟁점을 옳다고 하고 다른 쟁점은 틀렸다고 판정하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을 훨씬 뛰어넘는, 새로운 삶을 공동체에 가져다준다. 관계는 또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우리가 서로서로를 받아 줄 때, 그 받아들임의 최종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롬 15:9) ‘모든 백성들이 그를 찬송하는 것이다’(롬 15:11).
바울 혼자 한 일이 아니다(롬16장)
목차로 돌아가기로마서 16장은 바울은 혼자 일했고, 영웅적인 인물이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그의 고독하면서도 고상한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 온갖 역경을 견뎌 냈다 등등 바울이 한 일의 성격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추측을 뒤엎는다. 바울은 여기서 그가 한 일이 공동체가 한 일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는 동역자 스물아홉 명의 이름뿐 아니라, “저의 집에 있는 교회”나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 같은 표현을 써서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추가로 열거한다. 이 명단은 남녀 간 역할의 차이를 전혀 두지 않고,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을 포함시켜 가면서 그들이 한 일에 똑같은 가치를 부여한다. 몇몇은 확실히 부자였으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유인이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노예였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던’(롬 16:4), “많이 수고한”(롬 16:6), “나와 함께 갇혔던”(롬 16:7), “주 안에서 수고한”(롬 16:12) 또는 ‘내 어머니 같은’(롬 16:13) 사람들과 같이 특별히 수고한 많은 사람들을 칭찬한다. 더불어 이 서신의 기록자[필사자]인 더디오(롬 16:22)와 시 재무관 에라스도(롬 16:23)의 노고도 언급한다.
그렇게 광범위한 동역자들의 반경 안에서 사역한 바울을 관찰해 보면, 오늘날 서구에서 강조하는 개인주의, 특히 일터에서의 개인주의는 입추의 여지가 없다. 그가 열거한 모든 사람들처럼 바울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공동체 안에서 일했다. 로마서 마지막 장은 복음 전파는 만인의 일이라고 공표한다. 모두가 다 사도는 아니다. 우리 모두가 직장을 버리고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은 것도 아니다. 로마서 12장 6-8절에 다양한 은사를 바울이 열거하는 데서 그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의 직업과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종들로서 사명을 받았다.
이 인사들은 또한 우리에게 교회 지도자들은 일꾼임을 상기시켜 준다. 때로는 바울이 한 사역을 일반적인 일과는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가 열거하는 사람들이 한 일을 거듭 언급하는 것을 보면, 바울의 사역에 해당한 모든 것이 어떤 일터에서나 고스란히 해당된다는 점을 상기하게 된다. 매주 우리의 시간 가운데 상당 부분을 보내는 여기가, 새 생명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 되거나(롬 6:4) 아니면 사망의 권세라는 진창 아래 머물러 있는 곳이 된다.
일터에서의 여러 관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손으로, 마음으로, 가슴으로 일하는 세속의 장소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인 것이다.
로마서 마지막 구절에는 어느 누구도 홀로 일하며 살 수 없고,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한 일과 긴밀히 얽혀 있다고 기록한다. 바울은 자신보다 먼저 간 사람들, 그에게 믿음을 전달해 준 사람들, 그와 함께 곁에서 일했던 사람들, 그를 위해 그리고 그들 모두의 일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을 인정해 준다.
우리 각자도 이런 관점을 배워 우리의 일터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전체 구조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 삶과 맞물려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 곧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힘을 실어 준 사람들,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우리를 넘어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의 유익을 위해 자신들이 소원하던 어떤 것들을 포기했던 모든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로마서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로마서에서 바울의 주된 관심은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만드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화목하도록 이끄시며,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화목하게 만드시고, 죄와 사망, 그리고 썩어짐의 악한 세력에서 창조 질서를 구속해 내신다.
바울의 관심은 추상적이지 않고 실질적이다. 그의 목표는 로마 크리스천들 사이에 일어난 분열을 치유하고, 그들의 삶과 일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우리로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이 어떻게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는지를 보여 준다. 이 선물이 값없이 주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일과 일하는 방식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우리가 하는일과 일하는 방식 모두를 변혁시켜 놓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노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시면서 우리에게 이웃을 섬기고 공동체를 세우는 데 필요한 놀랍고도 다채로운 은사를 주신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시간에 따라 피조물의 충만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을 전하는 것이다.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