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고린도후서 서론

목차로 돌아가기

   고린도전서가 신약 교회의 일상을 놀라운 통찰력으로 기술했다면, 고린도후서는 고린도 교회의 기초를 다지고 교회를 세웠던 바울의 마음과 영혼을 잘 담아낸다. 여기에서 바울은 투명성, 기쁨, 좋은 관계, 정직, 명성, 섬김, 겸손, 리더십, 수행과 책임, 화해, 비신자들과 일하기, 격려, 관대함, 제때에 의무 이행하기, 그리고 부의 적절한 사용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인다.

 

   바울은 사도로서 직분을 수행하면서 맞닥뜨리는 매일의 갈등과 기회에서 일과 관련된 주제를 찾아내고 또 다룬다. 스스로 묘사한 대로 고린도후서를 집필하기 이전에 바울은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고후 7:5)에 수차례 직면했다. 이러한 경험은 분명히 바울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신약의 다른 서신과는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 고린도후서가 탄생한다. 여기서 바울은 번민과 불안부터 흥분과 확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수많은 역경을 겪으면서 바울은 자신의 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리더요, 사역자가 되었다. 자신의 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능력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고린도후서의 바울과 그의 가르침에서 매우 실용적인 본보기를 발견할 것이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소통

 

   고린도전서 서론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고린도를 처음 방문한 기간 동안(AD 49년 또는 50년 겨울에서 AD 51년 여름 사이)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 그 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9절에 언급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한 통의 편지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또 다른 편지인 고린도전서를 고린도 교회에 썼다. 또한 고린도 교회를 세 차례 방문했다(고후 12:14; 13:1). 로마서 16장 1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로마서를 썼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한 번은 바울이 엄한 내용을 담고 있는(고후 2:4) 소위 “혹독한 편지”(severe letter)를 이 교회에 썼고, 이 서신은 오늘날에는 없다.[1]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자신의 적대자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기를 바라며 디도 편에 이 편지를 보냈다. 고린도 교회와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 때문에 바울은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초조해했다(고후1:12-13). 마침내 55년 가을, 디도가 고린도에서 돌아오면서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바울의 혹독한 편지를 읽고 나서 고린도 신자들은 바울과의 불화를 진심으로 슬퍼했으며, 이 슬픔은 회개로 이어졌다 (고후 7:8-16).

 

   그러자 바울은 그들 사이가 회복된 일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하나님과 고린도 교인들 모두에게 표현하기 위해 고린도후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린도후서의 첫 일곱 장을 썼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삶에서 구현하라고 명하시는 투명성, 기쁨, 관계에 대한 관심, 진실함, 명성, 섬김, 하나님을 의지함, 윤리적 행동, 인격, 그리고 격려의 본을 보인다. 그리고 8장과 9장에서는 고린도 교인들이 유대에 있는 크리스천들을 구제하기로 약속한 내용을 짚으면서 구제와 제때에 의무 이행하기라는 주제를 설명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어떻게 구제해 채우시는지 설명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필요한 그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가진 것이 풍성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수 있다고 강조한다.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는 경건한 리더십의 특징들을 묘사하는데, 고린도 교회의 일부 교인들을 거짓 인도했던 소위 “지극히 크다는 사도”(super-apostle)에 관한 걱정스러운 소식 때문이었다.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교회 리더십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 기록한 바울의 말은 모든 직장에 실질적으로 적용이 가능하다.

 

​​

어떤 학자들은 고린도후서 10-13장이 바울이 언급한 “혹독한 편지” 또는 그것의 일부이며 이것은 나중에 고린도후서에 추가된 것이므로 원래 고린도후서의 형태는 9장에서 끝난다고 주장한다. 이 주제의 간략한 변론에 대해서는 Charles H. Talbert, Reading Corinthians: A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on 1 and 2 Corinthians (New York: Crossroad, 1987), xviii-xxi를 보라. 고린도후서 10-13장의 억양이 이전 장들에서 들을 수 있는 억양보다 도드라지게 호되지만, 고린도후서는 처음부터 통일성을 갖춘 편지로 쓰였음을 의심할 수 없다.

관계에 대한 감사 (고후 1:1-11)

목차로 돌아가기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인들과 가진 깊은 관계를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 관계는 매우 긴밀해서 한 사람에게 어떤일이 일어나면 마치 모든 사람이 겪은 일처럼 여겼다. 바울은 이렇게 쓴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고후 1:6).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7).

 

   바울은 관계를 마치 결혼 관계처럼 묘사해 놓았다. 본 서신에서 드러나는 바울과 교회 사이의 긴장된 관계를 고려하면 이러한 친밀한 묘사가 사뭇 놀랍다. 첨예한 의견으로 서로에 대한 실망은 물론 심지어 분노까지 품은 이들이 어떻게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고후 1:7)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좋은 관계는 상호 합의가 아닌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호 존중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장생활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리는 직장 동료를 선택할 수 없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그들의 사도로, 또 바울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끄실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직장에서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호감이 아니라 공동 임무의 성취를 위해 형성된다. 이것은 교회 건립, 자동차 부품 생산, 보험 처리, 대학 강의를 포함해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적용되는 사실이다. 다만 어려운 일일수록 좋은 관계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직장에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가? 고린도후서의 나머지 본문에서는 투명성, 진실함, 책임, 관대함 등 직장에서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탐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위의 주제를 모두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기술과 방법만 알아서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서로를 위한 중보기도는 좋은 관계의 초석이다. 바울은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라고 요청하고, 그다음에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고후 1:11)에 관해 이야기한다.


   당신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얼마나 많이 투자하는가? 그 답은 당신이 직장 동료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지를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중보기도를 할 만큼 동료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동료의 필요와 근심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는가? 동료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삶을 알기 위해 충분히 노력하는가? 다른 이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의 삶을 충분히 공유하는가? 직장 동료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도 될지 묻거나, 또는 당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그들에게 요청해 본 적이 있는가? 동료들이 내 신앙을 공유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순수한 제안이나 나를 위해 기도 또는 기원해 달라는 요청을 대부분의 경우 환영한다.

우리는 충분히 투명한가 (고후 1:12-23)

목차로 돌아가기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의 본론에서 자신이 고린도인들에게 솔직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말하지 않았던 고충을 털어놓는다. 바울은 고린도를 다시 방문하겠노라는 약속을 두 번이나 취소했다. 바울이 불성실했거나 또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 뒤에서 자기 뜻대로 하려고 남몰래 책략을 쓰는가?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12-14절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다룬다. 바울은 고린도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행동이 항상 투명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바울의 행동은 그가 “육체의 지혜”(고후 1:12)라고 일컫는 모략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체면을 살리는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린도인들에게 창피를 주거나 그들을 꾸짖고 싶지 않았다. 고린도를 재방문한다면 비난과 책망보다는 기쁨을 가져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에 되돌아가는 계획을 연기했다(고후 1:23-24).


   당연히 바울의 진실은 의심을 받았지만 바울은 그동안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투명성을 지켜왔기 때문에 그들이 계속해서 자신을 신뢰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들이 세상에서 특별히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함’(고후 1:12)을 교인들에게 상기시킨다. 지금까지 바울의 행동을 보아 온 터라 이들은 바울이 자기 속내를 망설임 없이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후 1:17-20).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기에, 바울이 고려해야 했던 모든 요소들을 고린도 교인들이 알게 된다면 결국에는 그들도 ‘완전히 알게 될 것’(고후 1:1-13)이라고 확신한다.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우리를 이미 부분적으로는 이해했습니다”(고후 1:14, 새번역)라고 바울이 말하는 데서 교인들이 바울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직장 동료들이 우리를 신뢰할 만큼 충분히 투명한가? 어떤 사람이든, 회사든, 조직이든 하루도 빠짐없이 진실을 숨기고자 하는 유혹에 직면한다. 우리는 고객 또는 경쟁자로부터 부정하게 신뢰를 얻기 위해 우리의 동기를 모호하게 하는가? 책임을 회피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반대하는 요소들을 숨기기 위한 방편으로 비밀리에 결정을 내리는가? 면전에서 동료를 지지하는 척하다가 뒤에서는 조롱하지는 않는가? 바울의 모범은 이러한 행동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더욱이 우리가 이러한 행동을 통해 단기적인 이익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동료들의 신뢰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득보다 실이 많다. 그리고 만일 동료들이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인들 우리를 신뢰하실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정보를 항상 밝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누설해서는 안 되는 개인이나 조직의 비밀은 있기 마련이다. 모든 정보를 모든 사람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기에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습니다”가 정직한 대답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을 얼버무리기 위해, 다른 사람에 대한 비교우위를 얻기 위해, 또는 우리 자신을 거짓되이 긍정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기밀 유지를 구실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동기가 의심을 받는 경우, 그동안 견고하게 쌓아 온 정직성과 신뢰가 그 의심을 해소하는 최고의 방법이 될 것이다.


   투명성은 고린도 사람들을 위한 바울의 사역에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편지 전반에 걸쳐 이 주제를 언급한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 4:2). “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놓았습니다”(고후 6:11).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일하는 기쁨(고후 1:24)

목차로 돌아가기

   바울은 관계를 세우는 다음 수단으로 ‘기쁨’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기쁨은 바울이 왜 그토록 효과적인 리더였으며 그와 교제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견고하고 신뢰할 만한 동역자가 되었는지 설명한다.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권위를 가진 사도였지만, 그의 목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도록 강요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자인가를 두고 논쟁하고 있었을 때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게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5-26).


   크리스천의 사역의 정수는 바로 다른 사람들이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곁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만일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우리가 수행해야 할 최우선 명령이라면, 우리의 직장은 어떤 모습일까?[1] 여기에서 기쁨이란 순간의 행복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일을 하는 데서 오는 깊은 즐거움이다. 동료와 거래처, 고객, 학생, 환자와의 관계에서 깊은 상호 만족감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당신의 목표로 삼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Dennis W. Bakke, Joy at Work: A Revolutionary Approach to Fun on the Job (Seattle: PVG, 2005)과 Raymond Bakke, William Hendricks, and Brad Smith, Joy at Work Bible Study Companion (Lake Mary: Charisma House, 2005)은 상세하게 이 질문을 탐구한다. 

임무 완수가 먼저인가, 관계 회복이 먼저인가(고후 2:12-16)

목차로 돌아가기

   직장에서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은 간단하다. 바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난 후 소아시아의 북서쪽 끝머리에 있는 항구 도시 드로아로 가서, 디도가 고린도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늘 그랬듯이 거기 머무는 동안도 열성을 다해 선교 사역을 수행했고, 하나님은 그의 노력을 축복하셨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인 이 도시[1]에서의 사역이 전도유망했음에도 바울은 성경에서 밝힌 대로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고후 2:13) 드로아에서의 사역 일정을 단축했다. 고린도 신자들과의 긴장된 관계에서 느낀 고통 때문에 자신의 열정 그 자체인 사역에 정성을 들일 수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만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마게도냐로 떠났다. 자세한 내용은 이 장의 “서론” 부분을 보라.


   이 본문에서는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째, 바울은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황폐해졌다면, 아마 바울의 마음은 초연하거나 가벼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제단에 자신의 헌금을 놓고 자신의 형제에게 먼저 가서 화해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마5:23-24)에 바울이 익숙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바울은 확실히 그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사태가 수습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그 목적을 이루려고 무진 애를 썼고 기도에 힘을 기울였다. 둘째,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큰 차질이 생긴다고 해도 화해하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 바울은 사역을 위한 좋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는 고린도인들과 그들의 재정적 필요를 외면할 수 없었다. 고린도 교인들과의 틀어진 관계 회복이 가장 먼저였다.


   그만큼 관계가 중요하다. 물론 지금 하는 일을 당장 멈추고 긴장된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항상 가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 (task)가 무엇이든지, 관계는 우리의 일(business)이다. 임무는 중요하다. 관계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일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관계가 긴장되어 있거나 깨어져 있음을 깨닫거나, 혹은 깨어진 것으로 의심된다면, 마태복음 5장 23-24절의 정신에 입각해 임무 완수와 관계 회복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절박한 문제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 답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만일 맡은 임무가 중요한 일이거나 긴장 관계의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면, 어느 문제가 보다 절박한지 생각하고, 존경할 만한 형제 또는 자매를 찾아 상담을 받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다.

드로아는 유럽과 소아시아 사이의 무역과 소통에 중요한 중심지였다. 사람들은 이 항구를 거쳐 로마제국 전역을 여행했다. Jerome Murphy-O’Connor, Paul: A Critical Life (Oxford: Clarendon, 1996), 300쪽을 보라. 

돈을 다루는 방식에서 진실함이 드러난다 (고후 2:17)

목차로 돌아가기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12절 이후 다시 한 번 자신의 고린도 방문 연기와 관련해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들을 다룬다. 그가 고린도 교회에서 재정 후원을 받지 않은 일로 고린도 교인들은 마음이 상한 것 같다. 이에 바울은 자비량하는 것이 진실함의 문제였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바울이 설교하는 바를 바울 스스로도 정말로 믿었다고 신뢰했을까? 아니면 당시 로마 어느 도시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사람들처럼 바울 역시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설교했다고 여겼을까? 바울은 당시 연설을 하고 두둑한 비용을 챙겼던 철학자 및 수사학자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 받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1]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진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부자가 되려고 이곳저곳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보내신 것으로 이해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


   이것은 특히 돈 문제에 관한 한, 그 동기는 단지 개인의 문제일 수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우리가 돈을 다루는 방식은 크리스천으로서 진실함의 문제를 다루는 척도가 된다. 사람들은 우리가 숭고한 원칙에 맞게 돈을 다루는지, 또는 돈벌이만 된다면 우리의 원칙을 저버리는지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돈을 헤프게 사용하는가? 은밀히 수입을 숨기고 있는가? 의심스러운 탈세에 관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가격 인상, 수수료, 보너스 등을 요구하는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재정적 이익을 취하는가? 불균형적인 재정 이익을 얻기 위하여 불합리한 계약을 체결하는가?

 

   우리가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주위 사람들 역시 우리의 행동이 기독교 신념과 일치한다고 인정하는지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의 이름에 불명예를 안겨 주는셈이 된다.

 Murray J.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Grand Rapids: Eerdmans, 2005), 253-254쪽을 보라.

명성을 추구하는 사회(고후 3장)

목차로 돌아가기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을 두 개의 수사적 질문으로 시작하는데, 이 두 질문 모두 부정적인 대답을 전제한다.[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고후 3:1). 고린도 교인들의 오랜 친구 바울은 교회에 출석하는 다른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소개서나 추천서가 자신에게도 필요한지 비꼬아 묻는다. 이런 편지는 고대 사회에 흔했고, 일반적으로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었다. 일례로 로마의 정치가였던 키케로(Cicero)는 많은 추천서를 썼는데, 추천서가 으레 그렇듯이 전형적인 칭찬 일색이었다. 그러나 수신자들은 칭찬 일색인 이런 추천서에 피로감을 느꼈고, 그 결과 키케로는 때때로 수신자들이 첫 번째 추천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두 번째 편지를 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2] 다시 말해 추천서를 당시에 귀했던 파피루스 종이에 쓸 가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경우든 바울은 이러한 편지가 진정 필요 없었다. 고린도 신자들은 바울을 친밀히 알았다. 바울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편지는 이미 그들의 마음에 쓰여 있었다(고후 3:3). 바울의 설교를 통한 고린도 교인들의 개인적 회심뿐만 아니라 한 교회로서 그들의 존재 그 자체야말로 바울이 자신의 사도 직분에서 필요로 했거나 원했던 표창이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수고가 맺은 열매를 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바울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더욱이 바울은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바울은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라고 썼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신임장과 추천서를 쌓아 놓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지 여부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명성을 쌓아 가는가?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신의 활동을 선택할 때, 그것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 또는 자신들이 정말 즐기는 활동인지 여부가 아니라, 그 활동이 대학 또는 대학원 입학에 유리한지를 우선 고려한다. 이러한 경향은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업무, 전문가 모임, 만찬회, 특권층의 사람 및 조직과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모든 사회활동에서도 계속 이어질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일을 선택할 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가장 잘 섬길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이런 바울의 모범을 따른다면 우리도 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고 지속적인 결과를 낳으며 사람들의 삶이 보다 나아지도록 영향을 주는 확실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 일할것이다.

 Harris, 258쪽.

Cicero, Epistulae ad Familiares (The Letters to His Friends), 13.6a를 보라. 더욱 면밀한 논의를 위해서는 Peter Marshall, Enmity in Corinth: Social Conventions in Paul’s Relations with the Corinthians, Wissenschaftliche Untersuchungen zum Neuen Testament 2.23 Tübingen: Mohr Siebeck, 1987), 91-129쪽, 특히 93-95쪽을 보라.

인도하다, 섬기다(고후 4장)

목차로 돌아가기

    고린도후서 4장은 바울의 사역과 긴밀히 연관된 주제들, 즉 투명성, 겸손, 연약함, 리더십, 섬김 등을 한데 모아 설명한다. 우리는 실제 삶의 상황에서 사역하는 바울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이 주제들은 그의 이야기 속에 서로 얽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각각의 주제를 최대한 분명하게 살펴보기 위해 이를 개별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투명하려면 겸손할 수밖에 없다

 

  고린도후서 1장 12-23절에 관한 논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4장에서 투명성의 주제로 돌아온다. 그리고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삶과 일의 실제모습을 보여 주려면, 겸손해질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숨길 것이 없다면 사람들에게 투명해지는 것은 당연히 훨씬 쉬워다. 바울은 스스로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고후 4:2)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칭찬받지 못할 일에 얽힌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자신에 대해 솔직해야만 투명성을 유지할 수 있다. 누구든 일을 수행하면서 실수할 수 있다. 바울은 점토로 만들어져 쉽게 깨어지는 당시 가정용에서 널리 쓰이던 그릇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7)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고대 근동의 유적지를 방문하면 이 그릇의 파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만을 막으시려고 “육체에 가시”(고후 12:7)를 주신 사실을 회고하면서 후에 이러한 생각을 강화한다.


   스스로의 약점을 알면서 동시에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특히 진정한 사과를 할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 공인들의 사과는 진정한 사과라기보다 얄팍하게 포장된 정당화에 가깝다. 왜일까? 스스로를 자신감의 원천으로 삼는 경우 사과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위축시킬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자신감은 자신의 의 또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존하는 데서 나온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만일 우리 역시 우리가 성취하는 좋은 일들이 우리 자신이 아닌 주님의 능력을 반영하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시길 바라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을 포함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연약함, 진정한 능력의 원천

 

   사실 연약함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의 원천이다. 우리가 겪은 고난은 그저 불운한 경험이 아니라, 진정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실질적인 수단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발생한 것과 같이,[1] 역경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사도들의 인내는 그와 꼭 같은 능력이 그들 안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데 필요하다는 생각에 강인함과 무적의 이미지를 보여 주려고 한다. 그건 고린도에서나 우리 문화에서나 모두 마찬가지다. 자신의 본래 모습보다 더 강하고, 영리하며,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에게 우리를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연약함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수 있다. 당신의 힘과 활력이 실제로는 본래 모습이 아니라 당신의 연약함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이 당신의 업무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가? 칭찬을 받으면 당신은 자신의 탁월함을 더욱 내세우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본래 당신의 잠재력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도우셨다고 간증하는가? 대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유능하다고 생각해 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재능을 발휘하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어려운 환경을 숨기지 않고 견뎌 낸다면, 외부로부터 오는 힘의 원천, 즉 죽음에서 예수님을 부활시킨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역사함이 명백해질 것이다.

 

 섬김의 리더십은 꽃길이 아니다

 

   자신을 위대하게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겸손과 연약함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목적은 위대함이 아닌 섬김이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이 구절은 ‘섬김의 리더십’을 고전적 개념으로 설명한 성경 진술 가운데 하나다. 팔레스타인의 경계를 넘어 기독교 운동을 진두지휘한 바울은 자신을 일컬어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되돌아보는 듯하다(눅 22:25-26; 고후 1:24). 예수님과 제자들은 리더로서 다른 사람들을 섬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라면 어떤 리더 자리에 있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당한 권위까지 행사하지 말라거나 리더십을 소극적으로 발휘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우리의 지위와 권력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안을 증진시키는 데 사용하라는 뜻이다.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다는 바울의 말은 곱씹을수록 엄중한 의미가 느껴진다. 리더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먼저 추구해야 하며, 종은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종은 밭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난 후 들어와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그후에야 자신을 위해 먹고 마신다(눅 17:7-10).


   섬김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끌어 가다 보면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세상이 너무나 타락해서 다른 사람을 섬길 때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바울은 고통, 곤경, 거의 죽음에 가까운 핍박을 당했다(고후 4:8-12). 크리스천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기 전에 우리 자신을 돌볼 권리를 희생할 의지가 없다면, 리더의 자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349쪽.

일의 수행과 책임 (고후 5:1-15)

목차로 돌아가기

   죽음 직전의 상황에 끊임없이 직면했던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고린도인들을 깨우쳐 준다. 우리는 모두 마지막 심판 날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고후 5:10)이다. 이러한 표현이 생소할 수 있다. 구원은 전적인 은혜에 기인하지 우리 자신의 행함의 결과가 아니라는 은혜의 교리(엡2:8-9)와 바울을 연관 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로마서 2장 6-10절을 상기한다면 또 그렇게까지 생소한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을 머릿속에 그릴 때 단순한 캐리커처가 아닌 바울이 실제로 말한 것에 기초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의 가르침은 예수님, 야고보, 심지어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도 조화를 이룬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선행으로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결코 믿음이 아니다. 참으로 믿음과 순종은 서로 긴밀히 엮여 있어서 바울 역시 실제로 이 둘을 모두 염두에 두고 있을 때조차 후자를 강조하며, 이는 본 구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든 행동을 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야 한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으로 묘사할 수도 있고, 이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된 의로움의 일’로도 묘사할 수 있다.


   어찌 됐든 바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사는지 눈여겨보신다. 이것을 직장 용어로 표현하면 우리가 어떻게 일을 수행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행한 것과 행하지않은 채 남겨 둔 모든 것을 주 예수님께 직고해야 한다. 이것을 일터에서 쓰는 용어로 표현하면 책임에 해당한다. 일을 수행하고 또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를 하나님께는 중요하지 않은 세속적인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는지, 직무를 소홀히 하는지, 무단결근을 하는지, 또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지 않고 하는 시늉만 하는지 모두 지켜보신다.


   그렇다고 직장에서 우리한테 거는 기대에 하나님께서도 항상 동의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탁월한 일을 수행할 때 탁월함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잣대는 세상의 관리자나 감독자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특히 고용주의 기대를 만족시키느라 비윤리적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하나님은 고용주와는 다른 평가를 내리실 것이다. 만일 상사가 당신에게 고객을 현혹시키거나 동료들을 폄하하라고 지시한다면, 부디 상사에게서 나쁜 평가를, 하나님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도록 애쓰라.


   하나님은 우리 행위를 높은 기준을 적용해 평가하신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 가족과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동료, 상사, 피고용인, 고객을 대우한 방식 등 스스로 행한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교리를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신 의도를 보여 준다.

화목하게 하는 일꾼 (고후5:16-21)

목차로 돌아가기

   행여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더욱 애쓰라고 요청하는 것처럼 들리는가? 그렇다면 고린도후서의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어, 노력이 아니라 세상을 새로이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길 바란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7-19).


   바울은 우리가 완전히 변하여 “새로운 피조물”의 일원이 되기를 바란다. “피조물”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인 창세기 1장과 2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땅을] 경작하며”(창 2:15), 땅의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며”,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땅을 “다스리게”(창 1:26) 하기 위해 하나님과 협력하여(창 2:19) 남녀가 함께 일하기를 의도하셨다(창 1:27; 2:18).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 의도에서 노동은 ‘실재’(實在)의 중심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피조 세계를 손상시키면서 일은 저주를 받았으며(창 3:17-18)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이 “[모든 것이]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할 때 이 “모든 것”은 일의 세계를 핵심 요소로 포함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그 아들을 옛 창조 세계로 보내심으로써 새 창조물을 만드셨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 이것은 세상의 한 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은 화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하도록 부름받았다(고후 5:18).

 

   우리는 세상의 모든 영역과 화목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매일 출근할 때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사람과 하나님(복음전도와 제자도), 사람과 사람(갈등 해결), 사람과 일 사이(진정한 필요를 채우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돌보는 재화와 용역)의 화목이 모두 포함된다.


   화목하게 하는 사역에는 세 가지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사람과 하나님과 창조 세계 사이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세상의 병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진정한 화목을 이룰수 없다. 이는 한 나라의 대사가 자국과 파견된 나라 모두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에서 자국을 효과적으로 대표할 수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두 번째, 사람들을 판단하기보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즉, 사람을 착취하거나, 제거 또는 아첨할 대상으로 보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고후 5:15) 사람으로 보라는 얘기다. 만일 우리가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삶과 일의 현장을 떠난다면, 그건 사람과 일을 육신을 따라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우리의 직장과 제품 및 용역의 질을 향상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화목하게 하는 자가 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씨앗이 된다는 것은 당연히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를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이 셋을 모두 행한다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람, 조직, 세상의 장소와 모든 일들을 화목하게 하도록 하여, 이 모두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세계의 일부가 되게 하는 사역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Wayne T. Alderson: Valuing People Helps Business,” Ethix 66 (Jul.-Aug.2009), http://ethix.org/2009/10/01/valuing-people-helps-business에 접속함.

투명성에 대한 재고 (고후 6:11)

목차로 돌아가기


   살펴본 바와 같이(고후 1:12-23) 투명성은 고린도후서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고후 6:11)라고 말하면서 이 주제를 갑자기 다시 언급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앞에 자신의 삶을 숨길 바가 전혀 없었다. 비록 바울은 이전에 언급했던 것에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지는 않지만 투명성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지는 점점 더 명백해진다. 누군가 자신의 사역에서 무언가를 문제 삼는다면, 바울은 이전에 고린도 교인들과 교제를 나눌 때 매순간 정직했던 일을 자신 있게 내세울수 있다. 우리 각자도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비신자들과 일할 때(고후 6:14-18)

목차로 돌아가기

   고린도후서 6장 14-18절에서 바울은 비신자들과 잘못된 짝을 짓는 (말 그대로 하면 “불균형하게 멍에를 메는”)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부부 관계(이 부분은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와 업무상 관계에 모두 적용된다. 이 지점까지 바울은 우리가 같이 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고린도전서 5장 9-10절에서는 우리가 비신자들과 같이 일해야 한다고 말했고, 고린도전서 10장 25-33절에서는 그렇게 하는 방법을 다루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6장 14-18절에서는 비신자와 함께 일하는 상황에 대해 주의를 준다. 그러면서 소와 나귀에게 한 멍에를 메워 밭을 갈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신명기 22장 10절 말씀을 거론한다. 신명기의 명령은 나귀가 소의 짐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고 소는 걸음이 더 빠른 나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이보다 더 심오한 영적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불법, 어둠, 우상숭배, 사탄을 섬기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조언한다(고후 6:14-15).


   우리는 비신자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들과 함께 일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바울은 그들과 “불균형하게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와 정반대에 해당하는 것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과 한 멍에를 메는 것이다. 멍에의 한 부분은 우리에게, 다른 쪽은 예수님의 어깨에 지우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멍에를 맨 팀 전체를 이끄는 소처럼 우리의 자세, 속도, 길을 결정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이끄심에 따른다. 예수님의 멍에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당기심, 인도하심, 방향 지시를 느낀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분의 멍에로 우리가 그분의 팀에서 효과적으로 일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분의 멍에는 우리를 이끌고 민감하게 만들며 그분과 이어준다. 예수님과 한 멍에를 멜 때 우리는 (고린도후서 5장 16-21절을 다룰 때 살펴본 대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하시는 예수님의 동역자가된다. 우리를 예수님의 멍에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그 어떤 멍에도 결코 이런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온 우주를 변화시키는 일을 한다.


   바울이 우리에게 업무상의 관계에서 불균형한 멍에를 메지 말라고한 것은 예수님이 맡기시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막거나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일하지 못하도록 막는 관계에 얽히지 말라는 경고다. 여기에는 강한 윤리적 요소가 담겨 있다. 바울은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겠느냐’고 묻는다(고후 6:14). 맡은 일의 요구를 따를 경우 고객을 해롭게 하고, 유권자들을 속이고, 환경을 오염시키게 된다면,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의 의무를 위반하는 멍에를 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한 멍에를 메는 것은 “천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비추어 세상을 화해시키고 새롭게 하는 일로 우리를 이끈다.


   그렇다면 비신자들과 불균형한 멍에를 메는 것은 예수님의 가치관 및 목적과 양립할 수 없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결정과 행동들에 매이는 상황이나 관계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우리가 일터에서 만나는 상사들과 동료들의 동기와 가치관과 일하는 방식은 상당 부분 크리스천인 우리의 신념과 양립하지 않을 수 있다. 근무 환경과 동료들의 신념이 우리의 믿음과 크리스천의 삶의 경험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대부분은 비신자들 사이에서 일하고, 바울은 그것이 크리스천들의 통상적 상황이라고 간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균형한 멍에를 메지 말라는 이 금지 명령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먼저 취업에 대해 생각해 보자. 취업은 합의된 보수를 받고 그 대가로 합의된 일을 하겠다는 계약으로 이루어진다. 그 일이 본인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로울 경우 계약을 자발적이고 정당하게 해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멍에를 벗을 자유를 가진 것이다. 멍에를 벗는, 즉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필요한 상황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상황을 생각해보자.


   첫째, 당신이 대체로 윤리적인 조직에 고용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당신과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 영향력이 당신의 신앙생활을 해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신자마다 다르게 분별할수 있다. 주위에 널려 있는 유혹과 불신의 한복판에서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돈, 권력, 성적 부도덕, 인정받고 싶은 욕구 같은 유혹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려올 경우, 우리는 바울의 금지 명령을 몸과 영이 더럽혀지거나 주님과의 관계가 훼손되느니 직장의 ‘멍에’를 벗는 것이 낫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런 유혹 한복판에서도 복음의 진리와 사랑과 소망의 증인으로 일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이런 경우 보통 그들에게는 일터의 유혹 바깥에 머물면서 그들이 신앙을 유지하도록 도울 누군가가 필요하다.

 

   에스더는 이런 상황의 흥미로운 사례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유다 사람들의 보호자 역할을 맡기시려고 아하수에로 왕의 하렘으로 부르셨다 (에 4:12-16). 그 “일”에 따르는 유혹은 왕에게 간택된 왕비로서 지위와 특권을 지키는 것이었다(에 4:11-12). 사촌오빠 모르드개가 에스더의 일상을 매일 확인하면서(에 2:11) 그녀를 이끌어 주고 자기 백성을 구하는 일에 목숨을 걸라고 촉구하지 않았다면(에 4:8) 그녀는 화려한 삶의 유혹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에스더는 왕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왕의 심기를 건드리면 당장 잘못될 수 있는 극도로 취약한 입장에 있기도 했다. 이것은 “불균형한 멍에”를 멘 분명한 사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에스더가 하나님과 멘 멍에가 왕과 멘 멍에보다 더 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에스더의 사례는 자신의 신념을 거스르라는 요청을 “거부”할 때 따라오는 결과를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 비신자와의 관계는 긴밀해지면서도 예수님과 여전히 한 멍에를 멜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지금의 일자리를 도저히 그만둘 수 없을 정도로 거기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의 형편에 버겁거나 소득 수준을 넘어서는 지출을 하고 빚을 진다면, 어떤 일자리도 금세 불균형한 멍에로 변할 수 있다. 보다 검소한 생활을 하고 충분한 저축을 확보한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직장 상황이 어려워져도 그리스도와 한 멍에를 멘 상태를 유지하기가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불균형한 멍에”를 메는 두 번째 사례는 비신자와의 동업이다. 권력관계에서는 이쪽이 훨씬 균형 잡힌 협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윤리적인 면에서는 똑같이 위험할 수 있다. 동업자 중 한 사람이 계약서에 서명을하고 나서 돈을 쓰고 부동산을 사거나 팔면 (법을 어기면) 나머지 사람도 그 행동이나 결정에 묶이게 된다. 이런 종류의 동업은 소와 나귀의 경우와 더 비슷하다. 두 동업자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힘을 쓰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 신자 사이의 동업에도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크리스천들 역시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동업에는 지혜와 분별력이 있어야 하고, 필요할 경우 동업 관계를 끝낼 힘과 의지도 있어야 한다. 거기에 값비싼 대가가 따른다 해도 말이다. 고린도후서 6장에 나오는 바울의 금지 명령은 적어도 동업 관계에 들어가기 전에 기도하고 분별력을 발휘해야 할 이유 정도는 돼야 하며, 그에 따라 동업 조건에 계약상의 한계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사고파는 관계, 투자하는 관계, 계약을 맺고 하청을 주는 관계, 동종업체협회 등 여러 다양한 업무상의 관계가 있다. 불균형한 멍에를 메지 말라는 바울의 경고는 언제 어떻게 그런 관계를 맺을지, 더 중요하게는 언제 어떻게 관계를 정리할지 분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보다 그런 관계에 더 의존할 때 위험은 증가한다.


   끝으로, 바울의 말을 핑계 삼아 비신자들을 ‘대결’ 구도로 바라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비신자들이 본질적으로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바울 본인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고전 5:12-13). 우리 역시 우리의 죄로 다른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매일 필요하다. 우리는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일이 그리스도의 목적과 뜻을 완수하고 있는지 분별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

서로 칭찬하고 격려해 주라(고후 7장)

목차로 돌아가기

   고린도 교인들을 꾸짖은 직후 바울은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고후 7:4)라고 그들을 칭찬한다. 혹자는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왜 그토록 자랑하는지 놀랄수 있다. 우리 가운데 대다수는 자랑은 죄이고(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성취를 자랑하는 일조차도 신중해야 한다고 배워 왔다. 더욱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자랑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들은 많은 어려움에 처한 회중이었고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들을 날카롭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의심을 받아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바울은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칭찬하기를 꺼리지 않았고, 고린도 교인들과 긴장된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들이 보여 준 변화를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마땅하며 아첨하는 말이 아님을 언급한다(고후 7:11-13).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14절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라고 말하며 칭찬은 진실해야 한다는 요점을 반복한다.


   이것은 우리가 직장에서 교류하는 동료, 피고용인, 그 외 다른 사람들에게 구체적이고 정확한 칭찬을 시의적절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킨다. 과장되거나 일반화된 칭찬은 공허하며, 진정성이 없거나 간계를 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끊임없는 비난은 상대를 세우기보다 가차 없이 무너뜨린다. 그러나 일을 잘 수행했을 때 진정으로 인정하고 감사의 말을 건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다. 이러한 말은 상호 존중의 증거이자 진정한 공동체의 토대이며, 계속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라는 말씀 듣기를 기대한다. 그러므, 우리 역시 칭찬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이와 같은 칭찬을 기꺼이 해 주어야한다.

넉넉한 베풂, 선택이 아닌 필수 (고후 8:1-9)

목차로 돌아가기

   서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린도후서 8-9장은 바울 서신에서 독립적으로 유대에 있는 교회를 위한 헌금을 주제로 다룬다. 바울은 자신의 교회에서 이 계획을 열정적으로 진척시켰다(고전 16:1-3). 그는 마게도냐 교회들의 본이 되는 “연보”(generosity)를 언급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그에 못지않은 연보를 기대한다는 암시로 이 본문을 시작한다. 고린도 신자들이 믿음의 풍성함, 진리를 선포하는 능력,[1] 지식, 열정과 사랑을 보여 준 것처럼, 그들은 넉넉하게 베푸는 “은혜”(헬라어로 charis)에도 풍성하도록 힘써야 한다. 

 

   여기서 “은혜”라는 용어에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 먼저 ‘영적 은혜’라는 의미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너그러움(관대함)의 미덕이라는 은혜다. 두 번째로는 헌금을 바치는 그들의 은혜를 일컫는 ‘기부’의의미다. 이는 넉넉하게 베푸는 것이 크리스천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일부임을 한층 분명히 해 준다.


   직장에서의 넉넉한 베풂은 여러 면에서 상황을 부드럽게 만드는 윤활유다. 고용주가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직원들은 필요한 경우 자신들의 조직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헌신하려고 할 것이다. 동료에게 관대한 직원들은 언제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다 즐겁고 만족스러운 업무 환경을 만들 것이다.


   너그러운 베풂은 항상 돈 문제만은 아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고용주는 직원들을 멘토링하는 데 시간을 내고, 직장을 예쁘게 꾸미며, 훈련과 개발의 기회를 제공하고, 문제나 불평을 갖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며, 병석에 있는 직원의 가족을 방문함으로써 관대함을 실천할 수 있다. 동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일을 더 잘하도록 돕고, 아무도 조직 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자들 편에 서고, 진실한 우정을 나누며, 칭찬하고, 잘못한 것은 사과함으로써 관대함을 베풀 수 있다. 스티븐 해리슨(Steve Harrison)은 워싱턴대학교에 외과 레지던트로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간호조무사, 병원 수위, 이송담당, 식당 직원들의 이름을 누가 더 많이 외워서 그들을 만날 때마다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지로 경쟁을 했다.[2]

문자적으로, “말에서.”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574쪽을 보라

 Steve Harrison, The Manager’s Book of Decencies (New York: McGraw-Hill, 2007), 67쪽

제때 의무 이행하기 (고후 8:10-12)

목차로 돌아가기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이 1년 전부터 유대에 있는 교회를 위한 헌금에 참여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걸 상기시킨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들은 그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아마도 바울의 사역에 의심이 생겼고, 또 그가 이전에 방문한 동안 생겼던 긴장이 여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고린도 교인들의 노력은 시들해졌고, 바울이 편지를 쓸 즈음엔 그가 이전에 교인들에게 각자 헌금을 모으라고 했던 지시(고전 16:1-3)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바울의 권고는 직설적이다.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후 8:11). 이러한 바울의 권고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특별히 우리의 직장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시작한 것은 반드시 끝내야 한다. 환경이 변하거나 다른 우선순위들이 생겨나 우리의 의무를 조정해야 하는 여러 상황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우리말성경)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종종 우리도 고린도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늑장을 부릴 때가 있다. 이에 바울은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의지한다.


   너무나 단순한 권고여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생산성 문제 이외에도 증인의 일로서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과소평가한다. 만일 우리가 직장에서 평범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님이 그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이루실 것임을 어떻게 우리의 말 또는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겠는가? 점심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보고서 제출이나 부품 납입, 또는 임금 인상을 제때에 이행하는 편이 훨씬 낫다.

소유를 나누는 연습 (고후 8:13-15)

목차로 돌아가기

   바울은 헌금 이면에 있는 기본 원리를 고린도 사람들에게 상기시킨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4). 이것은 이방인 교회가 희생을 감수하며 유대인 교회를 구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자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함을 뜻한다. 유대인 신자들은 현재 궁핍한 반면 고린도 교회는 넉넉하다. 하지만 상황이 역전되어 구제가 반대 방향으로 행해지면,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고후 8:14)할 수도 있다고 조언한다.


   바울은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개의 상이한 이미지를 언급한다. 첫째 이미지인 ‘균형’은 추상적이지만, 고대 사회나 오늘날이나 자연계와 사회에서의 평형 상태는 안정과 건강을 가져다준다는 상식에 호소한다.[1] 구제를 받는 자는 이 은혜가 심각한 부족을 해소시켜주기 때문에 혜택을 받는다. 후원하는 자는 이 은혜가 지속 불가능한 풍족함에 순응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에 혜택을 받는다. 둘째 이미지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도록 만나를 주셨던 옛 시대를 고린도인들에게 상기시킨다(출 16:11-18). 비록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두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적게 거두었지만, 하루 분의 식량을 나눌 때는 어느 누구도 너무 많이 거두거나 너무 적게 거두지 않았다.


   더 부유한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한 부를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 만인의 자원이 ‘균형’을 이룰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원리는, 개인의 자립 (self-reliance)에 가치를 두는 현대 사회의 인식을 흔든다. 바울이 크리스천들을 ‘예수를 위한 종’(고후 4:5)이라 불렀을 때, 그건 분명 우리의 소득과부가 100퍼센트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보유한 소득이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균형을 이루는 수준까지 우리의 소유를 분배하기를 원하실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 원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오늘날 세상의 구조에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원리에 대한 논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정치적 논쟁으로 번지기 때문에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기가 어려워졌다. 이 논의에서의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다. 국가가 더 가진 자들의 재산을 취해 더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함으로써 부의 균형을 이룰 권리 또는 의무가 있는가? 

 

   이것은 바울의 상황과는 매우 다른 문제다. 바울의 경우, 교회는 교인들에게 다른 교회의 가난한 교인들에게 자발적으로 기부하기를 요청했다. 사실 바울은 이 문제에서 국가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은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고후 8:8)라고 말하며, “인색함으로나 억지로”(고후 9:7) 헌금을내지 않도록 했다.


   바울은 특별한 사회 제도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기꺼이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는다. 그는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그들에게 보이라”(고후 8:24)라고 간청한다. 크리스천들은 빈곤 해결 방법을 논의하는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헌금이나 투자, 그 외의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또는 이 방법들을 조합해야 하는가? 교회, 기업, 정부, 비영리 단체의 구조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 법률 제도, 인프라, 교육, 문화, 개인적 책임, 조직 관리, 고된 노동, 그 외 다른 요인들의 어느 측면을 쇄신하거나 발전시켜야 하는가? 크리스천들은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관대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을 개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2]

 

  빈곤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다. 돈이 있다면 전 세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주저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전 세계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극빈에 시달리고 있으나 동시에 지구 한편에서는 수억명의 크리스천들이 과도한 풍요를 즐긴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의 단호한 말은 우리가 절대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Harris,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590쪽

John Stott, The Grace of Giving: 10 Principles of Christian Giving, Lausanne Didasko Files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2012)에서 그가 읽은 고린도후서 8-9장 본문에 기초해 깊이 있게 논한다.

하나님의 경제법 (고후 9장)

목차로 돌아가기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넉넉한 나눔을 독려할 때, 제한된 자원의 세상에서 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염려를 언급해야 함을 알았다. 바울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 가운데 일부는 ‘바울이 장려하는 대로 이타적으로 줘 버린다면, 정작 내 자신의 필요를 못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바울은 농사와 관련된 은유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경제는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을 이들에게 확신시킨다. 바울은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에서 잠언 11장 24-25절의 원리를 언급했다. 또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고후 9:7)하신다는 잠언 22장 8절의 헬라어 역본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원리를 한층 강조한다.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끼지 않고 주는 자를 위해 모든 종류의 축복[1]을 넘치도록 주실 수 있고, 또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암시한다.


   이렇게 현재의 관대함이 미래의 빈곤이라는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린도인들에게 확신시킨다. 아니, 그 반대로 관대함은 미래의 궁핍을 막는 방편이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바울은 이어지는 두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관대하게 심는 자(또는 뿌리는 자)에게 뿌릴 충분한 씨와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시리라는 확신을 준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고후 9:11)이라고 말하며 재차 강조한다. 이 구절은 물질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 이상의 축복을 약속한다. 

 

   바울이 물질적인 관대함과 축복을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확신이 부를 얻을 기대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다단계식 운영을 하지 않으신다. 바울이 말하는 “넘치게 하시나니”는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라는 것을 의미하지, 부자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소위 ‘번영 복음’은 이와 같은 본문을 본질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바울이 서신 전체에 걸쳐 강조하는 것처럼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노동의 열매를 나눠 주는 일, 즉, 돈과 다른 자원을 기부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는 또한 우리가 일하는 동안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것도 포함한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성공하도록 도왔다가 혹시 우리 자신은 안녕을 누리지 못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겠노라 약속하셨다.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멋지게 보이도록 도와주면 상대적으로 내가 초라해 보이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정도 부정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해도 된다.

 

   내게 경쟁적 우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의 원천이심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경쟁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으며, 지지할 수 있고, 심지어 도울 수 있다. 단,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약속을 건강과 부의 잘못된 복음으로 왜곡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자들에게 커다란 집과 값비싼 차를 약속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보살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 역시 채워 주실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신다.

 여기에서 “온갖” 또는 “모든”에 해당하는 용어는 “온갖 가능한” 축복이라기보다 “온갖 종류의”라는 의미다. Gerhard Kittel, Gerhard Friedrich, and Geoffrey William Bromiley,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erdmans, 1985), 631c를 참조하라.

업무 평가(고후 10-13장)

목차로 돌아가기

   서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후서 10-13장은 이 서신의 세 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일과 가장 관련성이 높은 내용이 10장과 11장에 나오는데, 이 두 장에서는 5장에서 시작한 ‘직장에서의 업무 수행’이라는 논의가 확장된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고후 11:5)이라고 비꼬아 부르는 이들의 공격에 맞서 자신을 변호한다. 이 과정에서 바울은 업무 평가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통찰력을 제공한다.


   지극히 크다는 이 거짓 사도들은 웅변술, 개인적 카리스마, 표적과 기사의 증거라는 측면에서 바울이 자신들에게 필적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당연히 이들이 선택한 ‘기준’은 자기 자신과 사역에 대한 자기 묘사에 지나지 않았다. 바울은 이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게임을 하고 있는지 지적한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비교함으로써 판단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만족에 빠진다. 바울은 자신에게만 유리한 방식에 동조하기를 거부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바울한테 유일한 판단이자 유일한 칭찬은 바로 주 예수님의 심판이다.


   바울의 관점은 우리 직장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우리의 업무 수행 능력은 매분기 또는 매년 평가될 것이고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치우친 기준이나 자신에게만 유리한 기준으로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일부 조직, 특히 조직의 소유주와 고객에 대해 책임감이 투철하지 못한 조직에서는, 친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작은 그룹이 그룹 내부자의 자기 이익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업무 성과를 평가하는 권력을 얻기도 한다. 이 그룹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 편인지 적인지 여부에 따라 평가를 받는다. 매우 난처한 상황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승진, 급여, 지속적인 고용보다 하나님의 평가를 성공의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야말로 이렇게 부패한 조직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부패한 조직의 수혜자인 경우, 자신이 누리는 안락함과 안정을 희생하더라도 손해 보고 소외된 사람들의 유익을 옹호한다면, 이보다 그리스도의 좋은 증인이 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고린도후서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

   자신이 처한 독특한 상황으로 인해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썼으며, 그 결과 일, 근로자, 직장에 대한 여러 중요한 교훈을 담은 서신이 탄생했다. 바울은 반복해서 투명성과 진실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직장에서 즐겁고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투자하고, 관계가 깨어졌을 때 화목하도록 힘쓰라고 독자들에게 권한다. 또 경건한 일을 평가하는 척도로써 섬김, 리더십, 겸손, 관대함, 우리의 행동을 통해 얻는 명성을 꼽는다. 또한 직무 수행과 그에 대한 책임, 제때 의무를 이행하는 것 등이 직장에서 크리스천들이 지고 있는 필수 책무임을 논증한다.

 

   바울은 편향되지 않은 업무 평가에 기준을 제시하며, 비신자들과 함께 일하는 데 따르는 기회와 도전을 살핀다. 우리가 얻은 부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고, 우리의 유익과 타인의 유익 간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정도까지 부를 나누라고 당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약점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오히려 더 안정을 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듯이,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정도까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역시 하나님의 경제에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바울의 말은 큰 도전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완벽한 신성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어떻게 하나님의 강하심이 인간의 연약함을 극복했는지를 보여 주는 귀감으로써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자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 목적, 가치에 부합하도록 일하는 것이 한층 충만한 삶에 이르는 참된 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바울의 솔직함 덕분에 더욱 신뢰를 얻는다. 그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이 충고는 바울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 편지를 썼을 당시 고린도 사람들에게 중요했고, 마찬가지로 오늘날 일터에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