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욥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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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기는 형통과 고난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간의 관계를 조명한 책이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만약 삶에서 그 좋은 것들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분의 선하심을 믿는 믿음을 버려야 할까? 아니면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표징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곁에 신실하게 붙어 있을 수 있을까? 혹독한 시련 중에도 여전히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꿀 수 있을까? 이 땅에 사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이 같은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일을 하는 데는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일정 수준의 삶을 영위하려는 목적으로 일을 한다. 내 집을 갖고 싶어서, 더 잘 먹고 잘살고 싶어서, 또 나와 아울러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일을 한다. 이런 목표를 향해 가는 도중에 닥쳐오는 고난은 위협이 될 수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믿음을 지키는 일이 어려울 수도 있다. 형통에서 시작한 욥기의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과 부의 상실은 물론이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난을 경험한다. 욥은 일과 삶에서 화려한 성공과 곤두박질치는 패배를 동시에 겪는다. 그러면서 그는 엄청난 믿음의 시험을 받는다.

 

   우리는 이 책이 말해 주는 일에서 오늘날 일터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탐구해 볼 것이다. 경제적 성공이 우리가 가진 능력을 나타내는 표시일까? 아니면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표시일까? 실직이나 실패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평가하신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우리의 실패와 손실을 다룰 때 어떤 도움을 주는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우리 가족들의 삶과 우리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일터에서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신자들은 서로에게 어떤 일을 해 줄 수 있는가?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어찌하여 내게 그것을 허용하셨는지 하나님을 향해 분노의 감정이 들 수도 있다. 그럴 때 그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 모두가 서로를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욥은 이 사실에 기반을 두고 상사와 부하 간의 관계를 다루었고, 우리는 여기서 욥이 내린 실질적 처방들을 탐구해 볼 것이다. 또한 놀랍게도 욥은 여성의 경제적 권리에도 기여했는데, 이 점도 살펴볼 것이다.

 

욥기 배경과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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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기를 누가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욥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고 추정하는데, 이는 그가 우스 출신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욥 1:1).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스’를 고대 이스라엘의 동남쪽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다만 그가 살았던 시기를 추정한다면, 그가 에스겔서에도 등장하기 때문에(겔 14:14, 20) 그의 이야기는 아무리 늦어도 에스겔이 살았던 시기(BC 6세기)를 넘지는 않는다고 보는 게 최선일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 자체는 참으로 오랜 시간을 초월한다.

 

   이 책은 광범위한 문학 장르(서사, 시, 환상, 대화 및 기타)를 아우르면서 서로 잘 짜인 문학적인 걸작이다. 욥기를 크게 구분해 보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 끼어 있는 두 사이클의 탄식, 대화, 계시로 나눌 수 있다.

 

 

 

 

 

욥기 신학과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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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독자들에게 욥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의인으로 알려져 있다. ‘어째서 선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상징적 존재가 바로 욥이다. 하나님을 향한 욥의 신앙은 극도의 시험에 내던져지고,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하나님을 향한 욥의 헌신은 기울어진다는 암시가 드러난다. 앞으로 보겠지만 욥의 재난은 일에서 시작한다. 욥기는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가 직장생활의 애환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 소중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형통을 누린 인생 (욥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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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기 서두에 눈에 띄게 형통한 농부이자 목장주인 욥이 등장한다.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큰 부자]”(욥 1:3)로 그를 기술했다. 족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욥도 소유한 가축이 수천 마리에 달했고, 대가족에 수많은 종들을 거느렸다. 아들 일곱과 딸 셋은 그에게 개인적인 기쁨이요, 동시에 그가 부를 이루는 중요한 토대였다(욥 1:2). 농경 사회에서 자녀들은 가정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해 줄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들은 부모의 은퇴 이후의 안락한 삶을 보장하는 가장 큰 희망이었으며, 오늘날 세계 여러 곳에서 여전히 그렇듯이 고대 근동 지역에서 쓸 수 있는 유일한 연금 계획이었다.

 

   욥기 1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욥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욥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다. 욥은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자신이 성공했다고 여긴다. 욥기는 욥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여겼음을 유독 한 부분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강조한다. 그는 자기 자녀들이 부지중에 하나님께 죄를 짓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욥 자신은 “온전하고 정직”(욥 1:1)하게 살아가려고 주의를 기울였지만, 그는 자식들이 자신만큼 꼼꼼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늘 걱정했다. ‘혹시 자식들 가운데 하나라도 며칠 동안이나 이어지는 잦은 잔치 때 마신 술로 인해 하나님을 저주하는 죄를 짓는다면 어떻게 하나?’(욥 1:4) 그래서 자녀가 하나님께 죄 짓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욥은 잔치가 끝날 때마다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다(욥 1:5).

 

   하나님은 욥의 신실함을 보신다. 하나님은 사탄(‘참소자, 고소자’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1]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참소자는 욥 안에도 조금이나마 있을 악한 본성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대답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다시 말하면, 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그에게 풍성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식들 숫자만큼 번제를 드리는 것이 단순히 계속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계산된 꼼수일까?욥의 신실함은 하나님의 복이라는 자판기에 투입되는 동전에 불과한가?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얻어 내기 위해서인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성취해 낸 것들에 하나님이 징크스를 걸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가?

 

   잘나가는 시절에는 사실 이런 이야기들이 별문제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모든 좋은 것의 원천으로 인정한다. 동시에 우리는 또한 부지런히 일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가 한 일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만사가 잘 풀리고 실제로 누가 봐도 우리가 형통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욥기에서 히브리어 ‘ha-satan’(참소자)은 마귀에 대한 개별 명칭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수행원들인 “하나님의 아들들”(개역개정; NRSV에서는 ‘heavenly beings’이라고 표현했다) 가운데 하나가 행한 기능을 가리키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의미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다. 하지만 이 논란에서 우리의 입장을 정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주요 역본들이 사용하는 용어인 “사탄”(Satan)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용했다

‘비난의 명수’ 사탄, 욥에게 함정을 놓다(욥1: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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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의 문제는 어려운 시기에 들이닥친다. 직장에서 승진 기회를 놓치거나 실직할 때, 난치병에 걸렸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좋은 시절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이라면, 그럼 지금은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주시는 것인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벌주시는 것이라면 우리를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그러지 않으시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닥친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겠는가? 그런 경우 우리를 바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만다. 또한 그 변화가 자칫 하나님의 요구에 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학교 예산 삭감으로 명퇴한 교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를 한번 상상해 보자. ‘내가 선교사가 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나를 벌주시는 게 분명해!’ 명퇴를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인 그는 신학교에 등록하고 학비를 대기 위해 대출을 받는다. 3년 후에 그는 졸업을 하고 자신의 선교 사역을 위한 모금을 하려고 애를 쓴다. 만약 정말로 하나님께서 선교사가 안 된 것 때문에 그에게 벌을 주셨다면, 이제 그는 올바른 하나님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그러니 이제 그의 삶은 순탄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그에게 명퇴라는 벌을 주신 게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실제로 하나님은 그가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면 말이다.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교사로서 하나님을 섬길 기회들을 놓쳤을 수가 있다. 설상가상으로, 선교 활동을 위한 후원금 마련이 난항을 겪는다면? 직장은 없는데 수천만 원의 빚만 떠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생각했던 대로 선교 계획이 안 풀릴 경우, 그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을 느낄 것인가? 신앙을 버리거나 하나님을 원망할 것인가? 이것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겪는 갈등이다. 모든 것은 명퇴를 하나님의 벌로 잘못 해석한 것에서 비롯했다.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봐야 하는지는 절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비난의 명수인 사탄은 욥에게 바로 그런 함정을 놓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욥에게 넘치게 부어 주셨던 부를 거두신다면, 욥은 ‘주를 향해 욕을 할 것’이라고 사탄은 장담한다(욥 1:11; 2:5). 만약 욥이 그 상황을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벌이라 생각했다면, 욥은 이래저래 함정에 걸리고 만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해 오던 의로운 습관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신다 생각하고 그 습관들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벌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 여겨 하나님을 믿는 믿음 자체를 버릴 수도 있는데, 사탄의 관점에서 보면 이거야말로 훨씬 더 좋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리해 보라고 허락하신다. 도대체 왜 허락하셨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듣지 못한다. 참혹한 어느 날, 욥은 가진 재산 거의 전부를 도적에게 빼앗겼고, 자녀들을 포함해 그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광풍에 죽임을 당하거나 살해당했다(욥 1:13-19).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벌주신다고 오해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처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경배했다(욥 1:20). 가장 낮은 순간에 욥은 좋은 것이든 안 좋은 것이든 인생의 모든 상황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송축한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섬세하게 균형 잡힌 욥의 태도는 놀랍기 그지없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형통했던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임을 잘 알았다. 그는 비록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있었지만(욥기 1장 1, 5절에 명백하게 드러나고, 6장 24-30절 등등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자격이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이전에 자신이 누렸던 복이 자기 공로 덕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현재 당하는 고난도 꼭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은총을 평가하는 잣대로 보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어떤 때는 축복을 내려 주시다가 왜 다른 때는 안 그러시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척하지 않는다.

 

   욥기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항상 형통의 복을 받는다고 하는 소위 ‘형통 복음’에 대한 책망이요 경종이다. 형통 복음은 사실이 아니며, 욥은 바로 그것을 보여 주는 ‘대표 사례’다. 동시에 욥기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궁핍한 삶을 암시한다는 정반대 ‘궁핍 복음’도 책망한다. 신자라면 의도적으로 욥과 같은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도 가당치 않은 것이기에, 욥기 논의에서는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섬기거나 따라야 할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 우리더러 모든 걸 다 포기하라고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욥기에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이 궁핍하게 살기를 원하셨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 욥의 형통은 정말로 하나님의 축복이었으며, 그가 당한 극도의 궁핍은 그야말로 하나의 재앙이었다.

 

   욥은 형통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신실할 수 있었다. 형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여 경험했기 때문에 그는 고난에도 절망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다. 그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지, 혹은 왜 고난을 허락하시는지를 자신이 모른다는 걸 잘 알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과 고통을 경험하게 하신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리하여 이 모든 일에 욥은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욥 1:22).

시련의 풍랑, 공동체까지 뒤흔들다(욥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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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은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을 자신의 “온전함”(integrity), 흠 없음을 내어주지 않으면서 견뎌 냈다(욥 2:3).[1] 그러나 사탄은 포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욥이 아직 충분한 고통과 고난을 당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탄은 아직 건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욥 2:4). 이에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역겹기 짝이 없는 온갖 종류의 종기가 나게 하도록 허락하신다(욥 2:7).

 

   결국 욥의 아내는 매우 불쾌해하며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라고 말한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욥이 흠이 없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욥과 달리 하나님의 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흠 없음’은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욥은 성경의 핵심 구절 가운데 하나인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로(욥 2:10) 응수한다. 이처럼 욥은 인생의 모든 상황을 전부 하나님의 손길로 돌린다.

 

   한편 욥은 자신을 그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하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전혀 모른다. 그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전말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는 것은 단 한 가지, 그의 신앙의 굳건함 덕분이다. 우리는 어떤가? 욥처럼 우리의 형통과 고난을 결정짓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걸 인정하는가? 좋은 시절에 신실함과 감사함을 실천함으로써 어려운 때를 대비하는가? 욥기 1장 5절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드리는 욥의 기도와 제사를 보면서 기이하다 못해 지나치다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걸쳐 신실함을 잃지 않았고, 그것은 극단적 환경까지도 이겨 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한순간에 올 수 있다. 그러나 온전함은 평생에 걸쳐 형성된다.

 

   욥의 고난은 수입의 통로가 끊기는 등 일터에서도 발생한다. 그것은 그의 가족에게 퍼지고 나중에는 그의 건강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이런 패턴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다 보니 직장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친다. 일터에서의 실패는 우리의 자아 정체성, 더 나아가 우리의 온전함마저 위협한다. 이는 수입과 안정의 상실이라는 실질적인 중압감과 더해져 가족 관계도 심각하게 해치곤 한다. 일과 관련한 스트레스로 인해 가족 관계가 아예 깨어지는 일이 빚어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몸도 정신도 쇠약해지고, 평안과 쉼을 누리지 못하는가 하면, 심할 경우 불면증에 시달리는 일도 생긴다(욥 3:26).

 

   그러나 욥은 이런 와중에도 자신의 온전함을 잃지 않는다. “일에 너무 빠져서 당신의 건강을 해치고, 당신 가족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끼치게 하지는 말라.” 이런 교훈이 얼른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욥의 이야기에 들어 있는 깊이를 놓치는 것이다. 욥의 문제들은 그의 일은 물론 그의 가족과 건강에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욥에게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다음 둘 중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슬기롭게 경계선을 잘 유지함으로써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을까?’ ‘최악의 상황들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끝까지 신실함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번째 문장이 바로 우리가 욥에게서 따라야 할 지혜다. 

 

 

“integrity”(NIV; 개역개정에서는 “온전함”으로 번역했다 - 편집자 주)로 번역한 히브리어 ‘tam’은 같은 절에서 “blameless”(NIV, 개역개정에서는 “온전하고”로 번역했다 - 편집자 주)로 번역한 ‘tummah’와 어근이 같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 (욥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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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탄이 저지른 만행을 보노라면, 욥에게는 도움이 절실했다. 욥에게는 세 친구가 다가섰다. 그들은 민감하고, 경건하며, 공감할 줄 아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그들은 7일 동안 밤낮으로 욥과 함께 있어 준다(욥 2:13). 그들은 이 시점에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을 만큼 지혜롭다. 불행을 겪고 있을 때는 친구가 찾아와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법이다. 물론 그들이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상황을 더 나아지게 만들 수는 없었다.

욥의 첫 번째 탄식 (욥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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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은 탄식했다. 그는 스스로를 정죄하길 거부했고 하나님을 탓하거나 하나님을 버리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어조로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욥 3:3).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욥 3:11).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욥 3:16).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욥3:23).

 

   욥의 탄식은 대부분이 질문 형식이다. 그가 당하는 고난의 원인은 미스터리다. 사실 그것은 욥에게뿐만 아니라 어쩌면 신앙 최대의 미스터리일 수도 있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허용하시는가? 욥은 그 답을 몰랐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일은 의문을 품는 것이었다.

‘욥이 악을 행했다’고 트집 잡다(욥4-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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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깝게도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난의 미스터리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 고난의 원인에 대한 결론을 섣불리 내리려 한다. 엘리바스는 욥이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고 세우며 힘이 되어 주는 존재였음을 인정한다(욥 4:3-4). 그러나 곧이어 그는 욥의 고난을 놓고 욥에게 대놓고 비난을 퍼붓는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7-8).

 

   욥의 또 다른 친구 빌닷도 그와 진배없는 말을 한다.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욥 8:20). 또 한 친구 소발은 그 후렴구를 다시 되풀이한다.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욥 11:14-15, 17).

 

   그들은 삼단논법의 추론을 펼친다. ‘하나님은 악인들에게만 재난을 내리신다. 너는 재난을 당했다. 그러므로 너는 악한 게 틀림없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런 식의 삼단논법을 쉬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욥은 그러지 않았다. ‘응보 신학’으로 불리는 삼단논법은, 하나님은 그분께 신실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죄를 짓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것을 가정한다. 물론 성경 곳곳에 이 논법이 등장한다. 하나님이 소돔에 하셨듯이(창 19:1-29) 재난을 하나의 심판으로 내리시는 사례가 성경에 많다. 종종 우리도 이런 신학적 입장을 뒷받침할 만한 경험을 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버릴 때보다 하나님을 따를 때 일이 보통 더 잘되는 모양새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항상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 건 아니다. 재앙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은 아니라는 점을 예수님도 친히 짚으셨다(눅 13:4).

 

   욥의 경우에는 응보 신학 적용이 불가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욥을 의인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욥 1:8; 2:3). 욥의 친구들이 저지른 치명적인 잘못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욥의 상황에 일반화의 오류를 적용시켰다는 것이다. 고난당하는 친구와 시간을 보내 본 사람이라면,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한 채 그저 곁에만 있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 것이다. 결과를 전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채 인생을 하나하나 다시 세워 나가야만 하는 친구 곁에서 아무 소리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묵묵히 고난을 함께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뭐가 잘못됐는지 조사해서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한다. 그러면서 친구가 그 원인을 제거해 최대한 빨리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우리가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한다. 원인을 알면, 적어도 우리 자신은 그와 같은 운명은 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고난의 핵심에 숨어 있는 신비를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그 고난의 이유가 옳든 그르든 간에 파악해 내려고 애쓴다.

 

   욥의 친구들은 이런 유혹에 무너졌다. 대부분 ‘나는 절대 안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한 의도를 가진 크리스천들이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 경건한 것처럼 들리는 텅 빈 대답을 해 줌으로써 얼마나 많은 해를 끼치는지 모른다. “그게 최선이야.” “다 하나님 계획의 일부라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은 안 주셔.”

 

   하나님의 계획을 안다고 생각하다니 이 얼마나 교만한가! 누군가가 고난당하는 이유를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우리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조차 모르지 않는가? “당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고통은 안 겪어야 하는데…….” 차라리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훨씬 진실하고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 다음 그 사람의 곁에 있어 줄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긍휼의 통로가 될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욥과 함께 탄식할 줄도 몰랐고, 나아가 자신들에게는 욥을 정죄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욥을 비난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무모한(그대로 직역하자면, 사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변호를 했다. 친구들의 연설이 계속되면서 그들의 수사(修辭)는 말할 수 없이 적대적이 되어 간다. 욥을 비난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비난하든 지 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자기 옛날 친구를 향해 점점 더 마음을 완고하게 먹는다.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욥 22:5) 엘리바스는 그렇게 말하고, 그다음 욥을 대적하는 몇 가지 허물들을 만들어 낸다.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욥 22:7).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욥 22:9).

 

   또한 소발은 말하기를,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먹은 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시기 때문에(욥 20:15) 자신들의 부를 누리지 못하며, 또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할’(욥 20:18) 것이라며 욥을 나무란다. 욥이 벌을 받는 것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리고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은’(욥 20:19) 욥의 악행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욥은 이런 내용을 적용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소발은 왜 그토록 격하게 욥을 비난하는가? 우리 친구들이 일과 삶에서 실패할 때 우리도 때때로 소발처럼 행동하지는 않는가? 욥기는 욥의 친구들이 바로 우리 자신과 같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 역시 옳고 그름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방식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적용 가능한 하나님의 방식을 모두 다 알지는 못한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

 

   하나님의 방식은 신비로워서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을 잘 알지도 못한 채 그들을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가? 또 꼭 우리 친구들만 우리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욥과 달리, 우리는 대부분 스스로를 쉽게 비난한다. 실패를 맛본 사람이면 누구나 ‘내가 뭘 했기에 이런 일을 당하는 거지?’라는 의문을 품어 봤을 것이다.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이고,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때때로 게으름 때문에, 부정확한 정보나 무능력 때문에, 우리는 직장에서 실패를 초래하는 형편없는 결정을 내리곤 한다. 그렇지만 모든 실패가 다 우리 자신의 결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개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수많은 요소들과 애매모호한 많은 상황, 결과를 예측하기가 불가능한 여건들로 인해 일터는 아주 복잡하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의 성공과 실패가 우리의 행위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요소들 때문인지 어떻게 진짜로 판별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상황을 가까이서 살펴보지 않아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제3자가 어떻게 우리가 한 행위들의 옳고 그름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우리의 지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우리 자신조차 어떻게 스스로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욥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트집 잡다 (욥8-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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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욥의 친구들은 ‘욥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하는 질문에서 욥이 하나님을 버렸는지 여부를 따지는 질문으로 옮겨 간다(욥 15:4; 20:5). 그 과정에서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욥에게 권면한다. 빌닷은 욥에게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욥 8:5)하라고 지시한다. 그래야 욥의 장래가 “심히 창대”(욥 8:7)해지고, “웃음”과 “즐거운 소리”가 입에 가득해질 것이라고 말이다(욥 8:21). 엘리바스는 욥에게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you will be restored, NIV]”(욥 22:23)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매우 훌륭한 충고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기 일쑤라 거듭 하나님 앞으로 부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 안다. 욥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또 그의 친구들이 그 충고를 퍼부은 의도가 욥에게 욥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을 말이다. 믿어 줄 누군가가 가장 절실한 때에, 오히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만들려 했다. 욥에게 어떻게 할지 이미 마음을 굳힌 그들이 어떻게 욥을 지지해 줄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청원하는 욥 (욥5-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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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부족한 지혜가 욥에게는 있었다. 욥은 자신의 감정을 자기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께로 돌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복의 근원이, 심지어는 불행의 근원조차도 하나님이라는 걸 믿으며, 자신의 원망을 하나님께 가져간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욥 13:3, 23-24).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욥 5:9). 그는 자신이 논쟁으로 하나님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안다.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욥 9:3-4).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뇌가 어딘가로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욥 7:11).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없는 자신이나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져가기보다는, 그것을 쉽게 처리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보호해 드리겠다는 잘못된 열심으로 (욥22-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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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실패를 경험하고 나면, 스스로를 괴롭히는 악마들을 잘 알게 된다. 늦도록 잠 못 이룬 채 스스로를 자학하며 지나간 일들을 가지고 스스로에게 시비를 건다. 자신을 비난함으로써 하나님을 보호해 드리는 것, 그것은 어찌 보면 거룩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우리 자신에게도 이렇게 시비를 거는 판국에, 아무리 의도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 친구들한테는 얼마나 더 쉽사리 시비를 걸겠는가? 그런 일이 일어나는 모습을 바로 욥의 친구들이 보여 준다. 욥의 저항에서 하나님을 지키겠다는 그들의 열망은, 욥에 대한 그들의 공격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여러 세기 동안 욥기를 읽어 온 크리스천들은 욥의 친구들을 하나님의 도구가 아닌 사탄의 도구로 보아 왔다. 하나님은 보호가 필요 없다. 그분은 스스로를 돌보실 수 있다.

 

   사탄에게는 다른 관심사가 없다. 단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넉넉하게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걸 하나님 앞에서 증명해 보이고 싶을 뿐이다. 실제로 자신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욥이, 뭔가 잘못을 했다고 스스로 시인했더라면 그것은 비난자의 공격을 정당화해 주는 첫걸음이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엘리바스는 마지막 말에서 하나님을 책망할 것이 조금도 없는 분으로 받든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욥 22:2).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욥 22:12).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욥 22:21).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을 네가 갚으리라”(욥 22:25-27).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탓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께 배우려고 애쓴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는데도 욥은,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을 더 잘 가꾸시기 위해 그런 경험도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욥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4).

 

   폴 스티븐스(Paul Stevens)와 앨빈 웅(Alvin Ung)은 일터에서 우리의 영혼을 단련시키는 사건들이 얼마나 많이 터지는지 지적한 바 있다.[1] 타락한 세상의 어두운 힘은 거기에서 우리 영혼의 수액을 빨아먹고자 위협을 가해 온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창조하신 의도대로 우리의 영혼이 단련되고 주조되어 순금같이 나오길 바라신다. 만약 우리가 교회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일하면서 보내는 그 모든 시간 동안 영적인 성장을 해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해 보라. 일터에서 시련을 만났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롭고 민감한 영적 상담자들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심이 전혀 없이, 틀에 박힌 영적 격언을 되풀이하는 욥의 친구들은 그런 면에서 욥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Paul Stevens and Alvin Ung, Taking Your Soul to Work (Grand Rapids: Eerdmans, 2010). 폴 스티븐스, 앨빈 웅, 《일삶구원》(IVP 역간).

모든 불만, 하나님께 털어놓으라 (욥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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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처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종종 일터에서의 어려움들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터에서의 실패와 손실들을 감당하는 데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거의 갖추고 있지 않다. 가정이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목사나 크리스천 친구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진실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직장 내에서의 문제까지도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얼마나 큰 도움을 얻으리라 기대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상사가 자기 실수를 당신 탓으로 돌리거나, 또는 정당한 의견을 제안했는데도 상사가 당신을 부당 대우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의 고객이나 공급자, 학생, 환자나 기타 당신이 일을 통해 섬기는 대상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적절치 못할 것이다. 비록 그들 가운데 당신 친구가 있다 하더라도 직장 동료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해로울 수 있다.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크리스천 공동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특별한 축복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다 직장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들을 공유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 교회는 바로 이 부분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욥은 자신의 불평을, 아울러 일터와 관련된 모든 불평들을 하나님께 가져가기를 겁내지 않았다. 욥기 24장 1-12절과 22-25절에 나오는 일련의 불평들은 특히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욥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직장이라든가 경제 활동에서 불의를 행하게 내버려 두신다고 불평한다. 사람들은 공공 자원을 개인의 이익을 챙기는 데 사용하고, 타인의 사유재산을 훔친다(욥 24:2). 그들은 이익을 챙기려는 욕심에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착취한다(욥 24:3). 교만한 자들은 승승장구하는 반면, 정직하고 겸손한 자들은 흙먼지 구덩이에서 뒹군다(욥 24:4). 가장 가난한 자들은 생계를 꾸려 갈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심지어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부자들로부터 훔치기까지 한다(욥 24:5-8). 어떤 이들은 죽어라 일하는데도 자신들이 한 수고의 대가를 누리지 못한다.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욥 24:10-11)

 

   모든 복은 하나님에게서 오고 모든 고난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온다는 걸 욥은 안다. 그러므로 “성 중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욥 24:12)라는 욥의 불평에서 그의 절절한 아픔이 느껴진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비난을 하지만 실상은 의인들이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는다. 반면에 악인들은 멋진 삶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욥 24:22-23). 욥은 악인들이 결국에는 잘려 나갈 것이라는 걸 믿는다.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욥 24:24).

 

   그러나 하나님은 도대체 왜 악인들이 번성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욥기에는 그 답이 없으며, 아직도 우리에게 그 답을 주시지 않았다. 경제적 고난은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수년간, 때로는 평생 겪는 매우 실질적인 고통이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어린 나이에 학업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그 바람에 일터에서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를 영영 놓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착취를 당하거나 경력을 망치는 억울한 일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태어나 사는 내내 아등바등해야 할 수도 있고, 자기 국민들을 계속해서 가난과 압제에 몰아넣는 부패한 정부의 손아귀에 눌려 죽을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일과 관련된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수백만 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생을 사는 동안 정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데다 치료책도 마땅치 않은 심각하고 부당한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불의와 고난 앞에서 그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때때로, 적어도 당장에는, 우리가 일을 바로잡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셋 가운데 하나다. 욥의 친구들이 한 것처럼 하나님을 이용해 그럴듯하지만 거짓된 설명을 늘어놓거나, 하나님을 버리거나, 아니면 대답이 없어도 하나님께 끝까지 매달리는 것이다.

지혜를 계시하시다(욥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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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은 하나님 곁에 끝까지 신실하게 붙어 있는 쪽을 선택한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가 자신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욥기 28장은 지혜를 추구하는 것을 광산에 비유한다. 지혜는 “사람 사는 땅에서” 찾아지는 게 아니라(욥 28:13) 하나님의 마음에서 찾아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욥 28:23). 이는 진정 의미 있는 일에는 기술적인 지식이나 실제 솜씨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과업을 수행해 나갈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흔히 ‘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들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어떤 교사가 학생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파악하려고 하거나, 지도자가 분명하게 의사소통을 하려고 할 때, 배심원단이 피고의 의도를 알아내려고 할 때, 분석관이 프로젝트의 위험 부담을 진단하려 할 때,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우리 일의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신다(욥 28:23).

 

   그러나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지혜에 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다’(욥 28:21). 우리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낸다 해도 우리의 모든 행동과 결정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의 판단에 의지하거나 거짓 지혜에 몰입하기보다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편이 더 낫다. 때로는 겸손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선의 길이다.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8).

욥의 두 번째 탄식 (욥29-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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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욥기 29-42장은 첫 번째 사이클과 비슷한 탄식 - 대화 - 계시의 두 번째 사이클을 보여 준다. 예컨대 욥기 29장은 욥이 좋았던 옛날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1장에 나오는 목가적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버렸다며 괴로워하는 욥기 30장에서의 욥의 모습은 2장에서 욥과 거리를 두던 욥의 아내를 생각나게 한다. 30-31장에서 보는 욥의 탄식은 3장에서 그가 내뱉은 탄식의 연장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사이클의 각 단계는 저마다 새로운 점을 강조한다.

 

향수에 젖어 자기 정당화에 빠지다(욥29-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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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의 두 번째 탄식에서(욥 29-42장) 새롭게 강조하는 것은 향수와 자기 정당화다. 욥은 영화롭던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며(욥 29:2), 하나님이 그의 장막에 기름을 발라 주셨던, 그가 원기 왕성하던 날과 같이 지내기를 바란다(욥 29:4). 그는 ‘젖으로 자기 발자취를 씻으며 바위가 자기를 위하여 기름 시내를 쏟아냈던’ 때를 추억한다(욥 29:6).

 

   “그때에는 내가 나가서 성문에 이르기도 하며 내 자리를 거리에 마련하기도 하였느니라”(욥 29:7)와 같은 극적인 구약시대의 표현처럼, 그는 자신이 지역 사회에서 얼마나 존경받았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욥은 젊은이나 어르신 모두에게 환영을 받았으며(욥 29:8), 유지들과 지도자들로부터 아무나 못 받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욥 29:9-10). 그가 존경을 받은 것은 그가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눈 먼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나그네 및 죽어 가는 자들을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다(욥 29:11-16). 그는 불의한 자들에 맞서는 챔피언이었다(욥 29:17).

 

   욥의 향수는 그가 일과 일상생활에서 받았던 존경의 상당 부분이 표면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느낀 상실감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욥 30:11).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욥 30:9).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은퇴나 경력의 후퇴, 재정적인 손실 또는 실패라고 생각하는 일 등에서 이와 비슷한 상실감을 경험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의 신분과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사람들은 예전과는 다르게 우리를 대하고, 설상가상으로 아무 이유 없이 우리에게서 멀어진다(적어도 욥의 친구들은 욥을 보러 오기라도 했다). 한때 친구였던 사람들이 혹시라도 존재를 들킬까 봐 잔뜩 숨을 죽인다. 어쩌면 그들은 실패를 전염병으로 생각하거나, 실패한 사람 근처에 얼쩡거리면 자신들도 실패자로 낙인찍힐까 봐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자신을 미워하여 멀리한다고 욥은 탄식한다(욥 30:10).

 

   모든 공적인 일이나 일터에서 이루어지는 대인관계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쓸모가 있을 때만 친구요, 쓸모가 없어지면 친구 관계를 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가슴 아픈 일은, 진정한 우정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등을 돌리는 일이다.

 

   첫 번째 탄식(욥 3장)과는 대조적으로, 욥은 이번에는 대대적으로 자기 정당화를 시도한다.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욥 29:14).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욥 29:15-16). 아울러 욥은 자신의 나무랄 데 없는 성적 순결성도 강조한다(욥 31:1, 9-10). 우리는 욥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그의 평가가 정확할 수도 있으나, 자기 정당화는 반드시 필요치도 않고 남에게 사랑받을 만한 일도 아니다. 역경이 항상 우리 안에서 최선의 모습을 이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욥이 나중에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했다’(욥 31:23)고 고백한 것으로 보아 비록 그 순간에는 욥이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다.

욥에게 배우는 직장생활 (욥3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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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탄식 가운데(욥 29-42장) 욥은 일면 예수님의 ‘산상수훈’(마5-7장)을 예견하는 듯한 윤리적 행위를 다룬 중요 논제들을 드러낸다. 비록 자신의 습관들을 정당화하는 형태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욥은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원리를 제시해 준다.

 

  1. 거짓과 속임수를 피하라(욥 31:5).
  2. 마음(원칙들)이 눈에 의해(기대) 미혹당하지 않게 함으로써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기 못하게 하라(욥 31:7).
  3. 너그러움을 실천하라(욥 31:16-23).
  4. 잘나갈 때 만족하지 말라(욥 31:24-28).
  5.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이용해 성공하려 하지 말라(욥 31:29).
  6.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라(욥 31:33).
  7. 아무것도 안 하고 뭔가를 얻으려 하지 말고, 자신이 소비하는 자원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라(욥 31:38-40).

 

   이 단락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바로 욥이 자기 일꾼들을 대하는 태도다.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배 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욥 31:13-15).

 

   경건한 주인은 부하들을 존중한다. 이것은 욥이 자기 종들, 특히 자신이 직접 부리는 종들의 불평을 진지하게 받아 주는 방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욥은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들도 밑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두고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다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욥 31:14).

 

   하나님은 아랫사람들에게 윗사람들이 어떻게 대우했느냐며 물으실 것이다. 그러니 윗사람들은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을 때, 아랫사람들에게 이와 똑같은 질문을 해 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진실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자’라는 표시는 자신도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마음을 열어놓는 것이며, 그것은 온갖 정당한 불평을 얼마나 그 사람이 잘 받아들이려 하는지를 통해 확실히 드러난다. 어떤 불평에 정말로 귀 기울여야 하는지를 알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목적은 사려 깊고 합리적인 호소를 상사들이 받아 줄 것이라는 사실을 아랫사람들이 아는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다. 비록 욥이 자신과 자신의 종들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원칙은 장교와 사병, 고용주와 근로자, 부모와 자녀(자녀 양육도 하나의 직업이다), 리더와 팔로워 등 권세와 권위를 가진 사람의 어떤 상황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우리 시대는 인종, 종교, 국적, 성별, 계층 및 기타 여러 요소들에서 파생하는 일터에서의 평등 문제로 많은 갈등을 겪는다. 욥기는 수천 년 전에 이미 이런 갈등을 예견했다. 그러나 욥은 단순히 인구학적인 범주의 형식적 평등을 넘어선다. 그는 자기 집 안의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갖는 평등한 존엄성을 생각한다. 사사로운 감정을 내려놓고 손해 본다는 생각은 접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으로 각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대할 때, 욥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크리스천 상사라면 일터에서 높은 기준을 정하고 실천하기를 권한다. 단 어떤 일터의 대인관계 윤리에서든, 존경과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 

엘리후와의 대화 (욥32-3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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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점에서 엘리후라는 이름의 한 젊은 구경꾼이 논의에 끼어든다. 그와 욥의 대화는 욥과 그의 친구들이 욥기 4-27장에서 한 대화와 맥을 같이한다. 엘리후에 따르면, 욥의 친구들에게 없었던 지혜를 말할 영감을 자신이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욥 36:4)라고 선언한다. 그런 다음 욥을 이기지 못한 욥의 친구들의 무능을 질타한다(욥 32:8, 18).

 

   엘리후의 자랑은 둘째 치더라도, 욥의 친구들이 확신에 차서 말하면 말할수록 그들의 비난은 더욱더 부정확해졌다. 이렇게 보면 엘리후에게서도 사실 큰 지혜를 기대할 수 없겠구나 생각할 수 있다. 사실상 엘리후는 앞에 나왔던 주장들을 그냥 되풀이한다. 그의 의도는 욥의 다른 친구들의 것과 똑같다. 우선 벌을 받을 만한 짓을 한 게 틀림이 없다는 걸 욥에게 확인시키고, 그런 다음 하나님께 복을 다시 받으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권면한다(욥 36:10-11). 그러면서 엘리후는 일과 관련된 새로운 원칙을 하나 더 소개한다. 바로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욥 36:18). 그것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다루는 참된 원칙이나 여기 욥에게는 적용할 까닭이 없는 원칙이다. 

하나님이 등장하시다 (욥38-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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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기 첫 사이클에서 욥의 친구들이 했던 발언은 하나님의 지혜의 계시로 중단되었다. 두 번째 사이클에서 나타난 새로운 요소는, 엘리후의 연설이 하나님의 직접적이며 극적인 등장으로 인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욥 38:1). 마침내 하나님은 자신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던 욥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욥기의 독자는 끝에 가서 욥이 과연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저주를 퍼부을 것인가를 놓고 기다려 왔다. 그러나 욥은 도리어 하나님을 더 굳게 믿는다. 그러면서도 욥은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식을 얼마나 더 초월하는지를 깨닫는다.

‘저는 모릅니다’(욥38:4-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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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을 향한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과 욥 사이의 거의 일방적이다시피 한 대화의 톤을 결정짓는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나님은 성경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장엄한 창조 언어들을 사용하셔서, 경이로운 창조의 유일한 저자로서의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것은 일과도 강력한 연관성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에는 위대한 창조주이신(창 1-2장)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언급하신다.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6-7).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욥 38:8).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욥 39:26-27).

 

   자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기이하게 새겨진 것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물으신다.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욥 38:36).

 

   정답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명철을 추구하면서 또 그 명철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존재들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단번에 확증해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지혜를 주셔서 고난이 닥쳤을 때 열정적으로 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능가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의 아주 작은 조각만을 우리 안에 심어 놓으셨기에 우리는 절대로 그분의 모든 길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불평의 소리를 내는 것은 유익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그래, 내가 틀렸다는 걸 이제야 알겠구나”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런 평등하지 않은 독대를 계속 이어 나가시면서 하나님은 욥에게 불가능한 도전을 던지신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 때로는 ‘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답일 수 있다. 욥은 그것을 알았고 그렇게 인정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하나님이 욥에게 그가 처한 상황을 큰 그림으로 보여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림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화가가 의도한 전체적인 관점을 보지 못하듯, 욥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조금이나마 일부를 혹은 전체의 큰 그림 즉,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이 만든 세상을 잘못 경영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계속해서 정면 공격을 퍼부으신다. 하나님은 욥의 자기 정당화 시도를 거부한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욥 40:8).

 

   여기서 욥은 잠시 비난을 남에게로 돌리려 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는지 물으셨을 때 아담이 하던 것과 같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고난의 시기에 어떻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욥기, 시편, 하박국 같은 책에 나오는 본을 따라, 불만이 생길 때는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자. 단, 우리 자신의 허물을 가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다(욥 40:11-12). 하나님은 욥의 그런 태도를 거부하신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께 불평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욥을 정죄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비난한 일은 이유를 막론하고 잘못이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할 일은 아니다.

 

   욥은 자신이 바라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룬다. 그러나 자신이 왜 그런 고난을 겪었는지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욥은, 잘못은 답을 알고자 기대한 자신에게 있지, 답을 안 주신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어쩌면 욥은 하나님의 임재에 너무나도 큰 경외감을 느껴 더 이상 답이 필요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욥이 왜 고난을 당했는지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해도 우리 역시 결국 찾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 욥의 고난은 그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더 큰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하나님과 욥의 관계는 더욱 깊어진 듯 보이며, 그 결과 욥은 더욱 현명해졌다. 그는 과거 자신의 형통이 자기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아주 약간의 성숙을 위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던 손실을 꼭 경험해야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욥에게서도 하나님에게서도 얻을 수 없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하는 사람(욥4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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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거짓 지혜로 위장한 교만한 선언으로 욥을 괴롭힌 세 친구들을 책망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만약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을 대신했던 그들의 무지한 말들에 합당한 벌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욥 42:7-8). 욥에게 회개하라고 잘못 촉구했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회개를 욥이 받아 줄지 안 받아 줄지 전적으로 욥에게 의존해야 하고, 또 자신들을 대신한 욥의 간청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길 바라야만 하는 신세가 됐다.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는 행동에서 욥이 자기 자녀들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던 욥기 1장이 떠오른다. 욥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실패에서 회복하는 과정의 일부로, 고난의 기간 동안 우리를 괴롭혔거나 우리를 의심했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나중에 우리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고(마 5:44; 눅 6:27-36), 이런 가르침을 욥기와 마태복음 두 본문 모두에서 단순한 치료 요법 이상의 의미로 제시한다. 우리를 괴롭히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제야 비로소 지리멸렬한 인생의 조건들을 초월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다. 

에필로그 - 형통이 회복되다 (욥4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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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욥의 재산이 복구되면서 이야기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회복했다. 그는 전에 가졌던 재산의 두 배를 받았고(욥 42:10) 새로 아들 일곱에 딸 셋을 얻었다(욥 42:13). 그러나 처음에 난 자녀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났기에 어떤 계산법으로 보아도 이것은 손해 보는 거래였다. 비록 욥의 나중 인생이 “처음 인생보다 더 큰”(욥 42:12) 복을 받았다고 본문에서 확인한다 해도 그의 입 안에는 틀림없이 아직도 쓴맛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욥이 알 수 없었던 한 가지, 즉 하나님께서 하실 마지막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딸들에게도 유산을 물려주는 욥 (욥42:13-15)

 

    욥은 고난을 겪은 후에 매우 놀라운 일을 감행한다. 딸들에게도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유산을 물려준다(욥 42:15). 고대 근동에서 딸자식에게 유산을 물려준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는 최근까지도 딸들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했다. 욥은 무엇 때문에 이런 전례 없는 일을 했을까?

 

   죽은 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슬픔이 살아 있는 딸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도록 결심하게 만든 것일까? 그의 슬픔이 여성 평등권의 한 측면을 가로막고 있던 사회적 장벽들을 뚫고 나가도록 밀어붙인 것일까? 그의 슬픔이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마음을 열게 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정의를 알게 해 달라던 그의 집요한 간구가 여자와 남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으로 응답이 된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히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결과는 볼 수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가 당한 고난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결론

 

   우리는 깔끔한 결론보다는 여러 관찰과 의문을 안고 욥기를 떠난다. 욥은 형통할 때나 불행할 때나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버리지 않았다. 이는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한편 그의 친구들이 욥에게 했던 얄미운 판단들은, 우리 삶에 아무거나 무턱대고 적용할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경고도 준다.

 

   하나님은 욥에게 신실하심을 입증하신다. 이는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요, 또한 위로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분의 신실하심이 우리 삶에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를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단편적인 증거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부분적 지혜, 우리가 붙잡고 있는 보잘것없는 관점들에 근거를 두고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 삶의 형편에 관해 묻는 가장 어려운 질문에 맞는 가장 현명한 대답은, 어쩌면 이런 것일 수도 있다. “저는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