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 빌레몬서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의 배경

목차로 돌아가기

상업 도시 골로새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상업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골로새는 점점 커졌다. 고대 골로새 역시 로마제국의 소아시아(오늘날 터키의 남서쪽 모서리) 지방의 리쿠스강(Lycus river) 골짜기를 통과하는 주요 무역로에 건설됐다. 그곳에서 골로새 사람들이 도시를 유명하게 만든 아름다운 검붉은 색 모직 천(colossinum)을 생산했다. 그러나 상업 중심지로써 골로새의 중요성은 BC 100년경 인접한 지역에 라오디게아가 건설되어 활발하고 상업적인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인접한 히에라볼리와 더불어 이 두 도시는 AD 17년(티베리우스 황제 때)과 AD 60년(네로 황제 때)에 있었던 지진으로 파괴됐다. 이후 재건되기는 했지만 옛 명성을 되찾지 못했고, AD 400년경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도시가 됐다.

 

 

골로새 교회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교회를 개척하느라 2년을 보내는데, 사도행전 19장 10절에서 그 중심지에서 뻗어 나온 광채로 인해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 자신이 그 지방을 다니면서 선교 사역에 열의를 보였는지, 아니면 그가 회심시킨 사람들이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골로새에 교회 하나가 세워졌다. 아마도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를 세웠을 것이고(골 1:7), 골로새서 1장 21절을 보아 그 교회 구성원이 주로 이방인들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빌레몬은 골로새 시민이었으며, 그 교회의 바른 지도자였다. 그는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의 종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고, 나중에 그 종이 사도 바울을 만나 예수님의 복음 메시지에 반응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직장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말한다. 특히 그는 종들이 자신의 상전을 위해 어떻게 일해야 하며, 상전들은 자신의 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빌레몬에게 보낸 짧은 개인 서신(빌레몬서)은 골로새서 4장 1절에서 말한 바울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서신의 목적

  골로새 사람들과 빌레몬에게 보낸 서신들은 대략 AD 60-62년 사이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썼다고 여겨지는 4개의 옥중서신 가운데 두 개다. 당시 로마제국 황제는 네로였는데, 그는 바울의 로마 시민권 주장을 무시할 정도로 잔인하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었다.


   옥에서 바울은 한때 강한 믿음을 가졌던 골로새의 크리스천들이 이제는 신앙에 대한 속임수에 넘어지기 쉬운 상태라는 말을 들었다(골 2:4, 8, 16, 18, 21-23). 그는 골로새 성도들이 받아들이고 싶을만큼 유혹적인 신학적 오류를 하나하나 반박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편지는 읽는 이들이 이런 속임의 문제들을 능히 뛰어 넘도록 해 준다. 바울은 그의 모든 독자들이 (2천 년 전의 골로새 교회 성도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들도)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서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정황을 이해하고, 또 그것이 그들의 직업상의 관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쳐야 할지를 아주 신중하게 말한다.

 

사람을 하나님 형상을 가진 일꾼으로 창조하셨다 (골1:1-14)

목차로 돌아가기

   골로새서 1장 6절에서 바울은 우리를 창세기 1장 26-28절로 되돌아가게 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

 


   여기 창조주로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나오시고, 그분 활동의 정점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시는 것이다. 새로 지음받은 인간(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과업을 주시니,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6절에서 창세기의 언어를 골라 복음이 온 천하로 전파되어 나감으로써 그들 가운데 복음이 ‘열매를 맺어(창세기 1장의 “생육하고”와 같은 단어 - 옮긴이 주) 자라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것을 골로새서 1장 10절에서 되풀이해 말한다. 골로새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위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업이 자녀 양육이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다면적인 일이든, 아니면 사역이든 간에, 그들과 우리는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이다. 우리는 태초부터 일하는 일꾼들로 창조되었으며, 그리스도는 일꾼으로서의 우리를 구속하고 계신다.

창조하시는 분, 구원하시는 분(골1:15-20)

목차로 돌아가기

바울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의 전반부를 영어 단어 아홉 개로 요약할 수 있다.


      Jesus made it all(예수님께서 만물을 지으셨다). 

      Then Jesus paid it all(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값을 다 치르셨다).

 

 

'예수님께서 만물을 지으셨다'

 

   골로새서는 독자들이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의 시작 부분, 곧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라고 진술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므로’ 창조되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일하셨다.’ 그 일에 대해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써 보낸 내용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값을 다 치르셨다'

 

   그런 다음 바울은 자기 독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존재하는 만물의 창조의 주체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가 우리 구원의 주체이심을 분명히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바울은 창조 때 하신 그리스도의 일과 구속 때 하신 그리스도의 일을 나란히 놓아 이 단락의 전반부(골 1:15-17)는 ‘창조’를 핵심 주제로, 후반부는(골 1:18-20) ‘구속’을 주요 주제로 다룬다. 이 병행 구절은 특히 골로새서 1장 16절 “하늘과 땅에서 ……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와 골로새서 1장 20절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에서 두드러진다. 그 패턴은 아주 찾기 쉽다. 하나님은 만물을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바로 그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고 계신다. 제임스 던(James Dunn)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단순하면서도 심오한데, 화목하게 하시고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원래 창조의 조화를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즉 자연의 부조화와 인간의 비인간성을 해소시켜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의 특성과 우주에 대한 그분의 관심의 완전한 표현을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1]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셨고, 예수님께서 모든 값을 치르셔서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다.

James D. G. Dunn,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and to Philemon: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The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6), 104쪽.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바라보자(골 1:15-29)

목차로 돌아가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이 우리 일에서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이것이 시사하는 한 가지는, 우리가 일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일하시는 양식과 가치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결과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그런 양식과 가치를 알 수 있다는 말인가?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알려 준다. 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걸 상기시킨다(골 2: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고후 4:6)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하신 기간 동안 빌립은 그에게 요구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 주신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로서 우리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 주신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 보이신 예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묘사한다(골 1:15-17). 그러고 나서 즉시 그런 능력을 뒤로하고 ‘성육신’하셔서 말씀과 행동으로 이 땅에 오시고, 우리 죄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신 예수님의 자발성과 연결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일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패턴과 가치를 어떻게 우리 일에 적용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아 살펴봄으로써 시작하고자 한다.

 

 

용서할 수 있게 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할 수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바울이 노예 주인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더 이상 도망친 노예가 아니라 형제로 용서하고 받아 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직장에서 우리가 그런 태도로 동료들을 대할 때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받아 주고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게 되다

 

   둘째, 무한한 능력의 예수님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골 1:16)을 포함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또한 우리를 위해 그 권세를 버리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셨다(골1:20). 우리에게도 직장에서 누리는 권한과 힘을 포기하고 (어쩌면 받을 자격이 없는) 누군가의 유익을 채우도록 요구받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만약 빌레몬이 (빌레몬의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오네시모에 대한 노예 소유주로서의 권위를 제쳐 두고 그를 새로운 관계 안으로 맞아들인다면, 빌레몬은 그런 방법으로 직장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세속적 직장 문화로부터 자유하게 되다

 

   셋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새로운 실상을 그대로 살아 내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대조적인 문화적 관행에 더 이상 매어 있지 않다. 우리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다. 우리는 다른 북소리에 맞춰 행진할 수 있다. 직장 문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을 대적할 수 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원하시고 우리 안에서 원하시는 것에 마음과 뜻을 두라고 말씀하신다. 태도는 물론 가치관부터 확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나는 내 힘으로도 잘하고 있어! 잘할 수 있어!(골2:1-23)

목차로 돌아가기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자력구원이라는 방향으로 후진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 2:8). A Good Man is Hard to Find (선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라는 소설에서 저자 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은 예수가 필요 없다고 선언한 연쇄 살인마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힘으로도 잘하고 있어!” [1] 이것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해를 가하던 거짓 교사들의 풍조를 적절히 요약한 것이다.

 

   그들의 “자의적 숭배”(골 2:23)에서 영적 진보는 몸의 학대와 신비한 환상(골 2:18), 그리고 특별한 날들이나 음식 율법을 지킴으로써(골 2:16; 이는 구약에서 유래된 듯하다) 얻어진다. 이 교사들은 그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원을 잘 정렬시킴으로써 자기 힘으로 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내용은 서신 뒤편에서 바울이 일꾼들에게 권면하는 토대가 된다. 신앙의 참된 진보는 (우리가 직장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방법을 포함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함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

Flannery O’Connor, “A Good Man Is Hard to Find,” Collected Works (New York: Library of America, 1988).

방향 전환(골3:1-16)

목차로 돌아가기

   방향 전환이란, 예수님께서 한 번도 접해 보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윤리 기준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삶을 재편하는걸 뜻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되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수님께서 구체적인 답을 주시지 않는 문제들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바울이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라고 말할 때, 이것은 집에 페인트 칠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걸 우선하라는 뜻인가? 더 나은 크리스천이 되려면 일 생각은 점점 적게 하고, 수금과 천사들과 구름에 관해서 점점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가?


   바울은 이런 것들에 대한 설익은 생각을 하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골로새서 3장 1-17절에서 그는 ‘위의 것을 생각하라’(골 3:2)는 말의 의미는 이 땅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하는 활동들을 철저하게 해 나가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를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땅의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삶은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과 그분의 길을 대적하는 세상 시스템의 가치대로 사는 것이다.


   “땅에 있는 지체를”(골 3:5) 죽인다는 건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그것은 영성 훈련을 위해 고행자가 걸치는 거친 옷을 입거나, 찬물로 목욕재계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몸을 괴롭게 하는” 것(골 2:23)은 죄를 그치게 하는 데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먼저 그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우상숭배인] 탐심”을 죽이라는 뜻이다(골 3:5). 우리는 성적 부도덕(천박한 성생활이 개선된 삶을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과 탐심(더 많은 것을 소유하면 더 많은 생명을 누릴 거라는 생각)에서 돌아서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당연히 그런 부름은, 실제로 성적욕망을 채워 줄 적절한 장소가 있으며(남자와 여자 간의 결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구의 적정선(하나님에 대한 신뢰, 부지런히 일함, 이웃에게 너그러이 베풂,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감사로부터 나오는 것)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진다.


   둘째,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8-10). “서로”라는 말에서 바울이 교회에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뜻일까? 아니다. 바울은 행위 변화뿐만 아니라 마음과 뜻의 변화도 말하는 것이다. “새 사람”을 입어 놓고 어떻게 된 일인지 비신자들을 대할 때는 옛 사람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일단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렸다’는 것은 그런 것들이 다시 되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악함 가운데 세 가지가 특히 직장과 연관되어 있으니, 탐심, 분노, 그리고 거짓말이다. 이 세 가지 악은 합법적인 사업을 해 나가는 중에도 나타날 수 있다.

 

  •  탐심은 아무런 제재 없이 부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업 이윤을 내고 비영리 기관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은 적절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윤 추구라는 욕망의 경계선이 없어지거나, 충동적으로 변하거나, 도를 지나치거나, 또 개인적 이익의 추구로 좁혀지면, 죄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  분노는 갈등이 일어날 때 나타난다. 어떤 직장에서든 갈등은 일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자세히 검토하고 또 해결해야 한다. 만약 갈등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분노와 노여움을 해소하지 못해 결국 악의로까지 변형돼 죄가 자리를 잡고 만다.

  •  거짓말은 회사에 대한 전망이나 제품의 이점들을 부정확하게 홍보하는 데서 올 수 있다. 모든 기업은 현재 자사 제품과 서비스 및 회사의 조직을 넘어서는 비전을 갖는 게 당연하다. 영업 판촉물에는 자사 제품의 최고 · 최선의 사용 상태를 명기하지만, 그와 더불어 그 제품의 한계점도 경고해 두어야 한다. 주식 공모 안내서는 공모가 잘 되었을 경우 그 회사가 무엇을 이루고 싶어 하는지를 기술하되, 동시에 회사가 직면할 수 있는 위험도 기술해야 한다. 만약 제품과 서비스 그리고 회사나 개인을 비전이 창창한 것처럼 제시해 보이고 싶은 바람이 속임의 선을 넘어설 경우(위험 대 보상, 방향성의 오류를 균형 있게 기술하지 않거나 조작을 목적으로 하거나 거짓말로 기술할 경우) 그때는 다시 한 번 죄가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바울은 올바른 미덕이 언제 사악함으로 타락하는지 진단하는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크리스천은 자신들이 처하는 특정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한다.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옛 사람을 “죽일 때”(골 3:5)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되길 바라시는, 곧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으시는(골 3:10) 사람들로 옷 입는다. 자신의 자아를 숨긴 채 기도하고 예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하고 예배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전임으로 이런 일들을 하라고 부름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덕인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골 3:12)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서로 용납하라’(골 3:13)는 바울의 권면은 용기를 주는 말이다. 대부분의 영역본 성경이 “bear with one another”(서로 참아 주라)로 번역하지만, 이런 번역은 바울이 말하는 요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 본래 교회 안에는 우리가 같이 잘 지내기 어려운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고, 직장에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바로 그 말을 하는 것 같다. 우리의 관심사와 개성들이 너무 달라서 본능적인 유대관계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그들을 용납한다. 그들의 유익을 구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자꾸 짜증나게 하는 그들의 성벽을 견딘다. 바울이 자기 서신들에서 칭찬하는 많은 성품들은, “그 사람은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잘 어울린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팀 플레이어’가 되는 것은 단순히 이력서에다 자랑하기 위한 상투어가 아니다. 그것은 크리스천의 근본 미덕이다.
 

  •  옛것을 죽이고 새것을 입는 것은 둘 다 우리의 일상 업무와 엄청난 관계가 있다. 크리스천들은 죽어 가는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여 주어야 하며, 직장은 어쩌면 그런 유형을 보여 주는 모습이 일어날 수 있는 주 무대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크리스천도 일을하다 많은 직장에 스며들어 있는 험담이나 불평에 가담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걸쭉한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직장에나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거짓말을 하는건 아니지 않은가?

  •  어떤 직장이든 불공평한 정책, 나쁜 상사, 제 기능을 못하는 업무 처리 과정, 그리고 형편없는 의사소통 채널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단점들을 불평하는 것이 중상모략은 아니지 않은가?


   바울은 타락한 직장 안에서조차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땅의 지체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입는 것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정면으로 직접 마주하는 것이지, 등 뒤에서 그들을 험담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마 18:15-17). 직장 내에서 일어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일하고, 그런 일들이 생겨도 용서하라.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하면서, 왜 사람들에게 ‘거룩한 소리만 늘어놓는 따분한 기독교인’이라는 오해를 사 거부당할 위험부담은 감수하지 않는 거죠?” 크리스천들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드러내기 위해 아예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무리에 섞이지 않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다. 직장 동료들은 이런 의도를 단박에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약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하는 대신 정말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자기 곁에 있어서 행복해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적어도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골 3:12)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는 사실에 몰래 또는 공개적으로 감사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속임수를 거부하는 크리스천 일꾼들은 (잘못을 호도하는 광고 카피를 거부하거나 또는 과장된 다단계식 사기수법을 좌절시키거나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직성 때문에 적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증권거래위원회(SEC; 미국 증시를 감시 감독하는 정부 직속 기관 - 편집자 주)가 사무실 문을 노크할 때 몇몇 동료들은 예수님을 새로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일한다는 의미(골3:17, 23)

목차로 돌아가기

   그렇다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골 3:17) 우리의 일을 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어떻게 우리는 ‘사람에게 하듯 하지 않고 주께 하듯 하여’(골 3:23) 전심으로 일을 해 나갈 수 있는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일을 한다는 것에는 적어도 두 가지 사상이 들어 있다.

 

  •  우선 직장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인정한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과 우리 일을 얼마나 성실하게, 충성스럽게 해 나가는지가 우리 주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그분과 맞게 이어지는가?

  •  “예수의 이름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또한 그분이 우리 주인이시고, 상사이시며, 마지막에 책임을 져야 할 분이라는 걸 인정하며 사는 걸 암시한다. 이것은 바울이 상기시켜 주는 내용, 곧 우리는 인간 주인들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위해 일한다는 내용으로 이끌어간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전반적인 책임을 지고 있지만, 우리가 일을 할 때 보여 주는 부지런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판단자라는 인식에서 나온다.


   바울이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라고 했을 때, 이 구절을 얕은 방식과 깊은 방식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얕은 방식은 성경 구절을 업무 공간에 붙여 놓는다든가 크리스천 범퍼 스티커를 트럭에 붙여 놓는 것처럼, 크리스천 표식들과 행동들을 우리 직장 안에 도입하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행동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들 자체가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하는 삶을 구성하는 건 아니다. 바울이 했던 도전을 이해하는 더 깊은 방식은 우리가 일을 해 나가면서 예컨대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 이 변론 취지서에 제가 사용하는 언어들이 어떻게 원고측과 피고측 모두를 존중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 주세요!”


   더 깊은 방식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회사 사장이시라면 하루의 목표로 무엇을 잡으실지를 상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바울의 명령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일할 것이다. 바울의 요점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일과 기도는 통합된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둘을 균형이 필요한 별개 활동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둘은 같은 활동, 소위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께서 성취하기 원하시는 것을 성취하는 행동의 다른 두 측면이다.

고대와 현대의 상전(주인)과 종(노예)에 대하여(골3:18-4:1)

목차로 돌아가기

   여기서부터 골로새서는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노예)과 상전을 위한 일련의 구체적 지시 사항들이 나오는 ‘집안 규례’(Household Code)로 이동한다. 이 규례들은 고대 사회에는 흔한 것들이었다. 신약에서 이런저런 형식을 띠면서 여섯 번이나(갈 3:28; 엡 5:15-6:9; 골 3:15-4:1; 딤전 5:1-22; 6:1-2; 딛 2:1-15; 벧전 2:11-3:9)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일터와 관련이 있는 골로새서 부분만 살펴볼 것이다.


   현대의 일꾼들에게 바울의 말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고대 사회의 노예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서구 독자들은 종종 고대 사회 노예제도를 잔혹함과 저열함으로 악명 높은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 노예제도와 동일시한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고대 사회의 노예제도는 앞서 말한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고대에 광산에서 일했던 외국인 전쟁 포로들은 미국 남부의 노예들보다 사정이 훨씬 나빴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극단에서, 고대의 일부 노예들은 교육을 잘 받고 집안 구성원으로도 인정을 받아 의사, 교사, 재산관리인 등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들은 주인의 재산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끔찍한 학대를 받을 경우에는 집안 노예라도 법적으로 호소할 수 없었다.[1]


   그렇다면 골로새서 3장 18절 - 4장 1절은 오늘날의 근로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노예는 (급여나 월급을 위해 일하는 오늘날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로마제국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주요 공급원이었다. 우리가 오늘날 직업이라고 인정하는 직종에서 많은 노예들이 일을 했고, 그 대가로 식량과 주거지는 물론 때로는 어느 정도의 위로도 종종 제공받았다. 이것은 노예들에게 권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노예 소유주들은 자신들의 노예에 대한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노동자들에게 고용주나 관리자들이 가진 힘과 유사할 수 있으나 사실 그보다는 더 극단적이었다. 이 서신에서 노예와 상전들에 대해 바울이 표명하는 일반 원칙은,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당시 그들의 상황 사이에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만 인정한다면, 지금 근로자와 고용주들에게도 적용 가능하다.


   이 일반 원칙들은 어떤 것들인가? 첫째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인데) 바울은 노예들에게 자신들의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다른 무엇보다 먼저 바울은 노예와 상전의 저울의 눈금을 다시 조정해서 그들의 삶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모든 것을 가늠해 보기를 원한다. 노예들은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기’(골 3:24) 때문에 “주를 두려워하여”(골 3:22) 일을 해야만 한다. 한마디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직역하면 “영혼에서 우러나와 일을 하라”는 뜻]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상전들도(“주인들”) 그들의 권위가 절대적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한다. 즉, 그들에게도 ‘하늘에 주인이 계시는 것이다’(골 4:1). 그리스도의 권위는 교회 담장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고용인과 고용주 모두의 진정한 주인이시다.


   이것은 몇 가지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께서는 감독하고 계시기 때문에 고용주나 상사 앞에서만 일하는 체하는 “눈가림”(골 3:22)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세상에는 상사가 주변에 있을 때는 잘 보이려고 애를 쓰다가, 상사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 곧바로 태만해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고대 사회에서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최고 상사가 항상 우릴 바라보고 있다고 상기시켜 준다. 덕분에 우리는 관리자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맡은 바 과업들을 진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진심을 다해서” 일을 한다. (이 땅에서도 어떤 상사들은 일하는 체 연기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알아차리지만 타락한 세상에서 때로는 업무를 태만히 하는 사람들은 들키지 않을 때도 있다.)


   골로새서 3장 25절에서 정직하지 못하거나 일을 부실하게 하는 것이 들통났을 때에 겪을 위험을 언급한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앞 구절이 하나님께로부터 충성스런 섬김의 대가가 온다는 것을 가리키므로, 하나님을 악한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봐도 무방하다. 다만 여기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핵심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일을 잘하는 이유는 업무 수행 평가가 나쁘게 나오는 걸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울은 선한 마음에서 선한 일이 우러나오기를 원한다. 그는 일을 잘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을 잘하길 원한다.

 

  여기서 암시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노동은 귀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우리가 그분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길 원하셨기 때문에, 맡은 일을 탁월하게 해냄으로써 우리가 그 사명을 성취할 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하라(골 3:23)는 말은 명령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인 소생에 의해, 우리는 비상한 열의를 가지고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골로새서 3장 22절 - 4장 1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노동을 진지하게 여기신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비록 그 일들이 불완전한 상태나 또는 퇴보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더라도 말이다. 월급을 상당히 많이 받는 안과의사가 제거한 백내장도 하나님께 중요하다. 또한 소작인이나 또는 심지어 대규모 농장의 노예들이 딴 면화도 마찬가지다. 노동 착취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의 존엄성은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것이기 때문에, 착취 시스템조차 노동자에게서 그 노동의 존엄성을 앗아 갈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신약의 집안 규례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이 하나 있다. 상호성 (mutuality)이라는 주제가 일관되게 나온다는 점이다. 바울은 종들에게 그냥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지 않고 상호의존이라는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가르친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서로에게 져야 할 책임이 있다. 그 때문에 종들에게 한 명령 바로 뒤에 상전들을 향한 명령이 나온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4:1).

 

   노예 소유주들에게 주어진 로마법 체제의 재량권이 얼마였든지 상관 없이,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공평함을 판단하실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들은 책임을 져야만 한다. 물론 정의와 공평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당한 임금’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라. 중국 농장에서의 정당한 임금은 시카고 은행에서 주는 정당한 임금과는 화폐 가치가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래에서는 고용주와 근로자는 서로서로를 정의롭고 공평하게 대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1세기 노예제도에 대한 더 상세한 설명은 S. Scott Bartchy, MALLON CHRESAI: First Century Slavery and the Interpretation of 1 Corinthians 7:21,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Dissertation Series (Missoula: Scholars Press, University of Montana, 1973; reprinted by Wipf & Stock, 2003)
을 보라.

빌레몬서와 일

목차로 돌아가기

   직장에서 상호성이라는 주제는 골로새서에 암시되어 있으며, 신약에서 가장 짧은 책인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서신에도 등장한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골 4:9)를 언급했다. 빌레몬에게 보낸 서신에서 오네시모가 빌레몬이라는 한 크리스천의 종 (노예)이었음을 알 수 있다(몬 16절). 오네시모는 도망을 쳤으며, 크리스천이 되었고, 후에 바울의 제자요 조력자가 되었다(몬 10-11, 15절). 로마법을 따르면,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를 아주 엄하게 처벌할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바울은 주님의 사도로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놓아주라고 명령할 권리가 있었다(몬 17-20절).

 

  그러나 바울은 권리의 서열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상호성의 원리를 적용했다. 그는 오네시모에게는 자발적으로 빌레몬에게 돌아가라고 요청하면서, 동시에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어떤 형벌도 내리지 말라고 청한다. 그는 두 사람 모두에게 종과 상전으로서가 아니라 서로를 형제로 대하라고 부탁한다(몬 12-16절).

 

  바울과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 상호성의 원리를 삼중으로 적용할수 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빚을 지고 있다. 그들 각자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주장할 것들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 모든 빚과 주장들을 상호 존중과 섬김이라는 호의 안에서 다 청산시키려고 애쓴다. 여기서 바울이 실제 직장 상황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서로의 허물을 용납하는 덕을 어떻게 적용하는지(골 3:12-13) 볼수 있다.


   바울이 명령보다 설득을 사용한 것은(몬 14절) 상호성 원칙의 추가 적용이다. 빌레몬에게 해결책을 지시하는 대신 바울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고,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펴되 결정은 빌레몬의 손에 맡겨둔다. 빌레몬은 바울의 명백한 소원과 자신을 양육하고자 하는 바울의 진술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몬 21절). 그러나 바울은 솜씨 좋게 소통했고, 이는 직장 안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데 훌륭한 하나의 본이 된다.

골로새서와 빌레몬서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

    골로새서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보여 주는 그림을 제시한다. 근로자 입장이라면, 받는 월급에 합당한 일을 함으로써 성실하게 고용주를 섬긴다(골 3:23). 반면 관리자 입장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 주시는 것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골 3:12)으로 부하 직원들을 대한다. 하나님은 우리 일이 호혜적 관계 안에서 즉, 일 전체를 감안하여 각 당사자가 서로에게 기여하고 서로에게 유익이 되도록 일을 수행해 나가길 의도하셨다. 설령 상대가 호혜적 책무를 다하지 못할지라도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의 의무를 다한다(골 3:22-4:1). 예수님의 본을 따라 우리는 갈등에 직면해서는 용서해 주고(골 1:13),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힘도 내려놓는다(골 1:20).

 

  이것은 우리에게 엄격한 기준이나 책임감이 모자란다는 의미도 아니고, 사업을 하거나 직장을 다니는 크리스천들이 활기 넘치고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용서를 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크리스천들은 직장 문화가 용인하는 것들과 언제나 같이 갈 수는 없다(골 3:1-3). 특히 그것이 동료나 근로자를 불공정하게 또는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일 때는 더욱더(골 4:1) 같이 가서는 안 된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경우가 바로 이런 사례다. 우리 일이 어떤 것이든지 우리는 탁월하게 하려고 애쓰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단순히 인간인 주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골 3:23-24)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 일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