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b-13)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 (빌1:1-26)
목차로 돌아가기도입부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기도에서(빌 1:3-11),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 안에서 또 그들 가운데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얼마나 확신하는지 나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역을 의미한다. 바울 자신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직접 그 일에 참여했다. 바울은 그들의 스승과 사도로서 그 일을 지속하고 있으며, 이러한 일을 “내 일의 열매”(빌 1:22)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일의 근원이 되는 일꾼은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빌 1:6)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빌 1:28, 새번역).
NRSV 역본은 “among you”(너희 가운데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 번역한 반면, 대부분의 영어 역본들은 “in you”(너희 안에서)로 번역한다. 두 가지 번역 모두 적절하며, 헬라어 구절인 ‘en humin[엔 휴민]’은 둘 중 어느 쪽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하나님의 선한 일은 개인들의 삶에서 시작한다. 다만 신자들이 서로 교제하는 가운데 살아 내야 한다. 6절의 요점은 개인들이나 전체로서의 공동체 그 어느 쪽으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일은 각 개인이 ‘구원받거나’ 또는 교회 개척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역사가 이뤄질 때까지 우리 안에서 또 우리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일하시며, 이 일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완성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하나님의 일은 끝날 것이다.
바울의 직업은 전도자요 사도였다. 그의 직업에는 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성공과 야망을 가늠케 하는 표시들이 있다. 얼마나 많은 회심자(개종자)들을 얻었는가? 얼마나 많은 기금을 모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들의 영적 멘토로 칭송하는가? 당신의 가시적인 사역 수치는 다른 전도자들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이런 것들은 교만과 야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바울도 자기 직업 속에 이런 동기들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지만, 오직 사랑만이 단 한 가지 합당한 동기라고 주장한다(빌 1:15-16). 이 말은 이것이 다른 모든 직업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는 모두 인정과 안정, 그리고 돈을 포함한 성공의 표상을 위해 일하고 싶은 유혹을 받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이기적 야망’(NIV; eritieias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부당한 자기 과시’로 번역할 수 있다)에 이르게 한다.[1]
이들은 직업의 목적을 정당하게 달성했을 때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빌 1:18)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동기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일을 끝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에는(빌 3:7-14) 동기가 훨씬 더 중요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단 하나의 동기는 바로 사랑이다.
James Strong, Enhanced Strong’s Lexicon (Ontario: Woodside Bible Fel lowship, 1995), G2052
복음에 합당하게 일하라(빌1:27-2:11)
목차로 돌아가기우리가 하는 일이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에 어울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능력이 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라는 바울의 권면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일반적인 삶이지만, 그가 이 권면에서 일을 배제한다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특별한 명령을 한다.
마음을 같이하라(빌 2:2).
어떤 일이든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빌2:4).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이런 명령들에 합당하게 일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우리가 하는 일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를 향한 찬송’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단락 안에서 말한다(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 특히 우리 안에서 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은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겸손한 자세로 행해지며, 설령 그 것이 희생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행해진다.
"마음을 같이하여" (빌2:2)
세 가지 명령 가운데 첫 번째인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한 몸으로서의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세상 직장에서 그것이 적용되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직장 동료들과 항상 마음이 딱 맞을 수는 없다(롬 12:2). 그러나 대부분의 직장에는 크리스천들이 한 명 이상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기 위해 애써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교회 안에서라면 성경적 · 신학적 · 도덕적 · 영적, 심지어는 문화적인 문제에 의견을 같이하는 공동체에 들어감으로써 서로 구분 지어 생활할 수 있다. 그러나 직장에서는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다. 직장에서는 그런 문제들에 의견이 다를 수 있는 크리스천과 같이 일해야 한다. 간혹은 우리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는 누군가를 크리스천으로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것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하는 간증이나, 직장 동료로서의 업무 효율성 양쪽 측면 모두에서 수치스러운 장애물이다. 신자들인 우리가 비신자들보다 서로 더 어울리지 못한다면, 믿지 않는 우리 직장 동료들이 우리 주님을,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적어도 우리는 직장 내에서 다른 크리스천들을 찾아내 그들의 신념과 삶의 방식이 어떤지 알아 가야 한다. 아주 중요한 문제에서 서로 의견 일치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크리스천들을 경멸하고 그들과 언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상호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편이 훨씬 더 나은 간증이 될 수 있다. 최소한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 정말로 중요하다는 걸 믿는다면, 함께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우리의 차이점쯤은 기꺼이 옆으로 제쳐둘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마음을 같이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빌 2:2)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빌 2:8), 우리도 그가 가졌던 것과 똑같은 사랑을(빌 2:5)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직장내 다른 신자들뿐만 아니라 비신자들과의 관계에도 공통으로 해당한다. 바로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직장의 모든 사람은 우리의 일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만약 어떤 크리스천이 “제 역할은 당신을 섬기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누가 그 말에 반대를 하겠는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빌2:3)
다른 사람들을 우리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빌 2:3) 사람들의 마음 자세다. 크리스천들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겸손한 마음을 베풀어야 한다. 왜냐하면 겸손의 궁극적 행위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의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눅 5:32; 롬 5:8; 딤전 1:15).
직장은 겸손히 섬길 수 있는 무한한 기회를 제공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칭찬하는 데는 너그럽고, 실패를 비난하는 데는 인색할수 있다. 당신은 대답할 말을 미리 생각하기 전에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먼저 귀담아 들어 줄 수 있다.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시도해 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승진 또는 고액 연봉을 시기하지 않을 수 있고,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점심시간에 그런 시기의 마음을 다른 동료들에게 가져가 털어놓는 대신 그 마음을 하나님께 기도로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거꾸로 직장은 이기적인 야망을 이룰 무한한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앞에서 우리가 보았던 대로 야망은 (심지어 경쟁심도) 절대적으로 나쁜건 아니지만(롬 15:20; 고전 9:24; 딤전 2:5), 부당하게 자신의 목표만 추구하는것은 나쁘다. 이는 부정확하고 과장된 자기 진단으로 이어져(“허영”) 당신을 외딴 환상의 섬으로 이끌어 가 결국 일에서도 신앙에서도 효과적이지 못한 사람이 되게 만들 것이다.
이를 위한 두 가지 처방이 있다. 첫째, 당신의 성공 여부는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달려 있으며, 또 그들의 성공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것은 일반적으로 직장에서 진정한 팀워크를 발휘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항상 당신 자신과 당신이 수행한 일에 대한 정확한 피드백을 구하라. 그 과정에서 당신의 성과가 누구보다 탁월하다는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 판단의 근거가 정확하고 객관적이라면 그건 허영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단순한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이미지를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이미지보다 더 중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겸손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단, 당신이 정확한 근거에 입각한 피드백을 받았을 때에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신을 학대하거나 속이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미지를 의존하는 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다. 비록 자신의 몸은 십자가에서 학대를 당하고 계셨으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그대로 유지하셨다(눅 23:43).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빌2:4)
세 가지 명령 가운데 직장 내 우리의 역할과 조화시키기 가장 힘든 게 바로 이 명령이다. 우리가 출근해서 일을 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돌보지 않는 행위가 어떻게 타당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이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바울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빌 2:4) 말한다. 어쩌면 그는 각자가 자신의 이익만 돌보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돌본다면 각자의 필요도 채워지리라 기대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과 성경의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몸의 비유와 일맥상통한다. 눈 스스로는 자기 필요에 따라 몸을 움직일 수 없지만 발에 의지해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다. 따라서 각 신체 기관은 전체 몸의 유익을 위해 움직이지만, 그러면서도 그 자체의 필요 역시 채워진다.
이것은 이상적인 환경에서 서로 밀접하게 엮여 있는 공동체, 아마도 모두가 똑같은 수준으로 헌신하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있다면 거기서는 실현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을 일반적인 교회 밖 직장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바울은 우리 자신의 유익 대신 직장동료와 고객, 상사, 부하 직원, 공급자, 그리고 우리 주변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돌아보라는 의도로 말하는 걸까?
다시 한 번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유익 대신 죄인들의 유익을 구하시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우리의 본보기로 묘사하는 빌립보서 2장 8절로 돌아가야 한다. 그분은 단지 교회가 아닌 세상 전체에서 이 원칙대로 사셨고,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삶의 결과에는 고난, 손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포함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빌립보서 2장 어디에서도 직장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돌보는 것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줄 만한 구절을 찾을 수 없다.
초능력자가 되라는 게 아니다(빌2:19-3:21)
목차로 돌아가기
빌립보서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걸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 바울, 에바브로디도, 디모데를 예로 든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말한다(빌 3:17). 그는 2장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향한 찬송에 근거한 틀 안에서 이들의 사례를 묘사한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대로 행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셨으니 우리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변명 뒤에 숨을 수가 없다. 또한 바울, 에바브로디도, 디모데는 우리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초인들이 아니다. 우리 역시 일터로 갈 때 다음과 같이 ‘파송과 순종, 위험을 무릅씀, 다른 사람들을 섬김’이라는 이 동일한 틀 안에 우리 자신을 넣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는 명령을 상식선에서 완화시키는 것은 허용되는가? 가령,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유익을 먼저 돌볼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의 유익에 더해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도 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조화롭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공익을 위해 일하지만, 상황이 우리에게 불리한 구조일 때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돌보는 것이 괜찮은가? 바울은 이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 정도로 대담하게 살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은 딱 한 가지만 말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당신은 오직 하나님께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와 간구, 감사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데 필요한 어려운 결정과 감당하기에 벅찬 행동을 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은 추상적 신학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과 일에서 실천 가능한 조언이다.
갈등 해결 (빌4:2-9)
목차로 돌아가기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들 가운데 있는 두 여인, 곧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화평하도록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빌 4:2-9). 우리는 본능적으로 갈등을 그저 부인하거나 억압하지만, 바울은 애정을 가지고 이 갈등을 터놓고 논의하며 해결하고자 한다. 그 여인들의 불화 내용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지만, 두 사람 모두 바울이 “복음에 나와 함께 힘써온 사람들”(빌 4:3)이라고 말한 신자들이었다. 알다시피 독실한 크리스천들 간에도 불화는 일어난다. 바울은 분노를 쌓아 두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한 것’을 생각하라고 말한다(빌 4:8).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은 우리가 주변 사람들의 좋은 점을 알아주는 데서 시작되는 것 같다. 우리가 그들과 갈등 관계에 있을 때조차 (또는 특히 그럴 때)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두를 위해 죽임을 당하시지 않았는가!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온유와 기도와 간구와 감사, 염려하지 않는 마음(빌4:6)을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직장에서 쉽지는 않지만 분명히 적용할 수 있다. 직장에서 발생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을 무시하거나 숨기고 싶을 때, 험담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터놓고 얘기해야 한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면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좋다. 다만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가 아닌 겸손한 자세로 행해야 한다. 우리가 경쟁자와 맞서야 하는 경우, 적어도 그들의 장점이 무엇이든 인정해 주는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도리어 그들을 위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관여할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그냥 관계를 끝내 버리고 싶을 때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내가 우리의 능력과 인내를 대체하게 해야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인적 목표를 추구하는 대신 “자신을 비우시고”(빌 2:7), 이에 따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신(빌 2:9) 우리 주님을 본받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행한다면, 그땐 우리의 투사나 두려움, 분노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무엇이 진짜 쟁점인가’ 하는 관점에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 이는 대개 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에서의 관계 회복과 일종의 상호 존중으로 이어진다. 드물게 화해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우리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을 기대할 수 있다. 깨어진 관계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희망을 넘어서지는 못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이다.
서로 지원해 주기(빌4:10-11, 15-16)
목차로 돌아가기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를 개인적으로(빌 1:30), 재정적으로(빌 4:10-11, 15-16) 후원해 준 일을 감사한다. 신약 전체에 걸쳐 우리는 바울이 항상 바나바(행 13:2), 실라(행 15:40), 루디아(행 16:14-15), 브리스가와 아굴라(롬 16:3)를 포함한 다른 크리스천들과 동역자로서 함께 일하려고 애쓴다. 바울의 서신들은 전형적으로 그가 긴밀하게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인사로 끝을 마무리하며, (빌립보서가 바울과 디모데가 보낸 것처럼) 보통 바울과 다른 동역자들이 보낸 서신들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동역자로 삼아 거의 모든 일을 함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자신의 충고를 그대로 따랐다.
빌립보서 2장에서 우리가 본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세상 일터에서 항상 크리스천들과 같이 일하는 호사를 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서로를 지원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이나 또는 기관에서 부딪치는 특정한 도전이나 기회에 직면했을 때 서로 지원해 주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 “엄마 대 엄마” 프로그램[1]은 직장에서의 상호 지원의 실례다. 엄마들이 매주 같이 모여서 양육을 공부하고, 아이디어를 나누고, 서로를 지원해 준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모든 크리스천이 그들이 하는 일을 위한 이런 종류의 지원을 받을 것이다. 따로 공식적인 프로그램이 없다 해도 우리는 예배와 설교, 성경공부, 소그룹, 교회 수련회, 강의와 휴식 등 일반적인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우리 일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하는가? 바울은 생각과 소식, 교제와 자원들을 나누기 위해 장거리 항해를 하는 사자들을 동원하면서까지(빌 2:19, 25) 자신의 소명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www.momtomom.org를 보라
가난과 풍요 (빌4:12-13, 18)
목차로 돌아가기마지막으로 바울은 가난과 풍요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직장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데, 바로 일이 가난과 부의 차이를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일을 해서 월급을 받고 사는 우리들에겐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바울의 충고는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당신의 일이 항상 당신에게 풍요를 안겨줄 것이라는 기대로 일을 우상화하지 말라. 대신 당신의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을 동기 삼아 일하고, 적든 많든 그 일을 통해 당신이 제공받는 것에 자족하는 법을 배우라. 정말 따르기 어려운 충고다.
교사나 보건 분야 근로자, 고객 서비스 분야 근로자, 보모 등 일부 직종의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초과 근무를 하면서도 그에 따른 수당을 받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수행하는 일에 대해 충분히 보상받기를 기대한다. 계약서나 상여금이란 목표도 없이 일하면서, “나는 고객과 직원, 주주를 위해 일하고 있는데, 연말에 회사가 나에게 얼마를 주기로 결정하든, 저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고위 임원이나 투자 은행가를 상상해보라. 그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다. 바울은 간단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 내가 풍족하니..(빌4:12-13; 18)
요지는 우리가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 얼마나 많이 또는 적게 받는가가 아니라, 우리의 일을 할 때 다른 사람 또는 우리 자신 중 어느 쪽에 가져다주는 유익으로 인해 동기부여를 받느냐이다. 그러나 그 동기 자체는 지나친 빈곤이나 풍요의 결과를 낳게 하는 기관이나 관행, 체제에 우리가 저항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결론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목차로 돌아가기
갈라디아서
결론 부분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힘’을 언급하며(갈 6:14) 갈라디아서 앞부분에서 이미 말했던 다음 내용을 상기시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믿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그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사무실, 창고, 가게, 회의실을 들어갈 때도 함께하시며,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도록 촉구하고 권능을 부어 주신다.
크리스천의 삶은 믿음에 근거한 삶이다. 그러나 믿음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수동적 동의가 아니다. 오히려 크리스천은 매일의 삶의 경험에서 믿음은 살아 있고 능동적인 것임을 깨닫는다. 바울은,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갈 5:6)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행위 모두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갈 5:22) 바로 그때에,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믿음은 사랑의 행위를 북돋운다.
우리는 우리의 일로 스스로 의롭다 하려는 종 노릇을 거부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일은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로 이어진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갈 6:10, 현대인의성경)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행사하는 주요 통로가 돼야 한다. 만약 일터에서 믿음의 열매들을 맺지 못한다면, 삶의 중요한 부분을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잘라 내는 것과 같다.
에베소서
에베소서에서는 단지 몇 구절만이 정확히 직장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다. 그런데 그것도 도둑, 종, 그리고 상전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만물을 어떻게 회복시키시는지를 깨닫는다면, 또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발견한다면, 직장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선한 일을 하는 주요 무대가 된다.
에베소서는 우리가 하는 일 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개인을 위해 예비해 주신 선한 일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다른 자료를 참조해야만 한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신다는 사실을 말한다. 우리의 유일한 참된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우리 자신과 동료들을 바라볼 때, 직장에서의 대인관계와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에베소서는 우리의 삶에 새로운 관점, 곧 우리가 하는 일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죄에서 세상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 사역의 부산물이라는 관점을 갖도록 격려한다.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예수님 뒤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엡 4:1) 반응해서 일한다. 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사무실, 공장, 학교, 가정, 가게 등 모든 일터에서 우리가 주님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열의를 가지고, NRSV]”(엡 6:7)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다.
빌립보서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정확하게 일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행해지는 하나님 사역에 가지는 그의 비전은, 우리가 신앙과 일을 고려해 보게 만드는 토대를 놓고 있다.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우리가 살아 내야 하는 주요한 무대다. 우리는 삶과 일터에서 다른 크리스천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려고 애써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낫다고 여기며 행동해야 한다. 자신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
바울은 일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직장에서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장에서 하는 일은 단지 우리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기 때문에 바울은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성경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