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요한계시록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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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계시록은 일에 대한 ‘큰 그림’과 관련해 성경에 나오는 가장 예리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는 깨기 어려운 견과류처럼 단단한데, 요한계시록 본연의 난해함과 아울러 그 책을 둘러싸고 생겨난 무수한 해석들이 바로 그 이유다. 여기서 이런 문제들을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성경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 통찰력을 얻기에 충분한 공통의 토대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아마도 여러 해석들 가운데 가장 큰 간극은 기본적으로 이 책이 6장 이후부터 역사의 절대적 종말을 말한다고 보는 미래적 해석과, 요한이 이 책을 쓰던 당시(대략 AD 1세기 후반 무렵)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보는 해석일 것이다. 다행스러운 소식은 ‘미래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장래에 일어날 일들 역시 과거에 하신 하나님의 일들 (가장 두드러진 예를 들자면 창조 때와 출애굽 때 하셨던 일과 같은 과거의 일들)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을 기본적으로 1세기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이 책이 최후의 미래(예를 들면, 새 예루살렘)를 얘기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요한계시록에서 영속하는 영적 진리들을 찾아내는 것에 반대해서는 안 되며, 또 요한계시록에 담긴 약속에서 의미심장한 미래적 지향성을 보지 못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나라의 때가 가까이 왔다 (계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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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시록을 써 내려가고 채 몇 절도 안 돼 요한은 확고한 일의 신학 밑동을 싹둑 자르는 듯한 말을 한다. “때가 가까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요한이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오실 거라고 생각했다는걸 의미하고, 그런 생각은 틀렸다고 본다.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종말적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일들이 앞으로 신속하게 일어나리라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두 견해 가운데 어느 쪽도 신약의 나머지 성경과 맞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종말 시대’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히 1:1; 고전 10:11; 행 2:17). 따라서 ‘때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코앞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보고,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최선이다. 일상에서 확실하다고 하는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반(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을 뚫고 들어와 있다.


   이것은 일을 바라보는 우리의 견해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일을 칭찬하는 내용이 성경에 많이 나오지만, 현재 상태의 일들 가운데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앞으로 다루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하는 것은 영속적인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처음이자 마지막 말씀은 항상 하나님이셔야만 한다. 그분의 가치에 맞게 사는것은 너무도 중요하며, 세상 시스템과 세상의 우상숭배 방식과는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일곱 교회에 주는 메시지들 (계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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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교회에 주는 메시지들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몇 개의 교회들에게 주는 메시지들은 ‘내가 너희 행위(한 일들)를 아노니’라는 말로 시작한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행위를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책망을 받고(계 2:5), 사데 교회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위해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을 마무리하지 않아서 책망을 받았다(계 3:2).


   이 책은 성경에서 ‘행위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한다. 그 행위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확고한 사랑을 표시하는 방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감정만 중요시하신다는 잘못된 믿음 탓에, 일부 개신교 진영에서는 지금까지 일반적인 노동을 홀대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악명 높은 세속성이 겉으로 하는 일과 경제에 확연히 드러났다는 증거가 있다. 예수님께서 이 신자들에게 불에서 정련한 금과, 그들의 벗은 몸을 가릴 흰 옷, 그리고 그들의 눈을 치료할 약을 사라고 권면했을 때, 예수님은 마치 라오디게아의 3대 주요 산업인 은행업, 양모 산업, 그리고 안과학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계신 듯 보인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 안에서 구해다 쓸 수 있는 그 자원들이 삶에 필요한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 것 같다. 교회들(특히 번성하는 나라들에 있는 교회들)은 물질적 풍요가 종종 영적 빈곤의 가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일에서의 성공이 절대로 우리를 자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보이는 세상, 단지 천국의 서곡이 아니다(계4-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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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장에 나오는 요한의 환상은 요한계시록의 핵심이다. 그것은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을 시각화하는 핵심이다. 예수님의 신실한 증거와 희생적 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다.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4장에서 만물의 창조주로서 정확하게 찬양을 받고 계신다(계 4:11; 14:7 - ‘복음’의 정수가 ‘하늘과 땅, 바다와 모든 샘들을 지으신 분’을 경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보이는 세상은 나중에 생각해 낸 것이나 또는 단순한 천국의 서곡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의 표현이며, 피조물이 그분을 찬양하는 근거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한 번 일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토대가 된다. 만약 세상이 단순히 천국에서의 실제 삶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일은 결국 완전한 시간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상이 만약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물이라면, 의미 있는 일에 대한 전망은 더욱 희망적이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이 늘 하나님의 손안에 달려 있으며, 현재의 세상 질서는 중대한 개혁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지음받은 이 세상이 그분의 임재 안에서 의미 있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설계되었음도 명심해야 한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하나님 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셨고, 그 구속의 역사는 지금도 우리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진행 중이다.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주목한 대로, 예수님께서 그 나라를 받으시는 것은 이 땅에서 그가 하신 일에 근거한 것이다. 즉 “지상의 사건은 천상의 사건을 촉발시킨다. …… 신적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이 땅 위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험에 의해 규정되고, 결정되며, 촉발된다.”[1]

 

 Jacques Ellul, Apocalypse, trans. G. W. Schreiner (New York: Seabury, 1977), 47–48쪽.

구원 전에 재앙이 먼저 온다(계6-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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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를 전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매우 놀랍다. 구원 전에 재앙이 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요한계시록 6-16장을 보노라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가장 모범적인 이야기인 출애굽기가 생각난다. 물이 피로 변하고, 메뚜기 재앙이 일어나고, 천체가 어두워진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압제하는 후기의 바로에게서 그들을 구출시키는 종말적 탈출을 이끌고 계신다는 표시들이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이것을 요한 당시의 시대로 보든, 아니면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보든, 하나님의 방식들은 시대가 달라져도 한결같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일해 나가시기 때문에 역사의 패턴은 반복된다는 기본 요점은 바뀌지 않는다.[1]

 

   일터에서 이것이 갖는 중요성은 대단히 심오하다. 계시록의 유명한 ‘네 명의 말 탄 사람들’을 예로 들어 보자(계 6장). 그들이 전쟁과 그로 인한 죽음과 기근과 재앙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대변한다는 데는 의견을 같이한다.[2]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6장 6절이다. “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감람유와 포도주에 대한 기록은 애매한데(아마도 심판이 부분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있다[3]), 밀과 보리의 가격은 분명히 인플레이션이 되어 있다. 데이비드 E. 아우내(David E. Anne)는 밀이 정상 가격의 여덟 배, 보리는 정상 가격의 약 5.33배라고 말한다.[4]

 

   이는 장래에 있을 재앙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사이클은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이다. 즉, 사람들이 다 함께 평화롭게 지낼 수 없음이 경제에 무서운 결과를 부른다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이런 고난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에(계 6:9-11) 우리 일과 일터가 종종 우리의 통제를 넘어서고 만다. 이런 힘들이 정말 무섭기는 하지만, 요한계시록 6장의 또 다른 메시지는 그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터를 정의가 살아 있는 곳,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개발하는 축복을 경험하는 현장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우리는 힘닿는데까지 고군분투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는 우리 삶에 역경이 오도록 허락하시는 부분도 포함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요한계시록은 종종 울퉁불퉁한 길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라고 우리를 권면한다.

 

   요한계시록 6장 6절에는 어려운 시기에 취약한 자들을 약탈하지 말라는 확실한 과제도 있다. 경제가 힘들 때는 가격 폭등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비참함을 이용해 우리가 많은 이윤을 내는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그 강조점을 자연적 재앙에 두고 있긴 하지만, 8-9장의 대접 심판도 이와 비슷한 교훈을 준다. 정확한 역학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자연적 재앙은 보다 더 명백하게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포함하지만, 여기에는 또한 인간의 오염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도록 만드는 자양분이 되는 타락한 세상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치신다는 것, 그것이 요점이다. 이것은 형벌일 뿐 아니라, 또한 옛날 찬송가 가사에 나오듯이 ‘이 세상에는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벗어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고, 그분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피신처가 되도록 환경을 조종할 수도 없다.

 

   요한계시록이 전개되면 될수록, 강조점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짐승(역사의 마지막에 등장할 유일한 우상숭배 통치자, 또는 모든 그런 우상숭배 통치자들의 전형)의 통치하에 있는 그의 백성들의 충성스런 증거로 옮겨 간다. 신실한 “정복자들”(계 2-3장)이, 비록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에 의해 신원되긴 하지만(계 11:11), 짐승에 의해 한동안 ‘정복당하게 된다’(계 13:7)는 것은 (의도적인) 아이러니다.

 

   성도들의 고난에는 경제적인 고난도 포함된다. 악명 높은 “짐승의 표”를 거부한 사람들은 “매매”가 허락되지 않는다(계 13:17). 에스겔서 9장에 나오는 “표”의 비유는 그 짐승의 표가 우상숭배(로마제국?) 시스템(666은 악한 황제의 화신인 “네로 황제”를 의미할 수도 있다)에 대한 집착의 상징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혹 누군가가 훨씬 더 글자 그대로 미래주의적인 해석을 취한다 해도, 여기서의 영적인 교훈은 분명하다. 거짓 예배에 대한 세상 시스템을 따르길 거부하는 행위는 신실한 자들에겐 때로 부정적인 경제적 결과를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크든 작든 어떤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5]

 

  크리스천들은 항상 옳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이것은 경제 활동을 하는 기회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상숭배자들은 틀림없이 심판받을 것이고, 아무리 엄청난 재정 이익도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에 대적하는 자들 편에다 집어던질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다. 바로 이것이 13장에서 짐승을 따르는 자들이 14장의 144,000명, 곧 ‘그 입에 거짓말이 없는’(계 14:5) 사람들과 대조되는 이유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충성심과 진실한 증거를 유지해 나간다.

만약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요한 당대에 초점을 맞춰서 받아들인다면, “exodus”(대탈출)이라는 주제는 무엇보다 먼저 충실하게 자신의 신앙적 증언을 지켜 나가는 사람들은 죽자마자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미래주의자의 견해는 문자 그대로 사악한 나라가 뒤집어지는 것과 하나님 백성들의 천년왕국 입성(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두 시나리오 모두 대탈출 모티프의 궁극적 성취는 하나님 백성들이 새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것에 달려 있다

 Ben Witherington, Revela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132–134쪽; Grant R. 
Osborne, Revelation,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2), 274쪽. 그랜트 오즈번, 《BECNT 요한계시록》(부흥과개혁사 역간); G. K. Beale, Revela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9), 370–371쪽을 보라.

이 견해를 선호하는 저자들을 보려면 오즈번(Osborne)이 쓴 책 281쪽에 있는 논의를 보라.

David E. Aune, Rev. 6–16,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1998), 397–400쪽에 나와 있는 폭넓은 논의를 보라. 데이비드 E. 아우내, 《WBC 요한계시록 6-16》(솔로몬 역간).

오즈번이 쓴 책 518쪽에 있는 신중하고 적절한 언급을 살펴보라

바벨론 제국 VS 새 예루살렘(계17-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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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의 큰 그림에 대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결론 장에 나온다. 거기서는 세상 도성 바벨론이 하나님의 도성 새 예루살렘에 맞서 우뚝 서 있다. 요한계시록 17장 1절과 21장 9절에 나오는 그 도성들 소개는 아주 분명한 병행 구절 묶음이다.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계 17:1).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계 21:9).


   바벨론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문화를 건설하려고 시도했던 인류의 막다른 골목을 상징한다. 거기에는 인류가 항상 열망해 왔던 낙원의 모든 모습이 들어 있다. 그곳의 금과 보석들이 새 예루살렘의 금과 보석들을(계 17:4) 떠오르게 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처럼 바벨론도 열방에 대한 권세를 행사하고 그들이 바치는 부를 받는다(요한계시록 18장 3절의 “땅의 상인들”에 대한 언급과 15-19절에 나오는 바다 무역상들의 애가를 주목하라).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은 가짜이며,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이 멸하실 것이다. 특히 도움이 되는 것은 요한계시록 18장 11-13절에 나오는 화물 목록이다.[1] 그 목록은 에스겔 27장 12-22절과 두로의 몰락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요한 시대에 로마에서 인기 높던 사치품들도 포함시켜 최신판으로 수정됐다.


땅의 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사람의 영혼들”을 마지막에 기록하는 것은 노예 무역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며, 그것은 약탈을 일삼는 바벨론 제국의 관에 마지막 못을 박는 것이다. 즉 바벨론 제국은 인신매매조차 못하게 되며, 그저 육욕에 빠진 방종을 추구하면서 어떤 일도 서슴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도성의 경제 풍습 때문에 한 도성을 심판하실 거라는 교훈에 정신이 번쩍 든다. 요한계시록에서 경제는 분명히 도덕적인 문제다. 상당수의 정죄가 자기 방탕에서 유래한다. 이 같은 사실은 한결같이 더 많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근시안적 시각에 빠져 있는 현대 소비 문화에 특별히 더 충격을 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바벨론이 새 예루살렘과 아주 흡사해 보인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생명을 누려야만 하며 하나님은 이 땅의 아름다운 것들을 기뻐하신다. 만약 세상 시스템이 시궁창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면, 크리스천들을 세상의 미혹에 빠지게 만드는 유혹은 아주 적을 것이다. 그런 위험을 구성하는 것은 정확하게는 기술의 진보와 광범위한 무역 거래 네트워크에서 오는 혜택이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간섭 없이도 에덴의 모든 영광들을 약속해 준다. 그것은 서서히 그러나 냉혹하게 하나님이 주신 선한 선물들을 경제적 상호 교류, 농업적 풍요, 근면한 장인정신, 거짓 신들을 섬기는 것으로 바꿔 놓고 있다.


   이쯤에서 어떤 이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 경제에 조금이라도 참가하면 (또는 심지어는 지역 경제에 참여하더라도) 우상숭배가 항상 따라붙기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물러나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함께 사는 삶이라는 대안적 비전인 새 예루살렘을 제시한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도성”이며, 그래서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 은혜를 그린 최고의 표현이다. 또한 스스로 만든 괴물인 바벨론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2]


   어떤 면에서 새 예루살렘은 에덴으로의 귀환이다. 즉 만국을 소성케하는 과실이 맺히는 가지와 잎새가 있는 생명나무가 서 있는 강이 그 중앙에서 흘러나온다(계 22:2). 인류는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화평한 가운데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의 영광 자체가 그 도성에 빛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계 22:5) 그것은 진실로 에덴을 능가한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단순히 더 낫고 새로운 동산이 아니다. 그것은 전원 도시이며, 바벨론의 무게에 균형을 맞추게 해 주는 평형추를 형성하는 이상적 도시다. 예를 들면, 아직도 이 땅에 내려오는 하늘 도성에서의 삶에 인간의 의미 있는 참여를 하며 살아간다. 물론 이것의 중심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예배하는 백성들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게 될 것”(계 21:24-26)이라는 기록에는 그 이상의 뭔가 더 있는 듯하다.

 

  고대 사회에서는 성전을 지을 때 세상 최고의 자재들로 지었으며,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 그렇게 했다. 그리고 성전이 완공된 후에는 사람들이 성전을 장식하기 위해서 각처에서 예물을 가지고 올 것이다. 새 예루살렘 성으로 왕들이 예물을 가지고 오는 이미지는 아마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예물들이 인간 문화의 산물이며, 이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바친다는 상상을 펼치는 것이 그렇게 과해 보이진 않는다.[3]


   우리는 또한 오늘날의 삶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미래에 대한 구약의 비전이 암시하는 바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 65장은 요한계시록 21-22장의 배경이 되는 핵심 본문으로,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라는 요한계시록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같은 장에서 하나님은 백성들이 받을 장래의 복을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사 65:21-22).

 

   우리는 이사야가 단순히 농업의 풍요로움이 아닌 그 이상의 거대한 무언가를 당대에 통용되는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있다. 따지고 보면 축소시켜 말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축소시켜 말한다는 것은 “천국”을 구름이나 수금, 하얀 세마포 등 기존의 틀에 박힌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해부하는 건 쉽지 않다. 나는 새 하늘, 새 땅에서 아직도 농사를 짓고 있을까? 만약 내가 경건한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면 나의 1.0 소프트웨어는 기꺼이 소각해 버리고, 반면에 향상된 2.0 버전은 하늘의 도성으로 들어갈까? 성경은 이런 유형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지만, 우리는 다시 한 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큰 그림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땅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창조했는데 여기에는 창의성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고 돌아서셔서 믿음으로 행한 일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기시고, 저쪽으로 던져 버리신다는 게 온당한가? 균형을 맞춰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높이 여겨 주시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한 모든 일을 완전케 하실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보여 주는 예언적 비전도 창조 세계 안에서 의미있는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이미 그려 보이고 있다. 현 세상에서 만들어진 물건들을 새로운 세상의 일들로 바꾸실지, 또는 앞으로 미래 상태에서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할 것인지 하나님께서 자세하게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하는지는 단지 추측만 할 뿐이다. 그러나 이는 당신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을 알기’ 때문에, 당신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전 15:58)는 걸 의미한다.[4]

Richard Bauckham, “The Economic Critique of Rome  in Revelation 18,” The Climax of Prophecy: Studies in the Book of Revelation (Edinburgh: T&T Clark, 1993), 338–383쪽.

 Richard Bauckham, The 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126–143쪽.

G. B. Caird, The Revelation of Saint John (Peabody: Hendrickson, 1993), 279쪽을 참고하라. “하나님이 옛 질서에서 가치 있다고 보신 것은 새로운 질서에서도 배제되지 않는다. 요한의 천국은 세상을 부인하는 열반, 즉 세상에 존재하는 구제불능의 해악들로부터 도피하는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선함을 긍정하고 인치는 곳이다. 사람들이 천국에서 발견하게 될 보물은 알고 보면 열국의 보물과 부다. 그들이 지상에서 알고 사랑했던 최고의 것들이 하나님의 광채로 인해 온갖 불완전함을 벗고 변화한 모습으로 천국에 있을 것이다.” 또한 Darrell Cosden, The Heavenly Good of Earthly Work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2006), 72–77쪽을 보라.

코스덴(Cosden)의 책 여러 곳과 Miroslav Volf, Work in the Spiri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특히 88–122쪽을 보라.

요한계시록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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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의 일터에서 살아가는 삶에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요한계시록은 최고의 일터에서 어떻게 행하라고 자세한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지침, 특히 큰 그림이라는 쟁점들과 관련된 지침을 제공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당신이 할 일만하고 일에만 신경을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당신은 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방향성과, 당신이 현재 이 일을 왜 하는지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사람이 맡은 권한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조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목적을 향해 가는지,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지 살필 책임도 더 커진다. 착취를 일삼는 바벨론과 달리, 크리스천 비즈니스는 재화와 용역의 공정한 거래, 근로자들에 대한 정당한 대우, (기업과) 협력하는 관계자 및 사회의 장기적인 이익에 대한 관점 등 상호 이익을 위해 애를 써야 마땅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일터는 공식 · 비공식적으로 이교도 신들과 연관은 없지만(고대 사회에서는 종종 관련이 있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상숭배가 파고 들어올 수 있다. 오늘날 이윤과 지속을 회사 존재의 궁극적 목적으로 보는 회사가 있다면(아마도 그 회사 사장은 어마어마한 왕좌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런 회사는 성경의 바벨론과 같다. 우리는 삶의 전부가 하나님께 열려 있으며,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음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은 조롱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과, 그것이 종교적인 일들 못지않게 일터에까지 해당된다는 점을 되새기게 해 주는 강력한 각성제다.


   결국 이런 충성심은 행동 그 자체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예수님의 도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윤리에 흠잡을 데가 없도록 애써야 한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만 가능한 용서라는 영원한 의무를 감당하고, 일상 속에서 그분의 중대한 증인으로서의삶을 닮아가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으로 결론을 내리는게 적절하다. 현재의 세상과 새로운 세상 사이에는 근본적인 나뉨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아주 강력한 연속성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새 예루살렘은 여전히 그 새 예루살렘이다. 그것은 지상의 도성과 몇 가지를 공유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것은 지상의 예루살렘이 간절히 되고 싶어 하던 이상향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미래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분의 창조적인 선함의 신비 안에서 (우리가 하는 친절한 행동,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 등) 우리가 행한 일들은 반드시 우리를 따른다(계 14:13).

 

골로새서 · 빌레몬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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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17, 23-24).


   어째서 사도 바울[1]은 골로새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모든 말과 행동을 절제하라는 총체적인 명령을 기억하며 매일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바울은 간략하지만 풍부한 이 두 서신에서 거듭 등장하는 이 두 가지 명령의 배후에 있는 신학적 명제와, 생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모든 관계(배우자,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부하 직원이나 상사와의 모든 관계)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탐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