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사도행전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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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은 성장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며, 박해와 인력 부족과 재정 결핍, 정부 제도(나중에는 교회 제도도 포함), 내부 다툼, 심지어는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그린다. 그들의 일은 오늘날 교회와 무관한 직장에서 크리스천들이 직면하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 준다. 적은 규모의 사람들이 온 마음을 다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일에 매진했고, 그러는 동안 그들은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다. 매일 하는 일에서 이런 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도 인도해 주시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며 능력을 덧입혀 주길 원하신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리더들의 ‘활동들’(acts; 사도행[行]전-옮긴이주)을 기록한 책으로서, 일이 핵심을 차지한다. 이야기는 걷고, 말하고, 병을 고치고, 넉넉히 베풀고, 결정을 내리고, 다스리고, 음식을 제공하고, 돈을 관리하고, 싸우고, 옷과 장막 및 다른 물품들을 생산하고, 세례를 주고(또는 씻기고), 토론하고, 논쟁하고, 판단하고, 쓰고, 읽고, 노래하고, 법정에서 자신들을 변호하고, 땔나무를 모으고, 불을 피우고, 적대감에 불타는 군중에게서 도망치고, 껴안고 입 맞추고, 공회를 열고, 사과하고, 항해하고, 배를 버리고, 헤엄치고, 사람들을 구조하면서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양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일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수행할 준비가된 사람들이다. 가장 높은 지위의 사람이 하지 못할 만큼 천한 일은 없으며, 가장 낮은 지위의 사람이 하기에 벅찬 일도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깊이는 초대 교회 사람들이 하는 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슨 이유에서, 어떻게,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이런 활동에 참여하는지에서 나온다. 바로 섬김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동료들을 섬기고, 사회를 섬기고, 나그네들을 섬기는 것! 사도행전 전체에서 크리스천이 일하는 배후의 동기는 ‘섬김’이다. 이것은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두 번째 편이며, 누가복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몰아붙인 동기는 섬김이었다.

   ‘왜’라는 이유에 대한 답이 섬김이라면, ‘어떻게’라는 방법에 대한 답은 뭘까? 섬김이 아니라 착취에 기반을 두고 있던 로마 사회의 구조에 지속적으로 도전을 가하는 것이다. 누가는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 방식과 로마제국 방식을 대조시킨다. 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제국의 관리들과 많이 상호 교류했던 사실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로마제국 내에서 작동되고 있던 권력 체계들과 그 권력 체계를 떠받쳐 주던 사회 · 경제적 요소들을 잘 알았다. 황제에서 귀족, 관리들, 토지 소유주들, 자유인들, 종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회의 각 계층은 자기 아래 계층에 권력을 휘두름으로써 존재했다. 그러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듯, 하나님의 방식은 그와 정반대다. 하나님의 사회는 섬기기 위해, 특히 더 약하고, 가난하고, 희생당하기 쉬운 취약한 지위의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결국 사도행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반드시 종사해야 하는 여러 활동의 종류를 보여 주는 모델이 아니라, 우리 활동의 토대가 되어야 하는 섬김에 대한 헌신의 모델이다. 우리 활동은 당시 사도들의 활동들과는 여러모로 다르지만, 섬김에 대한 헌신은 똑같다.

사명을 받은 공동체 (행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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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모습 그대로 세상을 회복시키려는 예수님의 사명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사명으로 전환된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주변 세상과는 다르게 일하고 일과 관련된 힘과 부를 다르게 사용하는 그룹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구성하는 동안 그들의 공동체 생활을 추적한다. 이 작업은 교회라 불리는 독특한 공동체의 탄생으로 시작된다. 누가는 “그들이 모였을 때” 그 공동체로 시작하며,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려는’(행 1:6) 임무를 계속해 나간다. 이 일의 성취를 위해 그 공동체는 먼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명을 지향하고,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증인을 자기 정체성으로 붙들어야 한다.

증인의 사명, 성령으로만 감당할 수 있다 (행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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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은 부활 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다(행 1:3). 그들은 사회적 · 정치적 나라를 세우는 것에 대한 질문으로 반응한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6).[1] 예수님의 반응은 일꾼으로서의 우리 삶과 아주 긴밀하게 연관된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제자들의 호기심을 막아 버리신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 1:7).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정확한 시간에 집착해 계속해서 의문을 품으며 살아서는 안 된다. 둘째, 예수님은 사회적 · 정치적인 나라, 곧 제자들이 물었던 ‘이스라엘에 회복시키실 나라’를 하나님이 세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이스라엘의 성경을 잘 알았다. 그들은 선지자들에 의해 그려진 나라가 또 다른 하나의 현실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새로워진 이 세상에서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참다운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예수님은 다가올 이 나라의 실체를 부인하지 않으셨으나, 기대하는 그 나라 속에 모든 피조 세계를 포함시키심으로 제자들의 기대의 범위를 확장시키신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영토를 위한 새로운 나라가 아니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행1:8) 이르는 나라다. 이 나라의 완성은 (“이때까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미 여기 이 세상에 와 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계 21:2-3).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임한다. 하나님이 여기, 구속된 이 세상에 거하신다. 그런데 왜 아직 여기에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분의 제자들이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그 답의 일부임을 암시한다. 에덴 동산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는 데는 인간의 일이 필요했지만(창 2:5), 우리의 일은 타락으로 무능력해지고 말았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일에 힘을 불어넣으시기 위해 그분의 영을 보내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도래에 필수적인 사명을 주셨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활동영역에 성령의 능력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선물은 하나님이 인간의 일에 위임하신 필수적인 역할과 그 역할을 완수할 수 있는 우리 능력 사이의 간극을 메워 준다. 타락 이후 처음으로 우리의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기여할 능력을 갖췄다. 대체로 학자들은 이 사도행전 1장 8절을 누가의 두 번째 책(사도행전)의 표제적인 진술로 본다.

   실제로 사도행전 전체는 (때로는 비틀거리기도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라는 크리스천의 사명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증언한다는 것은 전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께서 각 개인이 자기 말을 통해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나누는 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해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원칙과 관습에 맞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효과적인 증인의 형태는 종종(더 정확히 말하면 주로)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공동체의 삶을 나누는 것임을 우리는 볼 것이다.

   증인이 되는 사명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성령님은 개인과 공동체를 변혁시켜서 인간 노동의 결실, 특히 능력, 자원, 영향력을 지역 공동체 및 주변의 문화와 나누게 하신다.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도와줄 때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된다. 또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문화에 더 폭넓은 유익을 끼치기 위해 자신들의 자원을 사용할 때 증인이 된다. 정의, 선, 아름다움의 방식으로 일해 더 충만한 삶에 이르는것을 주변 사람들이 볼 때 공동체는 예수의 증인이 된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지역들을 보면 제자들의 증언이 그들을 사회적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곳들이다.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제자 그룹은 로마제국의 원수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서 최근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한 사람을 위해 대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그들의 스승이 죽임을 당한 도시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의 인종적 원수들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들, 넓게는 로마제국까지 이 부르심을 가져가라는 사명을 받았다.[2]

   한마디로, 사도행전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증인’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위해 부르신, 즉 목적이 분명한 부르심으로 시작된다. 무엇보다 증인이 된다는 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방식에 합당하게 사는 삶을 뜻한다. 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다. 이 사명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며, 사회적 장벽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이행되어야 한다. 목적이 분명한 이 부르심은 인간의 노동이나, 오직 말씀으로 예수님을 전파하는 제자들의 노동자로서의 삶을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행전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나라의 근본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이다.

누가가 사용했던 회복 동사인 ‘Apokathistēmi[아포카티스테미]’를 국가적 회복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망을 설명하기 위해 70인역과 요세푸스가 사용했다. (출 4:7; 호 11:11,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11.2, 14를 보라.) 또한 David L. Tiede, “The Exaltation of Jesus and the Restoration of Israel in Acts 1,” Harvard Theological Review 79, no. 1 (1986): 278-286쪽과 James D. G. Dunn, Acts of the Apostles, Epworth Commentaries (Peterborough, UK: Epworth Press, 1996), 4쪽을 보라.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적대감에 대한 참고 자료는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18:30; Jewish War 2:32 이하를 보라. “땅끝”에 대한 언급은 로마제국의 사람들과 장소의 최대 범위를 암시한다. David W. Pao, Acts and the Isaianic New Exodu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2), 91-96쪽을 보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행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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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순절 이야기가 초대 교회 공동체 삶의 중심이 되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 묘사된 ‘증인의 사명’이 시작된 사건이다. 사도행전의 이 부분은 모든 일꾼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첫째, 성령 강림은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크리스천들의 정체성을 인정해 준 사건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세상을 재창조하여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셨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생명력을 더한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나타난 그 현상을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언급함으로써 설명한다.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5-21).

   베드로는 포로된 하나님 백성의 회복을 묘사하는 요엘서 부분을 언급한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단번에 영원히 그분의 백성을 건지는 일을 시작하셨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이 부분을 사용한다.[3]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동시에 세상의 재창조의 시작이다. 요엘은 이 재창조를 너무 놀라워 숨이 멎을 듯한 이미지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땅에 돌아오면서 사막은 일종의 새 에덴으로 생명이 살아난다. 흙과 짐승과 사람 모두 하나님의 승리와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기뻐한다(욜 2장). 요엘서의 이 부분에 나오는 풍부한 이미지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회복이 즉각적으로 경제적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욜 2:19). 이런 구원 행위의 절정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초대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세상에 실질적이고 대단히 신비로운 방식으로 참여하는 참여자가 되게 하시려 성령이 오셨다고 이해했다.

   다음으로 중요하면서도 밀접하게 연관된 요소는, 베드로가 구원을 “패역한 세대”(행 2:40)에서의 구출로 본다는 점이다.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설명해 둘 필요가 있다. 하나는 누가가 이 세상에서 도망쳐 하늘의 존재로 옮겨 가는 것을 구원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리어 구원은 바로 지금 이 세상 한복판에서 시작된다. 또한 누가는 구원이 현재 시제 구성요소를 가지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이 “패역한 세대”의 패턴에 반하는 다른 방식의 삶으로서 지금 시작되는 것이다. 일과 일의 경제 · 사회적 결과는 인간의 정체성에 너무도 중심적인 것이기 때문에, 처음 재편돼야할 부분 가운데 하나는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소유를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도행전의 초반부 흐름은 이렇게 흘러간다. (1)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삶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신다. (2) 성령의 오심은 오래전 약속된 “주의 날”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새 세상으로 사람들을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3) “주의 날”에 대한 기대에는 심오한 경제적 변혁이 포함되어 있다. 누가의 다음 행동은 성령으로 능력을 받아 하나님 나라 경제에 따라 살아가는 새로운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종말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기대를 크리스천들에게 맞게 바꾼 것을 “시작된 종말론”(inaugurated eschatology)이라 부르며, 흔히 이미(already) 여기에 와 있지만 아직(not yet) 완성되지는 않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하에 조직화한다. 이스라엘은 주의 날이 절정의 단계에서 올 것으로 기대했다. 초대 교인들도 주의 날이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부으심으로 시작되었으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걸 발견했다.

권력과 소유를 쓰는 법이 달라지다 (행 2:42-47; 4: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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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가 성령이 새로운 공동체를 창설하셨다는 선언을 한 후에, 사도행전은 그런 공동체가 여러 곳에서 아주 빠르게 성장해 나가는 것을 추적해 나간다. 사도행전 2장 42-47절과 4장 32-37절에 요약되어 있는 공동체가 가장 집중적으로 묘사된 공동체다. 실제로, 초대 신자들의 헌신의 범위와 그들이 함께 나눈 삶에 대한 본문의 묘사는 놀랍기 그지없다.[4] 그 둘은 상당한 유사점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함께 논의해 나갈 것이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2-37).

 

   이 본문은 직접 일을 묘사하지는 않지만, 흔히 인간이 하는 수고의 결실인 권력과 소유라는 두 실체의 배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살던 주변 사회와 비교해 볼 때, 크리스천 공동체들은 권력과 소유의 사용에서 아주 다른 풍습들을 기르고 있다는 것이다. 초대 크리스천들은 각 개인이 가진 권력과 소유는 그 개인의 편안함을 위해서 비축해 둬야 하는 게 아니라, 크리스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거나 지혜롭게 투자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게 분명하다. 재화(財貨)는 타인의 선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 어떤 것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은 타인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두 가지를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첫째, 이 본문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정체성을 크리스천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공동체의 유익이 각 개인 구성원들의 유익이라는 말이다. 둘째, 이것은 당시 로마제국을 특징짓고 있던 보호 경제와 근본적으로 결별하는 것이다. 보호 체계하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부자들의 선심은 체계적인 의무 구조를 만들어 낸다. 베푸는 자에게서 나오는 모든 선심은 그것을 받은 자의 사회적 부채를 내포한다. 이런 체계는 너그러운 후원자(후견인)가 그 후원에 따라오는 영예를 얻기 위한 가짜 선행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5] 한마디로, 로마 경제는 ‘너그러움’(후한 베풂)을 사회적 권력과 지위를 얻는 수단으로 봤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묘사에는 구조적으로 은혜에 대한 답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개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크리스천 공동체에서의 기부는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의 번영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동기가 되어 하는 것이지, 기부자의 영예를 위한 게 아니다. 베풂은 주는 사람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고, 그 혜택을 받는 사람하고 관계가 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사회 경제 체계다. 누가복음에서처럼, 사도행전도 기독교 개종은 소유와 권력에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하는 결과에 이른다고 주기적으로 입증해 나간다. 나아가 재화는 이웃을 위해 써야 한다는 이 고집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명, 무엇보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보이신 자기희생에서부터 명확하게 나타난다.

역사적 맥락 안에서 누가가 쓴 공동체에 대한 요약과 그 두 본문의 병행은 많은 글의 주제가 되어 왔다. Essene/Qumran parallels: Brian J. Capper, “The Interpretation of Acts 5.4,”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6, no. 19 (1983): 117-131쪽; Brian J. Capper, “The Palestinian Cultural Context of Earliest Christian Community of Goods,” The book of Acts in its Palestinian setting, ed. Richard J. Bauckham (Grand Rapids: Eerdmans, 1995), 323-356쪽에 수록; Greco-Roman friendship parallels: Alan C. Mitchell, “The Social Function of Friendship in Acts 2.44-47과 4.32-37,”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11, no. 2 (1992): 255-272쪽; Greco-Roman utopian parallels: Gregory E. Sterling, “ ‘Athletes of Virtue’: An Analysis of the Summaries in Acts (2.41-47; 4.32-35; 5.12-16),”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13, no. 4 (1994): 679-696쪽; parallels with Greco-Roman associations: Philip A. Harland, Associations, Synagogues, and Congregations: Creating a Place in Ancient Mediterranean Society (Minneapolis: Augsburg Fortress, 2003); John S. Kloppenborg, “Collegia and Thiasoi: Issues in Function, Taxonomy and Membership,” Voluntary associations in the Graeco-Roman world, ed. John S. Kloppenborg, S. G. Wilson (London: Routledge, 1996), 16-30쪽.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구제가 이런 식으로 기능하는 것은 지금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급진적 베풂 (행 2:45; 4: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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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주석가들은 이 공동체의 모습을 “원시 공산주의”라고 묘사하고 또 다른 주석가들은 재화를 강제로 박탈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 등, 이 공동체들을 묘사한 성경 본문이 어느 특정 경제 체제를 옹호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크리스천 공동체를 넘어선 사회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소외된 자들로 이루어지고 사회적으로 아무 힘도 없는 하찮고 작은 집단이 거대 제국의 경제 체계를 변혁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공동체가 제국 내 경제 체계에서 완전히 분리돼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부들은 수산업 협동조합에 남아 있었고, 장인들은 여전히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6] 누구보다 바울도 자신의 선교 여행 경비 조달을 위해 장막 짓는 일을 계속해 나갔다(행18:3).

   도리어 본문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암시한다. 초대 교회 안에서는 재물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from time to time”(때때로 - 행 4:34, NIV) 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행 2:45; 4:35) 자신의 재화들을 소모했다. 이것은 급진적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눠 주는 것이 각 개인의 자산 관리의 정상적인 형태라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각 개인들이 자신들의 특정한 자원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면서도, 크리스천 공동체의 용도를 위해 자신이 소유한 물질적 · 정치적 · 사회적 · 실질적 자원들을 계속해서 내놓았다는 것이다.

   체계적으로 부를 분배해서 평면적인 공평성을 확보하는 대신, 초대교회는 경제적 불평등의 실상을 수용했고 재화가 개인이 아니라 전체의 유익을 위해 적절하게 존재하게 하는 급진적 베풂을 실천했다. 이런 형태의 나눔은 여러 면에서 엄격한 규칙에 얽매인 체계보다 훨씬 더 부담이 크다.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의 삶에 계속해서 관여할 것과 책임을 져줄 것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소유를 계속해서 느슨하게 잡고, 공동체 내의 관계를 소유물에서 오는 가짜 안정감보다 더 높은 가치로 볼 것을 요구한다.[7]

   체계 안의 이 체계는 50년마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토지와 그 토지에서 얻은 부를 재환원해 주는(레 25:1-55) 희년의 시행이 절정을 이루는 이스라엘의 율법에 표현된 경제적 이상에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희년은 사람이면 누구나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도록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고안하신 것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광범위하게 시행하지 않았던 하나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많은 희년의 주제를 소개하는 이사야서 61장과 58장에서 인용한 본문으로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희년의 윤리는 누가가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라”라고 말하는 사도행전 4장 34절에도 암시된다. 이 구절은 신명기 15장 4절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장으로,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라는 말씀을 확고히 하기 위해 고안된 안식년(매 7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의 축소판)의 시행을 담고 있다.

   크리스천 공동체가 이것을 자신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모델로 보려는 것은 적합하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안식년과 희년을 단지 각각 7년, 50년마다 한 번씩 시행해야 한 데 반해, 급진적 베풂은 초대 크리스천 공동체의 특징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산상수훈과 유사한 용어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예전에 너희는 매 50년마다 너희 토지를 토지가 없는 자들에게 돌려주라는 말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 권력과 자원들을 너희가 도울 필요가 있는 사람을 볼 때마다 언제든지 그들에게 내다 줄 수 있게 하여라.’ ” 다른 사람의 필요에 토대를 둔 급진적 베풂은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경제 활동의 토대가 된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건들을 통해 이 점을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초대 교회의 풍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오늘날의 급진적 베풂의 모델에 대해 상상력을 펼쳐 보라고 도전한다. 급진적 베풂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며, 개인적 부와 안정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인간의 삶을 조직화하는 가능성 있는 대안을 형성할 수 있을까?

Harland, Associations, Synagogues, and Congregations: Creating a Place in Ancient Mediterranean Society; Kloppenborg, “Collegia and Thiasoi: Issues in Function, Taxonomy and Membership,” Voluntary associations in the Graeco-Roman world, 16-30쪽.

Christopher M. Hays, Luke’s Wealth Ethics: A study in Their Coherence and character, Wissenschaftliche Untersuchungen zum Neuen Testament 2.275 (Tubingen: Mohr-Siebeck, 2010)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부의 윤리를 깊게 탐구했다.

후히 베풀 능력을 부어 주시는 성령 (행  2:42-47; 4: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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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두 가지 요점은 초대 크리스천 공동체의 자원 사용과 관련해 주목해 봐야 할 중요한 것들이다. 첫째, 급진적 베풂의 실천을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하다. 사도행전 2장 42-47절과 4장 32-37절에 묘사된 공동체의 모습은 성령이 나타나신 두 번의 주요 현현 직후에 나온다. 성령님의 임재와 권능, 그리스도를 닮아 너그럽게 살고자 하는 공동체의 능력사이의 연결 고리를 누가만큼 또렷하게 보여 주는 이도 없다. 우리는 초대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서 행하신 성령의 근본적인 역사하심 중 하나가 자원의 배분과 관련해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한 공동체를 구축한 것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환상, 방언, 기타 등등) 좀 더 장엄한 성령의 나타나심을 추구하면서도, 단지 무언가를 누군가와 나누는 행동이나 또는 일관되게 환대하는 행동도 성령이 주시는 가장 장엄한 은사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둘째, 우리가 이 말씀이 오로지 재정 자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할까 봐, 베드로와 요한이 모든 자원은 다 타인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증명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사도행전 3장 1-10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 앞에 있는 한 거지를 만난다. 그 거지는 돈이 하나도 없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증언이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대답한다(행 3:6). 여기서 금전적 부와 연결되지 않는 자원의 나눔에 대한 좋은 예가 나온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힘과 지위를 사용하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몇 번 나타난다.

   가장 큰 감동은 재정 자원을 급진적인 너그러움으로 내놓은 모범 사례(행 4:32-37)였던 바나바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도 바울과의 교제를 꺼려할 때 그를 환영해 들임으로써 바울을 처분하는 일에 자신의 사회적 자원까지 내놓았을 때(행 9:26-27) 일어난다. 또 다른 사례는 두아디라 성안으로 바울이 들어오게 하기 위해 두아디라의 섬유 산업계에서 자신이 가진 높은 사회적 지위를 사용한 루디아다(행 16:11-15). 사회적 자본도 다른 자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 효율적으로 활용돼야 한다. 

정의로운 공동체로 모여드는 사람들 (행 2:47;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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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들을 선택한 이후에서처럼 자원들이 크리스천 공동체의 삶에서 적절히 배치될 때 그 공동체는 하나의 자석이 된다. 그 공동체의 정의로운 삶, 권력과 소유를 기본적으로 타인 중심으로 사용하는 삶은 사람들을 그 공동체 안으로, 그 공동체의 머리이신 예수님께로 끌어당긴다.

   그 공동체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공동체의 소유와 특권들을 사용할 때, 개인의 자원들이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온전히 드려졌을 때, 사람들은 그 안으로 떼로 몰려든다. 우리는 이미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는 것’(행 2:47)을 봤었다. 그것은 사도행전 6장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한 섬김의 여파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공동체를 세우고 정의를 강화하는 일곱 집사들의 수고는 수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공동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들 (행 5-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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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은 진정한 공동체의 흙내 나는 현실에서 일어나며, 죄의 영향력이 이 공동체에 끼친 위협에 대해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지 않는다. 누가가 제시하고 있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처음 두 가지 주 요소는 자원과 연관된 것들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물론 그 공동체 내의 히브리어 · 아람어 사용자들도 그들이 가진 자원과 권력의 청지기직과 관련해 죄에 빠진다. 누가는 이런 결함을 공동체의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봤다.

행위의 동기가 중요하다 (행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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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행 5:1-11) 두렵거나 당혹스러운 것 이상이다. 이 부부는 땅의 일부를 팔았고, 그 돈을 공개적으로 그 공동체 앞으로 가져와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돈의 일부를 남겨 뒀다. 베드로가 그런 속임수를 찾아내고 그 둘에게 따로따로 묻는다. 베드로가 책망하는 소리만 듣고도 그 두 사람은 그대로 쓰러져 각각 그 자리에서 죽었다. 우리의 귀에는 그들의 운명이 그들의 위반행위에 비례하지 않는것 같은 느낌이 든다. 베드로는 그들이 그 돈을 기부할 의무가 없었다는것을 인정한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행 5:4). 사유 재산은 폐지되지 않았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겨 주신 자원들을 합법적으로 보유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돈에 대해 한 거짓말이 어째서 즉사라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한 것인가?

   그들의 사망 이유를 설명하려고 많은 시도가 있었고, 그들이 지은 죄목을 밝히려고 했다.[8]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허물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그 공동체의 가짜 멤버였다는 것으로 보인다. 학자인 스콧 바치(Scott Bartchy)가 말한 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이 갖지 못한 영예를 얻으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후원자로서의 그들 스스로 명예를 더럽히고 수치를 자초했을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동류가 아닌 외부인이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9] 그들은 수전노보다는 사기꾼이었다.[10]

   그들의 사기행각은 그들이 여전히 로마제국 후견인 제도에서 후견인이 경제적 지원을 베푸는 것처럼 가식적이었으면서도 크리스천의 이웃사랑 체계의 일원이 된 것처럼 가장한 데서 증명된다. 그들은 자원의 청지기직에 있어서 타인 중심의 접근법을 보인 바나바처럼 보이려고 시도했다(행 4:36-37). 그러나 그들의 실제 동기는 싼값으로 자신들의 명예를 얻는 데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로마 후견인 체계의 일원으로서 기능한 것이다. 그들은 너그러운 사람들로 보였지만, 사랑이 아니라 지위 때문에 기부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들이 자원의 청지기직에 대해 한 거짓말은 베드로에게는 성령과 하나님께 한 거짓말로 해석되었다(행 5:3-4). 공동체에게 한 거짓말이 하나님의 성령께 한 거짓말과 동일시된다는 건 너무도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자원에 대해 한 거짓말도 ‘종교적’ 문제들에 대해 한 거짓말 못지않게 심각하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주된 역할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른 사람에게 깊이 관심 가지며 자원을 사용하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봤다. 그렇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가짜 베풂 행위가 성령의 역사를 위조한 것으로 서술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거짓 베풂과 성령을 속이려던 그들의 시도는 초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었다. 이것은 크리스천 공동체와 그 안에서의 우리의 참여와 관련한 심각한 위험들을 상기시켜 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기는 돈의 영역에서 일어났다. 만약 일 자체의 영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들이 거짓으로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그들의 주인들을 섬기는 척하거나(골3:22-24), 또는 자기 종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척하거나(골 3:25), 아니면 정직하게 갈등을 대면하는 척했더라면(마 18:15-17)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누가 그런 것들에 대해 크리스천 공동체를 속였다면,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위협이 되었을까? 사도행전은 그런 경우를 한 건도 보고하지 않지만, 같은 원리는 적용된다. 진정으로 크리스천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동기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사회적 지위나 부,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항상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자세한 설명과 해석은 Joseph A.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he Anchor Bible (New York: Doubleday, 1998), 318-319쪽을 보라.

S. Scott Bartchy, “Community of Goods in Acts: Idealization or Social Reality?” The Future of Early Christianity: Essays in Honor of Helmut Koester, ed. Birger A. Pearson, A. Thomas Krabel, George W. E. Nickelsburg, Norman R. Peterse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1), 316쪽.

경제적 · 공동체적 함의와 관련해 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다루기 위해 Aaron J. Kuecker, “The Spirit and the ‘Other,’ Satan and the ‘Self ’: Economic Ethics as a consequence of Identity Transformation in Luke-Acts,” Engaging Economics: New Testament Scenarios and Early Christian Reception, ed. Bruce W. Longenecker, Kelly D. Liebengood (Grand Rapids: Eerdmans, 2009), 81-103쪽을 보라.

성령 충만한 일꾼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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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서 제기된 주제들은 크리스천 공동체내의 최초의 그룹 간 논쟁을 기록한 사도행전 6장 1-7절에도 나와 있다. 아마도 헬라파들은 로마제국 내에 흩어져 있던 많은 공동체 소속의 유대인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헬라어를 하는 유대인들일 것이다. 또 히브리파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땅(팔레스타인)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기본적으로 아람어나 히브리어 둘 다를 쓰거나, 둘 중 하나를 쓰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하는 데는 사회적 상상력이 크게 필요치 않다. 자신들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공동체 안에서, 이스라엘 원 족속에 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그 그룹들의 자원들을 더 많이 받았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상황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자주 일어난다. 배경이나, 문화, 지위 등에 기반을 둔 운동 단체 지도자들의 유형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종종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신분 때문에 지도자들과 다른 신분의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어떤 이익을 본다.

말씀 가지고 섬기는 것과 식탁에서 섬기는 것, 똑같이 귀하다 (행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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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이 일의 신학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사도행전 6장 1-7절에 나오는 공동체 내의 불공평에 대한 사도들의 대응에서 나온다. 정의의 실현이(여기서는 양식 배분을 감독하는 것) 말씀을 설교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것은 NRSV와 NIV가 번역을 잘못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열두 사도가 제자 공동체 전체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식탁 시중을 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행 6:2, NRSV).
       

식탁 시중을 드느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소홀히 하는 건 옳지않을 것입니다(행 6:2, NIV).
   

   이 영어 번역에서는 사도들의 생색내는 목소리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들 마음속에는, (NIV가 번역한 것처럼)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사역”이고, 식탁 “시중”을 드는 것은 하찮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공동체 안에서 “허드렛일”,[11] “하찮은 일”,[12]“천한 일”[13]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같이 번역한 것이다. 이런 식의 해석은 차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6장 3절의 성령의 영향력에 숨겨진 ‘진짜’ 목적으로 본다.[14] ‘자원 분배의 관리 같은 천한 일에 성령이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은 애매모호한 번역 때문에 일어난다. NRSV나 NIV에서 번역한 ‘시중들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diakone?[디아코네오]’로서 섬김 (service) 또는 사역(ministry)의 의미를 담고 있다. KJV와 NASB는 그것을 좀 더 정확하게 ‘serve’(섬기다)로 번역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떠나 식탁에서 섬기는 것은 합리적이지[즉 옳지] 않습니다(행 6:2, KJV).
       

우리가 식탁을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소홀히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행 6:2, NASB).
   

   더 나아가 몇 단어 후 사도행전 6장 3-4절에서는 NRSV와 NIV도 같은 단어를 ‘섬김’과 ‘사역’으로 번역한다.
     

우리는, 우리 쪽에서는, 기도와 하나님 말씀 섬기는 일에 전력하겠습니다(행 6:3-4, NRSV).
     

[우리는] 기도와 말씀 사역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할 것입니다(행 6:4, NIV).

   다시 말하면, 말씀을 가지고 하는 일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는 자원을 분배하는 일을 가리키는 단어와 (동사 형태로는) ‘섬김’을 뜻하는 같은 단어 ‘diakonia[디아코니아]’이다. NRSV와 NIV 번역자들은 설교하는 일을 ‘섬김’과 ‘사역’으로 올바르게 간주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양식의 배분을 가리킬 때는 식탁에서의 ‘시중’(waiting)이라는 의미로 그 뜻을 비하시켰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KJV와 NASB의 번역자들은 본문에서 그런 사도들의 생색내기를 읽어내지 않았다. 말씀을 가지고 일을 하든, 식탁에서의 음식을 가지고 일을 하든 간에 두 그룹 다 이 번역들에서는 ‘섬기고’ 있다.

   헬라어 본문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은 사도들이 기도하고 설교하는 일과 동등한 것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전달해 준다. 사도들은 말씀을 섬겼고 집사들은(그렇게 불리기 시작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섬겼다. 그들의 섬김은 비록 구체적인 과업과 기술은 달랐지만 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이었다. 하나님 백성의 형성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증인이 되는 일에 둘 다 필수적인 것이었다. 공동체의 삶은 이런 형태의 섬김에 달려 있고, 누가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힘이 있다거나 또는 더 신령하다는 의미는 전달하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생색내는 태도가 단순한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도들 말 속에 실제로 드러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사도들 스스로 자신들이 식탁 시중드는 일을 위해 택함받은 자들보다 자신들이 더 재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말씀을 섬기라고 택정함을 입었다는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사도들은 로마제국의 후견 제도와 비슷한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자신들은 너무도 고상하기 때문에 식탁시중 같은 것을 들 수 없다고 스스로를 구별하는 게 될 것이다. 신분의 새 원천(성령의 은사들)을 낡아빠진 로마의 것(후견인 제도)으로 대체시키는 꼴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보다 훨씬 깊다!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는 지위의 원천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식탁을 시중들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스데반은 대부분의 사도들보다 더욱 탁월한 설교의 은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행6:8-7:60). 그러나 그런 설교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원을 분배하는 섬김을 위해 따로 세워진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가 말씀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식탁을 시중드는 것이 하나님께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지위에 대한 갈망은 식탁을 섬기기 위한 이 부르심을 수용하는 길에 걸림돌이 전혀 되지 못했다.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e, 344쪽.

John Michael Penney, “The Missionary Emphasis of Lukan Pneumatology,” Journal of Pentecostal Theology (Sheffield, UK: Sheffield Academic Press, 1997), 65n11.

Joseph T. Lienhard “Acts 6.1-6: A Redactional View,” Catholic Biblical Quarterly 37 (1975), 232쪽.

Youngmo Cho, Spirit and Kingdom in the Writings of Luke and Paul (Waynesborough: Paternoster, 2005), 132쪽.

성령이 하게 하신다 (행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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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6장에서는 공동체 안의 인종적 분열을 치유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일꾼들에게 자격을 주었다. 그들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도와 설교에 자격을 갖춘 자들처럼, 식탁 시중드는 능력도 성령의 능력의 결과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기독교인들 사이에 의미 있고 공동체를 건설하고 화평케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할 수가 없다. 이 단락은 우리가 공동체를 세우거나 더 넓게는, 정의와 선과 미를 촉진시키는 모든 일을 깊은 의미에서 세상에 대한 섬김(또는 사역)으로 보도록 도와준다.
 

 우리 교회 안에서 말씀을 전파하는 목사와, 자기 자녀들에게 사랑의 가정을 제공해 주는 부모들과, 자기를 고용해 준 고용주의 지출에 대해 공정하고 정직하게 보고를 해 주는 회계원의 사역이 다 똑같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는가? 그 사람들 모두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할 때 성령을 의지해서 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가? 모든 종류의 선한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새롭게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노동의 대가, 누굴 위해 쓰는가 (행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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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외국인(사마리아인), 사회에서 내쫓긴 사람들(에티오피아 내시), 원수들(사울), 모든 인종(이방인)에게로 퍼져 나감으로써 성령의 능력으로 크리스천 공동체가 문화 장벽들을 뛰어넘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부분은 그들의 직업을 (간략하게) 밝힘으로써 여러 인물을 소개하는 경향을 띤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인물을 만난다.

  •  점쟁이 시몬(행 8:9-24).
  •  에티오피아 여왕의 주요한 경제 관리인 에티오피아 내시(행 8:27).
  •  바리새인이며 기독교 박해자 사울(행 9:1).
  •  의류 제조업자 다비다(행 9:36-43).
  •  로마 백부장 고넬료(행 10:1).
  •  무두장이 시몬(행 10:6).
  •  왕 헤롯(행 12장).

   
   이 부분에서는 일과 관련된 쟁점이 누가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라서 우리는 지나치게 직업명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누가가 말하는 요점은 그들이 자신들의 직업을 이행한 방식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게 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게하는 것이든지 둘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간 사람들은 타인을 섬기기 위해 자신들이 한 노동의 대가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거로 사용했다.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간 사람들은 그들이 한 노동의 대가를 오로지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만 썼다. 이것은 이 인물에 대한 간략한 요약에 잘 나타나있다. 그들 가운데 몇 명은 그들의 일에서 자신의 이익과 그 일로 인해 따라오는 권력과 자원들만 좇았다.

  •  점쟁이 시몬은 성령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고 사도들에게 돈을 줬는데(행 8:18-19) 그것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사람’(행8:10)으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분명한 노력이었다.
  •  사울은 열심당원(행 22:3)과 바리새인(행 26:5)으로서 누리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는 데 자신의 인맥을 활용했다(행 9:1-2).
  •  헤롯은 로마의 임명을 받은 왕으로서 자신의 인기를 떠받치기 위해 사도 야고보를 처형하는 데 그의 권력을 사용했다(행 12:1-2). 나중에 헤롯은 스스로를 로마 황제들이 주장한 최고 후견인 지위인 신으로 자처하기까지 했다(행 12:20-23).

   이런 행위의 결과는 비참했다. 점쟁이 시몬은 베드로에게 강하게 책망을 받았다(행 8:20-23). 사울은 사울 자신이 박해하던 공동체와 동일시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면했다(행 9:3-9). 헤롯은 주의 천사가 치는 바람에 벌레에 먹혀 죽었다(행 12:23).

   그들과 대조를 이루어 몇몇 사람은 자신들의 지위, 권력, 또는 자원들을 축복과 생명을 가져다주기 위해 사용했다.
 

  •  의류 제조업자인 다비다는 그녀가 속해 있던 공동체의 과부들에게 옷을 지어 줬다(행 9:39).
  •  가죽 가공업자(무두장이)인 시몬은 베드로에게 자기 집을 열어 줬다(행10:6).
  •  이미 많은 구제로 널리 알려져 있던(행 10:4) 로마 백부장 고넬료는 자기 인맥을 활용해 상당히 많은 친구들과 친척들을 초청해 베드로의 설교를 들려줬다(행 10:24).

   전에 이미 소개된 바 있는 바나바는 사도행전 4장 36절에서 말한 것처럼 레위인이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 사도들조차 교제를 안 하겠다고하던(행 9:26-27) 사울을 교제권 안으로 받아 주고, 또 안디옥 교회 내의 이방인 회심자들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행 11:22-24) 그 공동체 안의 자기지위를 활용했다. 우리는 사도행전 11장 24절에서 바나바가 크리스천 공동체를 세워 주기 위해 자신의 자원과 지위를 사용했던 그의 능력의 비결을 주목해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했다’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이 모든 사례가 말해 주는 메시지는 한결같다. 일에서 나오는 권력, 특권, 자원은 다 자신의 유익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도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에서 보여 주듯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세상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권세를 사용하셨던 예수님에게서 그 모델을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 11장 27-30절은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공동체의 한 예를 보여 준다. 성령의 영감으로 주어진 세계적인 기근에 대한 예언에 대응해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한다’(행 11:29).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한 수고의 대가를 타인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호의가 단순히 자발적이며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계획적이고 조직화되고 마음속 깊은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부조금 수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www.theologyofwork.org에 나오는 '고린도전서와 일'의 "고전 16:1-3"부분을 보라.)
 
  사도행전 11장 1-26절은 크리스천 공동체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려면 먼저 유대주의로 개종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논쟁을 해결한 방법에 대한 기사로 시작한다. 이 논쟁은 15장의 기사에서 다뤄진다.

성령 공동체, 세상 속으로 들어가다 (행 13-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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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을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일의 신학과 관련된 4가지 주요 주제를 바탕으로 조사해 볼 것이다. 먼저 우리는 증인으로서의 직업과 관련된 본문을 하나 더 분석해 볼 것이다. 둘째, 우리는 크리스천 공동체가 리더십의 힘과 의사결정의 힘을 어떻게 행사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셋째, 우리는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가 그 안에 있는 힘들을 어떻게 더 폭넓은 문화 안으로 연계시키는지를 볼 것이다. 넷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형태의 직업과 시민으로서의 참여를 배제시키는 것인지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선교 여행을 해 나가면서 자신의 장막 짓는 일을 계속하는 바울의 관행을 살펴볼 것이다.

함께 고민하고 분별하는 공동체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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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13장 1-3절은 안디옥 교회 내에서 있었던 일련의 풍습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 공동체는 인종의 다양성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실질적인 증인으로서의 헌신 면에서 아주 놀라운 공동체다.[15] 우리는 이미 누가가 일이 (특히 권력과 자원의 사용이) 어떻게 증인의 한 양식으로 기능하는지 보여 주는 것을 앞에서 살펴봤다.[16] 사도행전 6장 1-7절에서 우리는 이것이 자연스럽게 사역과 더욱 결부시키는 직업들(선교사 같은 직업)과 우리가 흔히 “일”이라고 부르는 직업들(환대 같은 것) 모두에 다 적용된다는 것을 봤다. 어떤 직업이든 다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증거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정의와 의를 추구하는 직업일 때는 더욱 그렇다.

   사도행전 13장 1-3절은 성령이 어떻게 증인의 삶으로 이끌어 가시는지를 분별하려 애쓰고 있는 크리스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준다. 바울과 바나바가 여행하며 전도와 치유하는 일을 위해 따로 세움을 받는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런 분별이 공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개인이 아니라 그 크리스천 공동체가 그 공동체 구성원 각자의 직업들을 분별한다. 이것은 청소년들과 청년들 또 그들의 가족들이 ‘어른이 되어서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니?’, ‘졸업 후에는 무엇을 할 생각이니?’, ‘하나님이 너를 무엇으로 부르신다고 생각하니?’와 같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할때 오늘날의 크리스천 공동체가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려면 크리스천 공동체는, 직업과 진로에 대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기존에 그들이 흔히 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전문 지식을 개발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또한 교회라는 구조를 넘어 세상을 섬기는 일에 대해 그들이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청년들의 일하는 삶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크리스천 공동체가, 그 청년들이 다른 수단으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충분히 분별하도록 도와줄 때 비로소 그들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이것을 잘한다면 이중으로 증인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먼저 온갖 종교적 전통을 가진 청년들이나 그런 전통이 없는 청년들도 일을 선택하거나 찾는 데에 큰 부담을 안고 깊이 씨름을 한다. 만약에 크리스천 공동체가 그런 부담을 덜어 주고 결과를 증대시키는 것을 진정으로 도와준다는 상상을 해 보라. 또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은 교회 구조 바깥에서 일한다. 만약 우리 모두가 세상을 섬기는 크리스천의 방법으로서, 우리가 함께하는 수십억 명을 대신해서 그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우리의 일에 종사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 줄 수 있겠는가?

   그 공동체에서 바울이 바나바, 디모데, 실라, 브리스길라 등 많은 선교 동역자들을 데리고 가면서 공동체가 직업을 분별하는 것은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계속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증인이 되기 위한 이 같은 직업의 분담이 인간의 죄성에 의해 초래되는 긴장마저 없애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사실주의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지난 번 선교 여행 때 팀을 버리고 떠났던) 마가 요한을 다시 데리고 가는 문제 때문에 너무도 심각하게 다툰 나머지 각자의 길로 가 버렸다(행 15:36-40).

Ben Witherington III, The Acts of the Apostle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8), 392쪽.

다시 반복하거니와, 제 기능을 하는 공동체(특히 너그러움, 경제 정의, 하나님과 타인 중심의 사랑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는 규칙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는 결과로 귀결된다는 사실은 주목 292 시리즈 집필진 및 역자 소개 293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사복음서 · 사도행전 할 만한 가치가 있다(행 2:47; 6:7; 9:31 등).

크리스천 공동체의 리더십과 의사결정 (행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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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천 공동체 내에서의 사회적 교류가 급진적으로 방향이 재편되는 한 사례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의 율법과 풍습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를 놓고 크게 분쟁이 일어났을 때다. 수직적인 로마의 계급사회에서 (어쩌면 여러 가지 의견을 듣기는 하겠지만) 사회적 조직의 후견인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결정권을 단독으로 행사한다. 그러나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는 중요한 결정은 그들 모두가 똑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해 전체 그룹에 의해 결정된다.

   그 논쟁은 실은 11장에서 시작된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이 되라는 요구 없이도 이방인들에게 “생명 얻는 회개”(행 11:18)를 제시해 주는 깜짝 놀랄만한 계시를 받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그가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이방인)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거기서 몇몇 기독교인들이 그가 유대인의 율법을 어기고 있다고 불평을 한다(행 11:1-2). 이런 식의 도전을 받아도 베드로는 화를 내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앞선 자신의 지위로 그들에게 군림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의견을 모독하지 않고, 그들의 동기를 비난하지 않는다.

   도리어 베드로는 그가 이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속에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손길을 봤는지 자초지종을 이야기한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 11:17). 그가 자신을 지혜로운 자나, 도덕적으로 더 뛰어난 자로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지 않으셨으면 심각한 실수를 저지를 뻔한 자로 제시하는 것을 주목해 보라.

   그런 다음 베드로는 그에게 도전을 가해 온 자들에게 대응을 맡긴다. 베드로의 경험을 들은 그들은 방어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야고보의 명의로(예수님의 형제이며 예루살렘 교회 리더) 베드로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베드로가 권한을 넘어섰다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그들 역시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시기를 간구하며, 베드로와 같은 결론에 이른다. 처음에는 갈등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찬양과 교제로 끝이 났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행 11:18) 드렸다. 우리는 모든 분쟁이다 그렇게 우호적으로 끝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조사해 볼 때, 상호 덕을 세우는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한때 자신의 적대자였던 사람들과 화합을 하고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유대에는 이방인들이 반드시 먼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라고 말했다(행 15:1). 바울과 바나바는 그 당시 안디옥에 있었는데 그들도 베드로처럼,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 임하는 경험을 한 바 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 분란이 너무도 심각했으나 그들은 크리스천 공동체 전체에서 지혜를 구하자는 결정을 상호간에 내렸다고 말한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 15:2).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행 15:4). 이방인들이 반드시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참석했다(행 15:5). 그들은 모두가 다 그 문제를 숙고해 보고 생생한 토론을 하기 위한 모임을 갖기로 결정했다(행 15:6). 그때 예루살렘 사도들 가운데 있던 베드로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필요 없이도 그들에게 은혜 주심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계시해 주신 이야기를 되풀이한다(행 15:7-11). 바울과 바나바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보고를 하고, 더 우월한 어떤 지혜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만 초점을 맞춘다(행 15:12).

   사람들은 모든 연설자의 보고를 존중하는 태도로 경청했다. 그런 다음 그 그룹은 성경에 비추어 각 사람이 말한 것들을 고려해 본다(행 15:15-17).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야고보가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행 15:19-20).

   만약 야고보가 로마의 후견인같이 권위를 행사했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을 것이다. 그의 지위 하나만으로 그 쟁점은 결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결정은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동체는 그의 결정을 수용했으나, 명령이 아니라 합의로 수용한 것이다. 야고보뿐만 아니라 모든 리더와 실제로는 온 교회가 다 그 결정에 발언권이 있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 결정하니”(행15:22). 그리고 이방인 교회들에게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행 15:28) 그들의 결정을 알리고자 했을 때, 그들은 지도자인 야고보의 이름이 아니라 온 교회의 이름으로 알렸다. “우리가 ……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행 15:25). 더 나아가 그들은 개인적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다만 성령께 순종하려고 애썼다. ‘성령과 우리는 …… 을 옳은 줄로 여겼다’(행 15:28, NIV). ‘여겨’(seem)라는 단어는 그들의 결정에 대한 겸손을 표시하며, 그들이 권력과 특권 및 지위를 내세우는 로마의 후견인 제도를 배격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거기에 포함된 한 가지 요소만 더 주목해 보자.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실질적인 결정이 요구되는 저마다의 특수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본부에서 멀리 떨어져 현장에서 일하는 베드로, 바울, 바나바의 경험을 놀랍도록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그들의 경험과 판단을 대단히 존중해 준다. 그들은 결정을 이끌어야 할 원리들에 대해 아주 신중하게 의사소통한다(행 15:19-21). 그러나 그들은 결정권을 현장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위임해 주고, 현장에서 베드로, 바울, 바나바가 내린 결정을 확정해 준다. 다시 이것은 후견인의 손아귀에 권력과 권세가 집중되는 로마의 후견인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이같이 의사 결정과 행동을 현장에 위임하는 것과 결합된 직무, 원리, 가치에 관해 동일한 교육을 실천한 효과들은 널리 알려져 있다. 20세기 후반에 수많은 사업체와 군사 · 교육 · 비영리 · 정부 기관들이 폭넓게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인해 모든 유형의 조직의 경영은 급격하게 바뀌었다. 그렇게 해서 해방된 인간의 창의성과 생산성, 서비스의 폭발적인 결과는 사도 시대에 교회의 급격한 팽창을 경험한 초대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들이 이 교훈을 경제적 활동과 관련해서 온전히 수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예를 들면, 개발도상국에서 일하는 크리스천은 종종 먼 거리에 있는 선진국 교회들의 너무도 경직된 자세가 방해가 된다고 불평을 한다. 좋은 의도의 보이콧, 공정무역 규정, 다른 압박 전술들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방글라데시의 한 경제 개발 선교사가 미국에서 자신을 후원해 주는 기관이 새로 만든 아동 노동 제한 조치 도입이 도리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보고를 해 왔다. 그 선교사가 개발을 돕고 있던 회사가 16세 이하의 근로자를 활용해 생산된 원료들을 구매하지 못하게 요구를 받았다. 그들에게 원료를 공급해 주던 회사 가운데 하나는 10대 형제 둘로 이루어진 회사였다. 새로운 나이 제한 조항 때문에 그 회사는 그 형제들로부터 부품 조달을 중단해야 했고, 그것은 그 가정의 생계를 막막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형제의 어머니가 다시 매춘굴로 돌아갔다. 그 가족 모두의 상황이 더 악화된 것이다. 나중에 그 선교사는 “미국 교회로부터 우리가 필요한 것은 압박이 아니라 교제입니다”, “선의의 서구 크리스천들의 지시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다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라고 호소했다.[17]

 

 

 

안전 문제로 그의 요청에 의해 자료명은 싣지 않았다. 2010년 7월 29일 홍콩에서 개최된 TOW 프로젝트 컨퍼런스에서 윌리엄 메신저가 받아 적은 강의노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로마 세계의 경제 관행과 충돌하다 (행 16장과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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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후반부에서 바울과 그의 일행과 다양한 크리스천 공동체들은 지역 경제권과 시민 권력을 가진 자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첫 번째 사건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벌어지는데, 거기서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도록 선동된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행 13:50)은 그들을 성에서 쫓아낸다. 그다음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행 14:5)에게 학대를 받는다.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그 성을 소란하게 한다는 혐의로(행 16:19-24) 옥에 갇힌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관리들과(행 17:6-9) 아가야의 총독과(행 18:12) 분쟁에 휘말렸다. 나중에 그는 에베소의 은장색(은세공업자) 조합원들과 갈등을 빚는다(행 19:23-41). 이런 갈등은 사도행전의 마지막 여덟 장을 차지하는 예루살렘에서의 평화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지방 실세들과의 이 같은 충돌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선언한 성령 강림을 염두에 두고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거기서 우리는 성령 강림이 (다소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옛 세상의 권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앞에서 우리는 그 공동체가 로마제국의 후견인 기반의 경제 체계와는 전혀 다른 은사기반의 경제를 구성하도록 성령이 역사하신 것을 봤다. 크리스천 공동체는 체계 안의 체계를 구축했는데, 거기서는 신자들이 로마 경제에 그대로 참여하긴 하지만, 자원을 사용하는 방법은 다르게 하고 있었다. 지방 지도자들과의 충돌은 엄밀히 말하면 지도자들이 로마의 후원 경제 체계 유지에 가장 큰 지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16장 16-24절과 19장 23-41절에 나오는 충돌은 둘 다 더 깊이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형태는 로마 세계의 경제 관행들과 깊이 충돌하고 있다.

빌립보에서 일어난 첫 번째 충돌 (행 16: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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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립보에서 있었던 두 번의 갈등 가운데 첫 번째는 바울과 실라가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나면서 일어난다.[18]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이런 유형의 귀신은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행 16:16) 점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것은 가장 추악한 형태의 경제적 약탈 사례로 보인다. 바울과 실라가 좀 더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행 16:18). 아마도 바울이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전에 아이나 아이의 주인과 연줄을 만들기를 원했기 때문일 수 있다. 바울이 행동을 취하자 아이는 영적으로 해방됐고, 아이의 주인들은 금전적 손해를 봤다. 주인들은 평안을 해친다는 죄목으로 바울과 실라를 당국자들 앞으로 끌고 간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해방 사역이 당시 흔히 있던 노예 착취라는 사업상의 관행을 배척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명했다. 인간을 착취해 가면서 경제적 이윤을 산출하는 사업은 기독교 복음과 마찰을 일으킨다. (인간을 착취하는 정부도 그에 못지않게 나쁘다. 우리는 앞에서 헤롯이 자기 백성을 향한 폭력, 심지어는 자기 군사들이 가한 그 폭력이 결국은 주의 사자의 손에 자신의 죽음을 초래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논했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제국의 부패한 정치 · 경제적 관행을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었지만, 죄와 사망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능력은 그런 착취의 굴레를 깨뜨릴 수밖에 없다. 경제적 결과 없이 영적 해방은 있을 수 없다. 바울과 실라는 성(性) 때문에, 경제적 지위 때문에, 또 나이 때문에, 학대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경제적으로 해방시키기 위해 기꺼이 조롱을 받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려 했다.

   만약 우리가 2천 년 앞의 일을 내다보고 그 시간을 준비한다면,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윤리와 사회적 원칙들을 어기는 제품들, 회사들, 사업들, 정부들의 편의를 봐주거나 심지어 거기서 이윤을 취할 수 있을까? 마약과 성매매 같은 불법 사업들을 가로막는 것은 쉽지만 근로자들이나 소비자들, 또는 크게는 대중에게 해를 가하는 사업들은 어떤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 대가로 누군가 이득을 챙기는 합법적인 구멍들과 보조금, 불공정한 정부 규제는 어떤가? 혹시 우리조차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이익을 얻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가?

   세계 경제에서 경제 활동의 조건들과 결과들을 추적하기란 어렵다. 정보를 잘 알고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크리스천 공동체는 지금까지 엄격하게 비판을 해온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도행전은 경제 활동의 표준을 위한 원리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경제 문제는 복음의 문제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위대한 선교사요, 믿음의 영웅들인 바울과 실라를 통해 우리는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경제적 남용에 정면 돌파를 하도록 부름받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도행전 17-18장은 일과 관련된 관심사를 훨씬 더 많이 담고 있지만, 세상 체계에 맞서는 복음의 도전에서 야기되는 충돌을 더 논의하기 위해 이 기사는 19장 21-41절에 나오는 두 번째 충돌 뒤에 나오며, 그다음에 17-18장으로 돌아갔다가 19장의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겠다.

그리스-로마의 인식 개념 안에서의 이런 유형의 영에 대한 설명은 John R. Levison, Filled with the Spirit (Grand Rapids: Eerdmans, 2009), 318-320쪽을 보라.

에베소에서 일어난 두 번째 충돌 (행 19: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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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이어 나오는 논의는 약간 순서를 벗어나는데(사도행전 19장 17-20절을 잠시 건너뜀) 그 결과 우리는 그 두 번째 갈등 사건을 다룰 수 있게 된다. 그 사건은 아데미(아르테미스) 신전의 본산인 에베소에서 일어난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 숭배는 소아시아에서는 막강한 경제적 힘이었다. 사냥과 농사 또는 가족 안에서의 다산에 대한 희망을 안고 순례객들이 그 신전으로(매우 웅장한 구조물로,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로 간주됐다) 몰려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른 관광 중심지들과 마찬가지로, 그 지역 대부분의 상권은 그 관광 명소의 영향력에 지속적으로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19]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행 19:24-29).

   데메드리오가 인식했듯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될 때 그들의 돈 쓰는 방식이 예전과 달라질 것이 요구된다. 우상숭배 관련 물품들을 구입하지 않는 것이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는 변화다. 자신을 위한 사치품 구입에 돈을 덜 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필품 구입에 돈을 더 쓸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그들은 전체적으로 덜 쓰고 더 기부하거나, 더 투자하게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크리스천이라고 은제품을 구입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 소비 패턴이 바뀌는 것을 목도한 데메드리오의 관찰은 옳다. 이것은 이전의 방식에서 가장 많이 이득을 취하던 사람들에게는 항상 위협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상황에서 경제생활의 어느 측면이 크리스천의 복음과 어울리지 않는지 자문하게 한다. 예를 들면,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계속해서 구매하는가? 크리스천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데미 여신의 은신상에 해당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사고 있는가? 그 물품의 ‘브랜드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지위나 부, 권력, 지성, 아름다움이나 다른 속성들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싶은 인간의 욕구에 호소하는, ‘꼭 갖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하는’ 몇몇 브랜드 품목들이 생각이 날 수도 있다. 만약 크리스천이 자신들의 지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서만 온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브랜드와 자신을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그건 일종의 우상숭배가 아닐까? 근본적으로 명품을 구매하는 것은 아데미 여신의 은신상을 구매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에베소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때로는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경제적 결과들을 맞이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해 준다.

Witherington III, Acts of the Apostle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592-593쪽을 보라.

존중하는 자세로 문화에 참여한 바울 (행 17: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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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다 더 광범위하게 문화 속에서 유력 인사나 정치 실세들과 충돌을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만, 크리스천 공동체가 세상에 참여하는 최선의 방법이 항상 그런 충돌만은 아니다. 때때로 문화가 하나님 은혜의 본질을 흐리고 문제를 일으키거나, 하나님 은혜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강제로 우리를 옥죄지는 않다. 이런 경우에는 복음을 선포하는 최선의 방법은 문화와 협력을 하고 존중의 자세로 그 문화에 참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어떻게 존중하는 자세로 우리가 문화에 참여할 수 있는지 모델을 보여 준다. 그것은 관찰에서 시작된다. 바울은 아덴(아테네)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거기에서 발견되는 여러 신의 신전들을 관찰한다. 바울은 그가 거기서 발견한 ‘예배 대상들’을 ‘자세히 살펴봤다’(행 17:22)라고 보고하는데, 거기서 그는 사람들의 ‘상상과 솜씨에 의해 만들어진’(행 17:29) 것에 주목한다. 바울은 그들의 문학을 읽고, 그것을 인용할 만큼 충분히 익힌 후 존중하는 태도로 그것을 대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설교에 그것을 포함시킨다. 실제로 거기에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고 바울은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인용해 말한다.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하니”(행 17:28).

   급진적 사회 변혁에 헌신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 사회의 모든 것을 크리스천들이 반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는 완전히 무신론적이지는 않고, 다만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직장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관찰자가 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학교나 사업체, 정부, 또는 다른 직장에서, 비록 그것들이 크리스천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좋은 관행들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가 진정한 관찰자가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식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조롱하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것을 깨닫게 된다. 바울처럼 우리도 그들을 불신하지 말고 도리어 그들과 협력해야 한다. 우리는 노무/경영 관계, 고객 서비스, 연구 개발, 회사 및 민간 관리, 공공교육 및 기타 분야를 향상시키기 위해 비신자들과 협력할 수 있다. 우리는 대학, 기업체, 비영리 단체 및 다른 곳들에서 개발된 기술들이나 지혜들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의 일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깊게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는다’(행 17:27)라는 것을 증명해 보여 줘야 한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당신이하는 모든 일은 다 틀렸소’라고 말하는 것과 ‘저는 그리스도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하는 일의 진가를 당신보다 훨씬 더 알아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의 차이를 상상해 보라.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직장에 분명히 드러나 있는 상처들과 죄에 대해서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목적은 판단이 아니라 치유이고 손상을 최소화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특별히 우상숭배의 죄와 왜곡을 관찰했다.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행17:16)했다. 현대 직장에서의 우상은 고대 아덴의 우상처럼 많고도 다양하다. 뉴욕의 한 기독교 지도자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교육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우상인 교육자들과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도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길 원하는 그들의 마음과 이어져 있었으나 저는 그들에게 교육으로 그들이 갈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고, 실제 해결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걸 짚어 주고 싶습니다. 다른 많은 전문직 종사자에게도 마찬가집니다.[20]

   바울처럼 우리가 신중하게 관찰하게 되면,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놓으실 수 있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능력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예리한 증인이 될 수 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0-31).

2012년 12월 15일 뉴욕 리디머장로교회 페이스앤워크센터 이사장이었던 캐서린 알스도프 (Katherine L. Alsdorf)와 한 전화 인터뷰 내용이다.

바울의 장막 제작에 관한 오해들 (행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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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에서 일과 가장 크게 연관된 단락은 사도행전 18장 1-4절에 나오는 바울의 장막 제작이다. 이 단락이 익숙하긴 하나 너무 협소하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바울은 장막을 지어 돈을 벌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신의 진짜 사역을 뒷받침했다. 이런 견해가 바로 지나치게 협소하게 보는 것이다. 그런 견해로는 장막 짓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증거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할 때, 장막을 제작할 때, 자기 수입으로 공동체에게 더 큰 유익을 줄 때, 바울은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이것은 크리스천들이 공동체 전체를 위해 자신들의 자원을 사용하고, 그것이 복음의 증언이 되도록 성령께서 힘을 불어넣어 준다는 누가의 관점에 딱 들어맞는다.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누가의 생각의 방향은 증인의 삶이며, 개인의 생애 전체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로 향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렇다면 바울이 이렇게 성령께서 형성한 관행의 전형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바울이 스스로를 후원하며 살고 싶어 한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열망은 말씀 전파 사역을 스스로 뒷받침할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도 재정 후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끼친 재정적인 영향력을 묘사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3-35).

 

   바울의 돈 버는 일은 공동체를 경제적으로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21] 바울은 자신의 기술들과 소유를 공동체를 위해 동원했으며, 특히 이렇게한 것은 아주 분명하게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말씀 전파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모든 사람이 약한 자를 돕고 후히 구제하기 위해 친히 손으로 수고하는 본은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벤 위더링턴(Ben Witherington)은 확신을 가지고 바울은 사도라는 자신의 직위에서 나오는 어떤 고위 신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를 위해 사회적 사다리를 내려오고 있다”라고 주장한다.[22]

   다시 말하면 바울이 장막 짓는 일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 종사함으로써, 그 결과로 자신의 ‘진짜 일’인 말씀 전파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재봉 작업장에서, 시장에서, 회당에서, 강연장에서, 감옥에서 한 다양한 일은 모두가 복음 증거의 형태들이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바울은 하나님의 회복 프로젝트에 동참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 심지어는 원수까지 사랑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신의 새로운 신분에 합당하게 살았다. 그가 죄수가 되어 바다를 가로질러 건너가는 가운데서도 그는 무서운 폭풍우를 겪어나가는 동안 군인들과 선원들을 안심시키는 데 자신이 가진 리더십과 격려의 은사를 활용했다(행 27:21-38). 설령 바울이 말씀 전파자나 사도의 직분을 안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는 여전히 장막을 짓고, 공동체를 위해 수고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장막 짓는 일”은 흔히 ‘전문 사역자’라 불리는 일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 버는 일에 종사하는 크리스천에 대한 은유가 되었다. ‘이 중 직’이라는 용어는 흔히 두 개의 별개의 직업, 곧 하나는 돈 버는 직업, 또 하나는 사역하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이 이음매가 없이 복음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전문 사역’과 다른 형태의 증인 사역 간의 구별의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크리스천은 실제로 ‘복음의 증인’이라는 오직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말씀 전파와 목회적 돌봄, 장막 짓는 일, 가구 제작, 연약한 자들을 돌봐주고 그들에게 기부하는 일 등을 포함해 많은 형태의 섬김이 있다.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는 것 같은 (돈 벌이가 아닌)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장막 제작 같은 (돈 버는) 일에 종사하는 크리스천은 “이중 직”(bivocational) 이라기보다는 “이중 섬김”(dual service)으로 부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소명은 하나고, 두 가지 형태로 섬기는 것이다. 한 영역 이상의 분야에서 섬기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다 마찬가지다.

이 윤리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과 고린도전서 9장 1-15절에서도 표현하고 있다.

Witherington III, The Acts of the Apostle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547쪽.

복음을 만난 사람 앞에 놓인 선택들 (행 19: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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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19장 13-16절은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행 19:19)이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는 약간은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술 책을 다 모아서 공개적으로 그것들을 불에 태워 버렸는데, 누가는 그 책들의 가격이 5만 드라크마에 이른다고 알려 준다. 이 금액은 일당 노동자가 쉬지 않고 연속으로 137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에 해당하고, 또는 100가족을 500일간 먹여 살릴 수 있는 돈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23 하나님 나라 공동체 안으로의 편입이 엄청난 액수의 경제 · 직업적 영향을 끼친 것이다.

   마술에 종사하다 회개했던 사람들이 생활비를 벌던 수단을 회개했는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많은 비용을 들여 책들을 수집 했다는 것은 그냥 취미로 마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 온 삶의 변화가 직업 결정에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복음에서 익숙하게 봐 오던 결과다. 이번 경우에 신자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완전히 버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다른 많은 경우에는 직업은 그대로 가지나, 그것을 행하는 방식을 달리해야 할 때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보험설계사가 노인에게 불필요한 보험을 들게 한다고 상상해 보자. 그 사람은 이제는 그런 영업 관행을 중단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보험을 드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상품으로 변경해 보험을 판매하는 그 직업은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수수료는 더 적을 수 (아니면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직업은 합법적인 성공을 할 여지와 윤리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합법적으로 할 수는 있으나 불법적 관행이 너무도 철저하게 고착되어, 성경 원리들을 어기지 않고는 경쟁을 할 수 없는 직업들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들이 발생한다. 부패가 심한 국가의 수많은 공무원이 이런 딜레마에 빠진다. 건축물 준공 검사를 정직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만약 당신의 공식 주급이 만 원인데 당신의 상관이 당신이 일자리를 계속 유지하려면 한 달에 십만 원을 바치라고 요구할 경우, 시공업체의 뒷돈을 거절하고 정직하게 검사 결과를 보고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있는 크리스천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만약 정직한 사람들이 모두 직장을 떠난다면, 대중에게 그만큼 더 좋지 않다. 그러나 그 직업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하면 크리스천이 어떻게 그 직장에 계속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3장 9절에서 세례 요한이 군인들과 세리들에게 그들의 직업을 그대로 유지하되, 직업상 늘 해 오던 갈취와 사기를 중단하라고 권면할 때 누가가 논하는 내용이다. (이 단락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www.theologyofwork.org의 '누가복음과 일'에 나오는 "눅 3:8-14"부분을 보라)

Darrell L. Bock, Acts,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2007), 605쪽.

바울에게 배우는 리더십 (행 20-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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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의 나머지 여덟 장은 바울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위협과 시도로 가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바로 그 뒤를 이어서 로마 총독 두 명 때문에 투옥이 되고,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에 가는 가슴 아픈 항해 여정이 나온다. 여러 면에서 바울의 경험은 예수님 사역의 절정을 재현하고 있으며, 사도행전 20-28장은 바울의 수난(Passion of Paul)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일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이 장들의 특성은 바울의 리더십에 대한 묘사다. 우리는 바울의 용기, 고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 다른 사람의 안위에 대한 관심 등에서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리더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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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립보와 에베소에서의 충돌 이후 바울은 투옥(행 20:23; 21:11)과 죽음 (행 20:3; 23:12-14)의 위협을 받는다. 이 위협들은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시도가 두 번이나 있었다(행 21:31; 23:21). 바울은 로마 정부의 사법조치 아래 있게 되고(행 23:10) 그에 대한 고소가 들어오는데(행 24:1-9), 거짓 고소이긴 했으나 그것이 결국은 그를 처형에 이르게 하고 만다. 우리가 이미 살펴봤던 갈등의 이야기들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른다는 것이 세상의 억압적 방식들과 충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게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견디면서도 바울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용기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씀 전파) 사역을 계속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을 잡아들인 유대인과(행 23:1-10) 로마인(행 24:21-26; 26:32;28:30-31) 모두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바울의 용기는 단순히 그의 전파하는 일뿐만 아니라, 배가 난파한 상황 한가운데서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있어서도(행 27:22-23) 결정적이었다. 주변 사람이 겁에 질려 움츠려들 때 바울이 자기 입으로 직접 한 말이 그의 용기 있는 태도를 요약해 준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

   그러나 요점은 바울이 특별히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 각 사람에게 우리의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용기를 주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역경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지켜 주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행 20:22; 21:4;23:11). 이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없는 용기를 성령께서 주신다는 것을 의지할 수 있다.

   우리가 극심하게 두려운 순간에 용기가 없어서 실패하게 되는 건 위험한 상태가 아니다. 일반적인 염려가 우리가 하는 일에서 하나님 나라 방식들을 따르는 첫걸음을 내딛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야말로 위험한 것이다. 우리가 실제 어떤 압력에 눌려서가 아니라 혹시 우리의 행동이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겁이 나서 동료들을 변호해 주거나, 고객을 만족시켜 주거나, 상사에게 도전하거나 어떤 쟁점에 대해 주장하는것을 주저한 경우가 얼마나 자주 있는가? 만약 직장에서 우리가 하나님 방식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기 전에 적어도 그런 행동을 하라고 직접 명령을 받고 나서 하겠다는 입장을 가지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과연 성령님께 의지하여 그런 일까지 할 수 있을까?

리더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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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자신이 하는 일로 인해 심한 고난이 초래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용기란 용기는 있는 대로 다 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3)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납치를 당했고(행 21:27), 매를 맞았고(행 21:30-31; 23:3), 위협을 당했으며(행 22:22; 27:42), 여러 번 체포되었고(행 21:33; 22:24, 31; 23:35;28:16), 법적 소송을 당했고(행 21:34; 22:30; 24:1-2; 25:2, 7; 28:4), 심문을 받았고 (행 25:24-27), 조롱을 받았고(행 26:24), 무시를 당했으며(행 27:11), 난파를 당했고(행 27:41), 독사에게 물렸다(행 28:3). 전해 내려오는 말에 따르면, 비록 성경 어디에도 기록된 적이 없지만, 바울은 결국 그의 일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한다.

   깨어진 세상 속에서 리더십은 고난을 수반한다. 고난을 리더십의 필수 요소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으며, 적어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방식의 리더는 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 후견인 제도에 대한 또 다른 급진적인 반박을 본다. 로마 체계는 후견인을 고난에서 격리시키기 위한 구조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무자비한 채찍질을 못하게 막는 유일한 것이 바울의 로마 시민권(후견인, 비록 어느 한 가문의 것이었지만) 행사였던 것에서 우리가 봤듯이, 후견인들만 신체 폭력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었다(행 22: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수님 방식을 따르는 리더에게 절대 필요한 것으로써 다른 많은 형태의 고난과 함께 담대하게 신체적 고난을 받아들인다.

   고대 로마 시대 사람들이 고난을 피하기 위해 후원했듯이, 오늘날 우리도 똑같은 이유로 리더가 되려고 애쓸 수 있다. 우리는 권력을 얻는 데 성공하고, 어쩌면 우리 자신이 세상의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크든 작든 우리 스스로 어느 정도의 상처를 수용하지 않으면 우리의 리더십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갖는 리더십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리더십이 아니다.

리더의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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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신념과 행위에 대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바울은 너무도 분명하게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사람들, 특히 그의 원수들과 그를 사로잡았던 사람들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서 그가 하나님 나라의 증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더할 나위 없는 기회를 그에게 제공해 줬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곳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예를 갖추고 그가 유대인의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는지를 증명해 보이라는 그들의 황당한 요구에 순응한다(행 21:17-26). 그는 조금 전에 자신을 두들겨 팼던 무리들에게(행 21:30-22:21),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려는 군인에게(행 22:25-29), 로마 법정에 자신을 고소한 유대인들의 공회에, 심지어는 모르고 대제사장을 모욕한 데 대한 사과까지 했다(행 23:1-10). 로마 총독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에게(행 24:10-26), 벨릭스의 후임인 베스도(행25:8-11; 26:24-26), 그를 투옥시킨 아그립바 왕과 그의 아내 버니게(행 26:2-29)에게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거기로 가는 여정 동안 그는 백부장 율리오(행 27:3), 멜리데 촌장(행 28:7-10) 및 로마에 있던 유대인 공동체의 리더들을(행 28:17-28) 존중하는 자세로 대했다.

   바울이 보여 준 존중을 복음 메시지에 대한 그의 소심한 자세라고 헷갈려서는 안 된다. 그는 결과가 어찌되든 간에 담대한 진리 선포에서는 한 번도 뒤로 물러난 적이 없다. 예루살렘에서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온다고 잘못 의심한 유대인 군중들에게 뭇매를 맞은 후에 바울은 그들을 대상으로 주 예수께서 그에게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전하라는 사명을 맡기셨다는 설교를 한다(행 22:17-21). 그는 사도행전 23장 1-8절에서 유대인 공회에게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행 23:6)라고 설교한다. 그는 벨릭스 총독에게 복음을 선포하고(행24:14-16), 유스도, 아그립바와 버니게에게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행 26:6)라고 말한다. 그는 로마로 향하던 배의 선원들과 군인들에게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행 27:10)라고 경고한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행 28:30-31)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타인에 대한 바울의 존중은 그가 하는 말들이 담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주 그의 말을 귀담아 듣게 해 주었고 심지어는 그의 원수들조차 친구가 되게 했다. 그를 매질하려던 백부장이 천부장과 함께 개입하여 그를 석방하라고 명령했다(행 22:26-29).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하겠느냐”(행 23:9)라고 결론 내린다. 벨릭스는 바울이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다’(행 23:29)라고 결정했고,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고자’(행 24:26) 하는 사람이 됐다. 아그립바와 버니게, 베스도는 바울이 무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그립바는 바울의 설교에 설득당하기 시작했다. 그는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느냐?’(행 26:28) 하고 물었다. 로마로의 항해가 끝나자 바울은 그 배에서 선장과 백부장이 기쁘게 순종하는(행 27:42-44) 명령을 내리는 실질적인 리더가 되어 있었다. 멜리데 섬에서 촌장은 바울과 그의 일행들을 환영하고 즐겁게 해 줬으며, 나중에는 그들의 배도 내주고 후한 대접을 해서 그들을 보내 줬다(행 28:10).

   물론 바울이 보여 준 존중에 모든 사람이 다 존중으로 화답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를 헐뜯고, 거부했으며, 위협하고, 학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그가 같이 움직이던 로마의 후견인 제도 속 주인들 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큰 존경을 받았다. 권력 행사가 존경의 외양을 지배할지 모르나, 진정한 존중의 행사는 참된 존경의 반응을 얻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사람들에 대한 리더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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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바울의 리더십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으로 가장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삶을 더 낫게 하려고 리더십의 짐을 진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들려고 졌다.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전파하러 어려운 곳들을 다니려 한 그의 자발성이 이에 대한 충분한 증거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아주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타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위층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친 청년을 고쳐 준다(행 20:9-12).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가 개척한 교회들이 계속 남아 있도록 준비하고, 그들이 ‘크게 울 때’(행 20:37) 그들을 격려한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려고 애쓴다(행 22:1-21). 그는 멜리데 섬의 아픈 자들을 다 고친다(행 28:8-10).

   타인에 대한 바울의 관심에 대한 놀라운 사례는 배가 파선했을 때다. 항해하지 말라는 바울의 경고가 무시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돕기로 작정하고 폭풍이 몰아치자 승객과 선원들을 안심시킨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행 27:21-25).

   바울의 관심은 격려의 말로 끝나지 않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는 모든 사람이 음식을 먹게 하고 힘을 내게 한다(행 27:34-36). 수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구해 내기 위한 방안을 강구한다(행 27:26, 38, 41, 44). 배를 좌초시킬 것을 지시하고(행 27:43), 선원들이 승객들과 군인들을 버리지 못하게 막는다(행 27:30-32). 그가 관심을 가지고 행동한 결과 단 한 사람도 그 배의 파선으로 인해 목숨을 잃지 않았다(행 27:44).

   바울의 리더십은 용기, 고난, 존중,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는 네가지 요소 그 이상을 아우르고 있으며, 그것은 사도행전 20-28장 이외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20-28장에 제시된 이 요소들은 성경에 나오는 리더십의 사례 가운데 가장 마음을 뒤흔드는 리더십 가운데 하나로, 누가 시대에 그랬던 것과 같이 오늘날에도 본받을 만한 훌륭한 사례다.

사도행전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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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일과, 일과 연관된 쟁점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세상에서 직업을 일관성 있게 다루고 있는 게 나타난다. 사도행전에서, 일에 대한 크리스천 관점은 단순히 윤리의 영역으로 격하되지 않는다. 도리어 일은 하나님의 세상 구속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의 한 형태다. 사도행전의 논리는 이런 방향으로 움직인다.

1. 성령 강림(성령의 오심)이 새로운 방식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새 나라의 출발점이다. 자신의 지위를 추구하는 로마의 후견인 제도는 타인의 유익을 추구하는 사랑의 정신으로 대체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이다.

2. 크리스천의 사명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선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영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는 ‘그리스도 나라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3. 크리스천의 소명은 단지 개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 전체에 주어진 것이다. 신자들의 행함이 완전하진 않고 때로는 완전하고는 거리가 너무도 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4. 공동체는 일과, 일에 관련된 자원들(권력, 부, 지위)을 다른 사람과 공동체 전체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 나라를 증거한다. 공동체 일원의 자격은 사랑과 섬김으로 이끄는 변화된 삶이다. 모든 종류의 자원을 가지고 급진적 베풂을 실천하는 것이 좋은예다.

5. 이런 식으로 일이 행해질 때, 모든 직업은 하나님 나라에서 오는 정의와 의, 아름다움들을 실천함으로써 증인의 행위가 될 수 있다.

6. 따라서 크리스천 공동체는 타락한 세상 구조에 도전장을 던지고, 때로는 세상의 권력을 쥔 자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가 의도하는 바는 세상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다.

7. 리더십은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과 섬김의 새 영이 활성화 되는 중요한 무대다. 권위는 공유되고, 리더십은 공동체의 모든 단계마다 고무된다. 리더들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부담을 떠안으며, 그들이 이끄는 사람들의 지혜와 권위를 존중해 준다. 용기, 고난, 존중, 타인에 대한 관심을 포함해 리더십 속성들은 사도바울의 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우리의 노동과 노동에서 얻는 열매를 비롯한 인간 삶의 모든 것이, 도래할 하나님 나라 가운데 이미 나타난 성령의 권능으로 참여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사도행전 덕분에 이해하게 됐다. 일은 인간의 증인의 소명에 위엄을 줄뿐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듯이 일은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천 일꾼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땅과 문화, 가족, 사업, 교육, 정의 및 다른 모든 영역을 개척하고 연구하고 양성하는 자요, 변혁자가 되는 소명을 받았다.

사도행전의 핵심 구절들과 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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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

주제

행 1: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직업을 가지고 지향하는 공동체에서 이루어진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크리스천 공동체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인으로의 방향이 정해진다.

행 2:17-21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크리스천의 삶은 새로운 하나님의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행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크리스천의 삶은 새로운 하나님의 세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행 2:42-47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4:18-21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하나님께서는 권력 체계를 초월하시는 절대 주권자시다

행 4:25-26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는 권력 체계를 초월하시는 절대 주권자시다

행 4:32-38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구르보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5:1-1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5:27-32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권력 체계를 초월하시는 절대 주권자시다

행 6:1-7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8:18-24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8:26-40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체시키는 것들이 아니다.

행 9:36-42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9: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10: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11:27-30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12:20-23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권력 체계를 초월하시는 절대 주권자시다

행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특별한 직업의 분별은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행 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크리스천의 삶은 권력자들과의 정면대결을 초래한다.

행 16:11-15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16:16-24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복음은 억압적 경제 관행 안에서 현저히 드러나는 악에서 벗어나게 한다.

행 17: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교회는 경제적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행 18:3-4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어떤 특정 직업들은 복음에 적대적이다.

행 19:23-41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크리스천의 삶은 권력자들과의 정면대결을 초래한다.

행 20: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행 27: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권력, 지위, 그리고 자원들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