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은혜에 내던지는 자들이다.[7]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했음을 인정한다. 자기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말한 사람은 세리였다(눅 18:9-14).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도덕적인 미덕이 전혀 없는 자라는 게 정직한 고백이다. 그것은 거만의 반대다. 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형태로 우리가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야만 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 복이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산상수훈 첫 부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영적 자원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배운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충족할 수 없다.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했음을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해 주며,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들이 창조 목적에 맞는 일을 할 수도 없고, 창조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산상수훈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런 축복된 상태를 획득할 수 있으리 라는 자기 착각에서 깨어나도록 우리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산상수훈은 우리 안에 진짜 영적인 가난을 만들어 내는 데 목적이 있다.
이 복이 가져다주는 실질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 심령이 가난해지면, 우리는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를 정직하게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이력서를 부풀리거나 직책을 자랑하지 않게 된다. 부풀려진 자기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고, 배우고 성장하고 남의 충고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일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정직해진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나무를 다듬으며 일을 시작하셨을 때 누군가의 안내와 지시를 받을 필요가 있으셨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도우실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로 하여금 실천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현장에서 매일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임재와 힘을 추구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심령이 가난한 것은 성공하고 승진하는 데 장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자주 빠지는 착각에 불과하다. “두려워하지마.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말한 대로만 해!”라고 말하는 사람과, “우린 함께 그 일을 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 각자는 그 어느 때보다 한층 더 분발해서 일해야 해!”라고 말하는 지도자 중에 과연 누가 끝에 가서 더 성공할 것 같은가? 거만하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지도자가 겸손하고 힘을 실어 주는 지도자보다 더 위대해 보인 적이 혹시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최고의 조직에서는 그런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짐 콜린스(Jim Collins)의 유명한 연구에 의하면 꾸준히 위대함을 유지해 나가는 회사의 첫 번째 두드러진 특징은 그 회사에 겸손한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다.[8] 물론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자신에 대한 평가를 부풀리는 구 시대적인 모습 안에 고착된 지도자와 일터도 아직 많다. 이직하는 것이 항상 가능할 순 없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직장을 찾아보라는 것이 최고의 조언일 수도 있다. 또 직장을 떠나는 게 가능하지 않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조직에 크리스천으로 남는 것이 선을 위해 중요한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것이 주변 사람에게 더욱더 복이 된다.
누가는 이것을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 6:20)로 표현한다. 학자들은 두 설명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는지를 놓고 격론을 벌여 왔다. 누가복음 4장 16-18절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절을 인용해 읽으심으로써 자신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밝히시며 자신의 사역을 여셨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메시아인지를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라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여기서 “가난한 자들”이란 겸손하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그 기본뜻이라고 말한다. 이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라는 이사야서 66장 2절과 부합한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가난한 자들”을 열다섯 번 언급하시는데, 그중 세 번은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자를 가리키시지만, 열한 번은 겸손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가리키신다. 최상의 해결책은 어쩌면 ‘가난한’ 자의 성경적인 개념은 사회 경제적 빈곤과 영적 파산 상태 둘 다 가리키고, 그 결과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
Jim Collins, Good to Great: Why Some Companies Make the Leap...And Others Don’t (New York: HarperBusiness, 2001), 20쪽. 짐 콜린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김영사 역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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